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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허억.”

     

    가쁘게 숨을 토해냈다.

     

    머리가 핑핑 돈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여도 시야가 뿌옇다.

    어둑어둑한 밤인지 사방이 어두웠다.

     

    뭐가 어떻게 됐더라.

     

    실기시험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꽤 싱글벙글한 기분으로 내 방까지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난다.

     

    고블린 시체나 퀴퀴한 지하의 흙, 이끼 냄새 따위가 밴 상의가 참을 수 없어서 우선 벗었고….

     

    거기서 끊겨있다.

     

    “쿨럭, 쿨럭.”

     

    기침이 절로 나온다.

     

    뭐라고 말을 꺼내고 싶은데 목에서는 낮에 들었던 고블린들이 긁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뭐야, 왜 이러지.

     

    우선 상태창.

     

     

    ―――――――――――

     

    · 진단 D가 진단 C로 랭크업 했습니다.

     

    · 의학 E가 의학 D로 랭크업 했습니다.

     

    · 혈액검사 D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

     

     

    의학 스킬 랭크가 올랐다.

     

    오늘 실기시험에서 의학을 신나게 사용한 덕이다.

     

    실제 환자들을 종일 상대했으니 싫어도 경험치가 쌓였을 수밖에.

     

    “혈액검사 스킬이라. 어디까지 가능할까.”

     

    병원에서 보통 공복상태에서 피를 뽑아 하는 검사가 CBC다.

     

    혈액의 구성성분인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개수 등을 분석해 환자가 어떤 병이 있는지 넓은 범위에서 알 수 있기에 가장 기본적이면서 범용적인 검사다.

     

    그런 능력의 스킬이라면 진단보다도 자세히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내 몸 상태는 왜 이래?

     

    스크롤을 내리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재능이 D랭크로 랭크업했습니다.

     

    · 디버프 체력 지속 감소 E (성장형, 해제불가)가 체력 지속 감소 D로 랭크업했습니다.

     

    ―――――――――――

     

     

    아, 재능이 성장한 만큼 디버프도 같이 성장했다는 뜻이구나.

     

    하, 이것 참.

     

    “끄응.”

     

    어째 위에서 따끔거리는 느낌이 강해졌다.

    위산이 내장을 안쪽부터 녹이고 있는 모양이다.

     

    남은 체력은 4 남짓. 최대가 11이다.

    실기시험에서 꽤 쓰기도 했고 디버프 때문에 계속 감소하고 있었던 듯하다.

     

    ‘쉽게 죽어가고 있는 거지 뭐.’

     

    명의도 자기 몸은 못 챙긴다고, 진단은 나 자신에게는 쓸 수 없다.

    증상만 보면 위궤양 같기도 하고.

     

    ‘체력감소량이 사탕의 회복량을 뛰어넘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나마 편한 자세로 쓰러져 잔 덕분에, 자는 동안은 감소량이 적었던 것 같다.

     

    지금도 머리를 부드럽고 푹신한 받침이 편안하게 받쳐주고 있다.

     

    …응? 바닥에 무슨 받침이 있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천장 쪽을 바라보니 어둠 속에서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두 개,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방금 2초 정도 심장마비가 온 것 같다.

     

    다행히 아직 목숨은 붙어있다.

     

    “깨어났구나.”

     

    아셀라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황녀님, 여긴 왜… 쿨럭, 쿨럭.”

     

    대답을 마치지 못하고 기침을 해버렸다.

    다행히 입을 틀어막아 아셀라의 얼굴에 내 단내나는 침이 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셀라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그녀가 눈가를 찌푸렸다.

     

    “공자, 기침도 해?”

     

    “잠깐 사레들렸을 뿐입니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내 상태가 안 좋다고 의심하고 있을까.

     

    주치의가 자기 몸도 못 가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

     

    특히나 담당해야 할 환자 본인에게는.

    직업의 신뢰를 망치는 일이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시험이 피곤해서 엎어져 잤을 뿐이에요.”

     

    “…바닥에서?”

     

    “전 그게 편해서요.”

     

    “옷을 갈아입던 도중에?”

     

    “그 정도로 졸렸습니다.”

     

    아셀라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나를 꿰뚫듯 노려봤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리를 아셀라가 받쳐주고 있는 건가?

     

    언제부터 내 방에 들어와 있었지?

     

    “황녀님, 제 머리는 왜….”

     

    “싫으니?”

     

    좋냐 싫냐 물으면 당연히 싫죠.

     

    지금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게 감촉으로 보아 무릎인 것 같은데, 내 머리에 아셀라의 손도 올라와 있고.

     

    악어의 벌어진 입 사이에 머리통을 집어놓고 있는 격이다.

     

    그것도 이미 내 얼굴을 몇 번이나 긁어댔던 악어지.

     

    분노를 더 사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으나 도무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내가 대답이 없자 아셀라가 입을 열었다.

     

    “내게는 루시가 주로 이렇게 해줘.”

     

    “루시가 누군데요?”

     

    “내 시녀장.”

     

    아, 시험을 계속 무표정으로 감독하던 누님 이름이었다.

     

    “어쩌다 이러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애초에 황녀님도 숙녀시니 남정네의 방에 혼자 들어오시는 일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사려됩니다만.”

     

    “혼약자잖아.”

     

    “그건… 그렇죠.”

     

    “내가 뭔가 오해했어?”

     

    “태양은 정오에는 희고 강하게 빛나나, 오후에는 주황빛으로 끈적해지는 법이죠.”

     

    보이는 대로 생각해서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다는 비유였다.

     

    내 몸은 멀쩡하다는 뜻을 전달했다.

     

    “왜 내게 거짓말을 하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황녀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담당 환자가 걱정할 일을 줄이는 것이 주치의의 일이지요.”

     

    “…그래?”

     

    아셀라는 내 대답에 조금은 미심쩍지만 납득해준 듯, 몸 상태에 대해 더 추궁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와중 슥.

     

    아셀라가 내 뺨에 손을 올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차가워서 기분 좋은 손이었다.

     

    누워있는 내 각도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공자,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

     

    아셀라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질문을 해왔다.

     

    내가 너무 오래 가만히 있으니 슬슬 지겨웠던 모양이다.

     

    나도 움직이고 싶어.

    움직이고 싶은데 힘이 없어.

     

    “황녀님,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사탕을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대가는?”

     

    하여간 공짜가 없는 황녀님이시다.

     

    “…한 개 드릴게요.”

     

    내 대답에 아셀라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어디 있어?”

     

    “아, 벗어놓은 상의 안쪽에 있어요. 바로 뒤에 침대 위에.”

     

    “어디… …많이도 있네. 한 개로는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한 개입니다. 그런 거래였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셀라는 사탕을 두 개 꺼내와 한 개를 내 가슴팍에 던졌다.

     

    “포장도 까주길 바라니?”

     

    “그럴 리가요.”

     

    그 대가로는 뭘 지불해야 할지 상상이 안 갑니다.

     

    포장을 벗기고 사탕을 입에 문다.

     

    달콤한 벌꿀 향과 함께 체력이 증가한다는 텍스트가 떠올랐다.

     

    이걸로 감소량을 상쇄하기는 했지만 바로 체력을 더 회복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런 맛이었구나.”

     

    어느새 아셀라도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달각, 그녀의 이빨 사이로 사탕이 이리저리 구르는 소리가 났다.

     

    “맘에 드세요?”

     

    “아니, 난 단 음식 싫어해.”

     

    저도 원래는 그래요.

     

    “그래도 이건 나름 맛있어. 공자에게서 뺏은 물건이라 각별한 맛이야.”

     

    “만족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역시 발상이 남다르다.

    희대의 악녀께서는 어찌나 이리도 강탈, 약탈, 타인의 고통을 즐기시는지.

     

    아셀라는 입안에서 굴리던 사탕을 쪽, 입에서 빼고는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빼앗아놓고 다 안 먹어버리면 공자의 상실감이 크겠지?”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당신이 기쁘시다면야.

    아니나다를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못 참으려는 눈치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할까?”

     

    “버릴 거면 저 주세요. 아까우니까.”

     

    내 대답에 아셀라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뒤로 살짝 뺐다.

     

    “…또 내가 먹던 걸 먹으려고?”

     

    “좋아하는 사탕이라서요.”

     

    “안 돼.”

     

    아셀라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홱, 사탕을 자기 품으로 가져갔다.

     

    버릴 거지만 너 주지는 않을 거란다.

     

    그야 그렇겠지. 맘대로 하십쇼.

     

    …어째 또 뽀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아셀라가 그 사탕을 다시 포장지에 조심스레 밀어 넣고 있었다.

     

    얘 뭐 하냐.

     

    “공자.”

     

    “예.”

     

    “시험은?”

     

    “최종후보에 올랐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셀라는 담담하게 말하고는 사탕을 드레스 품 안쪽에 챙겨넣었다.

     

    “끄응.”

     

    슬슬 당분 덕에 힘도 조금 나는 것 같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황녀님, 저녁 시간입니다. 식사라도 하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정중히 권했건만 아셀라는 자리에서 꼼짝 않고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황녀님?”

     

    “기다려.”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미는 아셀라.

     

    내가 막스도 아니고 기다리라면 기다리는 충견인 줄 아나.

     

    아니, 당분간은 그래야지 뭐.

     

    “왜 안 일어나세요?”

     

    “기다리라고 했어.”

     

    자세히 살펴보니 아셀라는 다리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엄지발가락 끝을 이리저리 꼼지락대며 영 자리를 찾질 못한다.

     

    다리가 저렸구나.

     

    “황녀님, 그럴 때는 허벅지 위쪽부터 마사지를 해주면 보다 금방 증상이 완화됩니다. 자, 제 자세를 따라해 보시죠. 조금씩 무릎을 펴며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공자, 방에서 나가.”

     

    “제 방인데요.”

     

    “…그럼 옷이라도 입든지!”

    아셀라가 홱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큰일이군. 짜증을 내는 단계로 넘어갔다.

     

    뭔진 몰라도 내가 아주 크게 잘못했다는 의미였다.

     

    그녀를 더 화나게 했다간 내 목이 날아갈 게 뻔했기에 나는 바로 상의를 챙겨 도망치듯 방에서 뛰어나갔다.

     

     

     

    ***

     

     

     

    나는 아셀라를 저녁 정찬에 먼저 보냈다.

     

    그동안 장미사탕을 전반적으로 손봤다.

    현재 상태에서는 강화를 써도 회복량이 상승하지는 않는다.

     

    원료가 약한 문제라고 생각되어서, [성질변화]를 써서 장미약 성분을 일부 변형한 후 [강화]했다.

     

    성분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확률에 기대야 하기에 여러 번 가챠를 돌렸다.

     

    그러던 중 빙고.

     

     

    ―――――――――――

     

    특제 장미 벌꿀 사탕 (연성, 변형, 합성됨)

     

    섭취 시 효과 : 내출혈에 의해 감소한 체력이 6시간에 걸쳐 0.6 치료됨

     

    굉장히 달콤합니다!

     

    ―――――――――――

     

     

    마침내 내 체력감소량을 커버할 수 있는 사탕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귀중한 사탕을 스무 개나 낭비해 버렸지만, 또 만들면 되지 뭐.

     

    앞으로도 이렇게 체력감소량은 점점 늘어나게 되겠지.

     

    “까짓거 계속 체력회복하면 그만이야.”

     

    당보충도 수시로 하고 좋지 뭐.

     

    당뇨는 안 걸리게 조심해야겠다.

     

    자신을 치료하다 보니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아셀라의 디버프는 뭘까.”

     

    진단을 사용하면 간단하겠지만 아직 주치의가 아닌 지금은 함부로 그녀에게 스킬을 쓸 수는 없다.

     

    마법에 민감한 아셀라는 내가 그녀에게 스킬을 썼다고 바로 알아챌 터고.

     

    아직 진단 랭크가 낮아서 정확하게 파악하리란 보장도 없다.

     

    “재능에 대가는 필수지. 대가인 디버프를 없애면.”

     

    재능도 없어질 것이다.

     

    디버프가 불치병인 내 상태로 봐서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혹시나 그렇게 되면 배드엔딩을 한 번에 여러개 삭제하는 일도 가능하겠지.

     

    아셀라의 마법이 약해지기만 해도 그녀가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드니까.

     

    “그것도 우선 주치의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야.”

     

    최종시험은 내일 바로 이뤄진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이만 푹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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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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