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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9

       의뢰를 받기 전, 로레이와 로윌렌은 따로 의논을 좀 해보겠다며 여관방 안으로 들어갔다. 로윌렌은 무척이나 수상하고 미심쩍다는 듯이, 의심을 제기했다.

       

       “저기, 그 사람은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만한 딸이 있다는 건 시간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지적이다.

       

       미친 마법사가 반로환동한 노괴나 엘프라면 모를까, 이만한 소녀를 딸로 두려면 이차성징이 오기도 전에 애를 만들어야 했을 터.

       

       로레이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요. 후배님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말이에요. 저는 후배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어요.”

       

       “예?”

       

       “말이 안 되는 일이어도, 후배님이라면 어쩌다 보니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어요.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로레이는 과거를 반추해 보았다.

       

       환상에 물리력을 깡으로 부여하는 건 그 누구도 못 할 짓이다, 그런 건 승화는 찍어야 할 수 있을 거다. 후배님에게 그렇게 떠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했다.

       

       사람의 뇌 성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게 마법에 복잡한 수식을 욱여넣어서야 머리가 먼저 터져버리고 말 거다. 그렇게 조언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했다.

       

       자색 마탑은 나사 빠진 정신병자들만 모인 집단이니까, 누구와 친하게 지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팁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했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그러니까⋯⋯ 로윌렌, 검을 휘둘러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돌을 금으로 바꾼다던가요.”

       

       “돈 많은 청탑의 마법사에게 칼을 겨누고 협박한다⋯⋯ 이런 게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게 그럴 수 있느냐는 뜻이라면.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걸 밥 먹듯이 해대고 다니니까, 수상할 정도로 나이가 많은 사생아도 납득할 수 있는 거예요. 또, 후배님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정보도 알고 있더군요.”

       

       사생아라는 자기주장만으로 믿은 것은 아니다. 악신쨩은 미친 마법사의 개인적인 정보들을 로레이에게 알려주어, 검증을 끝냈다. 그러니까 받아들일 차례만 남은 것이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이만한 사생아가 있느냐! (X)

       

       가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됐구나. (O)

       

       하고.

       

       “어쩌면, 그녀는 환상 마법으로 만들어진 생명일지도 몰라요.”

       

       “⋯⋯그건, 너무 멀리 간 이야기 아닙니까?”

       

       “너무 간 이야기가 맞죠. 그건 창조의 영역이잖아요. 하지만 어쩐지, 후배님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었어요.”

       

       로윌렌은 그런 로레이의 막연한 납득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지만, 이런 건 직접 보기 전까지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한 세기, 아니. 천년 역사를 넘어서서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천재를 직접 목도했을 때의, 역사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

       

       홀로 위대한 제국을 세운 흑룡대제나, 어쩌면 좀 더 나아가서⋯⋯ 가장 낮은 갈망의 웅덩이에서 태어나셨다는 여신. 그러한 과장된 옛날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감각.

       

       곧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리라는 확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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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레이와 로윌렌은 즉석에서 고용되어, 악신쨩과 함께 아카데미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로레이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금액은 아니었으나 후배님과 관련된 인물이니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로윌렌은 순수하게 금액이 마음에 들었다.

       

       베테랑 모험가와 마법사가 머리를 맞댔다. 어떻게 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날까? 속도만을 생각한다면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하는 게 최선책이지만.

       

       “텔레포트는 타지 않는 쪽으로 부탁해.”

       

       고객님의 요구가 있었으므로 이동 경로는 육로로 제한되었다. 일행은 이두 마차 하나를 구매해서 숲길을 내달렸다. 

       

       둘이서 여행의 안전성과 속도를 나름대로 타협한 결과, 여행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숲과 산을 돌파하여 아카데미에 도달하는 루트로 결정되었⋯⋯.

       

       “신성 도시에 들른다면 여행이 좀 더 편해질 것 같습니다만, 속도를 생각하면 역시──”

       

       “신성도시? 마차 돌려 봐. 아직도 그게 남아 있어?”

       

       ⋯⋯고객님의 요청으로, 신성도시를 거쳐 아카데미에 도달하는 루트로 결정되었다.

       

       신성도시 트럼펫홀.

       

       여신교의 본단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법적으로는 제국의 일부이나, 여신교의 위세가 강하여 일종의 독립적인 국가로 기능하고 있는 곳이었다. 현재 신성도시를 다스리는 것은 어린 교황이며, 추기경 다섯 명이 이를 보조하고 있다.

       

       대륙 전체에 만연한 여신교를 통솔하는 곳이니만큼 신성력이 뛰어난 사제들도 다수 머무르고 있으므로, 심한 저주에 걸리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입은 이들은 이곳으로 향하게 된다.

       

       다만, 어지간히 돈주머니가 묵직하지 않고서야 고위 사제의 서비스를 받을 수 없으므로. 신성도시는 돈 있는 자들이 주로 드나드는 부촌이라는 느낌⋯⋯ 이었다만.

       

       “요새는 조금 다르다더군요. 『개혁파』라고 했던가요? 그들이 ‘여신의 자비는 가장 밑바닥에도 닿아야 한다’며, 신성도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도 들었어요. 신성도시의 사제들은 하나같이 돈독이 올라 있어서 꼴 보기 싫었는데⋯⋯ 뭔가 바뀌려나요?”

       

       “파벌 싸움도, 이념 싸움도 잘은 모르겠지만. 모쪼록 치료비만 좀 내려갔으면 좋겠습니다. 절름발이인 동료가 하나 있는데, 아직도 절뚝거리면서 고블린을 잡고 있거든요.”

       

       “그거 다리가 아니라 머리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기회 되면 한 번 데려와 봐요.”

       

       마부석에서 나란히 앉은 로레이와 로윌렌은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로윌렌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마차 안에서 늘어진 악신쨩에게 말을 걸었다.

       

       “용사선발대회라고 아십니까?”

       

       “아니. 들어본 적 없, 잠깐만⋯⋯ 용사를 대회로 선발한다고?”

       

       “예. 교황님께서 여신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셨다고. 각지에서 용사 후보를 모집한 뒤에, 그중에서 진정한 용사를 가리는 대회를 열라고 하셨답니다.”

       

       악신쨩은 그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도 않네. 그래서?”

       

       “성대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더군요. 용사선발대회의 개최도 얼마 남지 않았고요. 아마 이 주일 정도 머무르면⋯⋯ 대회를 직접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고객님, 원하신다면 관광 일정을 잡겠습니다만.”

       

       “하루 정도는 쉬었다 가더라도, 관광을 즐길 정도의 여유는 없네.”

       

       “그러면 식량 보급과 휴식을 위해서 1박 하는 일정으로 가겠습니다.”

       

       악신쨩은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장자에 대한 공경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 발랑 까진 움직임은 조금 긁혔지만, 초면에 눈물점 게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참아낸 로윌렌이다.

       

       입금만 확실하다면 프로페셔널하게. 베테랑 모험가의 품격이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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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니.”

       

       이름을 밝히지 않은 후배님의 사생아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쪽빛 눈동자를 가졌다. 까만 머리는 드무니만큼, 정말로 혈연일 확률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이름 모를 소녀와 후배님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느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마법이었다.

       

       “아이씨, 꺼져 이 난쟁이 잡종들아!”

       

       휙, 하고 손가락을 좌우로 긋는 것만으로도. 임시 야영지에 몰려들던 고블린 떼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발휘된 효과는 간단한 위협 주문이지만, 디테일을 뜯어보면 매섭다. 주문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는 완전한 무영창에, 마력을 움직이는 기교는 완벽에 가까웠다.

       

       소녀는 강력한 환상 마법사였다.

       

       이 재능이야말로 후배님과의 연결을 확신하게 하는 끈이다.

       

       다른 소소한 면면들도 후배님을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성질머리가 꽤 드러운 편이라든가 (후배님은 마탑주님에게 양고기나 해 오라고 호통을 친 전적이 있다).

       

       “나방이네.”

       

       “불빛을 보고 날아들었군요. 고객님, 거슬리신다면 제가 잡겠⋯⋯ 그걸 왜 먹습니까?”

       

       “그럼 왜 안 먹어? 이거나 육포나 마찬가진데.”

       

       생각이 어디로 튀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든가.

       

       그렇게 미친 마법사와 이곳저곳 닮아 있는 소녀였으나. 로레이는 어쩐지⋯⋯ 그녀에게서 꺼림칙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마차를 타고 나아가고, 야영하고, 다시 나아가고를 반복하면서. 로레이는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대답이 나왔다.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째서 후배님을 볼 때는 꺼림칙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나? 이것부터 생각해야 했다.

       

       후배님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세상은 뒤집힌다. 괴짜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 어쩌면 하루아침에 이상한 걸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세상에 극도로 위협이 되는 어떤 것을.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후배님을 미리 죽여서, 어쩌면 미래에 발생할 재앙을 미리 막아야겠다든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의 선성(善性)을 아니까.

       

       그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쪽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이 소녀는 다르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표독스러움과, 사람들을 아래로 낮추어 보는 말투, 그리고 무시무시한 재능이 합쳐지면. 불안을 낳는다.

       

       “사람이든, 벌레든, 육포든, 다 똑같은 덩어리인데. 대체 왜 구분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

       

       이 소녀가 사악하다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런 로레이의 불안은, 신성도시에서 말끔하게 해소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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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신쨩은 늘어지게 하품을 때렸다. 마차로 이동한 지도 어언 4일째다. 일행은 열심히 달린 끝에 신성도시에 도착했다.

       

       엘메스트 영지에서 일주일을 보냈으니까, 미친 마법사에게 유기당한 지도 11일이나 지난 것이다. 여전히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다.

       

       용사선발대회를 앞둔 신성도시는 확실히 축제 분위기였다. 새하얀 컬러를 메인으로 삼는 여러 건축물 사이로, 떠들썩한 음악과 신난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닌다.

       

       어느 벽 한편에는 초상화들이 붙어 있기도 했다. 용사선발대회에 참가 신청을 넣은 용사 후보들의 모습이었다.

       

       “⋯⋯으엑.”

       

       그 사이에는 베네트의 초상화도 있었다. 악신쨩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혀를 빼물었다. 어떻게 보면 그놈들 때문에 자기 팔자가 꼬인 게 아닌가.

       

       로윌렌이 고객님의 시선을 읽고, 혹시나 모를까 싶어 옆에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개혁파』의 일원 베네트 힐튼이군요. 흑마법사 세력에 위장 침투해서 정보를 빼냈다던데,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단하기는 뭐가⋯⋯.”

       

       꼬장부터 놓으려던 악신쨩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래, 타라와 니오레는 몰라도 그 녀석은 부서진 적이 없었지. 튼튼한 놈이긴 하다.

       

       “오늘은⋯⋯ 저기서 식사하고 방을 잡을까요. 신성도시를 자주 방문한 건 아니지만, 저번에 왔을 때는 꽤 만족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면 그리로 갑시다. 고객님도 괜찮으십니까?”

       

       “좋아. 어디든 좋으니까, 저 빌어먹을 초상화 안 보이는 곳으로 가자.”

       

       악신쨩은 성큼성큼 걸었다. 그렇게 어느 여관으로 들어섰는데, 안쪽은 손님들로 꽉 차서 우글우글거렸다. 축제의 열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빈 테이블이 마땅히 없어, 일행은 임시로 개조된 것처럼 보이는 카운터석에 앉았다. 그리고 간단한 스튜와 맥주를 주문했다.

       

       축제, 축제라.

       

       용사는 여신의 칼이다. 그리고 여신과 ‘그것’은 사이가 나쁘다. 여신은 전 대륙에 이상한 걸 뿌리고 다니는 ‘그것’을 말소시키고 싶어 했고.

       

       그러니까 용사는 나름대로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대처했다.

       

       분명, 기억상으로는 여신에게 수작을 부려서⋯⋯ 용사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흉계를 꾸몄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악신쨩은 흉계의 디테일을 떠올려낼 수 없었다.

       

       정확한 내용은, 미친 마법사에게 남은 93%에 온전한 기억이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용사는⋯⋯ 탄생할 수 없을 텐데?

       

       악신쨩은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턱을 괴었다. 신성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판은 이상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보통 이런 판은, 사람들의 이해득실과 계획이 끈끈하게 얽혀 있다.

       

       이때가 참 파고들기 좋은 타이밍인데. 지금 난장판을 만들면, 온갖 비극이 다채롭게 피어날 텐데.

       

       꾸우욱.

       

       “⋯⋯알았어, 알았다니까.”

       

       악신쨩은 툴툴대면서 경고하듯이 조여드는 『긴고아』의 위를 긁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삶이 재미가 없다.

       

       그래도 우회적으로, 소년 하나에게 엿을 먹여 두었으니까⋯⋯ 그걸 떠올리면 묘하게 마음이 욱신거리기는 하는데. 아마도 설렘이리라. 비보를 전해 들으면 큰 기쁨으로 바뀌겠지.

       

       악신쨩이 스스로 마음을 달랠 무렵, 그녀의 귓가에 소란이 스쳤다.

       

       “이봐, 이분이 무려 용사 후보님이시라고. 언제 또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오겠어? 와서 한 잔 따라보라니까?”

       

       “저, 저기, 저는 그게⋯⋯.”

       

       테이블 두 개를 점거하고 있는 일련의 무리들과, 그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여종업원. 흔히들 일어나는 일이다.

       

       그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 진녹색 머리카락을 미역처럼 늘어뜨린 청년은 음습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 다들 너무 그러지 마. 곤란해하고 있잖아, 응? 미안해. 우리 애들이 장난이 조금 짓궂어서. 사과하고 싶은데. 가까이 와 볼래?”

       

       “아뇨, 저는⋯⋯.”

       

       “사과하고 싶다고 했잖아. 뭐야, 나 이렇게 나쁜 사람 만드는 거야? 그냥 잠깐 가까이 와보라니까.”

       

       “용사 후보님이 사과하고 싶으시대잖냐! 귓구멍 막혔어?!”

       

       옆에서 대머리 하나가 윽박지르듯이 언성을 높이자 여종업원은 크게 움츠러들었다. 평범한 종업원이 어떻게 이런 위협을 견딜 수 있을까.

       

       알 만하군.

       

       미역머리의 눈동자로부터 음욕을 느낄 수 있다. 아닌 척을 하고 있어도, 어떻게 해 볼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직접적으로 손을 쓰는 건 자신의 부하를 시키고 있다.

       

       움직임 전체에서 거들먹거리는 느낌이 강하다.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을 얻게 된 얼뜨기 같다. 한심하기는.

       

       뒤탈 없이 욕망을 충족시키려거든 조금 더 세련된 방식이 있을 텐데.

       

       악신쨩은 눈동자를 돌렸다. 로윌렌도, 로레이도 가만히 맥주를 들이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소동이 일어난 건 알고 있지만, 굳이 개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역머리의 행동이 불쾌하다는 듯 잠깐씩 흘기고 있지만, 그뿐.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돈을 받고 악신쨩을 호위하고 있다. 임무가 우선이다. 또한, 임무가 아니었더라도⋯⋯ 끼어들어서 득 볼 것이 없다.

       

       하지만.

       

       “야, 야. 그만해. 미안해, 내가 오해를 했네.”

       

       “아, 그으⋯⋯.”

       

       “밤길 안전하게, 오래오래 잘 살고 싶은 년인 줄 알았지, 가서 쉬어요. 오늘만 날인가?”

       

       “네⋯⋯?”

       

       여종업원의 표정이 굳었다가, 새파랗게 질린다. 미역머리는 웃는 낯으로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면서, 조금 더 악의를 드러낸다.

       

       “근데, 예전에 일하던 그 갈색 머리. 걔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걔랑 친해요?”

       

       “저, 저는 잘 모르⋯⋯.”

       

       “아, 누군지도 잘 모른다고? 그럴 줄 알았어.”

       

       이어지는 은근한 위협에, 여종업원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애가 탄다. 어중간한 놈이 제일 답답하다. 그렇게 입으로 위협을 쏟아 낼 거라면,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못 참겠다.

       

       저렇게 으스대는 놈들에게는 엿을 먹여주고 싶다. 악신쨩은 히죽 웃었다. 내 앞에서 잘난 체를 하다니. 그건 참기 힘들다. 빠르게 계획을 하나 짠다.

       

       미역머리. 나름대로 단련한 흔적이 있고, 아마도 우화를 보유했다. 그런 촉이 온다. 로레이와 로윌렌과 함께 덤비더라도 질 거라는 견적이 나왔다.

       

       성질과는 다르게 능력만큼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용사 후보씩이나 되는 타이틀을 달 수 있었겠지. 그러니까 전투는 배제한다.

       

       이 여관, 여종업원은 저거 하나뿐이다. 오케이.

       

       로레이는 마탑 후드를 입고 있어서, 겉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수행원이 남자뿐이라고 속일 수 있을 것 같다. 오케이.

       

       악신쨩은 로윌렌이 반쯤 마시고 남겨 둔 맥주잔을 뺏어 들었다.

       

       “야, 빌린다.”

       

       “고객님⋯⋯?”

       

       촤아악-!

       

       맥주를 자기 가슴팍 위에 부었다. 동시에 목소리를 변조한다. 소란스러운 현장을 뚫고도 들릴 수 있게, 약한 마법을 둘러 증폭한다.

       

       “꺄아앗──! 어떡, 어떡해! 나 몰라, 실수로 엎질러서⋯⋯.”

       

       사람 다 있는 곳에서 사고를 쳐서 부끄럽다는 감정, 당황, 발을 동동 구르고, 아끼는 옷이 맥주에 푹 젖어서 속상하고, 축축해져서 옷이 달라붙은 부분을 가리려 몸을 웅크리고.

       

       “고, 고객님?”

       

       “싫어, 로윌렌. 닦아주겠다니, 남자한테 내 몸을 내보이거나 만지게 할 수는 없잖아⋯⋯?!”

       

       “???”

       

       낚싯줄을 툭 던지자, 여종업원은 반색하면서 움직였다.

       

       “저,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저기⋯⋯ 손님분을 도와드려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 그래. 내가 강제로 붙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냥⋯⋯ 생각 잘해.”

       

       “⋯⋯⋯⋯.”

       

       여종업원은 딸꾹질을 하면서, 몸을 파르르 떨며 악신쨩에게 다가왔다. 일단은 자리를 피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혼란으로 가득 찬 상태로.

       

       “도와, 도와드릴게요.”

       

       “좋아. 빈방 있으면 그리로 가자. 안내해.”

       

       “네⋯⋯?”

       

       ===============================================================

       

       여종업원은 악신쨩을 데리고 사람 없는 빈방에 도착했다. 외부의 시선이 사라진 순간, 악신쨩의 표정은 단숨에 바뀌었다. 부끄러움에 겨워 비틀거리는 소녀가 아니라, 악동의 것으로.

       

       틱.

       

       악신쨩이 손가락을 튕기자(소리는 제대로 안 났다) 옷은 단번에 말랐다. 여종업원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헉 소리를 냈다.

       

       “마법사세요⋯⋯? 그, 그러면 왜⋯⋯.”

       

       “마법사 맞으니까 잘 들어. 주인장한테 맥주 하나 부탁해서, 그 안에 이걸 넣고 가져가. 그리고 미역머리한테 먹여.”

       

       쯔즈즉.

       

       악신쨩의 왼팔에서 새까만 비늘 하나가 자라났다. 그녀는 그걸 툭, 하고 뽑아낸 다음 여종업원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냥 어울려 줘. 놈이 너를 방으로 끌고 가면, 저항하지 말고 따라 들어가. 그날 밤, 그 놈팽이는 널 안았다고 생각할 거야. 실제로는 퍼질러 자게 될 거고.”

       

       “⋯⋯⋯⋯.”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다. 여종업원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깊숙이 90도로 숙였다.

       

       “저, 정말 감사해요. 제가, 어떻게 이걸 갚아야 할지.”

       

       “미역머리한테 감사해. 저 녀석이 내 심기를 건드렸거든.”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마법사님⋯⋯!”

       

       “어, 나가 봐.”

       

       여종업원의 안색에 핏기가 돌아왔다. 악신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쿨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연신 감사를 표하더니, 용린을 꼭 쥐고 밖으로 나갔다. 

       

       잠깐 기다리자, 로윌렌과 로레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악신쨩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듯싶었다.

       

       “고객님, 대체 뭘 한 겁니까?”

       

       “그 미역머리 뺀질이한테 엿 좀 먹였어. 불이 이쪽까지 번지지 않게 알아서 잘했고. 멋대로 굴어서 돈을 좀 더 받아야겠으면, 추가금은 그건 미친 마법사가 낼 거야.”

       

       “⋯⋯다음부터는 적어도 말을 해 주세요. 로윌렌도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잘하셨어요. 로윌렌도 이런 일로 추가금은 안 받을 거예요. 그렇죠?”

       

       “예.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안 말렸을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분위기가 훈훈하게 풀렸다. 이후의 뒷감당이 무겁고 부담스러워서 행하지 않았을 뿐, 뒤탈 없이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그 누가 망설이랴?

       

       또한, 로레이는 눈에 띄게 안심한 기색이었다. 악신쨩에 대한 경계심이 이번 일로 크게 내려간 것으로 보였다.

       

       그래. 이런 효과도 노렸다. 미역머리의 수작에 꼬장을 놓고, 동시에 미친 마법사의 지인에게 호감도를 쌓는 거다. 다 계획된 것이었다. 선한 자의 가면을 뒤집어쓰면, 언제고 배신할 때 강하게 때릴 수 있다.

       

       다 악의와 합리만으로 꾸미고 행동한 일이었다.

       

       “⋯⋯⋯⋯.”

       

       그런데, 머릿속에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 말이 계속 빙빙 돈다.

       

       뭔가 자꾸 심장이 뛰고, 자기가 멋있게 딱 비늘을 뜯어가지고 여종업원에게 준 장면이 생각나고, 칭찬 세례가 플래시백 되고. 그러다가.

       

       아니야. 이런 걸 느끼지 마. 긴고아의 정신 공격인가? 대체 무슨 감정인 걸까, 이건. 나는 딱히 구해주려고 한 게 아니야.

       

       혼란스럽다.

       

       나는 악몽이다! 사람들에게 공포와 고통, 절망과 쾌락을 선사하는 존재다!

       

       악신쨩은 자기 이마를 탁 치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 뭘 이까짓, 하, 나 참,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정말⋯⋯.”

       

       새침데기 같은 말이 나와버렸다.

       

       후천적으로 탑재된 선성에, 악신쨩은 난생처음으로 선행뽕을 느껴버린 것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마이프렌즈그러면내일봐요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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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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