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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1

     

    “폐하.”

     

    아셀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국의 12대 황제가 방금 눈앞에서 최후의 황명을 남기고 서거했다.

     

    더없이 영웅다운 마지막이었다.

     

    황제의 시대가 끝날 때가 가깝다고는 황실의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헤이케만 해도 티나지 않게 국장부터 인수인계 등 뒷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그의 건강 상태를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이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셀라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헤이케도 게오르크도 라우가도 마찬가지였다.

     

    오십 넘게 나이가 차이 나는 부친이었다. 계급과 지위 때문에 가족이라는 감각은 더없이 옅었던 아셀라였다.

     

    그렇지만 심장 한 켠이 뜨거워졌다.

     

    “전군, 전진하라!”

     

    묵념은 잠시, 그의 마지막 황명을 수행하기 위해 기사단은 어느 때보다도 투지를 발산하며 사기를 올렸다.

     

     

     

    전투가 끝나고, 아셀라는 라스를 찾았다.

     

    황폐해진 공작령의 시내를 보니 꼭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것 같아 불안해졌다.

     

    최소한의 호위만을 동행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던 아셀라는, 곧 어째선지 풍경이 눈에 익었다고 알게 됐다.

     

    ‘여기에 와본 적이 있었나?’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점점 마음이 흐트러져 가슴의 고동이 커져만 간다.

     

     

    모퉁이를 돌아, 다 쓰러져가는 민가 너머.

     

    폐허 한복판에서도 밝게 희끗거리는 머리칼을 발견했다.

     

    반가움에 그에게 달려가려다,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셀라는 그의 앞에 서 있는 용사를 보고서 그제야 깨달았다.

     

    천리안에서 봤던 광경이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그녀가 다음으로 할 말을 아셀라는 알고 있었다.

     

    “저와 함께 가요.”

     

    지금껏 천리안이 현실에서 똑같이 반복된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마법이 정교해졌다는 의미였지만 기뻐할 틈은 없었다.

     

    “함께라면, 용사 파티 말입니까.”

     

    “네.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약속할게요.”

     

    리셰가 라스에게 확고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반드시 제가 지키겠어요.”

     

    아셀라는 입을 틀어막으며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라스가 그 위험한 곳에 간다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물론 그를 뛰어넘는 실력을 가진 치유사는 대륙 어디에도 없으리라. 내의원에서도, 연무회에서도 그는 보란 듯이 증명해냈다.

     

    파티의 치유사가 아니라, 어쩌면 성자로 선택받는 일까지 생길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절대 라스가 용사와 출정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라스는 내 주치의야.’

     

    아셀라는 천지가 무너진들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당장에라도 뛰어나가 그들의 대화를 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윽.’

     

    아셀라는 그제야 미래의, 아니. 현재의 자신이 도망쳤던 이유를 깨달았다.

     

    라스의 대답을 듣고 싶지가 않다.

     

    지금 그가 뭐라 대답하는지 들어버리면 미래가 확정되어 버린다.

     

    라스가 알았다고 해 버리면.

    자신이 그 말을 들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귀를 틀어막아 관측하지 않는다면 시간선이 확정되지 않을지도.

     

    ‘나중에 라스를 꾀어버리자. 내가 말도 못 꺼내게 해서 가두면 라스가 내 곁에 남는 시간선만이 남게 돼.’

     

    어느 시간선을 진짜 역사로 만들지는 스스로의 손으로 고르고 말겠다.

     

    절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아셀라는 시선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황녀님!”

     

    호위기사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뒤쫓는다. 아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턱, 도중 잔해에 발이 걸려 꼴사납게 넘어졌다. 곧장 일어서서 얼얼한 무릎을 어루만졌다.

     

    “…아야.”

     

    긁힌 자리에서 송골송골 피가 맺혀온다.

     

    “괜찮으십니까?”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아셀라는 호위기사에게 손을 내밀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치료받고 싶었다.

     

    라스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래도, 참는다.

     

    부디 그가 올바른 선택을 했길 바라며, 아셀라는 터덜터덜 성채를 향해 걸어갔다.

     

     

     

    ***

     

     

     

    ―――――――――――

    ※주의

    · 당신은 기로에 섰습니다.

    · 이 선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

     

     

    상태창에 뜬 메시지.

     

    지금부터 내가 리셰에게 할 대답이, 앞으로 일어날 굿엔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기슈타로부터 모험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와 같다.

     

    용사 파티의 치유사로 함께 싸우자는 리셰의 부탁.

     

    대륙에 명성을 떨치고 후세에 기록되는 영웅으로서의 길이다.

     

     

    리셰는 차분하게 내 대답을 기다린다.

     

    내민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 그녀가 내심 긴장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큰 고심 끝에 한 부탁이었겠지.

     

    그녀는 올곧게 성장할 거다.

     

    포기를 모르고, 주위에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용사.

     

    때로는 좌절을 품을지 몰라도 마음 근본에서 선을 놓지 않는 사람이다.

     

    언젠가 내가 알던 샤를이 되어, 함께 술잔을 기울일 날도 찾아오지 않을까 한다.

     

     

    …대화가 멈추고, 타닥타닥. 작은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가 적막 속을 채운다.

     

    조용한 내 앞에 추가로 상태창이 메시지를 출력했다.

     

     

    ―――――――――――

    · 엔딩의 20%만이 남았습니다.

    · 선택을 위한 단서가 주어집니다.

     

    · [엔딩 열람권]이 1개 지급됩니다.

    · 원하는 엔딩을 단 한 번 체험합니다.

    ―――――――――――

     

     

    ‘열람권이라.’

     

    일종의 미래시일까.

     

    사용하면 굿엔딩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으니 선택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지금은 필요 없어.’

     

    나는 상태창을 밀어서 치웠다.

     

    미래를 보든 말든, 여기서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리셰에게 말했다.

     

    “저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용사님.”

     

    리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내렸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셨습니까.”

     

    “네. 선생님이 황녀님을 내버려 두고 저를 선택하실 리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티가 나요?”

     

    “아뇨, 티는 안 났어요.”

     

    슬쩍 혀를 빼무는 리셰.

     

    뭐, 그녀가 정확하게 봤다.

     

    지금 내가 함께 엔딩을 보고 싶은 사람은, 아셀라 외엔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님, 대신 하나 부탁이 있는데요.”

     

    “예.”

     

    슥, 리셰가 내게 가까이 얼굴을 붙여왔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살랑였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갑자기요?”

     

    “그게… 전부터 그렇게 부르고 싶었거든요. 언니는 늘 반말 하니까, 조금 부러워서요. 근데 나이도 어린데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걘 처음에 제 나이를 몰랐거든요. 뭐.”

     

    그 정도야 괜찮겠지.

     

    “편한 대로 부르세요. 이미 여동생도 있어서.”

     

    “응, 라스 오빠.”

     

    “반말까지 쓰라고는 안 했는데.”

     

    리셰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빨이 드러나도록 생글댔다.

     

    몸을 떨어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다.

     

    “마왕군 토벌은 맡겨주세요. 겁먹어서 도망친 오빠 몫까지 열심히 싸울게요.”

     

    “맡기겠습니다.”

     

    “아, 근데 오빠만 한 치유사를 또 찾을 수가 있을까요? 법국 분이셨던가, 그분이 성녀로 오시는 걸까요.”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멀리서 콩콩 뛰어오는 새하얀 성의가 있었다.

     

    “고트베르크 선생!”

     

    앰브로시아였다.

     

    “자매님, 부상은 없으십니까.”

     

    “괜찮소이다. 그보다 폐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폐하와 관련된 일은 천황궁에서 준비하고 있소. 월광궁에도 맡길 일이 있어 찾고 있었소만. 음? 그게 무엇이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앰브로시아의 머리에 가운을 씌워줬다.

     

    법국 교황이 떨어트렸던 바로 그 전대 성녀의 베일이었다.

     

    ―화아아악!!

     

    별안간 대낮이라도 된 듯 먹구름을 꿰뚫고 하늘에서 대량의 신성력이 쏟아지며 앰브로시아를 비추었다.

     

    “뭐뭐뭣, 대체 이건 또 무엇이오!!”

     

    “성녀로 간택된 걸 축하드립니다, 자매님.”

     

    “소녀가 성, 지금 뭐라고?!”

     

    앰브로시아가 입을 떡 벌렸다. 어두운 날씨 속에서 혼자 새하얀 빛 속에 서 있으니 꼭 무대 위 일인극 같았다.

     

    내가 리셰에게 말했다.

     

    “여기, 데려가시면 됩니다.”

     

    리셰가 멍한 표정으로 강아지처럼 혀를 살짝 내밀었다. 팔을 버둥대는 앰브로시아를 바라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잘 부탁드려요, 성녀님.”

     

    “아니, 용사님, 그게 아니라 소녀가… 도당체 영문을 모르겠구먼.”

     

    얼떨떨해하면서도 앰브로시아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는 두 사람.

     

    잘 생각해보니 나는 인사 배치도 꽤 잘 하지 않나 싶다.

     

     

    ―――――――――――

    [영웅의 길]

    · 당신은 인간입니다 0%

    · 용사와 성자 0%

     

    ·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욕망의 길]

    · 주치의는 ■■■ ■치고 ■■■■

    25% → 51%

    ―――――――――――

     

     

    상태창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굿엔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셀라와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

     

     

     

    공작령 방어전의 후속 처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피해 복구도 복구였으나 무엇보다 황제의 국장 준비가 우선이었다.

     

    기사들이 보고하길, 그는 마물을 쓰러트린 후에도 지상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죽은지 모른 이도 많았다고 했다.

     

    후처리를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를 가동하고 돌아온 아셀라는 진이 다 빠진 기색이었다.

     

    국장은 목휘궁에서 담당하여 준비한다. 보조를 맡을 월광궁은 공작령에서 하룻밤 대기하여 묵게 되었다.

     

     

    나는 램프만 몇 개 놓인 작은 침실에서 아셀라의 진료를 봐주고 있었다.

     

    작은 방이었다. 전투의 여파로 시설이 많이 파괴된 지라 이 정도도 괜찮은 편이었다.

     

    “황녀님.”

     

    “어허.”

     

    그리고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못 하게 금언령을 내렸다.

     

    왜 또.

     

    “마나 주사 때문인데요. 한 대 맞으시는 게 회복에 좋으실 텐데, 워낙 싫어하시니 의사를 묻고자…”

     

    “몸짓으로 하라고 했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답답하게 굴고 있었다.

     

    명령대로 온갖 몸짓을 섞어 의사소통을 하려니 그녀가 먼저 답답했던 모양이다.

     

    결국 업무에 관련된 내용만 천천히 발언할 것을 허락했다.

     

    “큰 부상은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외부활동이 길었으니 내일 황실로 돌아가면 정밀검사도 한 번 진행하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게 해. 진료 끝났어?”

     

    “얼추요.”

     

    “그럼 거기 들어가 있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아셀라가 방구석의 욕조를 가리켰다.

     

    “저기서 자라고요?”

     

    “응.”

     

    “저도 지쳤는데요. 며칠이나 강행군을 한 데다 큰 전투가 있었…”

     

    “어허.”

     

    “하다못해 바닥에서 자게 해 주시죠.”

     

    내 요청을 들은 아셀라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침대 이불보를 들추었다. 들어오라는 표현이었다.

     

    램프 불을 끄고 아셀라와 한 침대에 들어간다. 작은 침대라 아셀라와 거리를 벌리기에 여의치가 않았다.

     

    바닥이 더 낫겠어.

     

    “황녀님, 만약의 말씀인데요.”

     

    “너는 정말 내 말을 안 듣는구나.”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요.”

     

    “용사 얘기라면 절대 하지 마.”

     

    “아니에요.”

     

    “…그럼 뭔데?”

     

    바스락. 아셀라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저도 언젠가 주치의를 퇴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앰브로시아 자매님이 성녀로 승격하신 것처럼요.”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

     

    “제 직책은 언젠가 끝나지만.”

     

    나는 아셀라의 손을 잡았다.

    우리의 약혼반지가 맞닿았다.

     

    “황제라는 직책은 죽어야만 끝나니까요.”

     

    아셀라는 내 말에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베개에 볼이 눌린 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셀라에게 물었다.

     

    반드시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혹시나 그런 때가 온다면, 저와 함께 후작가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내 질문의 내용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지, 아셀라는 한참을 눈을 깜빡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FT_360님 후원 감사해요!! 각 루트의 엔딩은… 본편에서 나올 예정도 있고, 외전에서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네요! 저도 여러 if를 그려보는 걸 좋아한답니다.
    한 가지 비밀을 몰래 말씀드리자면, 사실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는 시작부터 if였을지도…?
    200화를 축하해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려요! 200화는 처음 도착해보는 숫자네요. 장기연재는 정말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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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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