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가 험하구나.”
“그래도 화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무당산에 비해서도…”
생각해보면 구파일방은 산 타는 거에 익숙하겠네.
문파들이 어지간하면 산 위에 있으니.
나는 노인네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열심히 거친 산맥을 등반했다. 다행스럽게도 날씨 자체는 화창했기에 우리는 별문제 없이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꼭대기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풍경을 감상하다 곧장 산 아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산이 반이구나.”
“딱히 뭐 보이는 건 없어 보이는 구려.”
역시 좀 더 들어가야 야영지를 찾을 수 있는 건가. 어차피 파르스의 주력은 마인들과 맘루크니 야영지 거리가 다소 멀어도 상관없겠지.
말을 타면 성채까지 도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은공,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산맥을 따라 안 쪽까지 들어가야지. 가능하면 오늘 안에 흔적을 찾는 게 목표야.”
정찰은 빠르고 신속해야 한다.
정찰이 오래 늘어질수록 들킬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죄다 무림인이라 흔적을 지우는 거에 나름 익숙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흔적이 남지 않을 수는 없으니.
“오늘 안이라…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희망사항에 가깝기는 합니다.”
무림인이 인간을 반쯤 초월해 있다고는 하지만 온종일 산을 타고 이동하며 주변을 수색하는 건 어려운 일. 나도 정말로 오늘 안에 야영지를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목표를 높게 잡아야 좀 더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뿐.
우리는 산맥을 타고 점점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여기서 야영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적당히 안쪽이 파여 있는 봉우리.
이 정도면 불을 피워도 멀리서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을 터.
나는 재빠르게 모아온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작은 모닥불을 만들어냈다. 내가 모닥불을 만들자 노고수들은 옹기종기 모여 벽곡단을 꺼냈다.
“벽곡단을 보니 한창 수련할 때가 떠오르는구려.”
“질리도록 먹었지.”
“다시 생각해도 못 할 짓이야.”
노고수들은 벽곡단에 대한 감상을 내뱉으며 천천히 지긋지긋한 구슬을 먹어 치웠다. 나도 그들을 따라 벽곡단에 입을 대니 살짝 달콤하지만 끔찍하게 퍽퍽한 식감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까도 먹었지만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이걸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먹어 치우는 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거지?
나는 익숙한 모습으로 벽곡단을 먹어 치우는 노고수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벽곡단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먹기 힘들다고 주린 배를 채우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무림 고수라도 허기 앞에서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나는 불을 조절해 아래에서 불이 잘 보이지 않게 만들고 쉬고 있던 노고수들을 불러 모았다.
“혹시 오늘 낮에 뭔가 위화감 같은 게 느껴지신 게 없었습니까?”
“이 노부가 본 바로는 그런 건 없었다네.”
가장 먼저 대답해준 것은 이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당운규 장로였다. 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품에서 야구공만 한 구슬을 꺼내고는 이리저리 만지는 중이었다.
“그건…”
“당가에서 만든 도구일세. 폭침뢰라고 이름 붙였지. 구슬이 충격을 받으면 사방으로 독이 발라진 침이 발사된다네.”
참 살벌한 무기일세.
하지만 우리한테는 정말 중요한 물건이기도 하고.
우린 10명밖에 안 되니, 대량 살상이 가능한 도구가 큰 도움이 되는 상황이니까.
“살벌한 물건이군요.”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지.”
당운규장로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처럼 오러아머를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독이 발린 침을 대량 발사하는 폭침뢰는 강력한 도구가 되리라.
물론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혹시 몇 개 나 가지고 계십니까?”
“세 개밖에 없다네.”
“적재적소에 쓸 만큼은 있군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뭐 우리가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정찰하러 온 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검을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서역의 검은 참 길군.”
“제가 커서 그렇습니다. 보통은 이것보다는 짧지요.”
“하긴, 색목인들이 다 자네 같은 거인이었다면 난리가 났을걸세.”
적당히 잡담을 나누며 모포를 폈다.
우리 같은 고수들이야 이런 모포 따위 없어도 감기에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자기엔 찝찝했으니 임시 야영지는 순식간에 모포 펼치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이보게 위 소협. 내일은 어떡할겐가?”
“적어도 내일까지는 계속 이 정도 속도로 산을 탈 생각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수색해보는 것도 방법이지만, 역시 위에서 보는 게 더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알았네. 그럼 일찍 잠들어야겠군.”
“못해도 해가 뜨기 전에는 일어나야 하니 말일세.”
“예.”
“불침번은 어떻게 하겠나?”
“저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시진으로 잡으면 얼추 다섯 정도면 되겠구먼.”
“한 명만 세울 겐가?”
“두 명씩 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렇게 합세. 혼자 시간을 죽이기엔 적적하니.”
“그럼 저는 목경이와 같이 먼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어르신들, 잘 주무십시오.”
“허허, 좋은 시간 보내거라.”
짓궂은 소리 하시기는.
노고수들은 다들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나와 목경이는 불 앞에 앉아 조용히 불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노고수들의 숨소리가 들려올 때쯤, 목경이가 입을 열었다.
“은공…”
“왜?”
“은공은 떨리지 않으십니까?”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전쟁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다.
전쟁이 익숙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으로서 무언가 망가졌다는 뜻이니까.
적어도 나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망가진 인간의 말로가 어떤지 수를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보았기에.
“…저는 무섭습니다. 기껏 얻은 약간의 행복조차 잃어버릴까 봐.”
팔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곧이어 따스한 감촉이 내 팔을 감쌌다.
“빼앗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이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예전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모든 걸 뺏길 생각은 없으니.”
전보다도 더 많은 병사와 물자, 그리고 고수들.
수많은 요소들이 내게 미소를 지어주는 전쟁.
맘루크라는 만만치 않은 위협이 존재하더라도,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으리라.
이번 정찰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훨씬 쉬워질 테고.
“은공…”
우리는 말 없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
“압둘. 선택하거라. 앞면이냐, 뒷면이냐?”
“…뒷면으로 하겠습니다.”
압둘의 말에, 파르스의 엄지 위에 올려저 있던 1디나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청명한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 동전은 어지러울 정도로 회전하더니, 이내 그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앞면이로군.”
중요한 일할 때마다 튕기던 낡은 동전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파르스는 동전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영지 건설이 거의 끝났으니, 이제는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다.
“그럼 예정하신 대로 마인들을 산맥 위로 올려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그리고 사대마인은 흩어놓지 말고 붙여놓도록.”
“예.”
압둘이 떠나가자, 그는 서장의 대략적인 지형이 그려진 조잡한 지도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교의 정보망이 끊어진 게 아쉽군.’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마교를 무너트리고, 정복하는 동안 끊어져 버린 중원 내부의 끈이 아쉬웠다. 그 끈이 살아있었다면 뒷공작을 하든, 아니면 얻어낸 정보들로 더 수월하게 작전을 짤 수 있었을 테니까.
‘허나, 정보를 얻을 방법은 많다.’
가장 쉽고 편한 수단이 사라진 것이지, 아예 방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그가 정찰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찰대를 잡으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정찰대원을 사로잡기만 해도 써먹을 곳은 많으니.’
그는 마교를 정복한 후 보았던 마교의 기술들을 이용해 충분한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상대에게서 있는 정보 없는 정보를 전부 빼둘 수 있는 극악한 마공들을.
‘이지를 제압해 꼭두각시로 만드는 마공이라.’
마공은 그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무기였다. 물론 그는 마공을 배울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사막의 후예이자 알라의 대행자인 그가 알라의 가르침에 반하는 아츠를 익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른 맘루크들도 그와 마찬가지였으니, 마인들만이 그들의 목표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주리라.
“이제부터 시작이로구나.”
???:아 내가 더 유리하네 ㅋㅋㅋㅋㅋ 이거 꽁승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