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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9

     

    대국의 황제는 그 몸의 손가락 하나까지도 개인이 아니다.

     

    옥체는 제국의 상징이자 나라 그 자체다. 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는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린다.

     

    아셀라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황제가 나를 찾아와 직접 용건을 전하다니?

     

    할 말이 있으면 한참 아랫사람인 이쪽을 부르면 될 일이다.

    그만큼 급한 안건이거나, 내게 반드시 내려야 할 명령이 있다는 의미였다.

     

    “부탁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표현이십니다, 폐하. 명을 내리신다면 신하로서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내가 예를 표하여 답하니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라, 고트베르크와 둘이 이야기하겠다.”

     

    “예, 폐하.”

     

    심지어 아셀라가 들어선 안 될 주제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황제가 손짓하니 앰브로시아가 내게 급서를 한 장 보여주었다.

     

    “공작령이 습격받았다니, 좋지 않군요.”

     

    “15분 전에 전서구로 날아왔네. 슈바르츠슈바이크 공작령뿐만이 아닐세. 왕국 서부나 여러 소국에서도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언데드 군대일세.”

     

    언데드 군대. 사천왕 리치의 공격임이 분명했다.

     

    “전쟁이다.”

     

    황제가 근엄하게 선언했다.

     

    본래 역사보다 한참 빠르다.

    진조를 토벌한 게 트리거가 됐나.

     

    핵심 전력을 잃어 마왕군도 초조해진 모양이다. 대륙의 주요 병력이 이곳에 모여 거점이 비어있는 지금을 중요한 기회라 여기고 선공을 쳤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

    No. 005 : 마왕군 승리 22% → 31%

    No. 095 : 연합군 전멸 28% → 35%

    ―――――――――――

     

     

    아주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마계와의 길목은 왕국이 방어하고 있으니 직접 침투할 틈은 없었을 터.

     

    ‘대륙 곳곳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어 공격해온 정도겠어.’

     

    그래도 틈새를 노려 인간계를 혼란에 빠트린 점에서는 훌륭한 선전포고였다.

     

    자칫 잘못하면 도시 몇 개는 이 공격으로 궤멸할지도 모른다.

     

    “공작령은 이미 방어전에 들어갔다네. 국경 방위군이 지원에 나섰지만 제국의 가장 강한 부대는 여기에 있지.”

     

    “제도 기사단은요?”

     

    “기습이기에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네.”

     

    앰브로시아의 설명을 듣고 내가 물었다.

     

    “폐하, 소인이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번 전투가 짐의 마지막 전장이리라.”

     

    황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당분간 제국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겠지.”

     

    그 말은 즉, 황제는 이번 전투에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는 의미였다.

     

    “폐하.”

     

    “됐다, 앰브로시아. 대처하지 않았다가 더 큰 혼돈을 보는 것보다는 낫다. 고트베르크, 그대는 이번 연무회와 어제 방어전에서 대륙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황공합니다.”

     

    “한 가지 물어보마. 그대는 이전부터 후작령을 후국으로 독립할 생각이 아니었는가?”

     

    황제의 질문은 상당히 예리했다.

     

    확실히 나는 그 준비를 전부터 조금씩 하고 있었다.

     

    영지에 제약공장을 세워 곳간을 채우고, 황제에게 독립군사권을 받아 수호대를 고용한 것도 그 기반 준비다.

     

    처음에는 한참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이 잘 풀렸다.

     

    ‘지금도 고트베르크 가문은 제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황궁이나 제도에 약도 납품하고, 귀족가에는 친자검사로 이름을 톡톡히 알렸지.’

     

    이제는 왕국과의 무역 루트도 뚫렸겠다, 연합군을 통해 대륙으로도 영향을 확장할 수 있게 됐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이 후국으로 빨리 독립할수록 내게는 이점이 있다.

     

    남은 배드엔딩의 확률을 낮추기 편해진다는 점이다.

     

    ‘이제 리셰는 지켜보기만 해도 될 정도고, 남은 배드엔딩은 주로 마왕군 관련이야.’

     

    내가 황실에서 주치의 신분으로 혼자 지울 수 있는 건 거의 다 지웠다.

     

    이제는 연합군 참가국의 주요 인사로서 영향력을 행세하는 편이 단연코 나았다.

     

    “폐하.”

     

    그렇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반역이 된다.

     

    “제국은 폐하의 위대한 업적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소국과 귀족을 직접 호령하시며 하나로 통합하셨지요. 모처럼 대륙이 연합군으로 뭉친 시기입니다.”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설령 소인에게 원대한 야망이 있다 한들, 욕망에 휘둘리는 잡배는 아닙니다. 무리하게 후국으로 독립하여 제국 각지에서 분열이 일어난다면 크나큰 원죄가 아니겠습니까.”

     

    “반대다, 고트베르크.”

     

    황제가 확고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대처럼 업적을 세운 자를 제국이 인정해야 범인들을 통솔하기 편해진다. 특히나 짐의 자식들에게는.”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즉, 황제는 자신이 죽은 후 다른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고트베르크를 대놓고 특별취급하겠다는 말이었다.

     

    제국에서 독립하고 싶다면 고트베르크 정도의 업적은 세워라. 수준이 안 되면 꿈도 꾸지 말아라. 먼저 못을 박아버린다.

     

    수를 앞서가는 보법이 달랐다.

     

    ‘나야 어그로를 끌게 되겠지만.’

     

    이득도 많은 제안이니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래 좀 더 천천히 나눌 이야기였다만, 여유가 없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트베르크, 이번 전투가 끝나면 황실을 떠나겠느냐.”

     

    “그것은.”

     

    황제의 질문에 즉답하지는 못했다.

     

    실리만 따지자면 나는 이제 황실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리셰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까.

     

    그건 다르게 말하면.

     

    ‘주치의 직을 퇴직한다는 뜻이야.’

     

    아셀라는 반대할 게 뻔했다.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가두려 들겠지.

     

    물론 이성적으로만 따지자면, 이제 아셀라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진 않다.

     

    내의원에는 실력 좋은 의사가 많다. 아셀라의 주치의 후임 후보는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황제가 될 여자다.

     

    나는 촌구석 개인병원의 의사가 될 거고.

     

    애초에 가는 길이 다르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주치의를 당장 그만두고 싶냐고 하면.

     

    ‘꼭 그렇진 않아.’

     

    봉급도 괜찮고, 안정적이고.

    아셀라가 귀찮게 굴긴 해도.

    이제는 나름 귀엽기도 하고.

     

    ‘나중에 이야기 해볼까.’

     

    가능성은 적겠지만, 의외로 사정을 알아줄 지도 모르고.

     

    “고트베르크.”

     

    내가 잠시 고민하자 황제가 말했다.

     

    “이번 전투까지는 참전을 부탁하겠다. 그대는 제국의 소중한 전력이다.”

     

    후국 독립까지는 제국에 충성을.

     

    그게 황제가 내게 보내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어 대답했다.

    황제는 만족한 듯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30분 안에 출발할 예정이오. 월광궁도 준비를 마쳐주시오.”

     

    “맡겨주시죠. 자매님도 참전하십니까?”

     

    “주군께서 몸을 안 돌보시겠다는데 어쩌겠소이까. 소녀라도 챙겨드려야지.”

     

    앰브로시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콩콩대며 황제의 뒤를 따랐다.

     

     

     

    ***

     

     

     

    ―두두두두!!

     

    말발굽이 지면을 찢는 소리가 평야에 울려 퍼졌다.

     

    제국 기사단은 열흘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엿새 만에 주파했다.

     

    월광궁, 목휘궁, 화량궁, 금서궁, 각 궁과 함께 황제의 천황궁을 상징하는 제국의 깃발이 정신없이 펄럭인다.

     

    강행군 때문에 낙오된 병력도 있었으나 한시가 급했다. 수시로 날아오는 전서구가 공작령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적군, 시야에 들어옵니다!”

     

    선두의 정찰병이 보고했다.

     

    왕국령에서 제국령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되는 시시포스 협곡.

    그 유일한 통로에 시꺼먼 뼛조각의 병사가 우글거린다.

     

    언데드, 스켈레톤이다.

     

    “전원, 전투태세!”

    “전투태세!!”

     

    연무회를 위해 왕국에 출정 왔던 제국의 병력은 약 6천.

     

    황실 기사단 일부와 각 궁에서 차출된 기사, 황제의 호위대, 치유사대를 포함한 병력이었다.

     

    낙오자는 고작 2백. 5천 8백이 협곡에 도착했다.

     

    이미 공작력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방위병 2만의 병력을 생각하면 대단한 원군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이쪽은 황실의 엘리트만이 모였다.

     

    전투력의 질은 차원이 다르다.

     

    “으랏!”

     

    시속 50키로미터로 달리던 기병이 그대로 창을 휘두르면 스켈레톤 병사가 일격에 박살이 난다.

     

    후속대의 발에 밟혀 뼛가루가 되는 언데드 군대.

     

    제국군은 순식간에 공작령 안까지 진입해 길을 텄다.

     

    “슬슬 저희도 준비하지요.”

     

    병력 수송용 마차 짐칸에서 장갑을 착용하며 휴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월광궁의 의료진과 기사들도 함께였다.

     

    “으아아, 설마 진짜 전쟁터에 끌려올 줄은 몰랐는데요오…!”

     

    “전시에는 내의원 치유사도 차출될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 쓰여 있어요.”

     

    “꼼꼼히 읽을걸 그랬어요….”

     

    울상인 클로에를 타냐가 일으켰다.

     

    “대신 살아 돌아가면 인센티브도 많이 줍니다. 명품관에 가방 사러 가죠.”

     

    “가방… 마침 신상 시즌이었죠.”

     

    클로에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의사와 치유사들이 각자 구급함을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도착했습니다!”

    “투입!”

    “제국에 영광을!”

     

    마차가 멈추고 덜컹, 짐칸 문이 열렸다.

    함성과 함께 기사들을 선두로 병력이 일제히 뛰쳐나간다.

     

    공작령 도시의 한복판이었다. 건물은 여기저기 무너지고 멀리 성벽에서는 공성전이 한참이었다.

     

    스켈레톤과 좀비 따위의 언데드가 길목을 점령했다. 스릉! 타냐가 기세 좋게 검을 휘두르며 적 세력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냈다.

     

    네 개 궁 기사단의 협력으로 점차 전선이 전진한다. 성벽을 사수하는 공작군과 함께 언데드 군대를 양쪽에서 협공해 압박한다.

     

    ―파앙!

     

    그 최전선을 유지하며 황금빛 마법진을 그리는 아셀라.

     

    부대를 통솔하며 원거리에서 얼음창으로 기사들을 보조한다.

     

    “정찰병에서 보고입니다. 시내에 아직 고립된 민간인이 다수 남아있다 합니다.”

     

    아셀라는 전황을 확인하며 빠르게 판단한 후 명령을 하달했다.

     

    “2소대가 분대로 찢어져서 구출하도록 해.”

     

    “부상자나 역병 감염자가 있어 진입이 어려워 보입니다.”

     

    그 말을 듣고 툭툭, 아셀라의 어깨를 건드리는 이가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라스였다.

     

    “황녀님, 환자라는데요.”

     

    “하아, 싸워봐야 내 입만 아프지.”

     

    아셀라가 턱짓으로 허락을 표했다. 라스는 싱글대며 품에서 포션 병을 꺼내고는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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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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