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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 * *

       

       

       

       어쩌냐. 총알도 살살 맞으면 아프지 않다.

       

       총알이 내 몸에 닿고 군납비리를 넘어 무슨 나무로 만든 탄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없이 바닥을 뒹구니. 오히려 내가 성녀란 사실에 힘을 신빙성을 더할 뿐이다.

       

       

       “마.말도 안 돼.”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제국이 한번 무너질 거라 하셨으니.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국을 망친 죄가 커 어쩔 수 없다 하나, 내게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 하셨다. 하여 나는 그대들의 죄를 사하노라.”

       “죄라니! 차르는 죽어야 옳았소! 당신네는 죽어야 옳아!”

       

       

       사내는 이제 황녀가 살아난 존재든 말든 그저 화만 내기에 바빴다.

       

       내가 묻히기를 바란다는 듯 열성적으로 죄를 열거하듯 외쳐대지만.

       

       내 의지로 땅에 묻히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다.

       

       무엇보다.

       

       

       “온실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란 어린 황태자와 황녀들에게도 죄를 물어야 했는가?”

       “!!”

       

       

       대체 왜 어린 황태자와 황녀들은 죽어야 하는가.

       

       사실 이 속내는 매우 뻔하디뻔했다.

       

       

       “솔직해 져라. 그대들은 두려운 것이었다.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내 형제들이 살아있다면 볼셰비키와 맞서 싸울 충성스러운 제국군의 구심점이 될 터이니. 허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죄를 사하라 하셨다.”

       

       

       말은 바로해야지.

       

       이놈들은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차르가 구심점이 되어 소비에트가 무너질 까봐.

       

       그런 주제에 단죄한다느니 하면서 처형하지 않는가.

       

       

       “말도 안 돼. 다시 한번 그 끔찍한 차르의 옥좌를 준비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제국은 망했어! 노동자의 붉은 깃발이 세워졌어!”

       “하나님께서는 볼셰비키의 미래도 점지하셨으니. 볼셰비키 정권은 권위주의와 폭력으로 얼룩지리라.”

       “거짓말!”

       “만일 거짓이라면 그대들 앞에 서 있는. 총알과 총검에 쑤셔지고, 황산이 부어졌는데도 살아남은 나는 무어란 말인가?”

       

       

       볼셰비키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라도 죽은 놈이 살았으면.

       

       아니, 내가 죽인 놈이 살아나 죄를 사하니 뭐니 하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나라도 뇌정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 잘난 제국을 지키지 않았는가! 차르의 신민들을 보호하지 않았는가!”

       “고인 물은 썩기 마련. 한번은 러시아는 뒤집어지리.”

       “저.정말 저희를, 당신의 부모·형제를 죽인 저희를 용서해주신다는 겁니까?”

       “만일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면 황녀를 강간하고 싶어한 너희의 죄도 물어야 하느니.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조차도 용서하였다.”

       

       

       저들은 니콜라이 일가의 황녀들을 강간하고 싶었다고 야고프에게 징징거렸다고 하지.

       

       질이 나쁜 범죄자라고 하였던가.

       

       

       “소.속지 마라! 그.그래. 죽은 라스푸틴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본인이 말하고도 우습지 아니한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라스푸틴은 참된 성인이 아닌가? 나는 너희의 죄를 사한다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제국은 재에서 다시 태어난다 하셨으니.”

       

       

       타앙!

       

       조금 전까지 나한테 총을 쏘고 오모조목 따지던 자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분명 저자의 이름이 야고프라 했던가.

       

       총살을 주도한 놈의 정수리에 바람구멍이 났다.

       

       아무리 죽어도 모자람이 없는 차르일가라 해도 대놓고 총살을 저지른 놈들이라 그런지. 정말 거침없이 총질을 해대는구나.

       

       역시 빨갱이들은 근본도 없다.

       

       

       “아아. 너희의 죄를 사하노라. 너희는 다시 제국의 신민이 되리라.”

       

       

       어쨌든 지금은 사정이 긴박하다.

       

       분명 이 무렵에는 한참 백군이 활동하기 시작할 때다.

       

       백군이 차르일가를 되찾을까 우려해서 급하게 차르를 처형한 것이니까.

       

       

       “아아, 러시아의 성녀시여.”

       “저희에게 길을 인도하소서.”

       

       

       야고프를 죽인 빨갱이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붙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이제 혁명의 적이 되었으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럼.”

       “지금 전쟁을 치르는 열강으로 가 볼셰비키가 러시아 황제 일가를 처참히 살해했노라고.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라. 최대한 너희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표현 방법으로 로마노프 황가가 처절하게 도륙당했음을 알려라.”

       

       

       아무렴 암만 내가 이런 몸이라고 해도.

       

       형제 부모를 죽인 놈들과 함께 있을 수는 없지.

       

       날 보좌할 한 놈만 내버려두고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다.

       

       계획은 매우 간단하다.

       

       우선 곧 세워질 러시아국으로 간다.

       

       그리고 시베리아 열차를 타든 뭐를 타든 블라디보스토크까지가서 배를 타고 미국이든 영국이든 망명하자.

       

       어차피 백군 주옥되잖아.

       

       망한다고.

       

       그러니까 나라도 살아남아야지.

       

       

       * *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모스크바

       

       아나스타샤 황녀의 생존.

       

       이 소식이 모스크바까지 전달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카테린부르크에 파견되었던 볼셰비키로부터 보고를 받은 블라디미르 레닌은 경악했다.

       

       

       “트로츠키 동지. 그게 무슨 소리요? 야코프 동지가 죽고 아나스타샤 황녀의 시신이 없다?”

       “예. 동지. 처형을 맡은 다른 동지들 역시 행방불명으로.”

       “황녀를 납치해서 어디 끌고 가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아나스타샤 황녀는 유독 미모가 빼어나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하! 죽이기 전에 범해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고작 그것 때문에 야고프 동지를 죽인 것이고?”

       

       

       레닌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이런 미친 작자들이 저지른 실수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른다.

       

       

       “애초에 죄질이 나쁜 자들이었다 합니다.”

       “끄응, 찾으시오. 당장 잡아야 하오! 그자들의 왜곡된 성욕으로 혹시라도 황녀가 반동들에 넘어가기로 하는 날에는!”

       

       

       그렇게 되면 곤란해진다.

       

       안 그래도 백군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는 마당에, 만일에 아나스타샤 황녀가 백군의 손에 넘어가는 날은.

       

       이 내전의 향방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전러시아 제국의 장교들이나 볼셰비키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나. 모두가 그 황녀 아래로 통합되고 로마노프 왕조가 부활해버릴지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전은 장기화할 것이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비에트를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나스타샤 황녀의 아래에 통합된 백군을 후원할 것이 뻔하다.

       

       

       “아직 이들은 예카테린부르크에 있을 것입니다.”

       “대체 아나스타샤 황녀를 데려간 체카 요원들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황녀를 죽여야 우리가 삽니다. 레닌 동지..”

       

       

       그래. 죽여야 한다.

       

       죽여야만 하는데,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급보입니다! 백군이 예카테린 부르크로!”

       “체코 군단이 예카테린부르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의 적 백군이 냄새를 맡고 예카테린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원 역사와 달리 백군은 황녀의 생존 소식을 듣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적백 내전에서 중립을 표방했던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움직임도 수상해졌다.

       

       이 전부가 황녀의 생존 탓에 벌어진 일이다.

       

       

       “대체 소식이 왜 이리 빨리 전해졌다는 말인가?”

       “저, 동지. 그 현지의 체카 요원이 황녀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떠벌리는 사이에 퍼진 모양입니다.”

       “이런 무능한! 차르 일가가 백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죽이려던 게 아닌가! 먹이를 던져주면 어쩌자는 거야!” 

       

       

       어떻게든 잡아야만 한다.

       

       그 황녀만 죽이게 되면 찢겨진 저 백군은 결국 붉은 군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황녀를 놓치게 되면 필시 자기 가족들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모스크바로 진군할 것이 뻔하니까.

       

       

       * * *

       

       

       “시발.”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후로 3일이 지났다.

       

       3일간 이 빨갱이 놈들은 정성스럽게 자기들이 죽인 아나스타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정성스럽게 다시 고쳐서 장례를 치르고 한동안은 직접 나돌아다니지 못했다.

       

       듣자하니, 같은 빨갱이들이 철수할 때까지만 버티자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나는 이 도시에서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이 빌어먹을 빨갱이 놈들은 정말로 개과천선을 했는지, 그도 아니면 나를 그냥 조리돌림을 하고 싶은지 몰라도 나를 말 위에 태우고 일단 내 부모랑 형제자매를 죽인 도시에서 나를 선전하고 다녔다.

       

       그나마 승마를 배워서 말은 잘 타고 있는데.

       

       

       “이분은 전 러시아 제국의 성녀. 아나스타샤 황녀님이시오!”

       

       

       저 빨갱이들은 여기저기 나를 성녀라 홍보하고 다녔다.

       

       그래. 가족들을 죽인 자신들을, 심지어 아나스타샤 본인마저 이미 죽였던 그들을 신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용서했다.

       

       아마 그러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뛰면서 백군으로 전향하기로 한 거겠지.

       

       아무튼.

       

       나는. 아니, 전향한 볼셰비키와 나는 이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Ебать.”

       

       

       이제는 러시아 욕도 익숙하게 하게 되었다.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내가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차르인 니콜라이의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 생각은 했을 거다.

       

       워낙 싸질러댄 것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

       

       문제가 있다면 나다.

       

       니콜라이 2세 부부와 그 자식들은 싹 죽고 아나스타샤 황녀만 살아남았다.

       

       저 정신 나간 개과천선 볼셰비키 놈들은 여기저기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다. 나를 앞으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 반응은 다양했다.

       

       극도로 로마노프 황실을 저주하는 자들과 그도 아니면 동정을 품은 자들, 그도 아니면 대가리가 깨져도 로마노프를 빨겠다. 하는 사람들.

       

       나를 진짜 로마노프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분이 황녀라고?”

       “차르는 어디로 가고 황녀 혼자 달랑 저러고 다니나?”

       “저러고 다니니 황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네.”

       

       

       붉은물이 들랑날랑하는 시기인지 예카테린부르크의 시민들도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정말 예카테린부르크 맞을까?

       

       예카테린부르크 그래.

       

       일단 이 몸의 아버지, 어머니.

       

       그냥 편하게 정의해서 내 부모님은 이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내 부모님을 죽인 미친놈들이 부모를 죽인 도시에서 나를 성녀라 홍보하는 미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

       

       이놈들이 체카라고 했던가.

       

       이게 맞나?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여기가 예카테린부르크 맞나요?”

       

       

       지들이 차르를 죽인 도시에서 나를 홍보할 리가 없으니까.

       

       

       “네.”

       

       

       뭘 해맑게 말하고 자빠졌어.

       

       그래. 확답을 줘서 고맙다.

       

       이 병신들은 자기가 죽인 황제일가의 마지막 생존자를 그 황제가 죽은 도시에서 선전하고 다니는 것에 나는 이놈들이 뇌를 꺼내 혹시 세척이라도 했나 진지하게 의심해야 했다.

       

       그나마.

       

       이 뇌를 세척한 놈들은 차르일가를 죽인 죄를 덮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은지 스스로 가능한 선전은 다 하고 있다.

       

       

       “차르께서는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하셨소! 인민의 재판을 받아 사형당해야 마땅하나, 차르만이 아니라 그 자식들까지 볼셰비키들은 잔인하게 총살하였소! 황후와 황녀는 시간까지 당하셨고, 이분은 그 자리에서 생존한 유일한 황녀시오!”

       “차르는 죽을만했지만, 그 자식들까지?”

       “아무래도 그 볼셰비키도 정상은 아닌 모양인데, 그냥 마음에 안 들면 막무가내로 쏴죽인다는 거 아니야?”

       

       

       이제는 동정의 시선마저 쏟아진다.

       

       하하, 그래. 뭐 살의보다야 저런 시선이 차라리 낫기야 하지. 응.

       

       이래서야 낯부끄러워서 살겠나.

       

       얼른 이 도시라도 떠나야 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체코군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차 세계대전~러시아 내전 당시 체코와 슬로바키아 인들이 결성한 독립군. 장갑열차 오리크를 타고 다니며 시베리아 철도를 점거했다.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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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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