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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0

       “사과하세요.”

       ​

       로즈마리는 자신의 지위도 잊은 채 길라흐를 노려보았다.

       ​

       “뭐?”

       “우리 언니에게 부랑아라고 한 거, 사과하시라고요.”

       ​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다. 그런 언니한테 부랑아라니.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로즈마리는 순간 욱하는 감정을 느꼈다.

       ​

       이는 아카샤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샤는 직접 말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리며 주머니에 든 마력초를 만지작거렸다.

       ​

       에테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녀는 양장본을 꺼내든 채 열심히 무언가를 적었다.

       ​

       “전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

       길라흐가 으쓱였다.

       ​

       “제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한들 부랑아였다는 과거는 변하지 않아요. 아, 당신은 배냇물도 안 마른 꼬맹이라서 모르시나요? 그럼 지금이라도 알아두세요. 흐히히히!”

       ​

       로즈마리는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스태프를 꺼내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에게 들었던 조언이 떠올라 차마 실행으로 옮기진 못하였다.

       ​

       – 공격을 할 땐 상대방과 너의 전력 차를 파악해야 한다. 뭣도 모르고 감정적으로 달려들었다가 대전쟁 때 변을 당한 얼간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여가 직접 경험해서 하는 조언이니 새겨듣도록.

       ​

       분명 그때 요르문간드가 말했던 ‘얼간이’에는 길라흐도 포함되어 있겠지. 지나친 자만심과 만용. 그 때문에 길라흐는 정령에게 패배하여 로드스톤에 봉인되는 치욕을 겪은 것이리라.

       ​

       [비밀번호 입력 : 00000000]

       ​

       탁.

       ​

       에테르가 양장본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

       “봉인에서 풀려나자마자 하는 짓이 동료 폄훼라니.”

       “뭐요, 설마 화내시는 건가요?”

       “짜증이 치솟는다. 헛소리 작작해라.”

       “저는 사실에 근거해서 말했을 뿐이랍니다.”

       “네놈은 본관을 모욕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뭐 어떡하실 건데요? 후하하하!”

       ​

       길라흐의 능청에, 에테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

       “이렇게 할 거다.”

       ​

       다음 순간이었다.

       ​

       길라흐의 등 뒤로 섬광이 피어올랐다.

       ​

       마왕성 곳곳에 배치된 유리창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깨진 창문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

       순식간에 온도가 높아진다. 길라흐와 파스모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저 멀리, 설원 한가운데에서 작은 버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버섯은 찬 공기를 자양분 삼아 점점 크기를 불려나갔다. 끝부분이 진흙빛으로 그을리며 하늘로 뻗어나갔다.

       ​

       로즈마리의 입에서 달큰한 맛이 났다.

       ​

       납과 같은 맛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나머지 구천지대계나 사천의 반응도 로즈마리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

       “저, 저게 뭡니까.”

       ​

       천하의 길라흐가 말을 떨었다.

       ​

       파스모는 흥미롭다는 듯 피어오른 구름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기다란 팔로 붕대의 일부를 끊어 날려보냈다. 헝겊처럼 낡은 붕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성 곳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

       “…상천이 만든 것인가?”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파스모는 끌끌 웃었고, 길라흐는 식은땀을 흘리며 에테르를 노려보았다.

       ​

       다른 구천지대계는 말이 없었다. 워낙 충격이 컸던 탓이다. 로즈마리는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고, 빌헬름과 엔테로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유일하게 아카샤가 손뼉을 쳐댔다.

       ​

       마지막으로 요르문간드는….

       ​

       “따듯하군.”

       ​

       창가로 다가가서 빛을 쬐었다. 드래곤은 변온 동물이었다.

       ​

       끝내 정적이 찾아오자, 에테르가 말을 꺼냈다.

       ​

       “그러고 보니 길라흐. 예전에 마왕이 본관을 사천으로 등용했을 때 네놈이 가장 불만이 많았었지. 고결한 금안의 핏줄에 이런 잡종이 들어왔네 마네 하면서.”

       “…….”

       “지금도 그따위 불만이 있나?”

       ​

       길라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침음을 삼켰다.

       ​

       여기서 불만이 있다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저 마법을 자신을 향해 쏘아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길라흐는 타인 욕보이는 걸 잘할 뿐이지, 눈치가 없는 족속은 아니었다.

       ​

       “그런데, 생각보다 위력이 안 나왔군.”

       ​

       에테르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펜을 깔짝였다.

       ​

       “안전거리 바깥에서 투하하긴 했어도, 초기 연료를 너무 적게 집어넣었어. 요르문간드. 올해까지 얼마나 생산 가능하지?”

       “고농축 우라늄 말인가? 많이 만들어봤자 100kg이 한계다.”

       “플루토늄은?”

       “그에 세 배 정도.”

       “누구 코에도 못 붙이겠군.”

       ​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저런 걸로는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기는커녕 콘크리트 벙커 하나 뚫지 못할 것이다.

       ​

       저래서야 평범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에테르는 대륙 어느 곳에서도 태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구름을 원했다.

       ​

       그 정도가 되려면 최소 기가톤 단위의 TNT를 터뜨려야 했다. 이는 못해도 차르봄바 수백 개를 동시에 기폭시켜야 나오는 위력이다.

       ​

       결국 고유마도인 ‘흑주’를 완성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바람이 달성되는 일은 한사코 없을 것이다.

       ​

       “요르문간드는 됐고, 지금 깨어난 두 놈은 들어라. 지금부터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본관은 초전도 연구에 집중할 테니 다른 일 시키지 말도록.”

       ​

       에테르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나갔다. 더는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

       “언니, 같이 가요!”

       “앗, 나도.”

       ​

       에테르가 나가려고 하자 로즈마리와 아카샤가 그 뒤를 따라갔다.

       ​

       회의장엔 정적이 내려앉았고, 남은 세 사천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서로 눈빛 교환을 하던 그때. 3석인 빌헬름이 앞으로 나서며 선언했다.

       ​

       “뭐, 해산하든가 말든가.”

       ​

       ​

       **

       ​

       마왕성에 돌아온 이후, 연구자료 정리에만 몰두하느라 옷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었다. 에테르는 두 사천을 맞이하고 난 직후 겉옷을 검은 트렌치코트로 바꿔입었다.

       ​

       브로치는 넥타이로. 테니스 스커트는 슬랙스로.

       ​

       하얀 목도리는.

       ​

       목도리는…….

       ​

       “일단 언니가 알아야 할 게 있어.”

       ​

       옷을 갈아입기 무섭게 아카샤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

       “지금 상태라면 마왕의 부활까지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어. 사실상 하나만 모으면 다 끝나는 상태인데 말이야.”

       ​

       로드스톤은 거의 다 모았다.

       ​

       남은 건 앞으로 한 개. 엘프들이 애지중지하는 ‘신록의 세계수’의 뿌리와 함께 얽혀서 잠들어 있는 ‘공(空)의 로드스톤’ 뿐이다.

       ​

       공의 로드스톤은 바람의 로드스톤이라고도 부른다. 바람의 로드스톤은 엘프 협의체와 그 장로들에 의해 보호되고 관리된다.

       ​

       “요샌 그 관리하는 장로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르나 봐.”

       ​

       아카샤의 말을 들은 에테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국회의원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단어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핵심만 말하자면, 이걸 얻는 게 다른 로드스톤을 얻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는 거야.”

       “그래서 뭐.”

       “뭐긴 뭐야. 이번엔 사천 전원이 움직여야 해.”

       ​

       아카샤의 말은 이러했다. 신록의 세계수 주변은 경비가 삼엄하다. 최고위 정령도 여럿 포진해 있고, 장로들도 대부분 실력자다. 제아무리 사천이라도 혼자서는 작전이 어렵다.

       ​

       그것 때문에 아카샤도 엘프국으로 출장을 갈 때 ‘로드스톤 탈취’가 아닌, ‘사전답사’를 목표로 잡았었다. 심지어 그 계획조차도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계속 미뤄졌었다.

       ​

       “어차피 그거 하나만 모으면 마왕은 바로 부활할 수 있거든. 귀찮게 따로 놀 바에야 다 같이 가서 후딱 끝내자는 거지.”

       ​

       확실히. 효율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

       어중간한 인력만을 보냈다가 들키면 끝장이다. 그 자리에서 대정령 여럿한테 얻어맞을 수 있다. 어찌어찌 돌아오면 그나마 괜찮다. 대부분의 경우 그 자리에서 고철이 되어 처분당하겠지.

       ​

       “먼저 잠입으로 한두 명이 먼저 가는 거야. 먼저 간 인원이 로드스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주변 지형을 세세하게 확인하는 거지. 그 다음 명절 같은 때를 틈타서 확…! 뭔 말인지 알지?”

       ​

       단, 이 방법도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

       일리야드 아카데미도 8석의 습격을 받았다. 덕분에 카우렐리아의 마수 대응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고조에 달한 수준.

       ​

       “잠입부터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신분증도 조작하고 악의 감추는 훈련도 해야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닐 거다.”

       ​

       카우렐리아에 마왕군 전력을 집중하면 마왕성이 빈집이 된다. 플레어도, 또 다른 에테르가 남긴 백야도 있는 상황. 잘못하면 제국에게 빈집털이를 당할 수 있었다.

       ​

       “전력 배분을 잘해야겠군.”

       ​

       에테르는 무신경하게 말을 던졌다. 마왕의 부활이니 뭐니 하는 거, 당장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올해가 지나기 전까지 기술 하나를 연구해 두고 싶었다.

       ​

       초고온 초전도 자석.

       ​

       말 그대로 아주 높은 온도에서도 동작하는 무저항 자석.

       ​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자석은 온도가 올라가면 저항이 0이 되기는커녕 자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초전도 자석은 왜? 테슬라가 있잖아.”

       “팔정도에서 사용하는 위력으로는 부족하다. 마력 소모도 크고. 그걸 하느니 차라리 스크롤 쪽을 건드려서 세계 자기장을 통째로 움직이도록 할 거다.”

       “뭐, 행성 자기장이라도 조작하게?”

       ​

       아카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언니라지만 황당하다.

       ​

       “내가 헛소리하는 걸로 보이지.”

       ​

       에테르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스크롤 조합론이 담긴 책을 펼쳤다.

       ​

       ‘설마.’

       ​

       곁에서 두 언니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로즈마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유 모를 위기감이 느껴진 까닭이다.

       ​

       “원리는 간단하다. 우선 네 백야로 바닷물을 전기분해한다. 그걸 행성 단위의 자기장에 투과한 뒤 흑주를 발동할 것이다.”

       “어, 언니. 그러면 이 행성이 태양처럼 변할 텐데?”

       “어쩌라고.”

       “나와 로즈마리까지 휩쓸리잖아. 어음, 농담이지?”

       ​

       에테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언니와 동생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

       두 사람은 황급히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

       “작은 언니…. 큰 언니 어떡하지? 내가 틸레트에서 연구 못 하게 하는 바람에 이상해진 것 같아……. 내, 내 잘못이야!”

       “아니, 네 잘못 아니야. 언니를 뒤통수친 인간들 잘못이지. 그러게 누가 배신을 밥 먹듯이 하래? 나야 좋았지만.”

       ​

       아무리 그래도 저 모습은 과하다. 냉철한 마왕군 기술고문은 어디로 가고, 그냥 복수귀가 된 것 같지 않은가.

       ​

       조금 전 언니가 회의실에서 벌였던 퍼포먼스도 있던 탓에 빈말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

       초고온 초전도 자석? 에이, 설마.

       ​

       ……뭔가 저 사람이라면 해낼 것 같다.

       ​

       “언니 기분을 풀어줘야 해.”

       “하지만 어떻게?”

       ​

       아카샤와 로즈마리는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다.

       ​

       해답은 예상보다 빨리 떠올랐다.

       ​

       “아, 맞다.”

       “작은 언니도 나랑 같은 생각해?”

       “장난감이 하나 있었잖아.”

       “맞아. 바로 그거!”

       “근데 오히려 스트레스 받으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어쨌거나 유능한 건 맞잖아?”

       ​

       긴급 회의를 마친 두 사람이 도로 연구실에 들어갔다. 에테르는 초전도 현상 유도 기계에 액체 헬륨을 막 주입하려던 참이었다.

       ​

       “뭐.”

       ​

       아카샤와 로즈마리를 본 에테르의 눈빛은 싸늘함 그 자체였다. 오로지 ‘흑주’의 개발 말고는 무신경한 듯한 표정.

       ​

       “연구하는 동안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에테르는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순 없었는지, 마지못해 밸브를 잠그며 다가왔다.

       ​

       “무슨 용건인지만 말해.”

       “언니, 혹시 조수 필요하지 않아?”

       “……조수?”

       “이번 겨울 지나면 다 같이 일리야드 아카데미로 가야 할 거 아니야? 그 전에 이런 연구는 후딱 끝내버려야지.”

       “고온 초전도 연구는 너희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러니까 조수 필요하지 않냐구.”

       “…흐음.”

       ​

       나쁘지 않다. 에테르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어중간한 녀석이라면 방해만 된다.”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일단 와 보라니까? 언니도 깜짝 놀랄 테니까!”

       ​

       아카샤와 로즈마리는 씨익 웃으며 에테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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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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