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병팔진(鐵兵八陣).
여덟 구획으로 나누어진, 마왕군 최대의 군용 연구시설.
“이곳에서 수많은 역작이 탄생했지. 반타 토터스, 리바이어던, 캐슬 브라보와 같은 친구들은 물론이요, 생화학병기나 백린탄도 만들었고, 정령을 분리하는 것에 성공한 연구실까지….”
“안 궁금하다.”
“알아, 안다고. 상천께서 여기 뭐 하러 오셨는지 정도는.”
구천지대계 5석, 엔테로가 부리를 딱딱 부딪히며 걸었다. 답답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느긋한 보폭이었다. 에테르는 두 여동생과 함께 엔테로의 뒤를 따라갔다.
“저곳이 내가 연구하는 시설이로다.”
엔테로는 기다란 손톱으로 어느 연구실 입구를 가리켰다.
“…마나 추출 연구실?”
“쉽게 말하면 채혈장이지.”
“저기서 뭐 하는데?”
“말 그대로 채혈을 하는 곳이다.”
에테르는 철병팔진에 온 적이 몇 번 없었다. 대부분의 연구를 독자적인 연구실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엘프의 피를 채혈하는 건가?”
“그런 셈이지. 마나가 깃든 혈청은 쓸모가 많거든.”
에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이쪽 분야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로즈마리가 라이터와 함께 마력초를 내밀었다.
골든슈타인. 세간에는 최고급 브랜드로 알려진 연초였다. 에테르는 버릇처럼 골든슈타인을 받아 불을 붙였다.
“후우.”
역시 좋다. 마력 흡수율이 다른 브랜드를 아득히 상회한다. 전투용으로도, 심신 안정용으로도 제격이다.
“혈청을 담뱃잎에 잘 먹여서 그런 연초도 만들거든요. 마소를 흡수하는 정도가 일반 시중에서 파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적어도,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바, 방금 뭐라고…?”
갑자기 담배맛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알아선 안 될 걸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에테르는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리고는 켁켁거렸다. 폐가 뒤집어지는 듯했다.
아카샤와 로즈마리가 등을 두들겨 주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인간의 혈액이 묻었던 걸 피워야 마법을 쓸 수 있는 종족이라니. 에테르는 당장이라도 제 폐혈관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금안으로 태어난 이상 감수해야 한다. 못해도 모든 정령을 죽여버리기 전까진 이 저주가 풀리지 않을 테고 말이다.
결국 정령을 멸족하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에테르는 이를 갈며 숨을 가다듬었다. 커다란 폭탄을 떠올리며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빨리, 빨리 끝내지. 여기 오래 있기는 싫다.”
하루라도 빨리 흑주를 완성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에테르는 엔테로의 안내를 받아 채혈장 내부로 들어갔다.
채혈장 내부는 약품 냄새로 진동했다. 소독과 향균을 위한 것이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또 누군가는 모든 걸 포기한 듯 크게 울었다. 대부분은 채혈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몸을 꽈배기처럼 뒤틀었다.
에테르가 미간을 한데 모았다.
“이런 곳에 조수로 쓸 만한 녀석이 있다고?”
“밑져야 본전이지.”
엔테로도 에테르가 여기 온 이유는 잘 몰랐다. 하도 잡혀 온 마도사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가 누구를 원하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 중 대다수는 상천의 요구를 들어줄 능력도, 체력도 없었다.
“언니,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에테르는 두 여동생의 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용 마수 둘이서 무언가를 속닥이는 중이었다.
“관리자님, 이년 웃는데요?”
“내버려 둬, 좋은 꿈 꾸나 보지.”
두 마수의 말을 따라 캡슐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레한 몰골을 한 여자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여자는 거적때기 하나만 입은 상태였다. 비쩍 말라버린 몸매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드러났다.
사지는 점액질 촉수에 구속당한 채였다. 몸통은 오이처럼 휜 캡슐에 반쯤 파묻힌 채 강제 반신욕을 당하고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금빛 머리카락은 윤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했고, 루비처럼 붉은 두 눈동자는 동태처럼 죽어있다.
“됐고, 피나 더 뽑아봐.”
덜컹!
이곳을 관리하는 마수가 무신경하게 레버를 내렸다. 그러자 여자의 몸 곳곳에 연결된 채혈관으로부터 피가 조금씩 뽑혀 나갔다. 여자는 정신병자처럼 웃다 말고 이를 꽉 깨물었다.
“큭, 크흑…. 아윽……!”
그러다가 결국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여자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주삿바늘 몇 개가 뽑혔다.
“이년이 또 이러네.”
관리자는 레버 옆의 버튼을 눌렀다. 캡슐 내부에 전기 충격을 주는 버튼이었다.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러게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불쾌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에테르에게, 관리자가 기계팔을 놀리며 꾸벅 인사했다.
“보셨듯이 이년은 근성 한번 대단한 년입니다. 상천께서 조수로 쓰실 계획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미천한 사무직으로서 감히 말씀드리는데, 반항이 심해 어렵지 않으실지…….”
에테르는 아무 말 않고 기절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빙하기처럼 냉한 눈초리. 로즈마리와 아카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악연이군.”
에테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주 지독한 악연이야.”
클라이스 하스펠트.
에테르는 눈앞의 여자를 상대로 3년이나 노예처럼 굴려진 전적이 있었다.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먼 이야기는 아니다. 불과 몇 개월. 두 사람의 입장은 지금과는 정확히 정반대였다.
“어때요, 언니. 이 인간 쓰실 거예요?”
로즈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테르는 잠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클라이스가 싫다. 4년 전, 의식이 다른 자아에게 넘어갔을 시절부터 경멸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런 식으로 재회하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꿈꾸고도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마주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뜻대로 되지 못했다.
“어떡할까요. 깨울까요?”
“전기 충격이라도 주게?”
“이미 버튼 눌렀습니다.”
파지직! 클라이스는 탁음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흉부가 위아래로 움츠러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크윽…. 하악, 하윽…….”
클라이스가 숨을 껄떡이며 응어리진 핏물을 내뱉었다. 그제야 관리인들은 전기 고문을 멈추고 청소 도구를 가지러 떠났다.
클라이스의 눈동자에 희미하게나마 초점이 돌아온다.
“당, 신은…….”
구멍난 고무풍선처럼 힘 빠진 목소리. 그것이 반 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본 옛 주인의 음색이었다.
클라이스는 더는 발음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연구실에 들여놓았다간 개복치처럼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았다.
기품 넘치고. 도도하고. 자신을 개처럼 부려먹던 클라이스는 더는 없었다. 옛된 미모는 남아있었지만, 연구에 미친 에테르에게는 감흥조차 없었다. 눈앞에는 그저 흉측한 몰골을 한 전쟁 포로만이 있을 뿐이다.
에테르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로즈마리에게 되물었다.
“이런 녀석을 연구 조수로 쓰라고?”
“어…. 왜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로즈마리의 머릿속에서 과거가 떠올랐다.
배에 정권도 내지르고, 스태프로 돌다리 짚듯 두들겨 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고 걸레처럼 질질 끌고 다니기는 했다.
그래도 그땐 이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는데….
로즈마리가 물었다.
“5석, 이 녀석 마지막으로 먹이 준 게 언제야?”
“마지막 탈출 시도를 한 이후로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
“3개월이 다 되도록 밥을 안 줬다고?”
“그렇다.”
“한 번도?”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있는 건데?”
“포도당 수액과 하트만 용액을 최소한으로 주며 연명시켰다.”
로즈마리와 아카샤는 경악했다.
식사 시간을 따로 주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혈관주사로 영양분을 공급하며 채혈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이었던 로즈마리가 보기에도 뭐랄까…… 조금 너무한 처사였다.
“동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탈출하고 말 테니까. 조금 전에 몸 비트는 꼴 못 봤나?”
“하긴, 도망가면 문제만 생기지.”
“그래서, 상천에게 묻고자 한다. 데려갈 건가, 말 건가?”
모두의 시선이 에테르에게로 향한다.
에테르는 이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생각이 길어졌던 탓이다.
솔직히 말해, 데려가기 싫다.
인간은 더는 꼴도 보기 싫었다. 기회란 기회는 전부 날려먹은 배신자들.
클라이스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았다.
그러나.
“데려가지.”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연구를 빨리 끝내는 것이 중요했다.
“알겠어요.”
로즈마리는 축 늘어진 클라이스를 강제로 꺼냈다. 힘이 쫙 빠진 클라이스는 별다른 저항조차 못 하고 그대로 끌려나왔다.
“케흑, 크헥…!”
클라이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연달아 기침했다. 공기가 밀려나간 기관지에서 다시 한번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간신히 힘을 짜내서 말했다.
“죽, 여…….”
그 말을 귀담아듣는 마수는 없었다. 엔테로는 관리 요원에게 주문하여 쇠로 된 목걸이를 가져오게 했다.
그가 클라이스에게 목걸이를 채웠다. 목줄의 한쪽 끝에는 내구성 좋은 소재로 만든 사슬을 걸고, 반대쪽 끝은 플라스틱 손잡이를 달아 간단하게 밀고 당길 수 있도록 장치했다.
“자, 언니.”
로즈마리는 엔테로에게 손잡이를 건네받아 에테르에게 건넸다.
무슨 개새끼 분양하는 것도 아니고. 에테르가 코웃음을 치며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부터 언니 조수? 노예? 아무튼 그런 거예요. 원래 탈출하려던 거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아카샤 언니가 처분은 큰 언니에게 맡기자고 해서 관뒀어요. 언니 마음대로 부려먹다가 필요 없어지면 버리세요. 알겠죠?”
목줄을 찬 클라이스는 다릿심이 없어 바닥에 엎어졌다. 에테르는 다짜고짜 목줄을 당기는 대신 고개를 슬쩍 내렸다.
“컥, 케흑….”
“일어나.”
“차, 차라리 죽, 여줘….”
“일어나라고.”
에테르는 목줄을 꽉 잡아당겼다. 클라이스의 몸이 맥없이 앞으로 튕겨나갔다.
“고개 들어.”
“크윽….”
“세 번 말 않는다. 고개 들어.”
로즈마리조차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정도의 위압이었다. 클라이스는 심장에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머리를 천천히 올렸다.
“내 얼굴 기억하나?”
“……에테르.”
“인지 능력에는 문제없군.”
몸이 다 망가지긴 했지만, 사고는 멀쩡하다. 심신의 피폐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연구를 보조해 줄 뇌만 남아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
“5석.”
“왜 그런가?”
“마지막으로 포도당 주사를 맞힌 게 언제지?”
“거의 50시간이 지났다.”
“빡빡하게도 굴리는군.”
“안 그러면 저번처럼 도망가거든.”
에테르는 신경질적으로 웃어대더니, 그대로 클라이스를 끌고 철병팔진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