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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0

     제국력 98년 6월 2일, 렘버리 캠프 2일차. 오전 9시 44분.

     뭔가 커다란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 생각보다 움직임이 없다.

     “과연. 이곳이 특등실인가. 움직이는 호텔이군.”

     “예. 느긋하게 구경하시죠. 윈체스터 대공.”

     “그냥 잠깐 둘러보고 이야기만 하고 갈 걸세. 젊은 친구들끼리 있는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지.”

     “괜찮습니다. 간밤에 무슨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그래. 없었다네.”

     덕분에 열차 특등실에 방문한 윈체스터 대공은 생각보다 더 편안한 얼굴로 열차를 구경할 수 있었다.

     “황금여명 기사단에서 훈련 교관으로 파견된 소대원들을 급하게 다른 곳으로 파견했다고 보고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겠지.”

     “그렇군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윈체스터 총장은 모든 걸 알고 있다.

     그에게는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내가 직접 전했으니까.

     “황녀. 그리고 두 사람. 잠시 그레이 지브롤터 이사장을 빌려가겠네. 괜찮겠나?”

     “아, 네! 차 한 잔 내려드릴까요? 그, 솜누스 차밖에 없기는 한데.”

     “자네는 솜누스 차 말고는 다른 건 안마시나?”

     “건강에 좋습니다.”

     

     윈체스터 대공이 질린다는 듯이 바라보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에게도 좋은데, 이게 참 뭐라고 말하기 껄끄럽군요.”

     “따뜻한 게 좋긴 하지. 한 잔 부탁…잠깐. 황녀께서 직접?”

     “저, 잘 우려내요! 마침 메이드복도 입고 있고.”

     윈체스터 대공은 아스타시아가 자신이 입고 있는 메이드복의 치마를 좌우로 팔랑거리며 다기를 향해 다가가자 당황했으나, 곧 아스타시아의 미소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특등실 안쪽 별실에 앉았다.

     “내가 살다살다가 제국 황녀의 차도 받아보는군. 그것도 직접.”

     “귀한 차입니다.”

     “어디 좋은 곳에서 재배한 솜누스인가?”

     “아니오. 아스타시아가 내려주기 때문에 귀한 차라는 말이지요.”

     “자네는 병에 걸렸네. 심각할 정도의 습관성 지브롤터 증후군이라는 병이야.”

     “그 무슨 제국식 병명이란 말입니까.”

     

     이제는 제국쪽 작명도 마다하지 않는 윈체스터 대공의 태도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기요. 천천히 드셔요.”

     “고맙소, 황녀. 내 오늘의 잔을 잊지 않겠네.”

     “히힛, 편히 이야기하세요! 누아르랑 웬즈데이는 제가 잠시 맡고 있을게요.”

     아스타시아가 떠났다.

     별실은 보통의 마차와도 같이 사람 두 명 마주보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너비였고, 윈체스터 대공은 품에서 마석 하나를 꺼냈다.

     

     사아아ㅡ

     마석으로부터 흘러나온 광역침묵, 사일런스 마법이 펼쳐진다.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지만, 어딘가 그 마력이 방출되는 방식이 특이하다.

     “침묵마법을 방출하면서 동시에 색적까지 하는 겁니까?”

     “도청장치 같은 게 있는 건지 확인도 하는 거지. 다행히, 없군. 하나 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제게는 그런 거 잘 안 보냅니다.”

     “그런가? 그러면 다음부터 내 개인 취향의 물건은 자네에게 부탁을 해야겠군. 뒤로 흘러들어오는 건 죄다 해체해야 안심하고 쓸 수 있어서 말이야.”

     “하하….”

     확실히 황제를 상대로 이런 부분에 있어서, 현재의 나는 조금 편한 입장이다.

     제국에서 보내지는 물건을 대할 때, 그냥 ‘항상 도청장치나 도촬장치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으니까.

     

     최근에는 그런 걸 빼는 추세라서 좀 더 편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에 대한 감시는 더 은밀해진 상황이다.

     “검토해보겠습니다.”

     “의외군. 절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큰 일 해주셨는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글쎄. 나로서는 그냥 뒷공작을 조금 했을 뿐이거늘.”

     윈체스터 대공이 솜누스 차를 가볍게 들이켰다.

     “황금여명의 쓰레기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네. 심지어 그들 중에는 흑장미와 인연이 깊은 자들도 있지.”

     “모두 솎아내도 되겠습니까?”

     “자네에게 맡길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는 흑장미를 가지치기해도 괜찮아.”

     윈체스터 대공이 품에서 윤전기로 인쇄된 종이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카르멘이 직접 정리한 명단일세.”

     “가지치기 명단입니까?”

     “모가지지. …으하하!”

     “…….”

     윈체스터 대공은 자신의 목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위를 자르는 시늉을 했으나, 나는 잠시 눈을 감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경룡 경기에도 나왔던 이들이군요. 아마 이들, 그 때 경기 때 낙마해서 얼굴도 구겼던 걸로 기억합니다.”

     “회색인 놈은 경룡 자체에 미쳐있고, 다른 놈은 비룡에 타지 않고 다른 이들의 비룡 경기로 돈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지. 나태해져서 시들어버린 흑장미는 솎아내야해.”

     “확인했습니다. 적당히 이들부터 먼저 베어낸 다음 퇴각하겠습니다.”

     “그래. 아무쪼록 정체는 들키지 말고.”

     윈체스터 대공이 믿는다는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의외로군. 그 정도로 정교한 제국검법은 또 언제 익혔나?”

     “보셨습니까?”

     “마나의 기억에 담겨있는 자네의 모습이 안개에 쌓인 것처럼 흐릿하기는 했지만, 검을 휘두르는 궤적은 일부 남아있더군.”

     윈체스터 대공이 한 손을 옆으로 뻗어 손을 움직였다.

     “이렇게였나?”

     “대공께서도 하루 정도 연습하시면 저처럼 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그 시간에 서류라도 한 장 더 처리하고 말지. 이 나이에 강해져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고.”

     “대공.”

     “아무리 마스터급이라고는 해도, 마스터도 나이를 먹고 늙기 마련이야. 내가 현역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다들 내가 아직도 지브롤터의 망나니 다음인줄 알지.”

     윈체스터 대공은 차를 단숨에 들이킨 뒤.

     “나흘째에 할 건가?”

     “예.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살살해주게. 요즘 다시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젊은 친구들의 혈기를 이겨낼 수는 없거든.”

     “살살하면 안 되죠. 그래도 ‘모두’가 보는 앞일 텐데.”

     “전력으로 했다가는 그냥 단순한 위기감 조성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데?”

     “저도 전력까지는 아니니까, 여파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래도, 조심하게.”

     윈체스터 대공은 진지한 얼굴로 창 밖을 가리켰다.

     “제로스 바르셀, 아마도 떠나지 않고 렘버리에 남을 모양이야.”

     “…….”

     “제국의 암살자가 주변을 돌아다닌다면, 어쩌면 왕국의 제1 기사단 단장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여쭤보겠습니다.”

     만일.

     “왕국 제1 기사단 단장이 제국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살해당한 게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한다면?”

     “그 때는….”

     윈체스터 대공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감았다.

     “암살자가 제국 황제에게 미리 이야기를 했냐, 하지 않았냐. 그걸로 갈라지지 않겠나. 하하.”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니라면?”

     “……자네, 진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고?”

     “위기감, 까지는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원래는 그냥 가만히 두려고 했는데, 아카데미 학생들이 자꾸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자꾸 누아르에게 집적거리는 이들이 좀 있어서.”

     “전쟁 중에도 사랑은 피어나는 법인데. 농담이지?”

     “예. 제가 왜 왕국과 제국 사이의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겠습니까? 제국 사이에서 내분을 일으키려고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데.”

     나는 손을 옆으로 뻗어, 허공을 세 번 찔렀다.

     “그건….”

     “황제가 좀 머리 아플 겁니다. 망한지 30년이 넘은 나라의 전통 검술이 지금 왕국에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벌써, 한 건 아니지?” 

     “아직은요.”

     “제국에게 멸망한 나라, 과거의 망령이 나타난 건가….”

     윈체스터 대공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세인트 지오는 속아넘어갈 거고, 대부분은 나처럼 그런가-정도로 생각하겠지. 근데 황제가 속을까?”

     “합스베르크 황제의 성향에 맞추는 거죠.”

     “맞춘다?”

     “껍질을 벗겨내니, 그 안에 진실이 있더라.”

     나는 탁자에 올려진 사탕을 꺼낸 뒤, 그 사탕을 손으로 깨뜨렸다.

     “그리고 또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이 있더라.”

     “제국은…사탕 안에 초콜릿을 넣나?”

     “잘 팔리겠죠.”

     팔려면 뭔들 못 만들랴.

     “제국의 암살자는 껍질입니다. 껍질을 까고 보니, 망국 부흥운동을 벌이면서 암약하는 단체. 그게 뭔가 이상해서 내부까지 살펴보니….”

     나는 입모양으로 대공에게 ‘최종계획’을 전했다.

     “자네, 진짜 그렇게까지 하려고?”

     “예. 기억하시겠지만….”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저는 10살 때부터 아버지를 팔았던 인간입니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팔 수 있다.

     “…하지만.”

     “예. 크림슨 지브롤터 변경백, 은 아니죠.”

     이번에는, 지금의 아버지를 팔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잠시 후레자식이 되어볼까 합니다.”

     대신, 다른 아버지를 팔아치울 예정이다.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

     * * *

     두 시간 뒤, 제국.

     “…라는 게 현재까지 확인된 정보입니다. 시체에서 백은이 발견되었고, 제국검법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말이 안 되는데.”

     합스베르크 황제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흰 제복 사내의 보고에 혀를 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께서 후환을 남겨두셨을 리가.”

     “…….”

     “늦은 나이에 불장난을 벌이신 건 일단 황궁 내부에서의 일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적어도 외부의 적을 그대로 남겨두는 분은 아니셨는데.”

     합스베르크 황제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보고서를 손으로 두드렸다.

     “정말로 그들이 ‘망국의 그림자’라고 말했단 말인가?”

     “예.”

     “혹시 이사벨라의 추종자들이 몰래 빠져나갔나? 아니면 선황의 추종자들이 몰래 따로 빼둔 자들이 왕국으로 넘어갔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황금여명 제1 기사단의 소대 하나를 셋이서 암살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볼까요?”

     “…….”

     그림자, 백발 청년의 질문에도 황제는 눈을 감은 채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폐하.”

     “그곳에는 그레이 지브롤터가 있다. 여차하면 알아서 해결하겠지.”

     까득.

     순간적으로, 방에 이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할 게 뭐 있나. 네가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닌데.”

     합스베르크 황제가 보고서를 옆으로 밀며 이죽거렸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부럽나?”

     “…….”

     “내가 분명 지난 번에 말했을텐데. 낳았다고 아들이 아니며, 내 아들이 되고 싶다면, 나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면 나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그 자는 지브롤터이며, 제국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는 자입니다.”

     “물려받게 만들면 그만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구나. 일개 군왕의 자리는 대부분 물려받고 이어지는 것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지배자는 운명이 정해주는 것이다.”

     “폐하께서, 운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운명을 비틀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자야말로, 진정으로 나의 유지를 이어받을 자격이 있거늘. 하하, 눈 좀 풀거라. 그러다가 어떻게 내 눈에 한 번 들어보려고 사고라도 칠-”

     장난스럽게 말하던 합스베르크 황제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렘버리 캠프에 파견나가있는 제국의 그림자가 총 몇 명이지?”

     “47명입니다.”

     “여자, 유학생을 제외한 남자들 중에서는?”

     “13명입니다.”

     “조사하라. 그들을.”

     합스베르크 황제가 귀찮다는듯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참으로 못났군. 이렇게라도 봐달라고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들이란. 하. 그레이 지브롤터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텐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왜 항상 그레이 지브롤터만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레이 지브롤터가 왕국 기사단을 암살하여 제국이 저지른 짓이라고 누명을 씌우려고 한다고 해도, 그런 짓을 저질러도 용서해주실 겁니까?”

     “아니.”

     황제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서할 필요도 없지. 그것은 잘못이 아니니까.”

     “폐하…!”

     “만일 그레이가 그렇게 한다면…. 으음, 그건 그거대로 꽤, 흥미로운 선택인데.”

     그러고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이죽거렸다.

     “내 혈육을 사칭하여 그림자인척 위장을 한다? 과연. 제 아버지도 팔았는데, 장인어른이라고 팔지 못할까.”

     “…….”

     “그레이는 선택하지 않을 일이지만, 지브롤터 가문의 인간이라면 뭐…. 아하, 그래서 내게 그런 부탁을 한 거였군. 그런 거라면…응? 뭘 그렇게 바라보느냐. 그래, 이 기회에 분명히 말해두지.”

     합스베르크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첩보부장 화이트 0…. 아니, 프란츠 페르디.”

     “큭…!”

     “네가 정녕 내 아들로 인정받고 싶다면, 프란츠 뒤에 오는 이름이 네 어미의 성을 쓰는 게 아니라 나의 후계를 드러내고 싶은 성을 쓰고 싶다면.”

     황제가 창 밖을 가리켰다.

     “그레이 지브롤터의 반만이라도 나를 이해하거나, 이 자리에서 뛰어내려라.”

     “폐하…!”

     “그리고 그레이 지브롤터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는 또 모르지. 아, 아니군.”

     합스베르크 황제는 경멸어린 얼굴로 혀를 찼다.

     “‘테르시안 제국’의 황제가 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영영 테르시안의 성을 받을 수 없을 테니.”

     “…….”

     “아들이 별 거냐.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승계하고, 아버지를 가장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아들인 것을.”

     합스베르크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나를 완성시킬 수 없다, 프란츠.”

     “폐하!!”

     “오직.”

     합스베르크가 두 팔을 벌리며 천장을 가리켰다.

     “그레이 지브롤터만이, 나를 완성시킬 수 있노라.”

     천장.

     합스베르크 황제의 즉위식.

     합스베르크 황제와 에르윈 황후가 나란히 선 옆.

     합스베르크 황제의 옆에 선 아스타시아 황녀의 옆.

     “사위가 장인을 팔아서 원하는 바를 이루겠다면, 그리 해줘야지.”

     그레이 지브롤터가 있었다.

     “그것이 설령, 전쟁이라고 해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
    친아버지도 팔았으니
    장인어른도 팔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공평하니까

    #2
    드디어 200화입니다.
    공모전 수상작 중에서는 제일 진도가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210화까지가 7권이니, 200 / 360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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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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