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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엔딩만 기다리던, 지긋지긋한 이세계에서 벗어나서 시원한 캔맥주에 먹태나 뿌실 생각만 하던 이반은

         

         이 시점에 비로소, 자신의 경험이 모두 ‘배경설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 게임의 장르는

         

         마왕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막아내야 하는 전략 시뮬레이션도.

         

         파티를 꾸려 마왕의 폭정을 무너트리는 용사의 정통 RPG도 아닌.

         

         무려, ‘아카데미 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가 이반의 빙의 30년차였다.

         

         

       

       

       

       ep2. 퇴역 군인은 쉬고 싶다.

       

       

         

         

         성 바실리샤 고아원은 왕국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한 고아원이다.

         

         보통 고아원이 부유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입지가 좋아 수도의 행정 영향권 안에 닿아 있던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왕국이 재건을 시작할 때, ‘전쟁 고아들을 위한 첫 번째 고아원’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던가.

         

         고아원장이 사회의 유력자들과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인맥을 다졌다거나 하는 조건들을 포함해 몇몇 기타등등의 사유를 충족한다면 놀랍게도 ‘부유한’ 고아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단체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성 바실리샤 고아원은 저 모든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

         

         

         “음.”

         

         

         이반은 팔뚝에 오스스 솟아오른 소름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군역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은 무시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얘들아 소금 뿌려라.”

         “네에-!”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죽고 벌써 4년이 지났는데도 게임이 끝나질 않는다. 에필로그가 이렇게까지 길면 문제 있는 것 아닌가?

         

         뭔가 조건이 더 있나? 엔딩 조건이 ‘용사가 늙어죽기’ 이딴 건 아니겠지? 그것보단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이때쯤 이반은 어느덧 희미해지는 기억을 애써 뒤적이며, ‘지구로 돌아가면 먹을 것들’ 목록을 열심히 써내려가고 있었다.

         

         전역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 병장의 심정으로, 처절하게.

         

         캔맥주, 먹태, 허니버터칩, 치즈 소스를 찍어 먹는 나초, 참치마요, 김치찌개.

         

         아 빌어먹을, 김치찌개에 밑줄을 세 개쯤 더 그어야 된다. 마지막으로 김치를 먹은 것도 30년이 지났으니까. 김치찜도, 볶은김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보드카랑 와인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술. 기왕이면 동북아권의 술을 마시고 싶었다.

         

         안주로 오이 피클이나 절인 버섯을 처먹는 괴물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이젠 뻥튀기마저 그리워지는 것이다.

         

         

         “후우….”

         

         

         이반은 힘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춰섰다.

         

         아무도 없어야 할 그의 사무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성인의, 그것도 잘 훈련받은 군인의.

         

         방금까지 축 풀려있던 두 눈이 날카롭게 뜨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번엔 소리를 죽이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터벅, 터벅.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이 무방비한 상태임을 강조해서, 원장실 명패가 붙은 나무문 앞까지 일직선으로 걸음을 옮기며.

         

         

         ‘한 명이군.’

         

         

         그의 감각은 이미 동물의 영역에 있었다. 절멸부대에서 수 년을 구르면 누구나 이런 곡예를 부릴 수 있었다.

         

         나무문 너머의 인기척이 움찔 멎었다. 그의 위치를 가늠하며 천천히 허릿춤에 손을 넣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설령 문이 열리자마자 상대가 쇠뇌를 쏘아내더라도 머리 위치를 빗겨갈 수 있도록. 오랜 버릇이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낯선 손님이 밝게 외쳤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반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문을 마저 열자 말끔하게 차려 입은 제복군인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지내셨죠? 아이고, 이거 제가 좀 더 자주 찾아 뵙고 그랬어야 했는데!”

         “정문으로 찾아왔어야지.”

         “에이, 우리가 언젠 그런 식으로 일했나요?”

         

         

         군인은 아하하, 짧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이반의 허릿춤과 소매에 짧게 스쳤다.

         

         

         “용건.”

         “급하기도 해라! 일단 차를 마시고 서로 묵은 이야기를 좀 풀어내고, 그런 시간이 먼저 나와야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품에서 작은 편지지 하나를 꺼냈다.

         그는 새하얀 장갑 낀 손으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고품질 종이와 질 좋은 밀랍 봉인.

         그 위에 꾹, 찍혀 있는 국화꽃 모양 인장.

         

         그걸 확인하자마자 이반은 반사적으로 테이블에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어어, 그거 불경죄에요?”

         “키릴로브나 대령이 왜 나를…?”

         “지금은 궁내장관이셔요. 애초에 선배 퇴역할 때 쯤엔 준장이셨는데?”

         “그래서 왜 나를 찾지? 내 기억이 맞다면 퇴역할 때 분명….”

         “네.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말씀하셨었죠.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떠난 선배가 참 대단해요. 왕녀 전하께서 사흘간 식사도 못 하셨다고요.”

         

         

         그는 낄낄거리며 테이블 끝까지 밀려난 편지를 다시 이반에게 들이 밀었다.

         

         

         “읽어나 보세요. 왕녀 전하의 친서라면 애장품 경매에서도 부르는 게 값인데요.”

         “….”

         

         

         폭발 직전의 마도구 해체작업을 하는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행여나 밀랍 봉인이 뭉개질까 주의하며 살살 뜯어냈다.

         

         톡, 하는 경쾌한 감각과 함께 편지 봉투가 부드럽게 열렸다. 금사가 섞인 편지지가 나타나자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왜 그래요? 전하께서 그냥 안부를 묻는 걸 수도 있잖아요?”

         “…퍽이나.”

         

         

         엘리자베타 키릴로브나 크라실로프. 전선이 한창일 당시의 조금 더 친근한 별명으로는 ‘철혈’의 리자. 이 여자가 평범하게 ‘안부’를 물으려 사절까지 보내올 리가.

         

         그럴 바에 차라리 편지지에 독을 발랐을 여자니까.

         

         설마 여기에 독이 발려 있진 않….

         

         

         “아, 그냥 읽으라고요.”

         

         

         이반은 그 뒤로도 한 차례 더 머뭇거린 뒤에야 편지를 열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타자기로 찍어낸 듯 반듯한, 미려한 필치로 적인 편지가 나타났다.

         

         

         [반카, 잘 지냈나.]

         

         

         벌써 읽기 싫다. 이반은 마른 침을 삼켰다.

         

         

         [간혹 그대의 소식은 듣고 있었네.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더군.

         처음 몇 달 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지금까진 그렇지 않았어.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 잘 지내지 못하고 있거든.]

         

         

         누군지 몰라도 이 여자를 ‘잘 지내지 못하게’ 만든 대가를 치르고 있으리라.

         

         

         [우리가 힘겹게 정원을 가꾸던 때를 기억하나.

         다 함께 다과회라도 하길 바랐는데,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잖나.]

         

         

         마족 거주구를 불태우고 군정청을 세워 ‘평화로워진’ 마족들을 착취하던 시절?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 뒤로 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했어.

         뭐, 좋아. 반카, 그대가 없다 한들 이렇게 열심히 가꿔 놓은 정원이 망가질 리가 없잖아.

         겨울도 다 지나갔으니 눈이 녹으면 꽃 피는 계절이 올 테고.

         그럼 그대도 언젠가, 그대가 만든 정원을 구경이라도 하러 올 지도 모른다고.]

         

         

         이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가요? 궁정으로요? 왜요…?

         

         

         [하지만 계절이 돌아 다시 겨울이 오고 있어, 반카.

         배가 불러 나태해진 시종들이 더 이상 정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잡초와 들짐승이 번성한 정원 사이에선 더 이상 들꽃이 자라지 않으니까.

         

         지난 겨울보다 더 차갑고 고요한 겨울이 오고 있네.

         언젠가 겨우살이가 죽어가는 관목 위를 덮고 있는 게 보이더군.]

         

         

         이제야 그는 이 편지의 목적을 깨달았다.

         이반은 마지막 문단을 읽기 전, 반사적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반카, 내가 가장 신뢰하는 나무꾼.

         바라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세 배로 보답하겠네.

         대가가 부족하다면 우리의 우정으로 대납하겠어.

         그걸로도 셈을 치루지 못한다면, 우리의 추억으로 지불하겠네.

         왕국엔 아직 그대의 헌신이 필요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친애를 담아. 키릴로브나.]

         

         

         길지 않은 편지를 몇 차례 더 주의 깊게 읽고 난 다음에야, 그는 뻑뻑해진 눈가를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톡, 톡, 톡.

         

         손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 있기를 잠시.

         

         

         “대답은요?”

         “상황 먼저.”

         “많이 어려워요. 군정 쪽은 제발 철수하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칭얼거리고, 알렉산드르 세자 전하는 나라를 다섯 등분 내어 팔아 넘기려고 벼르고 계시죠. 우리 ‘대왕’ 전하께선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앉아만 계시고요.”

         

         

         사내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짜잔! 성 얀스크 대학 기억하시죠? 국제 대학이라고 전쟁 중에 설립한 그거요.”

         “그게 왜?”

         “거기에 올해 신입생이랑 교직원들 명단을 미리 받아 봤는데요, 이거 좀 보실래요?”

         

         

         사내는 수첩을 꺼내 이반에게 건네며 말했다.

         

         

         “성녀가 교직에 앉았어요. 신학과 전임 교수로요. 그리고 이건 다 넘기고…. 학생들, 자아. 익숙한 이름들이 주르륵 나오죠?”

         

         

        -용사 막시밀리앙의 딸. 이자벨.

        -기사 질 베르의 아들. 오스칼.

        -마법사 베올그린의 딸. 엘피헤라.

        -광전사 에이나르의 딸. 에시디스.

        -도적 엔리케의 제자. 루시아.

         

         거기에, 올해 취임한 교수로 성녀 파트리시아까지.

         

         그림에 그린 것 같은 ‘용사 파티 맴버’다.

         

         

         “하필이면 우리 위대한 선왕 전하께오서 얀스크 대학의 입학 제한 연령을 철폐해버리셨지 뭐에요? 그냥 입학 시험만 치루면 나이가 어리든, 많든 상관 없이 받아준다 하신 바람에 이 꼴이죠!”

         

         

         성 얀스크 대학은 연합왕국 전체를 둘러보아도 한 손에 꼽히는 명문이며,

         이 빌어먹을 이세계식 ‘명문대’는 입학생의 나이를 보지 않는다.

         

         아주 어리더라도, 또는 아주 많더라도.

         

         나이에 상관 없이 공평하게, 지독하게 어려운 입학 시험과 면접, 추천 보증인과 같은 조건들을 통과하면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마왕을 죽인 후, 용사 파티는 각자의 고향을 향해 떠났다.

         

         누군가는 귀족이 되었고, 누군가는 은거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단 하나.

         

         그 파티의 누구나, 각자의 고향에선 전설적인 영웅으로 통한다는 점.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국제적 갈등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특히 유학 보낸 자식이라면 더더욱.

         

         

         “우리 왕자 전하께서 나라를 팔아보려 하시는데, 아이고 세상에. 마침 수도 한 가운데에 이런 일이 일어났네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이 중에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이 나라는 끝이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교직원에 자리 하날 만들어 뒀어요. 교수나 조교 같은 자리는 아니에요. 정원사에요. 뭐, 대학교에도 가로수는 있잖아요?”

         “….”

         

         

         사내는 수첩의 명단을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들이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까지. 딱 3년만 지켜줘요. 중퇴하면 그것보다 짧을 수도 있고.”

         

         

         이반은 이쯤에서 계산이 끝났다.

         

         키릴로브나 대령… 그러니까 우리 왕녀 전하께선 지금 군적에 남아 있지 않은 요원이 급히 필요한 상황이란 뜻이다.

         

         복무 중인 현역 요원을 쓰면 아무래도 흔적이 남아 왕자파 측이 파악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퇴역 요원들 중 아무나 쓰자니 누가 왕자파에 손을 얹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그런데 짜잔, 딱 적당한 인물이 수도 인근에 하나 박혀있었다.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고, 능력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퇴역 후 정치에 일절 관계 없이 조용히 은거한 주제에 바로 접촉 가능할 정도로 위치가 명확히 드러난 인물.

         

         그 기적 같은 인물이 바로 이반이었다.

         

         조용히 엔딩이나 기다리고, 지구로 건너가서 현대 문명의 아름다운 먹거리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를 마쳤던 이반은, 이 순간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마왕이 죽었는데, 용사파티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며 엔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개판이 난 국제 정세와 흉흉한 국내 정계를 배경으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국제 대학’에 세계의 명사들이 자녀들을 앞다투어 입학 시키는 이 상황….

         

         장장 30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장르 하나가 떠올랐다….

         

         

         “시발.”

         “…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김선우가 문득 깨어났다.

         

         

         “시발. 이거 아카데미 물이었다고?”

         “선배님…?”

         

         

         사내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반을 바라보았다.

         

         현역 시절에도 보기 드물었던 모습이다. 격렬하게 분노를 토해내는 저 모습은.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역 시절 그를 알고 있는 사내로서는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살기에 움찔 몸이 굳고 말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대체 저게 무슨 말인가 하고 고민할 때쯤.

         

         이반은 눈을 꾹 감고, 들끓는 김선우의 분노를 애써 억눌러 다스리며 말했다.

         

         

         “이반 페트로비치…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이젠 집에 좀 가자.’

         

         

         3년.

         

         30년을 기다렸는데 3년이라고 대수로우랴.

         3년만 더 기다리면 엔딩을 볼 수 있겠지.

         

         이것이 아카데미에 정원사가 생긴 과정이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로-씨아에선 보드카의 안주로 절인 버섯과 오이 피클을 먹습니다…

    실로 끔찍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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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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