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세요.”
로즈마리는 자신의 지위도 잊은 채 길라흐를 노려보았다.
“뭐?”
“우리 언니에게 부랑아라고 한 거, 사과하시라고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다. 그런 언니한테 부랑아라니.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로즈마리는 순간 욱하는 감정을 느꼈다.
이는 아카샤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샤는 직접 말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리며 주머니에 든 마력초를 만지작거렸다.
에테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녀는 양장본을 꺼내든 채 열심히 무언가를 적었다.
“전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길라흐가 으쓱였다.
“제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들 부랑아였다는 과거는 변하지 않아요. 아, 당신은 배냇물도 안 마른 꼬맹이라서 모르시나요? 그럼 지금이라도 알아두세요. 흐히히히!”
로즈마리는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스태프를 꺼내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에게 들었던 조언이 떠올라 차마 실행으로 옮기진 못하였다.
– 공격을 할 땐 상대방과 너의 전력 차를 파악해야 한다. 뭣도 모르고 감정적으로 달려들었다가 대전쟁 때 변을 당한 얼간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가 직접 경험해서 하는 조언이니 새겨듣도록.
분명 그때 요르문간드가 말했던 ‘얼간이’에는 길라흐도 포함되어 있겠지. 지나친 자만심과 만용. 그 때문에 길라흐는 정령에게 패배하여 로드스톤에 봉인되는 치욕을 겪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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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에테르가 양장본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하는 짓이 동료 폄훼라니.”
“뭐요, 설마 화내시는 건가요?”
“짜증이 치솟는다. 헛소리 작작해라.”
“저는 사실에 근거해서 말했을 뿐이랍니다.”
“네놈은 본관을 모욕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뭐 어떡하실 건데요? 후하하하!”
길라흐의 능청에, 에테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렇게 할 거다.”
다음 순간이었다.
길라흐의 등 뒤로 섬광이 피어올랐다.
마왕성 곳곳에 배치된 유리창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깨진 창문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순식간에 온도가 높아진다. 길라흐와 파스모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저 멀리, 설원 한가운데에서 작은 버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버섯은 찬 공기를 자양분 삼아 점점 크기를 불려나갔다. 끝부분이 진흙빛으로 그을리며 하늘로 뻗어나갔다.
로즈마리의 입에서 달큰한 맛이 났다.
납과 같은 맛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나머지 구천지대계나 사천의 반응도 로즈마리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저, 저게 뭡니까.”
천하의 길라흐가 말을 떨었다.
파스모는 흥미롭다는 듯 피어오른 구름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기다란 팔로 붕대의 일부를 끊어 날려보냈다. 헝겊처럼 낡은 붕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성 곳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상천이 만든 것인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파스모는 끌끌 웃었고, 길라흐는 식은땀을 흘리며 에테르를 노려보았다.
다른 구천지대계는 말이 없었다. 워낙 충격이 컸던 탓이다. 로즈마리는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고, 빌헬름과 엔테로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유일하게 아카샤가 손뼉을 쳐댔다.
마지막으로 요르문간드는….
“따듯하군.”
창가로 다가가서 빛을 쬐었다. 드래곤은 변온 동물이었다.
끝내 정적이 찾아오자, 에테르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길라흐. 예전에 마왕이 본관을 사천으로 등용했을 때 네놈이 가장 불만이 많았었지. 고결한 금안의 핏줄에 이런 잡종이 들어왔네 마네 하면서.”
“…….”
“지금도 그따위 불만이 있나?”
길라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침음을 삼켰다.
여기서 불만이 있다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저 마법을 자신을 향해 쏘아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길라흐는 타인 욕보이는 걸 잘할 뿐이지, 눈치가 없는 족속은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위력이 안 나왔군.”
에테르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펜을 깔짝였다.
“안전거리 바깥에서 투하하긴 했어도, 초기 연료를 너무 적게 집어넣었어. 요르문간드. 올해까지 얼마나 생산 가능하지?”
“고농축 우라늄 말인가? 많이 만들어봤자 100kg이 한계다.”
“플루토늄은?”
“그에 세 배 정도.”
“누구 코에도 못 붙이겠군.”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저런 걸로는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기는커녕 콘크리트 벙커 하나 뚫지 못할 것이다.
저래서야 평범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에테르는 대륙 어느 곳에서도 태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구름을 원했다.
그 정도가 되려면 최소 기가톤 단위의 TNT를 터뜨려야 했다. 이는 못해도 차르봄바 수백 개를 동시에 기폭시켜야 나오는 위력이다.
결국 고유마도인 ‘흑주’를 완성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바람이 달성되는 일은 한사코 없을 것이다.
“요르문간드는 됐고, 지금 깨어난 두 놈은 들어라. 지금부터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본관은 초전도 연구에 집중할 테니 다른 일 시키지 말도록.”
에테르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갔다. 더는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언니, 같이 가요!”
“앗, 나도.”
에테르가 나가려고 하자 로즈마리와 아카샤가 그 뒤를 따라갔다.
회의장엔 정적이 내려앉았고, 남은 세 사천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로 눈빛 교환을 하던 그때. 3석인 빌헬름이 앞으로 나서며 선언했다.
“뭐, 해산하든가 말든가.”
**
마왕성에 돌아온 이후, 연구자료 정리에만 몰두하느라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었다. 에테르는 두 사천을 맞이하고 난 직후 겉옷을 검은 트렌치코트로 바꿔입었다.
브로치는 넥타이로. 테니스 스커트는 슬랙스로.
하얀 목도리는.
목도리는…….
“일단 언니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아카샤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지금 상태라면 마왕의 부활까지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어. 사실상 하나만 모으면 다 끝나는 상태인데 말이야.”
로드스톤은 거의 다 모았다.
남은 건 앞으로 한 개. 엘프들이 애지중지하는 ‘신록의 세계수’의 뿌리와 함께 얽혀서 잠들어 있는 ‘공(空)의 로드스톤’ 뿐이다.
공의 로드스톤은 바람의 로드스톤이라고도 부른다. 바람의 로드스톤은 엘프 협의체와 그 장로들에 의해 보호되고 관리된다.
“요샌 그 관리하는 장로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르나 봐.”
아카샤의 말을 들은 에테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국회의원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단어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핵심만 말하자면, 이걸 얻는 게 다른 로드스톤을 얻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는 거야.”
“그래서 뭐.”
“뭐긴 뭐야. 이번엔 사천 전원이 움직여야 해.”
아카샤의 말은 이러했다. 신록의 세계수 주변은 경비가 삼엄하다. 최고위 정령도 여럿 포진해 있고, 장로들도 대부분 실력자다. 제아무리 사천이라도 혼자서는 작전이 어렵다.
그것 때문에 아카샤도 엘프국으로 출장을 갈 때 ‘로드스톤 탈취’가 아닌, ‘사전답사’를 목표로 잡았었다. 심지어 그 계획조차도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계속 미뤄졌었다.
“어차피 그거 하나만 모으면 마왕은 바로 부활할 수 있거든. 귀찮게 따로 놀 바에야 다 같이 가서 후딱 끝내자는 거지.”
확실히. 효율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어중간한 인력만을 보냈다가 들키면 끝장이다. 그 자리에서 대정령 여럿한테 얻어맞을 수 있다. 어찌어찌 돌아오면 그나마 괜찮다. 대부분의 경우 그 자리에서 고철이 되어 처분당하겠지.
“먼저 잠입으로 한두 명이 먼저 가는 거야. 먼저 간 인원이 로드스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주변 지형을 세세하게 확인하는 거지. 그 다음 명절 같은 때를 틈타서 확…! 뭔 말인지 알지?”
단, 이 방법도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리야드 아카데미도 8석의 습격을 받았다. 덕분에 카우렐리아의 마수 대응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고조에 달한 수준.
“잠입부터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신분증도 조작하고 악의 감추는 훈련도 해야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닐 거다.”
카우렐리아에 마왕군 전력을 집중하면 마왕성이 빈집이 된다. 플레어도, 또 다른 에테르가 남긴 백야도 있는 상황. 잘못하면 제국에게 빈집털이를 당할 수 있었다.
“전력 배분을 잘해야겠군.”
에테르는 무신경하게 말을 던졌다. 마왕의 부활이니 뭐니 하는 거, 당장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올해가 지나기 전까지 기술 하나를 연구해 두고 싶었다.
초고온 초전도 자석.
말 그대로 아주 높은 온도에서도 동작하는 무저항 자석.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자석은 온도가 올라가면 저항이 0이 되기는커녕 자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초전도 자석은 왜? 테슬라가 있잖아.”
“팔정도에서 사용하는 위력으로는 부족하다. 마력 소모도 크고. 그걸 하느니 차라리 스크롤 쪽을 건드려서 세계 자기장을 통째로 움직이도록 할 거다.”
“뭐, 행성 자기장이라도 조작하게?”
아카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언니라지만 황당하다.
“내가 헛소리하는 걸로 보이지.”
에테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스크롤 조합론이 담긴 책을 펼쳤다.
‘설마.’
곁에서 두 언니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로즈마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유 모를 위기감이 느껴진 까닭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우선 네 백야로 바닷물을 전기분해한다. 그걸 행성 단위의 자기장에 투과한 뒤 흑주를 발동할 것이다.”
“어, 언니. 그러면 이 행성이 태양처럼 변할 텐데?”
“어쩌라고.”
“나와 로즈마리까지 휩쓸리잖아. 어음, 농담이지?”
에테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언니와 동생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작은 언니…. 큰 언니 어떡하지? 내가 틸레트에서 연구 못 하게 하는 바람에 이상해진 것 같아……. 내, 내 잘못이야!”
“아니, 네 잘못 아니야. 언니를 뒤통수친 인간들 잘못이지. 그러게 누가 배신을 밥 먹듯이 하래? 나야 좋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모습은 과하다. 냉철한 마왕군 기술고문은 어디로 가고, 그냥 복수귀가 된 것 같지 않은가.
조금 전 언니가 회의실에서 벌였던 퍼포먼스도 있던 탓에 빈말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초고온 초전도 자석? 에이, 설마.
……뭔가 저 사람이라면 해낼 것 같다.
“언니 기분을 풀어줘야 해.”
“하지만 어떻게?”
아카샤와 로즈마리는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다.
해답은 예상보다 빨리 떠올랐다.
“아, 맞다.”
“작은 언니도 나랑 같은 생각해?”
“장난감이 하나 있었잖아.”
“맞아. 바로 그거!”
“근데 오히려 스트레스 받으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어쨌거나 유능한 건 맞잖아?”
긴급 회의를 마친 두 사람이 도로 연구실에 들어갔다. 에테르는 초전도 현상 유도 기계에 액체 헬륨을 막 주입하려던 참이었다.
“뭐.”
아카샤와 로즈마리를 본 에테르의 눈빛은 싸늘함 그 자체였다. 오로지 ‘흑주’의 개발 말고는 무신경한 듯한 표정.
“연구하는 동안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테르는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순 없었는지, 마지못해 밸브를 잠그며 다가왔다.
“무슨 용건인지만 말해.”
“언니, 혹시 조수 필요하지 않아?”
“……조수?”
“이번 겨울 지나면 다 같이 일리야드 아카데미로 가야 할 거 아니야? 그 전에 이런 연구는 후딱 끝내버려야지.”
“고온 초전도 연구는 너희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러니까 조수 필요하지 않냐구.”
“…흐음.”
나쁘지 않다. 에테르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중간한 녀석이라면 방해만 된다.”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일단 와 보라니까? 언니도 깜짝 놀랄 테니까!”
아카샤와 로즈마리는 씨익 웃으며 에테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