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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1

       철병팔진(鐵兵八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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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구획으로 나누어진, 마왕군 최대의 군용 연구시설.

       ​

       “이곳에서 수많은 역작이 탄생했지. 반타 토터스, 리바이어던, 캐슬 브라보와 같은 친구들은 물론이요, 생화학병기나 백린탄도 만들었고, 정령을 분리하는 것에 성공한 연구실까지….”

       “안 궁금하다.”

       “알아, 안다고. 상천께서 여기 뭐 하러 오셨는지 정도는.”

       ​

       구천지대계 5석, 엔테로가 부리를 딱딱 부딪히며 걸었다. 답답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느긋한 보폭이었다. 에테르는 두 여동생과 함께 엔테로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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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곳이 내가 연구하는 시설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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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테로는 기다란 손톱으로 어느 연구실 입구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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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나 추출 연구실?”

       “쉽게 말하면 채혈장이지.”

       “저기서 뭐 하는데?”

       “말 그대로 채혈을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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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철병팔진에 온 적이 몇 번 없었다. 대부분의 연구를 독자적인 연구실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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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나 엘프의 피를 채혈하는 건가?”

       “그런 셈이지. 마나가 깃든 혈청은 쓸모가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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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이쪽 분야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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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가 라이터와 함께 마력초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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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슈타인. 세간에는 최고급 브랜드로 알려진 연초였다. 에테르는 버릇처럼 골든슈타인을 받아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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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

       ​

       역시 좋다. 마력 흡수율이 다른 브랜드를 아득히 상회한다. 전투용으로도, 심신 안정용으로도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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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청을 담뱃잎에 잘 먹여서 그런 연초도 만들거든요. 마소를 흡수하는 정도가 일반 시중에서 파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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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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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 방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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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담배맛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알아선 안 될 걸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에테르는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리고는 켁켁거렸다. 폐가 뒤집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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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샤와 로즈마리가 등을 두들겨 주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인간의 혈액이 묻었던 걸 피워야 마법을 쓸 수 있는 종족이라니. 에테르는 당장이라도 제 폐혈관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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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수가 없었다. 금안으로 태어난 이상 감수해야 한다. 못해도 모든 정령을 죽여버리기 전까진 이 저주가 풀리지 않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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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정령을 멸족하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에테르는 이를 갈며 숨을 가다듬었다. 커다란 폭탄을 떠올리며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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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빨리 끝내지. 여기 오래 있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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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라도 빨리 흑주를 완성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에테르는 엔테로의 안내를 받아 채혈장 내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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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혈장 내부는 약품 냄새로 진동했다. 소독과 향균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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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서 사람들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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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또 누군가는 모든 걸 포기한 듯 크게 울었다. 대부분은 채혈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몸을 꽈배기처럼 뒤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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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미간을 한데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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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곳에 조수로 쓸 만한 녀석이 있다고?”

       “밑져야 본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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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테로도 에테르가 여기 온 이유는 잘 몰랐다. 하도 잡혀 온 마도사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가 누구를 원하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 중 대다수는 상천의 요구를 들어줄 능력도, 체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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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이쪽으로 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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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두 여동생의 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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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용 마수 둘이서 무언가를 속닥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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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님, 이년 웃는데요?”

       “내버려 둬, 좋은 꿈 꾸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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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마수의 말을 따라 캡슐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레한 몰골을 한 여자가 실실 쪼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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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거적때기 하나만 입은 상태였다. 비쩍 말라버린 몸매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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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지는 점액질 촉수에 구속당한 채였다. 몸통은 오이처럼 휜 캡슐에 반쯤 파묻힌 채 강제 반신욕을 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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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금빛 머리카락은 윤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했고, 루비처럼 붉은 두 눈동자는 동태처럼 죽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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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고, 피나 더 뽑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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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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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을 관리하는 마수가 무신경하게 레버를 내렸다. 그러자 여자의 몸 곳곳에 연결된 채혈관으로부터 피가 조금씩 뽑혀 나갔다. 여자는 정신병자처럼 웃다 말고 이를 꽉 깨물었다.

       ​

       “큭, 크흑…. 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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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결국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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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주삿바늘 몇 개가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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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년이 또 이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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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는 레버 옆의 버튼을 눌렀다. 캡슐 내부에 전기 충격을 주는 버튼이었다.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

       “그러게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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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쾌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에테르에게, 관리자가 기계팔을 놀리며 꾸벅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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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셨듯이 이년은 근성 한번 대단한 년입니다. 상천께서 조수로 쓰실 계획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미천한 사무직으로서 감히 말씀드리는데, 반항이 심해 어렵지 않으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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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아무 말 않고 기절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빙하기처럼 냉한 눈초리. 로즈마리와 아카샤는 꿀꺽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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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연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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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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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지독한 악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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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 하스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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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눈앞의 여자를 상대로 3년이나 노예처럼 굴려진 전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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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먼 이야기는 아니다. 불과 몇 개월. 두 사람의 입장은 지금과는 정확히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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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때요, 언니. 이 인간 쓰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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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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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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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자면 클라이스가 싫다. 4년 전, 의식이 다른 자아에게 넘어갔을 시절부터 경멸하던 기억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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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으로 재회하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꿈꾸고도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뜻대로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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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떡할까요. 깨울까요?”

       “전기 충격이라도 주게?”

       “이미 버튼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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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지직! 클라이스는 탁음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흉부가 위아래로 움츠러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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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윽…. 하악, 하윽…….”

       ​

       클라이스가 숨을 껄떡이며 응어리진 핏물을 내뱉었다. 그제야 관리인들은 전기 고문을 멈추고 청소 도구를 가지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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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눈동자에 희미하게나마 초점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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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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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멍난 고무풍선처럼 힘 빠진 목소리. 그것이 반 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본 옛 주인의 음색이었다.

       ​

       클라이스는 더는 발음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연구실에 들여놓았다간 개복치처럼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았다.

       ​

       기품 넘치고. 도도하고. 자신을 개처럼 부려먹던 클라이스는 더는 없었다. 옛된 미모는 남아있었지만, 연구에 미친 에테르에게는 감흥조차 없었다. 눈앞에는 그저 흉측한 몰골을 한 전쟁 포로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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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로즈마리에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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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녀석을 연구 조수로 쓰라고?”

       “어…. 왜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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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의 머릿속에서 과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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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에 정권도 내지르고, 스태프로 돌다리 짚듯 두들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고 걸레처럼 질질 끌고 다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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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그땐 이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는데….

       ​

       로즈마리가 물었다.

       ​

       “5석, 이 녀석 마지막으로 먹이 준 게 언제야?”

       “마지막 탈출 시도를 한 이후로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

       “3개월이 다 되도록 밥을 안 줬다고?”

       “그렇다.”

       “한 번도?”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있는 건데?”

       “포도당 수액과 하트만 용액을 최소한으로 주며 연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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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와 아카샤는 경악했다.

       ​

       식사 시간을 따로 주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혈관주사로 영양분을 공급하며 채혈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이었던 로즈마리가 보기에도 뭐랄까…… 조금 너무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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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탈출하고 말 테니까. 조금 전에 몸 비트는 꼴 못 봤나?”

       “하긴, 도망가면 문제만 생기지.”

       “그래서, 상천에게 묻고자 한다. 데려갈 건가, 말 건가?”

       ​

       모두의 시선이 에테르에게로 향한다.

       ​

       에테르는 이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생각이 길어졌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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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 데려가기 싫다.

       ​

       인간은 더는 꼴도 보기 싫었다. 기회란 기회는 전부 날려먹은 배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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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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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

       “데려가지.”

       ​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연구를 빨리 끝내는 것이 중요했다.

       ​

       “알겠어요.”

       ​

       로즈마리는 축 늘어진 클라이스를 강제로 꺼냈다. 힘이 쫙 빠진 클라이스는 별다른 저항조차 못 하고 그대로 끌려나왔다.

       ​

       “케흑, 크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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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연달아 기침했다. 공기가 밀려나간 기관지에서 다시 한번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

       그녀가 간신히 힘을 짜내서 말했다.

       ​

       “죽, 여…….”

       ​

       그 말을 귀담아듣는 마수는 없었다. 엔테로는 관리 요원에게 주문하여 쇠로 된 목걸이를 가져오게 했다.

       ​

       그가 클라이스에게 목걸이를 채웠다. 목줄의 한쪽 끝에는 내구성 좋은 소재로 만든 사슬을 걸고, 반대쪽 끝은 플라스틱 손잡이를 달아 간단하게 밀고 당길 수 있도록 장치했다.

       ​

       “자,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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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마리는 엔테로에게 손잡이를 건네받아 에테르에게 건넸다.

       ​

       무슨 개새끼 분양하는 것도 아니고. 에테르가 코웃음을 치며 손잡이를 잡았다.

       ​

       “이제부터 언니 조수? 노예? 아무튼 그런 거예요. 원래 탈출하려던 거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아카샤 언니가 처분은 큰 언니에게 맡기자고 해서 관뒀어요. 언니 마음대로 부려먹다가 필요 없어지면 버리세요. 알겠죠?”

       ​

       목줄을 찬 클라이스는 다릿심이 없어 바닥에 엎어졌다. 에테르는 다짜고짜 목줄을 당기는 대신 고개를 슬쩍 내렸다.

       ​

       “컥, 케흑….”

       “일어나.”

       “차, 차라리 죽, 여줘….”

       “일어나라고.”

       ​

       에테르는 목줄을 꽉 잡아당겼다. 클라이스의 몸이 맥없이 앞으로 튕겨나갔다.

       ​

       “고개 들어.”

       “크윽….”

       “세 번 말 않는다. 고개 들어.”

       ​

       로즈마리조차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정도의 위압이었다. 클라이스는 심장에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머리를 천천히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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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얼굴 기억하나?”

       “……에테르.”

       “인지 능력에는 문제없군.”

       ​

       몸이 다 망가지긴 했지만, 사고는 멀쩡하다. 심신의 피폐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

       연구를 보조해 줄 뇌만 남아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

       ​

       “5석.”

       “왜 그런가?”

       “마지막으로 포도당 주사를 맞힌 게 언제지?”

       “거의 50시간이 지났다.”

       “빡빡하게도 굴리는군.”

       “안 그러면 저번처럼 도망가거든.”

       ​

       에테르는 신경질적으로 웃어대더니, 그대로 클라이스를 끌고 철병팔진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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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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