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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업(業)이란 흔적이자 궤적이다.

       나무에 나이테가 자라나고 흐르는 세월에 바위가 깎이듯.

       티끌만 한 것이 모여 시간과 자라나 형태를 만드니.

         

       명심하라.

       구도(求道)는 오직 업만이 길은 아닐지언정.

       업을 올바르게 쌓은 이는 득도(得道)하였느니라.

         

         

         

         

        * * *

         

         

         

       예전에는 은밀하게 계승되어오던 수많은 신비는 현대에 이르러서 이능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공개되었다. 그 때문에 비의(秘意)로 불리던 것은 과학과 결합해 학문이 되었고, 비기(秘技)라 불리는 것은 호신용 기술, 전투용 기술로 격하되어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각국, 지역마다 중구난방으로 불리던 에너지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활용되며 정립되었고, 사람들은 이제는 이능을 미지로 여기지 않는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능은 옛날에는 신비로 불렸던 힘이며, 이제는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는 힘이다.

         

       마법은 과학과 결합해 마도 과학이 되었다.

       무공은 호신용 기술로 학교에서 가르치기까지 한다.

       소환술은 보디가드 겸 펫을 소환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

         

       당장 TV를 틀면 숙면에 좋다는 마도 과학 침대가 광고로 나오고, 어느 무가(武家)에서 애들 공부시킬 때 쓰던 비전 한약이라며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틀면 귀여운 소환수와 함께 지내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고, 갈고닦은 미용술로 외모를 한껏 뽐내는 마녀가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되었음에도 사람들에게 ‘미지’로 여겨지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영혼.

       운명.

       업.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라는 점이다.

         

       악령이나 악귀에 시달린 사람의 이야기는 괴담으로 전해지고, 영혼을 단련해서 힘을 발휘한다는 능력자는 심심찮게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이 영혼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맞음에도 관측할 수 없다는 점이 사람들에게 영혼을 미지의 요소라고 여기게 했다.

         

       오감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에너지를 측정하고 싶어도 측정이 되지 않는다.

       무게가 있는 듯하나 막상 재려고 하면 그 무게가 들쑥날쑥하다.

       물리법칙에 간섭할 수 있는 것 같으나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분명히 존재하나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영혼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일반인도 악령과 악귀를 볼 수 있고, 영안(靈眼)이 열렸거나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의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라면 일상적으로 영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으로 가면 더더욱 아리송하다.

         

       주술사나 초월종이 이에 대해 언급하며 말하기도 하고,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재앙을 대비하라는 이들이 종종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선 운명이라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것이 절대적이진 않고, 바꾸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참으로 아리송하다.

         

       그게 얼마나 애매하고 아리송하냐면 학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운명의 성질은 불변인가 가변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고 할 정도다.

         

       과거 존재했던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에서 발하는 예언은 델포이의 신탁(Oracle of Delphi)이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아신으로 분류되는 아폴론이 내리는 예지는 거의 저주나 다름이 없어서, 피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피하려고 했기에 그 운명을 맞이하게 되고, 피하지 않는다면 예정된 미래를 맞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한다.

       그 때문에 운명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학자는 이를 예시로 들어 소리높여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운명이 불변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운명이 바뀐 사례가 수없이 존재한다. 당장 최근만 하더라도 토네이도 때문에 미국이 쑥대밭이 되는 미래를 능력자들이 모여서 토네이도를 소멸시킴으로써 막았고, 그 전에는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웬 괴물이 튀어나올 거라는 미래를 핵폭탄과 대마법 폭격으로 그 지역을 지워버림으로써 막았다.

         

       아니, 위의 예시를 들지 않아도 단 한 단어로도 불변성을 반박할 수 있었다.

         

       종말 예언.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종말 예언 중에 이루어진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본다면 운명이 가변성을 띠고 있음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운명이 존재하냐고 묻는다면 반드시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존재한다고.

         

       그것은 초월종이 증명했으며, 역사가 증명했으며, 주술사가 증명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할 수 없고 그 성질을 말하기 힘드니, 그것을 미지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어라 부를까.

         

       그런데 업은 위의 두 가지와는 다르다.

         

       영혼과 운명은 사람들이 미지의 요소라고 여길 뿐 존재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 업(業)이라는 요소는 사람들이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요소였다.

         

       이 업이라는 것은 참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해서, 경지에 이른 능력자들조차 이 업이 존재하냐는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정도다. 사람의 몸에 자연을 담았다는 무인도, 홀로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대마법사도 이 업에 대해 말해달라고 한다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업(業)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운명과 숙명을 뜻하는 카르마(Karma).

       가능성을 뜻하는 다르마(Darma).

         

       이 두 요소는 운명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에, 몇몇 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 업이라는 것은 일부 문화권에서 운명을 말하는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

         

       하지만 그런데도 업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초월종이 이 업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초월종은 빛의 형태로.

       어떤 초월종은 글자의 형태로.

       어떤 초월종은 색의 형태로.

         

       초월종마다 그 방식이 다르고 보는 광경이 다르다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이세린과 계약한 악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이제 확실하군. 저 녀석은 이상하다. ]

         

       악마는 박진성이라 불리는 이의 업을 보고 그리 평했다.

         

       이세린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는 악마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간만에 진성이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아침 식사를 하자고 말하고 오는 길이었는데, 진성을 보자마자 악마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더니 저런 말을 꺼낸 것이다.

         

       “갑자기…?”

         

       거기다가 악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평소 진성을 보면 귀엽게 보던 악마의 얼굴에 약간의 혐오감이 띄워져 있었다. 낙타의 얼굴임에도 명백히 알아볼 수 있는 그 감정의 변화는 이세린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 계약자야, 나의 계약자야. 너는…. 내가. 아니. 초월자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

         

       초월종.

       인간계에서 신, 악마, 아신, 용, 신령 등.

       신화나 전설에서나 볼법한 강함을 지닌 존재들.

         

       인간들은 신화와 전설에서 자주 나오는 존재들에 대해 경외심을 담아 자신과는 격이 다른 존재, 초월종이라 부르며 존중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초월종’이라는 표현은 본질과 조금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인외의 존재는 인간보다 존재값이 높아 초반에는 강한 힘을 낼 수는 있지만, 그들을 ‘초월했다’라고 표현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기록들을 살펴보면 사람에게 토벌당한 괴물이나 요괴 이야기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럽 쪽에서는 허구한 날 영웅에게 토벌당하는 게 용이었고, 동양에서는 지나가던 주술사나 무인이 봉인하거나 죽인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에 초월종이라는 표현보다는 ‘초월자’라고 불리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초월이라는 것은 종을 타고나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으며, 오직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초월이었으니까.

       초월은 그 무엇의 도움도 없이 개인으로서 오롯이 이루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초월을 하고 나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무료함과 외로움.

         

       종을 초월함에 따라 초월자는 압도적인 수명을 손에 넣는다. 그것은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늘어나 종국에는 폭력 이외에는 죽지 않는 신체가 된다고 할 정도니, 그들의 삶이 일반적인 존재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무료함과 외로움이 따라온다.

         

       애정을 쏟는 존재는 시간과 함께 죽어버린다.

       흥미를 느꼈던 것은 반드시 끝에 도달한다.

         

       그렇게 시간과 함께 가치 있던 것은 마모되고 사라진다. 차라리 미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계를 아득히 초월해버린 그들의 정신은 미쳐버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강력한 인과의 규율은 그들의 힘을 구속해 물질계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들은 오직 초월의 격에 어울리는 일만을 할 수 있게 된다.

         

       초월하여 남부럽지 않은 힘과 길고 긴 수명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유희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어…. 사람 좋아하는 거?”

       [ 그래. 우리는 인간을 좋아한다. ]

         

       하지만 그런 초월자들에게도 하나의 희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

         

       하지만 초월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아주 훌륭한 유희 거리이자,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외로움과 무료함을 덜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평생 책도, TV도 없는 헬스장에서 평생 갇혀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처지라고 생각해보라. 음식이라고 나오는 것은 닭 가슴살과 단백질 셰이크. 자극적인 맛은 기대도 할 수 없고, 운동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10년, 50년, 100년. 1,000년을 보낸다고 생각해보라.

       거기다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뿐이다.

         

       암담하지 않은가?

         

       자기네들끼리 쌈박질하거나 내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눈이 맞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100년, 1,000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도 싫증이 나기 마련.

         

       그런데 바로 이때, 헬스장에 사람 숫자대로 스마트폰이 지급되고 거기서 귀여운 동물을 볼 수 있다고 해보자.

         

       새끼 고양이.

       새끼 고슴도치.

       햄스터.

       강아지.

       귀여운 새.

       …

         

       수많은 귀여운 동물들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자기 취향에 맞는 동물과 교감하거나 키울 수도 있다.

         

       그럼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초월자들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다.

         

       놀 거리도 없고, 자극적인 것도 없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초월자들은 제각기 모습도, 성질도 달라서 동족은커녕 동료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이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초월자는 빛으로 둘러싸인 모습이고, 어떤 초월자는 아예 동물 모습이고, 어떤 초월자는 괴물 모습이고….

       개중에는 맞는 이들이 있어 하나로 뭉쳐서 잘 지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귀여운 생물이 눈에 들어온다고 해보자.

       당연히 힐링이 되지 않겠는가?

         

       [ 우리 초월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래. 비유하자면 새끼 고양이 같은 것이다. ]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

       새끼 고양이들이 떼거리로 모여있는 곳이다.

         

       인간이 검을 휘두른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고양이가 검을 들고 춤을 춘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귀엽겠는가.

         

       마법사?

       새끼 고양이가 마법사 옷 입고 마법 쓰고 다니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자.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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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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