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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애러건트 사가는 8 ,90년대 JRPG 감성을 표방하며 발매된 턴제 어드벤처 게임이었다.

         

        용사 루시에나 에스텔과 그 파티원들이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마왕을 물리치는 단순한 스토리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이미 아는 맛이지만 게임 본연의 재미를 추구한 덕분에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인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그 시대의 감성만을 가져왔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그때 당시의 일본 애니나 게임 주인공들이 으레 그렇듯 루시에나 역시 열혈호방이지만 자기과신이 심한 시건방진 캐릭터라는 걸 제외하면, 주인공부터가 여자 캐릭터에 각 파티원들에 대한 호감도 시스템이 있다는 것은 이색적이었다.

         

        문제는 이 호감도로 인한 연애 모드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또다른 특색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용사 파티원을 플레이어가 골라서 영입할 수 있다는 점.

         

        기본적으로 용사 파티는 용사인 루시, 방패기사 라인폴드, 마법사 티그리아, 엘프 궁수 나이드리안, 무투가 성녀 아르실로 이루어진다.

         

        스토리를 진행하다보면 아르실까지 자동으로 영입이 되지만 마지막 멤버만큼은 달랐다.

         

        플레이어에게는 두 명의 캐릭터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도적 여캐.

         

        맵의 숨은 아이템이나 함정을 발견하고 전투에서는 아군 버프를 해주는 아르실과 달리 적군 디버프를 넣는 캐릭터.

         

        때로는 아주 낮은 확률로 적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나 소모성 아이템을 훔쳐서 지원한다.

         

        다른 하나는 짐꾼.

         

        그냥 여분의 인벤토리창이 더 생긴다고 볼 수 있었다.

         

        전투 캐릭터들의 인벤토리가 꽉 차면 잠시 맡겨놓는 용도.

         

        그만큼 가지고 있는 인벤토리 창도 넉넉하고, 심지어 전용 아이템인 짐꾼의 낭까지 획득하면 안그래도 넓은 템창이 더 넓어진다.

         

        그러나 애러건트 사가는 엔딩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용 아이템을 주고 스팩이 섭섭치 않게 맞춰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 가서는 소모성 아이템도 많이 필요가 없어진다.

         

        회복템이나 상태이상 해제 같은 소모템을 잔뜩 들고 다니게 하면 안되냐 라고 볼 수 있지만 각 전투마다 보스마다 필요한 아이템은 도적이 그때그때 훔쳐와서 요긴하게 충당이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최종 보스인 마왕이 너무 강했다.

         

        짐꾼은 비전투원으로 분류되어 시스템상 강제로 전투에서 배제되는 탓에 아이템 많이 쥐어 줘봤자 전투 돌입하면 써먹지도 못한다. 말그대로 운반책일뿐.

         

        그런데 오리지날 엔드 컨텐츠인 마왕은 더럽게 쎄다.

         

        도적 선택해서 6명으로 총공격을 해도 이길까말까할 정도인데 짐꾼을 영입할 이유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왕한테서 로또보다 낮은 확률로 외뿔을 훔쳐내 전투를 종료시키는 도적의 전투씬이 최근에서야 발견되어 유튜버들까지 도적 외뿔 훔치기 켠왕 챌린지를 하는게 유행했다.

         

        그런거다.

         

        짐꾼은 사족 중의 사족.

         

        어찌보면 개발사에서 고일대로 고여버린 고인물에게 한 번 클리어해보실래요? 하고 붙여주는 패널티와 같았다.

         

        그리고 그걸 클리어한 사람은 전세계에서 단 한 명이었다.

         

        그 업보 때문인지 이 유일한 플레이어는 자신이 조종했던 짐꾼으로 전생하여 개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글프게도 전생의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였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그저 애러건트 사가 짐꾼 플레이 클리어를 했단 것과 대한민국의 이씨 성을 가진 남자였다는 것, 대신에 지독하리만치 게임 내용은 확실하게 복기가 된다는 이점만 있었다.

         

         

        “이러면 완전 나가리인데.”

         

         

        빙의가 아닌 전생이었다.

         

        그것도 게임 초중반부에 들어서고 나서야 기억만 각성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짐꾼으로 합류하게 된….’

         

        ‘됐고 파티 내에서는 라인폴드 외에는 다른 남자 얼굴 보기 싫으니까 가면이라도 써.’

         

         

        인생 최대 업적인 용사 파티에 합류하던 날, 파티원 중에서 제일 처음 만난 루시에게 타박당해 어쩔 수 없이 이 기묘한 가면을 쓰는 순간에 말이다.

         

        이상했다.

         

        짐꾼은 도적보다도 게임 내내 내뱉는 텍스트나 상호작용이 압도적으로 적긴 하지만 없는 취급을 당할지언정 무시 받진 않았다.

         

        그런데 무시 받았다.

         

        어떻게 무시 받았는지는 나중에 차차 풀기로 하자.

         

        지금 짐꾼 린은 사지가 절단 난 용사를 안고서 물길에 쓸려가고 있으니 당장 썰을 풀기에는 힘들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알아서 육지에 닿아야 하는데?”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수분이 지났는데도 어딘가에 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품에 있는 루시는 의식을 잃은 데다가 입술까지 파리했다.

         

        물먹는 걸 방지하기 위해 배영하는 자세에다 그녀를 짐꾼의 배 위에 올려놨기 때문에 전방 시야를 확보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두면 나락에 떨어질 것이라는 걸 감지한 린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저기다!”

         

         

        안간힘을 써서 쳐다본 대각선 앞쪽에 숲으로 들어갈 수 있는 땅이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 앞쪽에 둑처럼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통나무도 있겠다 린은 허우적거리며 그 통나무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빡!

         

         

        “아우! 아야…!”

         

         

        별다른 제동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통나무를 머리로 들이박아 멈출 수 있었다.

         

        각오했던 것보다 더 큰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어차피 가면에 가려져 볼 수 없었다.

         

        린은 등을 움찔거려 슬금슬금 강가의 뭍으로 움직였다.

         

         

        “후우, 후우.”

         

         

        당연하겠지만 물은 차가웠다.

         

       루시를 안아들고 숲으로 들어간 린은 조금 깊숙이 들어왔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짐꾼의 낭에서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일반: 온기의 포옹.”

         

         

        각종 침구류를 세팅한 뒤 거기에 루시를 눕히고 일회성 스킬을 사용했다.

         

        스크롤을 루시의 배 위에 올리자 따스한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젖은 머리칼이 마르기 시작하는 걸 확인한 린은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파이어 스타터로 불을 붙였다.

         

         

        “특급: 기척 경계(Lv. Max)”

         

         

        또다시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이번에는 특급 등급이었다.

         

        배신자들로부터 도망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에 혹시 모를 추격자와의 조우를 대비해 가장 높은 등급을 썼다.

         

        적의를 가진 자나 해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주위에 나타나면 머릿속으로 알림을 주는 스킬이었다.

         

        Lv. Max 스킬이기 때문에 적대자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든 그가 일행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상태라면 무조건적인 알림이 오게 돼있었다.

         

        린은 속까지 푹 젖은 옷을 벗어서 불가에 걸어 놓았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온 저하가 더 심하다는 건 상식이었고 어차피 짐꾼의 낭에 예비 옷은 차고 넘쳤다.

         

        그 역시도 추위에 몸이 떨렸지만 스킬과 마법 스크롤은 아껴두는 편이 좋았다.

         

        가능한 루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만 한다.

         

        특히, 그들의 목적지를 생각하면 생존에 관련된 스크롤은 최대한 비축해 놓아야 했다.

         

        옷을 갈아입은 린은 얼굴을 닦기 위해 가면을 벗었다.

         

        정말 오랜만에 벗어보는 가면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외모는 평범했다.

         

        아주 살짝 처진 눈꼬리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썹,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괜히 미적 기준이 높은 루시가 그에게 가면을 쓰라고 한 게 아니었다.

         

        풀내음이 나는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잠깐 시원했지만 곧바로 싸늘해졌다.

         

        마른 천을 꺼내 얼굴을 닦던 린은 바닥에 놓인 가면을 보고 고민했다.

         

         

        “역설적이네.”

         

         

        용사 파티에 합류한 이후로 린은 줄곧 가면을 써왔다.

         

        그랬기에 용사 파티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가면을 보고서 용사 파티의 짐꾼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봤다.

         

        그 말인즉슨, 반대로 린이 가면을 벗고 다니게 된다면 그가 짐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질 터였다.

         

        그런 까닭에 린은 역설적이다 라는 말을 내뱉었다.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원래도 없었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어쩌다 한번씩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찌됐든 고민을 마친 그는 가면을 주워 짐꾼의 낭에 넣었다.

         

         

        “아, 이거는 예정에 없던 건데.”

         

         

        적당히 평평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앉아 루시를 탈출시키면서 했던 말을 반복한다.

         

        자신이 배신당한 용사를 구한 게 의외였을까? 그건 아니었다.

         

        게임 오리지날판에서는 마왕을 물리치고 절벽에서 승리를 만끽하며 엔딩을 맞이하지만 이어서 출시된 DLC에서는 이미 본 바와 같이 용사 파티가 용사를 배신한다.

         

        그리고 파티원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용사의 편에 서서 그녀를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어떤 캐릭터가 나서주는가는 오로지 오리지날판을 진행하며 쌓아온 호감도로 결정되었다.

         

        당연하지만 모든 파티원의 호감도가 일정 수치 미만이면 루시의 편을 드는 이가 없어 그대로 배드엔딩.

         

        마법사, 궁수, 성녀가 각 본인 루트에서 가세한다하여도 마왕과의 사투 때문에 완벽한 탈진 상태라 마나나 신성력 수치가 0이고 탈진 디버프가 걸려 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가세하는 시점이 미묘하게 늦어서 최소 용사 팔다리 중 두 개는 날아가고 나서야 상황을 눈치채고 전투에 돌입하기 때문에 용사는 그냥 딸피로 시작한다.

         

        즉, 이것도 배드 엔딩.

         

        도적 루트로 간다면 당장 용사를 살리긴 살린다.

         

        그런데 강제 이벤트로 도적이 대신 죽고 용사를 절벽으로 밀친다.

         

        혼자 절벽 아래 계곡으로 떠내려간 용사는 랜덤 확률에 의존해 1퍼센트 확률로 산다.

         

        그럼 뭐하나 팔다리가 없는데.

         

        강가에서 정신 차리면 아무것도 못하고 그대로 아사하거나 저체온증으로 죽는다.

         

        하, 이것도 배드 엔딩.

         

        그렇다면 배신의 주축인 방패기사 라인폴드는?

         

        축하한다. 라인폴드 호감작을 한 당신! 게임을 새로하기로 재시작하면 된다.

         

        얘는 호감도 상관없이 배신을 주도한다.

         

        애초에 루시를 사랑하지도 않는 약혼자 설정이기 때문이다.

         

        이 탓에 라인폴드 온리유를 외치던 한 여성 플레이어가 절규하며 모니터를 주먹으로 뚫은 유명한 사건도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혼란에 빠졌다.

         

        DLC라고 내놨는데 1장 인트로도 완료를 못한다.

         

        어느 캐릭터를 써도 결과는 마찬가지.

         

        그럼 지금까지 해온 고생은 뭐지? 이 플레이타임들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거지?

         

        충성팬들이 극성 안티팬으로 돌변하는 건 매우 쉬웠다.

         

        개발사에 트럭을 하도보내서 강강술래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1장 인트로를 클리어한 영상이 온라인에 풀렸다.

         

        정확히는 오리지날판 마왕 토벌 엔딩 달성부터 DLC 1장 인트로 클리어 영상이었다.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그 열쇠는 바로 짐꾼이었다.

         

        변태처럼 짐꾼 픽으로 켠왕을 하던 전생자 이씨는 기어코 호감작까지 하며 한 끗 차이로 마왕 토벌까지 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DLC에서 첫 번째 배드 엔딩을 각오하던 이씨에게 펼쳐진 전개는 지금까지 온라인에서 보아온 내용들과는 사뭇 달랐다.

         

        파티가 배신한다. 용사 팔다리가 잘린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수순.

         

        그러나 라인폴드가 막타를 치고 용사가 완전히 무력화되는 순간,

         

        짐꾼이 여태까지 짐꾼의 낭에 저장했던 모든 아이템을 쏟아 부으며 용사를 구해 같이 절벽으로 떨어지고 결국 지금처럼 숲으로 와 불을 피우는 것으로 1장 인트로가 종료되었다.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흑화했던 팬들은 오리지날 모든 컨텐츠를 정복하지 않은 자신들을 탓하며 회개했다.

         

        수많은 문의와 악수 요청이 전생자 이씨에게 쏟아졌다.

         

        그들은 알았을까?

         

        전생자 이씨는 이미 DLC를 클리어하고 다음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는 걸.

         

        그 이후의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씨는 얼마 뒤 영상을 업로드하지 못하고 모종의 이유로 생을 마감한 것 같았다.

         

        따라서, 배신당한 용사 루시에나 에스텔 곁에 있는 이는 실질적으로 그녀의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사지 잘린 그녀를 살려놓은 데다가 이후로 일어날 일들도 다 알고 있는 고인물 전생자가 있으니 얼마나 든든할까.

         

        그러나 짐꾼 이 린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용사랑 호감도가 아예 없는데.”

         

         

        없는 게 아니라 바닥을 뚫고 내려간 마이너스다.

         

        애초에 게임에서 호감도를 올리려고 움직이는 주체이자 주인공이 루시였다.

         

        하지만 전생한 자신은 짐꾼.

         

        첫 만남부터 꼬여버리고 무시당했으니 호감도 따위 없었다.

         

        그렇다. DLC는 시작부터 호감작한 캐릭터랑 함께 새로운 모험을 하게 되는 건데 루시는 짐꾼에 대한 호감도가 없다.

         

         

        “큰일났네.”

         

         

        난감해하는 어투와는 달리, 린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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