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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덜컹, 덜컹.

       

       흔들리는 열차의 일등칸 객실. 창 밖을 보면 지나가는 풍경은 온통 논밭이었다. 가만히 앉아있기도 지루하던 나는, 마침 객실 밖의 복도에서 판매대를 끌며 지나가던 승무원을 불러세웠다.

       

       “뭘 드릴까요?”

       “아! 저기, 신문 한 장만 주세요. 아무거나요.”

       

       그렇게 해서 받은 1939년 4월 8일자 조간신문을 펼쳐들었지만, 신문도 재미없는 것은 마찬가지. 우선 1면에 나와있는 기사부터가,

       

       <이태리 육해공군, 알바니아 진격 개시……>

       

       하는 전쟁 이야기였다. 이거 아마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얘기겠지. 유럽 쪽도 차근차근 2차 세계대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음 기사를 읽었다.

       

       <산서(山西) 남부에서 장렬한 백병전>

       <… 산서 남부 강현 일대의 지나군 잔적소탕을 개시한 아군 부대는 마력포와 박격포 수문을 가진 적과 장렬한 백병전을 연출하고 … 적(敵)은 시체 백이십오를 내엇다. …>

       

       그 다음 이어진 것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일전쟁의 기사였다. 아직 조선에서 전쟁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같은 분위기였지만, 지금도 중일전쟁은 한창 진행중이었던 것이다.

       

       ‘……후우.’

       

       게이트도 있고 몬스터도 있고 헌터도 있는 세상이건만, 전쟁 같은 큰 역사적 흐름은 바뀌지 않고 일어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1941년 12월부터 시작되는 태평양 전쟁도 틀림없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는 건데,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하는 시기와 아슬아슬하게 겹친다. 1941년 12월이라면 내가 3학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식이 이루어지기 전의 겨울방학 동안이겠지. 

       

       그리고 나는 아버지 백노평의 강압에 의해, 일본군 장교로 강제 입대당하게 되어있는 운명.

       

       ‘이건 진짜 미국뿐이다.’

       

       하지만, 졸업장을 받자마자 미국으로 뜨려면 준비해둬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우선, 전쟁이 발발된 직후이기에 통상적인 배편으로는 도항이 어려울 것이니 밀항을 해야 할텐데, 그러자면 미리미리 방법도 알아두어야 하고, 일반 배편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어떻게든 차곡차곡 자금을 모아야 하는데, 문제는 학생 신분으로는 돈을 모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선 생활비부터도 쥐꼬리만큼 받고 있고…….’

       

       학생 신분으로서는 그럭저럭 충분하긴 하지만, 남작 집안의 자식이라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생활비. 그러니 백철연은 다 쓰러져가는 하숙집에 묵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본가에 내려가는 첫 번째 목적은 물론 내가 일본군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러 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생활비를 좀 더 올려달라고 요구하러 가는 목적도 있었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생활비를 올려보자.’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신문을 접어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4인 객실 반대편에 마주 앉은 다까히로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다까히로.

       

       ‘무슨 꿍꿍이일까.’

       

       경성역에서 마주친 다까히로는 나에게 1등칸 객실 표를 제공하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도게자」까지 하며 사과를 올렸다.

       

       ‘일단 사과는 받아주긴 했는데……’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아가씨의 명에 따라 시중을 들어야 한다며 고향집 가는 길까지 따라오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말로는 내 시중을 든다는 명분이었지만, 날 감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빤하게 들었다.

       

       『어이. 다까히로.』

       

       나는 다까히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다까히로는 눈을 뜨며,

       

       『뭐……입니까. 도련님.』

       

       하고 대답한다. ……저 놈 입에서 나오는 「와까단나(도련님)」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젓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악수나 한 번 하지.』

       『……?』

       『네가 도게자까지 했는데, 내가 별다른 말을 안 했잖아? 이제 악수 하고 서로 화해하자는 얘기야. 자.』

       

       다까히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내 손을 맞잡았다. 뭐, 어찌되었든 겉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굳이 악수를 청한 것은 겸사겸사 녀석의 상태창도 한번쯤 봐 두기 위해서였다.

       

        [유저 정보]

        성명 高広 康治 (다까히로 고지)

        연령 만 24세

        마력 B급

        각성 강기/A급

           신속/B급

        상태 보통

        [▷메인 화면]

       

       ‘마력은 B급, 각성은 신속과 강기…….’

       

       첫 날에 기싸움을 벌이며 추측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 정도라면, 역시 시마즈 구미같은 곳의 간부급에 어울리는 높은 수치였다.

       

       ‘그때 얘랑 붙었으면, 내가 아주 개발렸겠는데……’

       

       하지만 지금 어디까지나, 놈의 역할은 내 적수가 아닌 꼬붕 역할이었다. 그것도, 높으신 분인 렌까가 명령한 만큼, 나에게 거역할 수 없는 꼬붕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요긴하게 써먹어 볼까.’

       

       

       

       ***

       

       

       

       오후 다섯 시에 경성역에서 출발해 용산역, 영등포역, 안양역을 지나 수원역에 도착한 것은 대략 두 시간이 채 안 된, 저녁 6시 50분 무렵이었다.

       

       단층 한옥 양식의 수원역 주변으로는 나름 포장도로에, 2-3층 되는 석조 건물들도 꽤 있고, 버스며 자동차도 몇 대 굴러다니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많지는 않았다.

       

       그 외로 보이는 것은, 사방이 논밭—.

       

       21세기에서 수원에서도 몇 년 살아본 적이 있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감회가 새로웠다.

       

       ‘나중엔 여기에 엄청 커다란 백화점이 들어서는데 말이지. 저 쪽은 로데오 거리가 될테고…….’

       

       잠시 그런 상념에 젖어있자 다까히로가 물어왔다.

       

       『본가가 이 근방입니까?』

       

       흠. 어디보자……. 호적 등본상에 나와있는 주소는 수원읍내 안이었으니, 분명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는 할 것이었다. 그렇게 대답해 주자, 다까히로가 말했다.

       

       『그럼 구루마보다는 리끼샤(인력거)를 타죠. 어이! 요보상!』

       

       그 말에, 역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꾼 한 명이 인력거를 끌고 다가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하는 말에 호적 등본에 적혀 있던 주소를 읊어주자,

       

       “아아! 혹시 남작 대감님 댁 말씀이십니까?  성안에 있는……”

       

       하고 바로 알아듣는다. 

       

       “어, 네. 거기요.”

       “알다마다요! 뫼시겠습니다!”

       

       남작이면 남작이고 대감이면 대감이지, 남작 대감은 또 뭐란 말인가? 하여튼, 인력거는 수원 화성의 남문을 지나서,  슬슬 어둑어둑해져서 하나둘 가로등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가지를 지나쳐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인력거가 멈춘 곳은 길고 긴 돌담을 낀, 으리으리한 궁궐같은 한옥.

       

       나는 인력거에서 내려 삯을 지불하고, 다까히로와 함께 대문을 향했다. 커다란 솟을대문 옆으로 열려있는 쪽문으로 들어서자, 늙수그레한 아저씨 한 명이 나를 맞는다.

       

       “아이고! 작은도련님 오셨습니까! 대감 마님께 알리겠습니다요. ……대감 마님! 작은도련님 오셨습니다!”

       

       하고 마당 건너편의 안채를 향해 외친다. 행랑아범인지 집사인지, 뭐 그런 역할의 노인인 듯 했다.

       

       조선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닌, 조잡하게 꾸며진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 앞으로 다가가자, 전등불이 켜져있고 두런두런 남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방 하나가 있었다. 아마 여기가 안방이리라.

       

       『여기서 기다려.』

       

       안방 앞에 선 나는 구두를 벗으며 다까히로에게 말했다.

       

       『……여기서 말입니까?』

       『그래. 여기 서서 기침도 내고, 인기척도 내고 그러면서 서 있어.』

       『……?』

       

       그렇게 다까히로를 세워두고 혼자 안방으로 들어서자 먼저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저거, 저 놈이 이제사 오는구나! 너는 정신머리가 있는게냐, 없는게냐? 네 애비가 앓는다는데 째깍째깍 오지를 않고…… 콜록! 콜록!”

       

       하는, 역정을 내는 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안방 상석의 보료(앉는 자리에 깔아두는 두툼한 이부자리)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노인네였다. 

       

       ‘저 사람인가.’

       

       저 찌그러진 노인네가 백노평 남작, 그러니까 나 백철연의 아버지 되는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 진정하시지요. 철연이도 학교가 끝나야지만 올 것이 아닙니까. 여기, 물 좀 드시고요……”

       

       하며, 그 곁에 앉아 노인네를 진정시키는 40대 중후반의 남자. 저 중년 남자가 나의 이복형이자 적자(嫡子)인 백철우일 것이다.

       

       “어이구 작은아버지, 먼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수. 자, 얼른 앉으시우.”

       

       라고 나에게 말하며, 어쩐지 뺀질거리는 인상의 20대 중반. 저 녀석이 백철우의 아들이자 내 조카 되는 백남수이리라.

        

       나는 안방 한켠에 앉아, 아버지·이복형·조카의 3대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완전 개족보네, 시발.’

       

       이복형이란 사람은 완전 내 아빠뻘이고, 조카라는 놈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 이게 다, 모든 것의 원흉인 백노평이 뒤늦게 첩을 들여서 낳은 서자가 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니까 집안에서 무시당하지.’

       

       조카보다도 나이가 어린 서자인데다가, 내 편을 들어줄 어머니도 일찍이 죽고 없다. 그러니 백철연은 집안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가족들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렇게 안 될거다.’

       

       『크흠, 흠!』

       

       타이밍 좋게, 문 밖에서 어렴풋이 다까히로의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지시해둔 대로였다. 그 소리를 들은 중년의 이복형, 백철우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철연아. 문 밖에 저 분은 누구시냐? 너랑 같이 온 것 같은데……”

       “아. 이거, 소개가 늦었네요.”

       

       나는 짐짓 고압적인 목소리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오-이! 다까히로! 곳찌 하이레(들어와)!』

       

       그러자 문 밖에서 대기중이던 다까히로가 신을 벗고 안방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백철우와  백남수는 흠칫 놀란다. 그들이 보고 놀란 것은 다름아닌, 다까히로의 양복 깃에 달려있는, 번쩍번쩍 빛나는 시마즈 구미의 뱃지.

       

       나는 다까히로에게 명령했다.

       

       『어른들께 자기소개하고 인사 올려.』

       『…….』

       

       다까히로는 잠시 나를 쏘아보더니, 결국 마지못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익히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시마즈 구미 경성분조의 부분조장으로 있는 다까히로 고지입니다. 좌중의 여러분들께 인사 올립니다.』

       

       “허어…….”

       “이거, 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철우·백남수 부자는 어쩐지 이 상황이 민망한지, 어정쩡하게 자세를 고쳐앉으며 탄식을 흘렸다. 그러더니 백철우는 다시 나를 보고 조심스레 묻는다.

       

       “아니, 철연아. 저런 분이 어찌 이런 곳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뭐, 제가 이래저래 심부름 시키는 녀석입니다.”

       “……!”

       

       내 말에 백철우 부자는 적잖이 놀란다. 시마즈 구미는 조선에서 어느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엽사조합이었다. 그런 곳의 고위급 간부가, 학교에 들어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학생의 꼬붕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터.

       

       ‘좋아.’

       

       이것으로 방 안의 기세는 휘어잡았다. 이 기세를 몰아서, 나는 노인네 백노평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붙였다.

       

       “병중에 죄송합니다만, 아버지. 제가 학교를 다니며 보니, 일본군이 아니라 엽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마즈 구미의 위세에 쫄아붙은 백철우 부자와는 달리,

       

       “무어? 엽사? 너 그게 무슨 말이니?”

       

       노인네는 시마즈 구미의 위세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는지, 보료에 누운 채 얼굴만 벌개져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내기 시작했다.

       

       “네가 집안의 이름을 높일 수단은 엽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군대의 장수가 되고 공을 세워서, 으응! 우리 집안이 받은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 뿐이다! 왜 여태 그걸 모르니? 언제쯤 철이 들 셈이냐?”

       

       “그런데 무어, 엽사? 옛날 죄선 때부텀 착요꾼이니 엽꾼이니…… 그게 다아 제 잇속만 챙기는 놈들이 아니더냐! 그런 족속을 어찌 나라의 군인이 되는 것에 비하겠느냐! 헌데 너는 어째 그런 족속이 되어서 집안에 먹칠을 하려고 하니? 으응? 듣기 싫구나!”

       

       “내가 구태여 돈 들여서 너를 그 핵교를 보내는지 아직도 모르느냐? 장차 엽꾼 나부랭이가 될 셈이라면 핵교일랑 때려 치우거라! 차라리 내 너를 그냥 일개 병졸로 입대시키고 말 터이니……”

       

       이렇게 된 거였구나.

       

       백철연이 갑자기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이 되기 싫다는 뜻을 그 전부터 여러 번 비췄지만 소용이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겠지.

       

       그리고 일본군이 되기 싫다는 그런 백철연의 태도 때문에, 노인네는 ‘집안을 위하지 않는’ 백철연을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백철연을 일본군 장교로 입대시키려고 했고, 백철연이 이를 거부한다면 장교도 아닌 일반병으로 입대시킬 셈이었던 것이다.

       

       ‘시발…… 좃 같은 노인네…….’

       

       그래서, 백철연에게 있어서 선택지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엽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각성자 특수 전형으로 일본군 장교가 되는 것. 그도 아니면, 그냥 조선인 지원병으로 일반 일본군 병사가 되는 것. 이러니 백철연이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자.’

       

       달리 생각하면, 어쨌든 노인네 덕분에 지금 내가 학교를 다닐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졸업까지는 아직은 3년이나 남았다. 3년 뒤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될 터.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당장은 노인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졸업하기로 결심한 나였다. 졸업할 때까지 노인네로부터 학비를 받아가며 학교를 다니려면, 어찌되었든 지금은 노인네에게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 지금 당장은 노인네한테 반대할 게 아니라, 내가 일본군에 들어가겠다는 확신을 주는 게 나아.’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노인네에게 다시 말을 붙이려는데,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대감 어르신! 춘월이가 왔습니다요!”

       

       행랑아범인지 집사인지가 외치는 소리였다. 춘월이는 또 누구지? 호적에는 없던 이름인데?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노인네는, 

       

       “춘월이가?”

       

       하며 갑자기 안색이 펴지더니, 좌중에 앉은 자식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너희들은 이만 다들 물러가 보거라!”

       

       하고 꾸짖으며 물리는 것이다. 

       

       별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마당에 들어서니, 대문으로 한 여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는데, 칼같이 자른 단발에 짙은 눈화장을 하고, 반들거리는 옥색 코트를 입고 있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향하던 여자는, 안방 앞에 구두를 신으며 서 있던 나와 마주치고는,

       

       “어머. 작은 도련님이시구나. 반가와요.”

       

       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저건 또 뭐 하는 여자야?’

       

       내가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있자, 이복형 백철우가 다가와 넌지시 말한다.

       

       “그러고보니 넌 못봤겠구나. 너 서울 올라가고나서부터, 아버지 수발 들어주고 있는 계집애다. 뭐…… 춘월이도 왔고 아버지도 이제 별 말 안하실테니 너도 이만 네 방으로 들어가 자거라.” 

       

       수발 들어주는 계집애라고……. 그렇게 말한 백철우와 그 아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은 안 들어가십니까?』

       『잠깐.』

       

       다까히로가 물었지만, 나는 한동안 안방 앞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까 그 사내애가 작은도련님인가봐요?”

       “으응, 춘월아. 고놈이…… 옳지, 거기 좀 주물러 보아라. 옳지! 에구, 좋다…….”

       “여기요. 어째 시원하세요? ……그래 작은도련님이 말썽이시라고요? 제가 봤을 땐 착해 보이던데.”

       “고놈, 그 철없는 것이…… 콜록! 춘월이 너는 계집이라 모르겠지만, 집안에 장정 하나는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야 집안의 위신이 서는 법이다! 그런데 고놈은 제 하나만 생각하고, 제 목숨만 생각하고 반기를 들지않니…… 콜록, 콜록!” 

       “아이고 영감님. 물 좀 드세요.”

       

       기생인지 애첩인지, 나긋나긋하게 노인네의 말상대를 해주며, 팔다리도 주물러주며 수발을 드는 모양이었다.

       

       ‘노인네가 곧 죽을 것처럼 골골대면서도 여자는 밝히는구나.’

       

       아무튼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경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노인네에게 ‘나는 일본군이 될래요!’ 하고 속여넘겨야 하는데, 그럴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애첩이랑 단둘이 있는데 내가 들어가면 역정을 낼 것이고……’

       

       그 때, 방 안에서 카메라 플래시 터지듯 느껴지는 마력.

       

       ‘응?’

       

       일반인들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마력 감응 각성이 있기에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마력 패턴이었다. 이것은 분명, 얼마 전에……

       

       ‘그 조선인 범죄자!’

       

       끽다점에서 마취독 안개를 분출했던 그 조선인 각성자와 매우 흡사한 질감의 마력 패턴이었다. 그러니까, 유독성 물질을 방출하는 계열의 마력 패턴.

       

       ‘저 년이?’

       

       나는 조심스레 문가로 다가가, 문풍지 구석에 조그맣게 구멍을 뚫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 자욱한 것은 분명 독성 물질이었다. 독 저항 패시브인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치만, 작은도련님이 군인이 되면 지나로 끌려갈 텐데, 영감님은 그게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지금 지나는 난리도 아니라는데.”

       “목심이 아까워서 전쟁을 못한대니? 이 공명정대한 전쟁에 나서는 것이 광영인데 목심이 중하더냐? 으응…… 콜록! 콜록!”

       “에이, 공명정대는 무슨요. 자, 이거 드세요.”

       “춘월이 너 그런 말 말아라! 으응……”

       “아이고, 잘 드신다. 자아……”

       

       그렇게, 노인네의 팔다리도 주물러주고 말상대를 해 주면서, 은근슬쩍 독성 마력을 주입하고 독성이 섞인 물을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집구석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거야?’

       

       그렇잖아도 어지러운 집안인데, 거기다가 도둑고양이같은 계집까지 붙었다. 그것도, 자칫하면 노인네를 죽일 수도 있는 계집이.

       

       ‘노인네가 죽으면 안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노인네가 죽으면 당장 학비부터가 끊기는 것이다. 나를 경계하던 이복형 백철우가 내 학비를 내 줄지도 의문이었고.

       

       ‘하지만, 지금 당장 방 안에 들어가기엔……!’

       

       내가 방 안에 들어가 저 춘월이라는 애첩을 저지한다면, 그녀에게 홀랑 취해있는 노인네가 역정을 낼 것이다. 노인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게다가, 방 안에 들어가도 뭘 어쩐단 말인가? 어디까지나 마력에 의한 독성이었으니 저 춘월이라는 계집이 마력만 거둬들이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증거따윈 없었다.

       

       또 그녀가 독을 쓰고 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내 감에 의한 것 뿐. 정확히 무슨 능력인지는 신체 접촉을 통해 상태창을 봐야 확실해지는데, 외간 여자의 손을 함부로 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청국도 아라사도 다아 빨갱이 한통속 아니냐? 그 불한당들이 시시탐탐 이 죄선을 넘보고 있는데, 시방천지 뻘갱이 세상이 되려는 것을 일본 병정들이 나서서 막아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응?”

       “그거야 그렇지요. 그런데 듣자하니 지나 남경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던데…….”

       

       나는 안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헛헛허…… 콜록! 콜록! 춘월이 네가 아직 순진해서 뭘 모르는게야! 뻘갱이를 잡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게지! 병이 깊으면 독한 약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안 하면, 어디 제놈들이 말을 듣나?”

       “하지만 지나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요. 오히려 일본 군대가 좀 심하면 심했지…….”

       

       ‘각이다.’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나는, 저 말을 듣자마자 번개같이 구둣발로 안방에 뛰쳐올라가,

       

       짝-!

       

       “꺄악!”

       

       난데없이 뺨은 맞은 춘월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고, 

       

       “이, 이 무슨 짓이냐!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누워있던 백노평도 놀라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눈을 휘둥그레 뜬다. 하지만 나는 짐짓 노한 얼굴로 춘월에게 외쳤다.

       

       “네 이년! 이역만리에서 목숨걸고 나가 싸우는 대일본제국 황군용사를 감히 네가 모욕하느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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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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