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Please report if you find any blank chapters. If you want the novel you're following to be updated, please let us know in the comments section.

EP.2

       신분증 속엔 하얀 와이셔츠를 걸친 내 사진이 찍혀 있었다.

       

       내 저런 옷을 입은 기억은 없다만 저 사진도 만들어 낸 걸까.

       

       ‘백아라’라는 이름과 2011년에 태어났다는 글자. 마지막으로 신분증 구석에 찍힌 도장. 어디를 보아도 가짜 같진 않았다.

       

       신분증을 내려놓고 지갑을 들었다. 지갑 안엔 냉기가 돌았다. 있는 거라고는 카드 하나 뿐.

       

       편지에 따르면 돈은 계좌에 들어 있다고 했던가. 정확한 금액을 확인하려면 계좌를 열어봐야 할 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스마트 폰.

       

       이 물건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노망이 들었다 한들 과거 십 년 넘게 쓴 물건을 어떻게 잊겠는가.

       

       문제는 ‘모든’ 걸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대충 어떻게 쓰는 건지는 알겠다마는 그를 떠올리기 위해선 다소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당연하게도 스마트폰을 만지는 손은 느렸다.

       

       흐. 이러니 꼭 노인이 된 것 같구나. 실제로도 노친네라 부름이 옳은 나이기는 하지.

       

       은행 어플을 찾아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한글이라는 언어를 마지막으로 써본 것이 대략 백 년 전쯤. 어지간한 것은 다 잊어버렸다. 은행이라는 두 단어를 찾아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난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어플이란 어플은 모두 다 켜서 내가 바라는 걸 찾아냈다.

       

       어디 보자. 계좌에 든 돈이. 공이 하나 둘… 여덟 개고. 앞에 숫자가 8이니까.

       

       8억.

       

       입술을 두드리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시절 내가 직장에서 일하며 받은 월급이 대략 2백만원. 연에 보너스니 뭐니 하는 걸 다 합쳐봐야 3천만원이 안 됐었다.

       

       그러니 이 8억이라는 돈은 평범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모으고 또 모아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영물 고 놈. 부탁받은 건 잘 해준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이 집도 그가 선물해준 것이었지. 어디 한 번 둘러볼까.

       

       집은 전체적으로 살풍경했다. 막 만들어진 집에 기본적인 가구만 넣어 놓은 것 같은.

       

       그으. 무어냐. 그래. 모델하우스처럼 보였다.

       

       그런 주제에 옷장에는 하늘거리는 옷이 한 가득이었다.

       

       앞서 일을 잘한다 말했던 걸 취소하겠다. 그 녀석. 내가 이런 걸 좋아하리라 생각한 건가? 아니면 억하심정에 나를 놀리려 든 것인가.

       

       어느 쪽이건 좀 더 자기 주제를 알게 해줬어야 했는데.

       

       무림에서 날 단순히 여자 취급한 놈팽이 중에 몸 성히 걸어 나간 이는 없었다.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난 그리 잔악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대신 내가 빼앗은 것은 그들의 남성뿐이었다.

       

       여러 이들에게 같은 결말을 내어주고 나니 자연스레 내게 추파를 던지는 이가 사라졌지. 지금 생각해봐도 괜찮은 방법이었어.

       

       탐색을 끝마치고 방구석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대충 잘라 낸 검은 단발과 무심한 검은 색의 눈동자.

       

       심드렁한 눈매와 꾹 다문 입술.

       

       오랫동안 무림을 굴러다녔음에도 백옥처럼 말끔한 피부.

       

       여러 어린 이들이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던 아름다운 여성. 그것이 나였다.

       

       난 이 외모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무림에서 아름다움이란 대개 걸림돌이었다. 힘을 가졌음에도 뇌는 가지지 못한 것들이 어디 한 둘 이던가.

       

       내게 천마의 딸이란 지위와, 천하제일의 무력이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곤란한 일을 여럿 겪었을 것이다.

       

       물론 이 여성성을 이용하려 했다면 할 수야 있었겠지. 허나 난 태어나기를 남성으로 태어난 이였다. 그 정체성은 천마의 딸이 되고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난 남성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여성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전생 초창기에는 다른 여식들을 보며 가슴을 두근거린 적도 있으나 여자로서의 삶이 길어지다 보니 두근거림도 결국 흐려져 버렸지.

       

       지금의 나는 굳이 따지자면 무성애자 같은 것이리라.

       

       백 살이 넘은 노친네가 누구를 사랑하겠다 지껄이는 것도 웃긴 일이지. 

       

       가만 거울을 보다 슬며시 웃음을 지어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거야.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영 어색한 일이구나.

       

       

       *

       

       은거를 택해 산구석에 틀어박힌 후 현대를 떠올리며 그리워 하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대개의 것들은 무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나였지만 시대의 기술이 부족해 이룩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난 무림인이었지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리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건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무림에 있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제대로 된 조리법도 정립되지 않을 것들뿐이다.

       

       잡내도 심하고. 깊은 맛은 찾아볼 수 없고. 애초에 기본 재료 자체도 별로다. 향신료? 소금이나 제대로 쳐주면 감지덕지다.

       

       천마의 딸로서 나름 풍족하게 살 적에도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 느낀 적이 없는데 다른 곳은 어떻겠는가.

       

       전생의 나는 스스로가 먹는 걸 좋아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을 달랐다. 내 좋아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지. 단순히 입에 뭔가를 처넣는 게 아니었다.

       

       드디어 미식을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왔으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 먹는 것이었다.

       

       옷장에서 하늘거리는 것들을 모두 다 구석으로 치우니 그래도 입을만한 것들이 나왔다.

       

       청바지에 후드티. 바지가 영 다리에 딱 달라붙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 정도면 참을 만 했다.

       

       옷을 걸친 나는 무작정 바깥으로 나왔다. 무얼 알아보진 않았다.

       

       사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는 편이 옳으리라. 한글을 읽지도 못하는 내가 한글로 무얼 검색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난 개의치 않았다. 현대는 풍족한 세상이지 않은가. 걷다 보면 무언가 나오겠지.

       

       나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대략 한 식경정도 돌아다녔을 뿐이거늘 수많은 가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파는 것들은 하나 같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허나 고민은 없었다. 나는 바깥에 나온 그 순간부터 무얼 먹을지 결정한 상태였기에.

       

       내가 택한 건 바로 치킨이었다.

       

       바삭한 튀김과 그 안에 담긴 육즙이 가득한 속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 맛이란.

       

       맛있는 것이 그리웠던 무렵. 난 무림에서 치킨을 재현해보려 노력했다.

       

       결국 치킨이란 닭을 기름에 튀긴 것 아니던가. 몇 번 실패하더라도 결국에 성공하리라 생각했었다.

       

       너무도 간단한 시장 통닭을 만드는 데도 실패한 끝에 난 깨달았다. 닭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질긴 주제에 먹을 건 없고 냄새만 심한 무림의 닭과 현대의 닭은 비교하는 게 실례였다.

       

       기대를 감추지 않은 채 가게의 문을 연 순간 상상만 하던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기름내와 고소한 향이 뒤섞인. 너무도 먹음직스러운 향취.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카운터에 서 있던 점원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무어라 소리쳤다.

       

       “어XXX요! XX. 드XX 가X XX요?”

       

       …아. 맞다. 나 한국어 못하지?

       

       *

       

       치킨집 사장 하일근은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했다.

       

       문을 열고서 한 시간이 흘렀지만 가게는 한산했다. 그도 그럴 게 점심 때 가게까지 찾아와 치킨을 먹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배달이야 몇 개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여태까지의 경험 상 저녁 때가 되어서야 좀 바빠지겠지. 그 때까진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었다.

       

       스마트 폰으로 어느 방송인의 영상을 보던 중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손님인가? 포장이었으면 좋겠다. 가게에 손님이 있으면 눈치가 보이니까.

       

       고갤 드니 손님의 얼굴이 보였다.

       

       무심하게 가게를 둘러보는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직접 자른 건지 엉망인 검은 색 단발. 그에 반해 관리가 잘 된 새하얀 피부. 두터운 후드 티 위로도 느껴지는 육감적인 몸매.

       

       개판인 머리스타일을 뒤로 하고서라도 미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제발 매장 손님이면 좋겠다. 저런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니까.

       

       “어서오세요! 손님. 드시고 가실 건가요?”

       

       고개를 끄덕여 주길 바라며 물었더니 여성의 얼굴에 곤혹이 새겨졌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Nǐ huì shuō zhōngwén ma?”

       

       중국어?! 하일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일근도 나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녔던 사람이다. 기본적인 영어 정도는 할 수 있다. 일본어도 조금은 가능하다.

       

       그런데 중국어라니. 그의 입장에서 저 언어는 우주에서 내려온 외계인이 하는 말과 다름 없었다.

       

       “어. 음. can you speak english?”

       “Wǒ bù zhīdào nǐ shì shénme yìsi”

       

       소통이 안 되잖아.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하란 말이다.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하일근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제일 곤란해 보이는 건 입술을 두드리는 저 여성이었으니까.

       

       번역기라도 켜야 하나.

       

       “여기. 밥 가능?”

       

       다행히 여성은 한국어를 아예 못하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예쁜 게 좋긴 좋아. 방금 전까지 곤란했던 게 저 다행이라는 표정 하나에 날아가 버렸으니까.

       

       하일근은 직접 몸을 움직여 자리를 안내해 준 후 메뉴판을 건네줬다.

       

       여성은 메뉴판의 글보단 그림에 집중했다. 애초에 글을 알아볼 수도 없겠지.

       

       얼마간 고민을 하던 그녀는 프라이드와 양념 치킨의 사진을 가리키며 어눌한 한국어를 내뱉었다.

       

       “이거. 이거.”

       

       반반을 말하는 건가 싶어 되물었지만 여성은 고갤 갸웃거릴 뿐이었다.

       

       하아. 결국 먼저 움직이는 건 답답한 쪽이었다. 하일근은 스마트 폰을 꺼내서 번역기를 켰다.

       

       중국어를 번역해 본 적은 없는데. 중국에 사는 사람 인구가 인구니까. 잘 되겠지?

       

       번역기의 성능은 괜찮았나보다. 여성은 번역기가 바꿔 준 글을 읽고는 고갤 저었다.

       

       “아니. 이거. 이거. 따로.”

       

       각각 한 마리 씩 달란 거겠지.

       

       아무리 봐도 많이 먹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인데. 의아했지만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먹고 남기면 포장이라도 해주지 뭐.

       

       “아! 그리고 코?… 라?”

       “콜라?”

       “맞다.”

       

       주문을 받은 하일근은 도망치듯 주방에 들어갔다.

       

       여느 한국사람처럼 그는 외국인이 말을 거는 게 두려웠다. 그게 제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 한들.

       

       

       *

       

       곤란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이었나.

       

       지금이야 어찌저찌 소통에 성공했으나 계속 이런 식이어선 여러모로 곤란할 게 뻔했다.

       

       한국어를 배우긴 해야 할 텐데. 어디서 배우지?

       

       전생의 나에게 한글은 모국어였다. 자라나며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 것.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글을 어디서 배워야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대체 어디서 다 큰 성인에게 한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알려줄지. 이 나이를 먹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원.

       

       고민이 깊어갈 무렵 점원이 접시를 들고 왔다.

       

       그 위에 놓여진 치킨의 아름다운 자태란.

       

       황룡포를 입은 치킨의 황제와 곤룡포를 입은 치킨의 왕이 함께 납시는 모습은 내게 감동마저 선사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저걸 먹고 싶기는 하다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도망치듯 돌아가려는 점원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는 곤란해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이방인인 내가 도움을 청할 데는 여기밖에 없었다.

       

       “도움.”

       “XX 도움X 필요XXXXX.”

       

       한글을 배우려면 어디에 가야합니까. 라는 단어를 어떻게 말해야 하지?

       

       한글을 배우기 위해 한글을 알아야 한다는 모순이 생겨버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