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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인형이라….”

         

         

        린은 래빈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모른다.

         

        그가 지금처럼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서 노력을 해왔는지.

         

        래빈이 말한 인형이 되고 나서야 용사 파티 짐꾼의 무모한 행동은 사라졌으며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에 파티원들의 아이템들을 넣고 캠핑 준비, 식사 준비, 온갖 허드렛일을 실수없이 해내고 전투에 돌입하면 작은 방패 뒤에 숨어 떨고만 있는 본연의 임무.

         

        스스로가 너무나도 꼴사나웠지만 타고난 그의 육체는 용사 파티와 마족 간의 전투를 이겨내기에는 허약했다.

         

        마기 침식을 버티는 게 고작인 그가 그 꼴사나움을 합리화하고 버텨내기 위해 추구한 방식은 악우에게 인형 같다는 꼬리표가 붙어 버렸다.

         

        그럼에도 린은 차분했다.

         

        아니 차분해야만 했다.

         

        마음이라는 건 참 연약해서 두들기는대로 전부 다 받아들이면 산산히 부서져 끝없는 자괴감과 자기혐오만 남길 터였다.

         

        린은 불현듯 루시에게 생각이 미쳤다.

         

        건방진 행실이 흠이었지만 그래도 루시는 용사의 부담감을 짊어지고 그 책무를 다해왔다.

         

        그 대가는 약혼자와 동료들의 배신.

         

        절망 속에서 자기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당장 곁에 있는 린에게 몸과 마음을 의존하는 게 다였을 것이다.

         

        린이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죽인 것처럼 루시도 살아남기 위해 린에 대한 의존을 선택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루시에게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왜 루시가 린에게 살갑게 굴고 집착하는 지를.

         

        그동안 무조건적으로 그녀에게 거리를 둔 것이 미안했다.

         

        그렇다면 루시가 나을 때까지는 자신이 받아줘야하지 않을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린은 조심스럽기만 하던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품 속에서 제일 부드러운 천을 꺼내 루시에게 건넸다.

         

        하지만 조용히 눈물을 떨구고 있던 루시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린은 직접 루시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린?”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돼.”

         

        “울고 싶지 않아.”

         

         

        도적 앞이라 부끄러운가보다.

         

        섬세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준 뒤 린은 장난스럽게 루시의 코를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안심하라는듯이 그가 미소를 짓는다.

         

        수줍어진 루시가 얼굴을 붉혔다.

         

        그걸 지켜보는 래빈은 복장이 터져 얼굴을 붉혔다.

         

         

        “옛 인연을 앞에 놓고 뭐하는 거야? 너희 둘이 사겨?”

         

        “유일한 동료거든. 최고의 동료이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챙겨야지.”

         

         

        루시는 린의 말에 시무룩해야할 지 기뻐해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표현은 똑바로 하자고. 옛 인연인 건 맞지만 너랑 매일 다투던 기억만 있는데?”

         

        “그야…! 네가 아르실 밑에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 고릴라 같은 년 편이나 맨날 들고! 난 언제나 너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했었어! 우리 패거리로!”

         

        “와, 왜곡이 심하다. 서로 칼 겨누다가 막판 가서 권유 두 번인가 한 게 전부면서.”

         

        “아… 아니야…!”

         

        “그것도 내가 샌드위치 줬을 때잖아.”

         

        “윽…! 그… 샌드위치 맛있었지….”

         

         

        먼저 꼬리를 내린 건 래빈이었다.

         

        린은 이겼다는 생각에 흡족해 했지만 루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두 사람만의 옛날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루시가 알지 못하는 린의 옛날 모습을 알던 이가 자기 앞에서 보란듯이 으스대고 있었다.

         

        그녀가 기 죽이기 전의 린을 아는 사람이 그와 시답잖은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 시답잖은 잡담이 루시는 미치도록 부러웠다.

         

        하지만 이 잡담에 친밀감은 그리 담겨있지 않다는 걸 루시는 알고 있을까.

         

         

        “끝까지 왜 이렇게 된 건지는 말 안해주겠다는 거로군, 이씨?”

         

        “너무 긴 이야기라서 말야. 가장 최근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가장 최근이라면?”

         

         

        마지막까지 떠보는 래빈에게 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는 장난만 치지만 그 아래에서 상대를 면밀히 살피고 정보를 캐내는 게 래빈의 주특기였다.

         

        잘난 척 심한 리나시엔도 래빈 앞에서는 긴장하며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래빈, 너는 마왕 토벌 이후의 용사 파티 일을 모르지.”

         

        “반대로 마왕 토벌 이후 속세의 일은 내가 더 잘 알지.”

         

        “그럼 서로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거네?”

         

         

        전생자 이씨 시절 기억대로만 에피소드가 진행된다면 이런 별 것 아닌 협상 따위 할 이유가 없었다.

         

        몇 번이나 강조되었던 그놈의 디테일.

         

        특히나 도적 길드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정보망을 가진 제국이 루시와 린에 대해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어림짐작이라도 알아놓아야 했다.

         

         

        “도적 길드는 정보상이기도 하잖아? 서로 정보 거래를 해보자고.”

         

        “흐음~, 좋아 대신 너부터야 이씨.”

         

        “그건 안되지. 넌 지금 용사의 위치라는 최고급 정보를 알게 되었잖아.”

         

        “그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고 싶지 않기는, 최우선 확보 대상 중 하나면서.

         

        발터크루아는 2장 주요 거점이다.

         

        이미 여기서 메인 에피소드를 진행을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린은 전생자 이씨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할 건 없어.”

         

         

        당장 후달리는 건 래빈이었기에 그녀부터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용사 루시에나 에스텔은 마왕을 상대로 동귀어진 했고, 남은 용사 파티가 마왕의 외뿔을 신성한 관에 담아와서 토벌 완료를 선언했어.”

         

        “하.”

         

         

        가당치도 않은 거짓말에 루시가 코웃음을 쳤다.

         

        린에게 집중하느라 잊고 있던 복수심이 다시 치솟았다.

         

        그러나 루시는 그녀답지 않게 그것을 꾸욱 눌렀다.

         

        여신에게 린을 살려달라고 빌면서 버리겠다고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복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복수 한정.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녀 앞에 나타난다면 그 자리에서 도륙낼 계획이었다.

         

        지금은 린의 마음을 얻는 게 더 급선무라 잠자코 있을뿐.

         

        그리고 라인폴드는 예외다.

         

        기회가 닿으면 직접 쳐죽일 생각이었다.

         

         

        “그간의 공적을 계산하고 나눠먹기 위한 대회의가 열렸는데 이상하게 엘프에서 사절단이 오지 않았단 말이지? 계속 지체되고만 있었어. 교국은 바로 왔는데 말이야.”

         

         

        교국이야 자신들의 성물인 신성한 관을 확보하기 위해서 바로 오는 게 맞았다.

         

        더불어 그 안에 담긴 마왕의 외뿔을 이용해 교세를 더 확장하기 위한 욕심도 있었다.

         

         

        “대회의는 저어어어말 따분했어. 마왕 토벌에 한 것도 없는 녀석들끼리 자기는 그래도 뭘 했네, 무엇을 지원했네 하면서 숟가락 얹으려고 난리를 쳤거든. 제국과 교국은 어떤 공훈을 세웠는지, 또 그 안에서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하루를 꼬박 세워도 결론이 안나더라. 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진절머리 나네. 빌어먹을 귀족들. 잠깐 물 좀 마실게.”

         

         

        래빈은 침대 머리맡에 있던 물주전자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서 봉화가 올라오더라? 시작점은 에팔테르가. 마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었어.”

         

         

        에팔테르가 봉화로 인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마왕을 토벌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마족이 발견되었으니 인류는 또다시 공포와 불안에 떨며 용사 파티를 다그쳤고 그들은 재빠르게 티그리아의 마법을 사용해 에팔테르가로 이동했다.

         

         

        “이동한 건 마법사, 궁수, 성녀 3명이었어.”

         

        “방패기사는?”

         

        “우리 잘나신 황태녀님이랑 같이 같잖은 연극하다가 망신 톡톡히 당했는데도 뻐팅기면서 안가더라고.”

         

        “연극?”

         

         

        래빈이 루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 저년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저 풀어진 근육을 사후경직시킬 수 있지 않을까.

         

        루시는 해볼만한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빛을 잃은 성검이랑 신성한 관을 들고와서 마왕이 죽었지만 그 마기로 동귀어진한 용사가 타락해서 마족이 존재하고 있는 거라는 누명을 씌우려고 했어.”

         

        “누가 타락을 해!”

         

         

        참지 못하고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재빨리 붙잡은 린이 그녀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었다.

         

         

        “화낼 가치도 없어 루시.”

         

        “그렇지만… 린… 린은 알잖아. 정작 나는…!”

         

        “그럼 알지. 우리는 알지. 곧 머지않은 날, 세상한테 진실을 알려주자.”

         

        “린이랑 같이 할 거야.”

         

        “물론이지. 당장은 준비가 필요하니까 조금만 참자?”

         

        “응….”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루시는 속삭였다.

         

         

        “난 린만 있으면 되니까.”

         

         

        저 용사의 포니테일을 마루바닥에 못 박아놓으면 이씨한테 치대지 않고 똑바로 고개 들고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래빈이 새로운 실험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갑자기 성검이 다시 붉은 금빛을 내뿜으면서 황궁 천장을 뚫고 날아가버렸대. 다들 어버버하고 있는데 마법사 티그리아가 조용히 선언했지. 용사가 돌아왔다고.”

         

         

        그건 린이 까먹고 있던 사실이었다.

         

        루시가 몸을 회복하면 당연히 주인의 부활을 감지한 성검이 저절로 날아온다.

         

        즉, 루시는 지금 성검 흐노니를 가지고 있는 상태.

         

        …이어야 하는데 왜 없지?

         

        그건 인벤토리 창에도 넣지 못하는 특수 귀속 아이템이었다.

         

        의아해하는 눈빛에 루시는 그와 동행한 이래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들의 기묘한 기류를 내버려두고 래빈은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그렇게 용사 파티 3명이 에팔테르가에 갔고, 결론은 마족의 시체를 찾았다. 이상하지? 퇴치했다가 아니고 찾았다야. 이미 누군가가 그 마족을 죽였다는 거지.”

         

         

        이때 래빈은 루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족을 죽인 게 너지? 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진실을 알고 있는 린은 굳이 알려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리고 현재, 느려터진 귀쟁이들 사절단이 제도에 도착해서 궁수는 돌아왔고, 성녀랑 마법사가 에팔테르가에서 마족의 흔적이 더 있는지 조사 중이야. 이게 끝.”

         

        “세간의 평은 어때?”

         

        “마족이 더 있을 거라는 불안에 빠져있지. 성검이 하늘로 솟구치는 걸 본 제국민들도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용사의 행방을 찾아 데려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

         

         

        평민들일 것이다.

         

        루시는 평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얄궂게도 귀족들 위주로 만들어진 여론이야.”

         

         

        예측이 틀린 린은 머쓱했다.

         

         

        “마족의 위협이 다시 피부로 느껴지니 유일한 대항마를 찾아서 지켜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거지. 그런데 왠지 모르게 황태녀랑 방패기사는 밍기적 거리고만 있단 말이지?”

         

         

        이야기를 마친 래빈은 기지개를 폈다.

         

        작긴 하지만 봉긋한 가슴이 두드러졌다.

         

         

        “우리 차례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린은 솔직하게 다 말하기로 했다.

         

        도적은, 린과 루시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격전 끝에 루시가 성검으로 마왕을 베었지.”

         

         

        담담하고 높낮이 없는 어조가 얼마 전에 있었던 역사를 읊는다.

         

        파티원들이 용사의 팔다리를 하나씩 짓이겨 뽑아낸 것부터 그가 루시를 구해 절벽으로 떨어지고, 몇날며칠을 걷고걸어 에팔테르가로 당도하고 천신만고 끝에 루시를 회복시킨 역사를.

         

        이야기를 듣는 래빈의 눈은 갈수록 커져갔다.

         

         

        “뭐…?”

         

         

        처음에 래빈은 부정했다.

         

         

        “그럴리가 없어. 아르실이야! 자기 사람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는 게 우리 구정물골목 출신이라고!”

         

         

        린은 루시의 소매를 걷어부쳤다.

         

        양팔에 드러난 하얗게 튼살, 그 접합부를 보고서야 래빈은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였다.

         

         

        “백번천번 양보해서… 널 못알아본 건 그렇다고 쳐.”

         

         

        린도 동의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모르는 쪽을 바보 취급하겠지만 원래부터 찾고 알아내는 행위는 숨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었다.

         

         

        “그런데 생사를 같이한 동료의 팔을 분질러?”

         

         

        머리를 움켜잡고 주저앉아 허망하게 한탄했다.

         

         

        “방패기사가 약속한 그 대가라는 게 뭔데?”

         

         

        두피를 쥐어뜯고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던 래빈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이쪽도 쉽지 않구나.

         

        린의 몸은 하나인데 어째 이 세상 모든 사건의 실타래들이 자신을 휘감고 있는 듯 했다.

         

        과연 아르실은 방패기사와 황태녀에게 어떤 대가를 약속 받았는가.

         

        래빈과 린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래빈은 꼭 확인해야만 했다.

         

         

        “이씨, 설마….”

         

         

        아르실, 이 멍청한 성녀가 대체 어떤 추악한 죄를 저질렀는지 그 깊이를 알려면 꼭 확인해야만 했다.

         

         

        “아르실은 구정물골목이 사라진 걸 아예 모르고 있어?”

         

         

        래빈은 그래도 성녀라는 위치에 있으니 짐작 정도는 하고 있을 거라 근거없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그러기라도 했길 바란, 눈가리고 아웅 식의 염원이었다.

         

        린이나 자신을 만나면 짐작이 확신이 되니까 짐꾼이 정체를 숨긴 거라고 생각했었다.

         

         

        “너 그래서 끝까지 가면 쓰고 정체를 숨긴 거였어?”

         

         

        린은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긍정이 되는 법.

         

         

        “아르시이이일-!!!!!!!”

         

         

        서로의 목에 주먹과 단검을 날리면서도 인정하고 아꼈던, 지난날의 라이벌이 저지른 터무니없는 집착과 죄에 래빈은 노성을 터뜨렸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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