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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궁으로 돌아와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

        “그러니까, 뷔르템부르크 후작가를 중심으로 일련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보자는 건가요?”

        ​

        “그렇지.”

        ​

        마리아는 탁자 위에 펼쳐둔 관계도를 보며 고민했다.

        ​

        그래, 분명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의 일을 욤을 통해 더 캐묻는 건 어려웠다. 어쨌거나 갈등도 결투로 해결했고, 그걸 제외하면 두 가문 사이에 뭔가 척진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여전히 마리아에 대해 신경 쓰는 것 같긴 했지만, 마리아가 스스로 날 선택했다는 걸 확인했으니 적어도 내게 시비를 걸진 않을 테고, 그럼 굳이 욤과 척을 지면서까지 무리하게 답을 얻어낼 이유는 없었다.

        ​

        하지만 청탁은 원래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다. 주는 쪽이 있다면 받는 쪽도 응당 존재하기 마련, 상대가 누구인지도 확인했으니, 반대쪽의 뒤를 캐서 답을 구할 수도 있었다.

        ​

        “욤이 인정한 후작가와 관련된 이들의 목록이야.”

        ​

        “…욤 공자에게 직접 물었다고요?”

        ​

        “응.”

        ​

        “…저 때문에 싸운 사람이랑?”

        ​

        “결투에서 졌으면 어련히 수긍하겠지.”

        ​

        “세상에.”

        ​

        살짝 질린 표정으로 마리아가 날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돌렸지만.

        ​

        뭐, 나도 인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수도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해. 내 지인은 전부 변경이나 지방에 있다고.

        ​

        “아무튼.”

        ​

        어쩐지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주변에 둘러선 시종과 기사들의 시선이 날 책망하는 것 같아 화제를 전환했다.

        ​

        “그런데, 막무가내로 파내봤자 조사 범위만 너무 늘어난단 말이지. 의심가는 것 몇 가지를 추릴 필요가 있어 보여.”

        ​

        “조사의 기본이죠.”

        ​

        “그런데, 내가 이쪽으로는 아는 게 잘 없단 말이지.”

        ​

        지구인으로 산 시간도 적지 않고, 이 세계에서도 20년 넘게 살아왔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 사는 생리가 어떤지 정도는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

        하지만 내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있었으니, 귀족들의 생리에 대한 이해였다.

        ​

        물론 나도 귀족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태생이 귀족일 뿐 생활 환경은 귀족보다는 무인이나 낭인에 가까웠다. 애초에 삼남이라 귀족 가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어?”

        ​

        그래서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 주변에서 이쪽으로 해박하고 스스럼없이 상담할 만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

        마리아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관계도를 노려봤다. 한참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던 그녀가 돌연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짓을 따라 마력이 움직였다.

        ​

        종이 위에 새겨진 글자가 빛이 나더니, 공중에 글자가 떠올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글자는 마리아의 지휘에 따라 움직여 하나의 표를 이뤘다.

        ​

        “당신이 가져온 관계도를 조금 더 깔끔하게 정리해 봤어요.”

        ​

        “이것도 마법이야?”

        ​

        “마방진을 그리는 기술의 응용에 불과해요.”

        ​

        “내가 마법사를 종종 만나긴 했어도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

        “…6위계에 도달한 사람이 얼마 없으니까요.”

        ​

        그녀는 내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본론을 이어 나갔다.

        ​

        “으흠, 하여튼, 이건 제가 나름대로 정리해본 거예요.”

        ​

        그녀는 손가락으로 뷔르템부르크 후작가와 그들과 거래하는 가문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녀가 정리해둔 표에서 가문의 이름은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

        “뭘 기준으로 나눠둔 거야?”

        ​

        “각 가문의 기반이 어디냐를 기준으로 나눠둔 거예요.”

        ​

        그녀는 차례대로 왼쪽부터 글자를 반짝이게 했다.

        ​

        “가장 왼쪽은 지방, 가운데는 수도, 그리고 오른쪽은 양쪽 모두를 신경 쓰는 이들이죠.”

        ​

        “아하.”

        ​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리스트를 살펴봤다. 확실히, 왼쪽과 오른쪽에는 내가 아는 가문들도 꽤 보였다. 초대받거나 의뢰를 받은 곳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지나가며 들려본 곳들은 적잖이 있었다.

        ​

        “그런데, 중앙은 별로 없고 지방에 기반을 둔 이들이나 절충하는 가문이 많은 것 같은데?”

        ​

        “그게 핵심이죠.”

        ​

        마리아는 몇 안 되는 수도 귀족의 목록을 지우고 양 사이드의 글자를 키웠다. 

        ​

        “보통 이런 식으로 청탁을 하는 경우는, 문제가 생겼거나 빠른 일 처리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

        “그렇지.”

        ​

        “그런데, 중앙에 와서 청탁을 벌이는 사람이, 수도의 주요 인사들이 아니라 지방 인사들을 위주로 청탁을 벌이고 있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

        “…그렇네?”

        ​

        나야 선제후나 나와 친한 가문들, 한번 만난 이들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귀족들의 가문명을 잘 모르니 그러려니 했지만, 확실히 설명을 들으니 그럴듯했다.

        ​

        중앙에 로비하는데 막상 그 대상이 지방의 유력가들 위주라면, 그건 분명 이상하다고 의심해볼 만했다.

        ​

        “만약 이게 진실이라면, 의심해볼 건 둘 중 하나예요.”

        ​

        그녀는 각 가문의 이름을 뭉쳐 두 개의 키워드를 만들어냈다.

        ​

        “작위를 승계하려 하거나, 혹은 영지에 문제가 발생했거나.”

        ​

        과연 무엇이 답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

        이제부터 우리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 움직일 거니까.

        ​

        -―

        ​

        덜컹, 덜컹.

        ​

        마리아가 탄 마차가 귀족가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

        “작전은 숙지하고 있죠?”

        ​

        마차 안에서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물론이야.”

        ​

        이번에는, 나는 마리아의 마차에 타지 않고 움직였다. 오랜만에 그녀를 처음 호위할 때처럼 무장을 갖춘 채 이동했다. 신분은 철저하게 감추기 위해 철십자 기사단의 복장을 입었다.

        ​

        “네가 제국백을 붙들고 시간을 끄는 동안 내가 물증을 확보한다. 맞지?”

        ​

        “잘 이해하고 있네요.”

        ​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를 추리고 우리는 곧장 작전을 수립했다.

        ​

        요는 간단했다. 황후 파벌에 속해 있지만, 그렇다고 마리아를 일방적으로 거절하지 못하는 가문을 하나 골라 방문한다.

        ​

        제국백이 선택된 이유는, 제국백은 오로지 황제의 선택을 받아 임명되는 작위였기에 황후에게 줄은 댄다 하더라도 황실 사람들에게 밉보이기 어려운 탓이었다.

        ​

        그렇게 찾아간 제국백의 저택에서 마리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동안, 수행원으로 위장한 내가 잠입해 증거를 확보한다.

        ​

        말로 하면 쉽지만, 막상 실행하자면 또 어려운 일이었다.

        ​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저택의 보안을 뚫고 잠입하는가였다.

        ​

        하지만 또, 내가 이런 건 자신이 있지.

        ​

        인간보다 기척에 수십, 수백 배는 더 민감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 보면 이런 데는 도가 트기 마련이다.

        ​

        “슈페 제국백저의 설계도는 외워뒀죠?”

        ​

        “생각보다 간단하던데. 이런 저택은 구조보다는 보안이 더 문제인데 말이지.”

        ​

        “보안에 마법을 쓰는 건 적어도 성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걱정 마세요. 수도 방위를 위해 팔츠성 안에서 건물에 마법을 거는 건 황궁 외엔 금지된 행위니까. 마법을 쓴다 해도 자물쇠에 마법을 거는 정도일 거예요.”

        ​

        그럼 문제는 없었다. 만약 마법을 동원했다 하면, 알림 마법의 위험성 때문에 손도 대기 어려웠겠지만, 겨우 자물쇠에 마법을 거는 정도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

        결국 마법은 마력으로 작동되는지라, 마력 소모와 지속을 고려해 작은 물체에 거는 마법은 그 출력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겨우 저택 짓는 데 쓰기에는 너무 비싼 돈이 들었기에 배제해도 괜찮았다.

        ​

        “이제 곧 도착하네요. 준비해주세요.”

        ​

        “알았어.”

        ​

        헬멧을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기사단 사이에 끼어들었다.

        ​

        저택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먼저 마리아가 탄 마차가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그 행렬의 중간에서 기다리다가, 수풀이 가득한 정원을 지나는 동안 기사단 사람들을 움직여 사람의 벽을 세우고 몰래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고.’

        ​

        은밀한 이동을 위해 투구와 갑옷을 벗어 땅에 묻었다. 2위계의 마법을 사용해 소량의 흙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작업은 순식간에 끝냈다.

        ​

        곧장 허리춤 위로 솟은 수풀 사이를 움직이며 저택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사용인들의 숙소였다.

        ​

        결국 저택을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이 돌아다니는 복도를 움직여야 했다. 그때는 차라리 당당하게 움직여야 했기에 복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

        남자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숙소에서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

        “씁, 좀 끼는데.”

        ​

        다만, 아쉽게도 내 체격이 이 시대 평균에 비해 좀 큰 탓에 완전 딱 맞는 옷은 없었다. 이래서야 이거 한 번 격하게 움직이면 망가질 것 같은데.

        ​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작전을 위해서는 감수할 수밖에.

        ​

        아무튼, 집사복을 걸쳐 입고 저택 내부를 돌아다녔다.

        ​

        내가 노려야 할 곳은 크게 두 곳이었다.

        ​

        하나는 슈페 제국백의 집무실이고, 하나는 침실이었다. 청탁에 관한 물증이 보관될 만한 곳은 그 둘 중 하나였으니까.

        ​

        어딜 먼저 갈까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

        “우선은, 집무실부터 가보자고.”

        ​

        어떻게 생각해도 보안은 침실보다는 집무실이 조금 덜할 것이 분명했다.

        ​

        소드 익스퍼트의 기감을 살려 모서리와 기둥, 장식 등을 활용해 사람의 기척을 피해 가며 집무실로 향했다.

        ​

        다행히 집무실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여긴 제국백 본인이 없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 곳이니만큼 텅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

        이 근처 꽤 넓은 범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문고리 앞으로 다가갔다.

        ​

        당연하지만, 문은 단단하게 잠겨있었다. 자물쇠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철사를 활용해 금방 문을 열 수 있었다.

        ​

        “서류를 어디에 숨겨놨으려나.”

        ​

        책상 위부터 서랍장까지 전부 열어가며 모든 서류를 일일이 확인했다. 서류는 물론이고 책장에 꽂힌 책들까지 낱낱이 살폈다. 혹시나 비밀공간이 있지 않을까 싶어 뒤졌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

        “이러면, 침실을 확인해봐야겠네.”

        ​

        씁, 이럴 줄 알았으면 침실부터 갈 걸 그랬나.

        ​

        입맛을 다시며 문으로 다가가던 찰나였다.

        ​

        또각, 또각.

        ​

        누군가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털이 곤두섰다. 정리는 미리 해두고 있었기에 위험한 건 없었지만, 이래서야 들킬 수 있었다.

        ​

        숨을 곳을 살폈다. 그런데, 하필 집무실에는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다. 제국백의 취향이 미니멀리즘인지, 가구들이 딱 제 기능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외형만을 유지한 탓에 어디에 숨어도 신체의 일부가 겉으로 드러났다.

        ​

        “흐흥~ 이제 집무실만 청소하면 업무도 끝이네~”

        ​

        아무래도 메이드가 청소를 위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제발 집무실에 들리지 않고 지나가길 기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중, 내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

        -―

        ​

        딸칵.

        ​

        잠긴 문을 열고, 저택의 중견 메이드 안나는 제국백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직 완전히 신뢰를 얻지 못한 신입 메이드들은 하지 못하는 나름 중요한 업무였다.

        ​

        “흐흥~”

        ​

        오늘의 마지막 업무라는 사실에 안나는 콧노래를 흘리며 방에 들어왔다.

        ​

        “응?”

        ​

        그런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분명 모든 것이 평소와 마찬가지지만, 뭔가, 뭔가가 달랐다.

        ​

        방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만 같았다.

        ​

        “…뭐, 기분 탓이겠지.”

        ​

        결국 끝내 그 뭔가가 뭔지를 알 수 없었기에 안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

        콧노래를 흘리며 정리를 시작한 안나의 뒤로, 살짝 열린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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