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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아아…… 콜록…. 악! 아…… 콜록!!”

         

         무슨 소리라도 내보려고 기침할 때마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비릿한. 오직 아나스타샤를 위해 맞춰진 완전 배양액을 밖으로 거칠게 토해냈다. 한꺼번에 배운 적도 없는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혼란스러운 내 머리는, 일단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과 몸에 관련된 내용부터 상기시켜주었다.

         

         까드득….

         

         “아파……!”

         

         칼칼한 목통증에 무심코 엎드린 바닥을 긁자, 연약한 손가락 끝에서 더한 고통이 뇌를 엄습했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들이 돌연 살아나서 나를 덮칠 것도 아닌데, 난생 처음 겪는 엄청난 격통에, 내 팔은 멋대로 바닥을 밀쳐 뒤로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었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다.

         

         찰팍…!

         

         다행히 깨진 시험관으로부터 흘러나온 배양액 웅덩이가 추가적인 부상은 막아주었으나… 고마워할 겨를도 없었다. 그제야 들린 시야에, 살벌한 연구실 내부 풍경이 들어왔으니까.

         

         “………꿀꺽.”

         

         반쯤 끊어진 전선에 매달려,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조명이 간헐적으로 깜빡이며 어두운 내부를 살짝씩 드러냈다.

         

         폭발과 화재의 여파로 곳곳이 새까맣게 불타 있었고, 그나마 좀 멀쩡한 타일도 날카로운 탄흔이 남아있었다. 그것뿐이랴? 몸 근처에 깔린 웅덩이만 초록색 배양액이었지, 다른 곳에 튄 액체는 전부 전해액이 아니면…… 새빨간 피.

         

         여기에 마무리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홀로그램 패널들까지 더해지니, 그 유명한 공포영화의 도입부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읏…!!”

         

         피어난 두려움을 자각하자 오한이 몰려와서, 나도 모르게 허전한 두다리를 모으고 팔로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가슴이 무릎에 눌려 모양이 망가졌고, 여기저기 묻은 배양액을 제외하면 순백의 도화지 같은 아담한 몸이 강조되었다. 생각해야한다. 생각해야만 한다. 하찮은 감정이 몸을 지배하게 놔둬봐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나스타샤, 검체 번호 RoTG-71214. 이정도 역경도 이겨내지 못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

         

         “방금 무슨…?!”

         

         나를 나라고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무언가가 침식당하는 느낌에 고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는 두 물질을 병안에 넣고 흔들었는데, 진짜로 섞여버린 듯한 불쾌한 기분. 딱히 식도에 남은 배양액이 없는데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한 꿈 치고는 모든 게 너무 생생하다.

         

         베인 손가락, 추위, 두통, 혐오감, 마지막으로… 진동까지.

         

         쿵….

         

         바닥에 고여 있던 액체들이 미세하게 요동치며 파문이 일었다. 늘어진 조명도 좌우로 흔들거렸고, 천장에 맺혀 있던 전해액도 똑 하고 덜어져 내렸다.

         

         내가 틀렸다.

         이 실험실 풍경은 공포영화와 전혀 똑같지 않았다. 있어야할 가장 중요한 게 빠진 상태였으니까.

         

         비몽사몽한 의식으로, 이 대참사가 발생하기전에 지켜봤던 풍경엔 분명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게 연구원이든 타격대던 상관없이, 폭발에 휘말리고 피를 바닥이 잠길 정도로 흘렸는데. 왜 시체는 단 한구도 남아있지 않을까.

         

         쿵… 쿵… 쿵…!

         

         “하아… 하아…!!”

         

         고함에 반응한 듯한 진동이 점점 이 방으로 다가오자 호흡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밀폐문이 제역할을 해준다면 베스트지만, 그랬다면 애당초 저 미지의 청소부가 시체들을 깔끔하게 치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거운 발소리를 듣고 내 상식은 살집이 좀 있는 괴한을 그렸지만, 아나스타샤의 지식은 네오 헤이븐 기준으로 지극히 흔한, 로봇이나 드로이드를 떠올렸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그냥 깨어나면 그만이겠지만.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덜컹!! 덜컹덜컹!

         

         무력하게 말고 있던 몸을 잽싸게 움직여, 너덜거리는 철봉을 떼어내려고 거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이 예쁘기만 한 빌어먹을 몸뚱어리는 고정이 거의 풀린 지지대 하나 분리하지 못하고 헛손질만을 반복했다.

         

         쿵! 쿵! 쿵!!

         

         놈이 다가온다.

         더는 풀리지 않는 막대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기방어를 위해 작은 손으로도 잡기 쉬운 물건에 달려들었지만, 사실 더 위험한 무기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까득…!

         

         “윽!!”

         

         바닥에 널려 있던 시험관 조각 중 최대한 날카로운 녀석을 움켜쥐었다. 실상 칼이나 다름없는 흉기로 급소를 잘만 노린다면 제 아무리 덩치 큰 생물이라도 일격에…!

         

         “…아. 씨발.”

         

         쿵—!!

         

         그런 헛된 희망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내 팔 만한 드로이드가 벽을 집으며 실험실 내부로 비집고 들어오자 싹 사라졌다. 본래 얼굴이 있어야할 자리엔 적을 놓치지 않기 위함인지, 소름 끼치는 붉은 광선을 내뿜는 홀로그래픽 스캐너만 세 개가 달려있었고. 다리는 평범하게 두 짝인 주제에, 손은 뭐가 그리도 많이 필요했는지 어깨에 달린 두 개를 제외하고도 등으로부터 네 개가 더 나 있었다.

         

         손가락과 관절이 있는 베이스 암과 달리, 등으로부터 난 기계 팔 끝 쪽에는 톱날, 바늘, 집게, 총구가 달려있었으니… 용도는 누가 봐도 명확했다. 미친 살육 머신 새끼.

         

         철컹!

         

         “?! 이거 놔! 이 씨발 새끼야…!!”

         

         반항할 겨를도 채 없었다.

         순식간에 단거리 가속으로 접근한 드로이드는 집게 팔로 이 가냘픈 허리를 붙잡고, 손가락 네 개만으로도 양팔을 구속했다. 그 와중에 힘조절은 또 어찌나 절묘한지,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져 마구 버둥거리는데도 특별한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쨍그랑…!

         

         휘둘러보지도 못한 파편이 바닥에 떨어졌다.

         거창하게 계획한 것 치고는 너무 하찮은 반항이라 눈물이 다 나왔다. 그렇다면 적어도, 힘조절만큼이나 깔끔한 솜씨로. 이 악몽을 안 아프게 끝내주기를 바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강렬한 의지와는 별개로 순응력이 지나치게 높으시군요, 코드 네임 아나스타샤. 이대로 라면 닥터께서 계산하신 기대수명을 달성하시는데, 크나큰 애로사항이 꽃필 것으로 예상됩니다. –

         

         “……뭐?”

         

         되묻거나 말거나, 드로이드는 내 발버둥이 멈추자 조심스럽게. 엉망이 된 손을 펼치고 스캔한 뒤, 치료하기 시작했다.

         

         – 재생 혈청(Regeneration Serum) RS-03를 투여하겠습니다. 인젝션 후, 남은 RS-03 잔여수량…… 0. 추후 부상이 발생할 경우, 원본 혈청(Original Serum)을 사용하셔야 하므로. 자산관리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

         

         펼쳐진 손바닥에 바늘이 꽂히고 혈청이 주사 되었다. 동시에 드로이드의 손가락 끝이 개방되더니, 작은 핀셋들이 튀어나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박힌 이물질들을 모두 제거해버렸고. 말하는 방식이 열 뻗치긴 하지만… 이 드로이드가 아군이라고 가정하지 않고 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넌…… 넌 대체 뭐야?”

         

         – 중의적 질문 수용. 저는 파라다이스 코퍼레이션에서 제작된 돌보미 로봇 시리즈, 케어봇(Carebot)에 엑사테크 코퍼레이션의 자동 요격용 드로이드 모델, 인터셉트론(Interceptron)의 부품을 장착한 고유 객체입니다. 또한 닥터 마카로비치가 완성한 검체 번호 RoTG-71214. 코드 네임 아나스타샤를 위해 연구소 자폭 시 생존을 돕고, 임플란트 시술을 행할 수 있도록. 연구소 예산을 횡령해 준비된 고성능 안드로이드입니다. –

         

         “어… 그래…?”

         

         질문 한번에, 네오 헤이븐 용어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직원 목숨은 대체재가 넘친다고 자산(Asset)으로도 취급 안 하는 메가 코프들. 병원이나 가족단위로 사는 집에서 자주 보이는 케어봇. 인테리어의 일부 마냥 매달려 있다가 튀어나오던 인터셉트론.

         

         ‘내가’ 염원을 담아 창조한 아나스타샤를, 누구인지도 모를 놈이 만들었다고 말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덕분에,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여기는 인간 실험에 환장한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연구소.

         이 세계는 네오 헤이븐, 모든 게이머들의 지옥이었다.

         

         

         – 우수하게 설계되셨을 텐데, 정신 제어에 난항을 겪으시는 군요. 빨리 수술실(Operating Room)로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충격에 대비해 주십시오. –

         

         “뭐이 샊…… 꺄악?!”

         

         쾅쾅쾅쾅쾅—!!

         

         건방진 말을 씨부리는 드로이드에게 욕이라도 퍼부어 주려고 했는데. 갓난아기를 안듯, 나를 품에 쏙 집어넣은 놈이 전속력으로 연구소 복도를 질주하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신체에 어울리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쿵! 끼기기기기기기긱—!!

         

         메가 코프의 비밀 연구소 답게 계단이 없었기에, 드로이드는 봉쇄된 엘리베이터 격벽을 힘으로 열어제끼고 더 깊은 지하로 벽면을 긁으며 뛰어내렸다.

         

         어디 부러지지 않게, 난폭하지만 세심한 취급 하에 눈 깜짝할 새에. 멀쩡한 지하 수술실에 도착한 놈은 내 몸을 수술대 위에 내려놓았다.

         

         온갖 날붙이와 수술용 레이저 조사기, 바늘이 겨냥 된 금속 침대. 누우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처럼 생겼지만,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오 헤이븐을 플레이하면서 수만번은 우습게 들렸을 파워업의 성지.

         사이버웨어 업그레이드는 다른 곳에서도 가능해도, 생체 임플란트는 오직 이곳 수술실에서만 장착하고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으니. 괜히 네오 헤이븐 폐인들이 에메랄드 시티 전체의 OR맵을 작성한 게 아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물쭈물, 알아서 수술대 위에 몸을 누이는 나를 지켜보던 드로이드가 터치패널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 아까 와는 다른 능동적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코드 네임 아나스타샤에게 최대한 불편사항이 없도록 오퍼레이팅을 진행하겠습니다. –

         

         “어디까지나 날 위해서야…!”

         

         초능력이나 강화에 대한 기대에 굴복했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기엔 부끄러워서 변명을 주워섬겼다.

         난잡한 기억이나 정보 정도는… 수술이 끝나고나서 천천히 되짚어봐도 충분하겠지.

         

         삑삑. 삐비빅. 삑!

         

         [ 마취제 카트리지 손상 확인. 손실률 계산 중……. 손실률 100%. 오퍼레이팅 시퀀스를 종료합니다. ]

         

         “…?”

         

         – ……. –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 불길한 시스템 메시지가 표시된 걸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놈이 배신했다.

         

         삑삑!

         철컹!!

         

         침대에서 튀어나온 구속구가 몸을 결박했다.

         설마. 설마 아니리라. 제정신 박힌 새끼라면, 생체 임플란트를 신경에 박는 대수술을 환자 마취도 안 하고 막무가내로 할리가….

         

         삐빅!

         

         [ 시스템 오버라이드 완료. ]

         

         “야이 씨발! 미친 새끼야아아아아아아악—!!”

         

         발사된 레이져가 어깨에 틀어박히자마자, 나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혼절해버렸다.

         

         

         다행인 점이라면, 적어도 수술 도중에 나는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불행한 점이라면, 날아간 의식이 이상한 세계를 목격했다는 것인데….

         

         

         네오 헤이븐 대신. 오직 네오 헤이븐 프라임이라는 게임만이 존재하는 지구.

         거기서 나는,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었다. 무려 공략가능한, 심지어 인기도 쓸데없이 많은 서브 히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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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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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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