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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

        

        

        “거르고 걸러서 셋… 인가.”

        

        

        여기까지 추리는 데에 사흘이 걸렸다. 이반은 뻑뻑해진 눈가를 꾹 누르며 일어섰다.

        

        거르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갑작스레 두각을 나타낸 인물, 성격이나 성향이 급격히 변한 인물, 기이한 언동을 보이는 인물.

        

        방첩사령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보들이다. 귀족원을 직접 캐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이 녀석들.”

        

        

        하나는 고아. 실기 특기 장학제도를 통해 입학.

        

        다른 둘은 귀족원. 즉, 왕세자파의 인물들이다.

        

        건드리기 곤란하다. 이반이 아무리 위장취업이라지만 뿌리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방첩사령부의 인원과 연이 닿는다.

        

        그리고 방첩사령부는 엘리자베타의 오른팔이다. 귀족원을 섣불리 자극했다가 덜미를 내주면 엘리자베타의 정치적 영향력에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셋 모두 납치해선 곤란한가….”

        

        

        이반은 드미트리가 들었다면 거품을 물었을 소리(엘리자베타와 함께 거품을 물었을 소리)를 하며 테이블을 톡톡 쳤다.

        

        

        하나는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화제의 신입생. 이 녀석은 고아지만 벌써부터 각계 기관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재다. 섣불리 자극했다간 좋은 꼴을 보기 어렵다.

        

        남은 두 귀족 자제는 모두 귀족원의 상원직 가문 출신이다. 당연히 무턱대고 납치할 수는 없다.

        

        정말 ‘빙의자’라면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하겠으나, 아직은 심증뿐, 확실한 물증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셋을 마크하고, 잠시 지켜보는 방향으로 가자.”

        

        

        죽이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납치마저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뒤탈 없이 상황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이반은 사흘 만에 아카데미에 출근하기로 한다.

        

        그 날부터 성 얀스크 대학엔 괴인이 출몰한다는 괴담이 퍼지기 시작했다.

        

        

        

       *

        

        

        이해할 수 없는 모종의 악의 섞인 운명으로 왕따라는 굴레에 빠져버린 에시디스에겐 남은 선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히 학기는 이제 막 시작이다. 아무리 첫 인상이 끝 인상이라지만,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가령, ‘삼촌도 감히 건드리기 꺼림칙한’ 인물을 찾아보는 것이 그 중 하나로 꼽혔다.

        

        

        ‘아빠 친구 딸…!’

        

        

        부모 간의 약속이었을지, 아니면 놀라운 우연 탓인지 같은 학년엔 용사 파티의 자제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지 않던가.

        

        삼촌이 아무리 생각 없다 하더라도 감히 용사의 자식에게 섣불리 접근하진 못할 테니까.

        

        그것이, 이 점심 모임이 만들어진 결과였다.

        

        

        “반가워요. 에이날스도티르 양…? 이렇게… 부르면 될까요?”

        “아, 그건 그냥 아빠 딸이란 뜻이에요. 우리끼린 편하게 에시디스로 불러주세요.”

        “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 공주님이시잖아요?”

        “아하하, 공주래. 나 정말 이런 취급 처음 받아봐서 막 눈물이 나고 그러네요….”

        

        

        에시디스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 예쁘장한 여자애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 제가 좀 무례했죠…? 죄송해요. 이자벨이랑은 알고 지내던 사인데… 기사학부 신입생 맞으시지요? 혹시 성함이…?”

        “유리 프란크예요. 에시디스 양. 편하게 유리라고 불러주세요.”

        “에시, 주접 그만 떨고 물러나. 아아주 귀하신 몸이시라고, 이 애?”

        “죄송해요! 제가 크라실로프 궁정 귀족들 명단은 몰라서…!”

        “아니 너는 무슨 소릴…! 아녜요! 귀족이라뇨! 큰일 날 소릴!”

        

        

        이자벨이 쿡쿡 웃으며 에시디스를 툭 쳤다. 얘는 왕족보다 귀한 혈통이 어디있다고 이러는 거야.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에시디스가 잠시 머뭇거리자, 유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 그냥 고아에요. 프란크라는 성도… 솔직히 제 진짜 아빠 성도 아니고요.”

        “게다가 유리는 남자 이름이야.”

        “하지만 길바닥에선 여자애 이름 붙이고 살아남기 어려운걸요.”

        

        

        유리는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자벨은 피식 웃고는 에시디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가 우리 학부 전액장학생이야. 진짜 칼 잘 쓰더라.”

        “와, 이자벨보다요?”

        “나는 물론이고 오스칼보다도 더 잘 쓰던데? 솔직히 놀랐어. 어디서 이런 애가 나타났지?”

        “과찬이셔요. 그냥 운이 좋았죠.”

        “운으로 우릴 이겼으면 그건 실력이지.”

        

        

        에시디스는 마음이 따듯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거야. 이게 맞지.

        

        활기찬 봄, 따듯한 햇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서로의 실력을 칭찬하고, 선의의 경쟁을 해 나가는 이 로망….

        

        그녀는 저도 모르게 훌쩍이며, 아마 지금쯤 기사학부 학부생들과 노닥거리고 있을 삼촌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애써 지웠다.

        

        

       *

        

        

        이자벨과 에시디스, 그리고 신입생이라.

        

        이반은 나무 위에 앉아 노닥거리는 이들을 내려보며 메모를 넘겼다.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까지 접근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정확한 수준의 독순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가는 대화는 평범함. 이름은 유리 혹은 율리.

        

        둘 다 신입생 명부에 있는 이름이었지만, 그의 ‘용의자 명단’에 있는 이름이라면 유리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하필이면 ‘용의자’가 용사 파티와 접촉하고 있다라. 거기다가 하필이면 이름이 ‘유리’다.

        

        당연히 크라실로프 문화권에서 그 이름은 남성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리고 범위를 좀 더 넓히면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선 여성 이름으로 쓰인다.

        

        유리라는 이름을 쓰는 여성이 있다면, ‘빙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용의선상에서 붉은 밑줄 하나를 그었다.

        

        

       *

        

        

        “저 자식 뭘 하는 거야.”

        

        

        엔리케는 챙 넓은 모자를 쓴 채로 멍하니 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거리까지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한 녀석이었는데,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자신의 접근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반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에, 신입생 몇몇이 밴치에서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평범한 광경이다.

        

        

        “으음… 이자벨인가…? 저건 에시디스 같고… 쟤들이야 원래 친했으니까… 쟨 누군지 모르겠는데.”

        

        

        방첩사령부에서 사정사정하길래 잠깐 찾아가 볼까 했더니, 현장 요원이라도 된 양 신입생들을 미행하고 있는 꼴을 마주하고 말았다.

        

        

        “맛이 간 것 같진 않은데. 그냥 호들갑이었나?”

        

        

        무감정한 눈빛, 방심한 와중에도 완벽에 가까운 은폐. 평소의 이반이다. 편집증 적일 정도로 몸가짐에 신경을 쓰는.

        

        엔리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림자 뒤에 몸을 숨겼다.

        

        

       *

        

        

        “예브게니! 같이 가! 오후 수업 뭐 들어? 나, 나는 성경해석학 오티 들으러 가는데!”

        “난 복음원어강독. 미안.”

        “아, 아냐! 이따… 이따 보자! 수업 잘 들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학생을 웃으며 떠나보낸 뒤에, 예브게니라고 불린 청년은 얼굴을 굳히고 강의동 복도를 걸었다.

        

        귀찮다. 거기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배워야 할 것이 많을 줄 알았다면 결코 신학과를 선택하지 않았겠지만… 당시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몸 쓰는 일을 할 수는 없어.’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평생 식칼조차 들어본 적 없는데 이제와서 괴물이나 마족 따위와 칼부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전투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직렬을 골라도 곤란하긴 마찬가지. 적어도 필드에 직접 나가 뛰는 직업군을 선택해야 했다.

        

        따라서 신학과다. 사제 과정을 거치면 각종 버프와 힐링 스킬을 물론이고 신성한 강타 계열 주문도 익힐 수 있다.

        

        

        ‘거기에다 이 몸은 검술에 조예가 있다.’

        

        

        [북부대공가 망나니 검술천재]의 주인공, 유진은 검의 천재다. 이는 시스템 상으로도 명확히 증명된 바 있다.

        

        주변 신입생 모두가 8~10레벨 사이의 저조한 성장세, 전투 기술이라 해봐야 별것 없는 하잘 것 없는 능력을 보일 때. 이 몸은 빙의 첫 날부터 [소드 마스터리 5Lv]이란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

        

        아카데미, 얀스크 대학 기사학부의 1학년 교관 바로 아랫단계쯤 된다. 즉, 신입생 수준은 이미 넘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에서 검술을 익히고 있는 것과 그것을 활용해 사람을 도륙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란 것.

        

        닭 모가지 한 번 비틀어본 적 없는 현대 한국인에게 이건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제가 최곤데….”

        

        

        일선에 나설 필요 없는 후위. 해봐야 힐이나 뿌리면 끝나는 간단한 직군에다, 거기에 칼질도 보통 이상으로 한다면 그림 같은 먼치킨 등장이시다.

        

        예로부터 진짜 잘하는 일은 부업으로 삼으라 했다. 연기파 배우보다 연기파 아이돌이 더 많은 인기를 얻는 것이 당연하지 않던가.

        

        여기서 발생하는 유이한 문제는.

        

        하나, 성 얀스크 대학의 신학과 커리큘럼은 현대 한국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빡세다는 점.

        

        둘, 눈깔이 돌아있는 투석기 산타클로스가 쫓아오고 있다는 점.

        

        

        ‘쟨 진짜 뭔데…!’

        

        

        원작 소설엔 이딴 이벤트가 없었다. 사실, 원작 소설이랑 전혀 다른 세상이기까지 하다. 원작은 이런 미묘한 빨갱이 제국도 아니었고, 마왕이나 용사파티 같은 것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나쁜 마법사 가문이랑 대략 1,000화쯤에 걸쳐 싸우는 ‘명가물’이었다…!

        

        이 세계와 그 소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익숙한 스킬트리, 익숙한 상태창, 그리고 익숙한 가문 내 상황 정도.

        

        북부대공…? 이 ‘크라실로프’라는 나라 자체가 북부에 있는데 북부대공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쟨 왜 레벨이 안 보여…!’

        

        

        일반적인 수준을 넘긴 레벨차부터 표기 등급이 ‘???’로 바뀐다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카데미 정원사 레벨이 왜 저 모양인가. 심지어 그는 그의 가주 레벨도 59라는 점을 상기하며 절망했다.

        

        애써 시선을 돌린 그 주변 시야로, 눈을 부릅 뜬 수염난 괴인이 나무 위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위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확장된 직감 3Lv]로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거리에서.

        

        

       *

        

        

        “총 세 명을 미행하고 있군.”

        

        

        엔리케는 확신했다. 처음엔 용사 파티 자제들을 지키라는 명령이라도 들은 줄 알고 넘기려 했는데, 뭔가 찜찜해서 따라가보니 그랬다.

        

        문제가 있다면… 그 세 명에겐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것.

        

        하나는 신학과, 하나는 기사학과, 다른 하나는 마법학과다.

        

        신분을 보아도, 공작가 아들, 고아, 자작가 막내딸. 뭐 도저히 매치가 되질 않는다.

        

        거기다가 저 살기.

        

        덤불 속에 웅크린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노려보는 것이 꼭 무슨 원수라도 보는 양….

        

        

        “저것들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고아 꼬맹이는 장학제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하며 입학해서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모양이고.

        

        귀족 자제 두 녀석은 귀족원 출신. 명백히 왕세자파에 속한 인물들이다. 건드려서 좋을 것도 없는데, 하필이면 마법학과 신학과이기까지 하다. 둘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학과장이 크라실로프 사람이 아니란 점.

        

        신학과는 당연하게도 성녀가 맡고 있고, 마법학과는 칼리온의 엘프들이 담당하고 있다. 즉, 학부생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진다는 뜻.

        

        

        “에이 설마. 에이. 설마 그래도 그렇게까지?”

        

        

        엔리케는 피식 웃으면서도, 내심 저 미치광이라면 어떤 모종의 이유로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용사 파티의 도적, 한 세기간 프리첸카야의 뒷골목에 군림한 흡혈귀는 언제든 비상상황에 개입할 준비를 하며, 학생-스토커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

        

        

        ‘내 눈을 봤다.’

        

        

        신학과 본과 건물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행하고 있었는데, 저 녀석은 날 인지했다.

        

        이반은 메마른 눈으로 ‘용의자 명단’의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브게니 노비코프 카람진.

        

        예브게니는 평범한 이름이다.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예브게니라는 이름은 아시아 문화권에선 유진이란 이름으로도 쓰인다. 당연히 카톨릭 성인 에우게니오스와는 다른 의미이다.

        

        즉,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게서 통용되는 인칭이란 뜻이다.

        

        따라서 명단에 기록된 이 녀석 또한 ‘빙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반은 붉은 밑줄을 두 개 그었다. 은신을 감지함, 움직임이 수상함, 이름이 수상함.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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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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