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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2

       엘랑카야 산맥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건 밥부터 먹어야 일사천리로 해결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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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클라이스의 상태로는 연구 조수를 시키기는커녕 바닥 청소를 명령하기도 껄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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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그대로 사람이 쓰러져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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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밥부터 먹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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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클라이스에게 미음을 끓여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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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 몇 푼만도 못한 싸구려 식단이었지만, 오랫동안 정맥주사로만 영양을 공급받아 위가 비어버린 클라이스에게는 가뭄에 단비를 맞은 것처럼 기꺼운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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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놋쇠그릇에 담긴 미음을 허겁지겁 퍼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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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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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작 죽여달라고 했을 땐 언제고, 숨통이 트일 기미가 보이자마자 대뜸 살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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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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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를 데면서까지 뜨거운 죽을 먹는 모습이 꼭 부랑아 같았다. 놋그릇에 든 쌀죽을 소금간 하나 없이 싹싹 긁어먹는 모습을 본 에테르는 그녀가 식사를 마치는 동안 이론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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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전도에 관련한 이론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령을 어떻게 하면 빨리 족칠 수 있을지 그 기본을 탐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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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복잡한 비선형 편미분방정식을 푸는 것 이상으로 난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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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녀는 상천(上天)의 에테르. 머리 자체가 수치해석을 간단하게 처리하기 위해 설계된 그녀이니만큼 모든 과정을 암산으로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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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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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마침 숟갈을 내려놓은 클라이스가 에테르의 눈치를 알음알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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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그녀의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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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는 미친년처럼 풀어헤쳤고, 반복된 채혈로 인해 팔다리 중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으며, 팔은 진달래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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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캐미솔보다도 단면적이 좁은 천쪼가리 하나 걸친 것이 꼭 창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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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에 클라이스는 숟갈을 입에 가져갈 때마다 반대 손으로 다른 곳을 가려야만 했다. 그런 그녀를 음흉한 시선으로 보는 자는 없었지만, 사람 의식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었다.

       ​

       “당신, 에테르 맞죠? 왜 이런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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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지시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클라이스는 무의미한 발언이라고 느꼈다.

       ​

       이미 눈앞의 소녀와 똑같이 생긴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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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샤.

       ​

       정황상 에테르는 그녀의 쌍둥이 언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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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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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혹시 마수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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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눈가에 곤혹스러움이 비친다.

       ​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테르는 한때 클라이스의 전속 연구노예였는데, 그때 클라이스는 마수를 쓰러뜨릴 스크롤 연구만 주야장천 해댔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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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도 에테르는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3년을 함께했다. 연구비가 급해진 자신이 2황자에게 에테르를 팔아버리려고 하기 직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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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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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턱 끝을 괸 채로 회전식 의자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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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새 지능이 퇴화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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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 날씨처럼 싸늘한 눈빛. 클라이스의 몸이 우뚝 굳었다.

       ​

       절멸급 이상의 마수가 내는 압도적인 기운, ‘위압’이다. 클라이스의 심장이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쿵쿵 뛰었다.

       ​

       “벌써부터 머리가 망가지면 곤란해. 너처럼 스크롤에 도가 튼 녀석은 온 대륙을 다 뒤져도 찾기 어렵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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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손톱을 다듬으며 무신경하게 내뱉었다.

       ​

       “밥을 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안 그래?”

       “이, 일이라뇨.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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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감이 엄습했다.

       ​

       마수들이 포로를 상대로 이야기하는 일이란 대개 ‘고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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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클라이스가 조금 전까지 받던 것도 고문이었다. 마수들은 마력을 모은다는 이유로 그녀를 감금했지만, 클라이스 입장에서는 몸의 피를 모두 뽑아내는 생고문이나 다름없었다.

       ​

       아주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마수들은 인간과 엘프, 정령의 신음을 즐긴다. 세간에 알려진 금안족의 인식과는 정반대였다.

       ​

       “글쎄, 무슨 일부터 시킬까.”

       ​

       에테르가 침음을 삼키며 클라이스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클라이스는 굴로 숨어드는 뱀처럼 몸을 웅크렸다.

       ​

       예전 같았으면 그녀가 주도권을 잡아 에테르를 멋대로 부렸을 터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일이 불가능해졌다.

       ​

       눈치껏 확인한 결과, 눈앞의 소녀는 마왕군에서 꽤 높은 서열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구천지대계 앞에서도 당당히 탈출을 시도했던 클라이스였다. 그때 그녀에겐 플레어라는 비장의 수가 있었던 덕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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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눈앞의 소녀. 에테르는 자신을 제치고 플레어를 완성해낸 존재. 당연히 그에 대한 방어책도 있을 것이다.

       ​

       그러한 점이 클라이스를 위축시켰다. 클라이스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쪼그라들었다.

       ​

       “할 일이 많아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 본관도 누군가를 부려먹은 적은 손에 꼽아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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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시선이 두려웠다. 무서웠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

       저절로 몸을 뒤로 내뺐지만 쉽지 않았다.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반신이 곧 앞으로 당겨졌다.

       ​

       “아악…!”

       ​

       목이 콱 조여들자 숨이 턱 막혔다.

       ​

       “어딜 가려고.”

       ​

       퉁퉁 부어오른 눈가에 눈물이 구슬지듯 맺혔다.

       ​

       지옥, 아니.

       ​

       노예 생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

       ​

       의외로 에테르가 처음으로 시킨 일은 ‘청소’였다.

       ​

       전반적으로 연구실을 정리하는 것. 이는 클라이스가 노예 시절의 에테르에게 매일같이 시켰던 일이기도 하다.

       ​

       “오랫동안 연구실을 비웠더니 먼지가 많군. 여기도 정리하고, 저쪽 선반도 쓸도록. 다 했으면 부르고.”

       ​

       빗자루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

       치욕이었다.

       ​

       긍지 높은 전투마도사이자, 틸레트 아카데미의 교수였던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서 시종 노릇을 하고 있다니. 아버지가 본다면 분명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다.

       ​

       클라이스가 바닥을 쓰는 동안 에테르는 책을 읽었다. 전계? 자계? 무슨 뜻인진 몰라도 어려운 책이라는 것만큼은 알겠다.

       ​

       클라이스는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어쨌거나 그녀의 본질은 마도사. 호기심이 동한 까닭이다.

       ​

       “뭐해. 안 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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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로운 목소리에 몸이 튀어올랐다. 목에 달린 쇠사슬도 덩달아 짤랑거렸다.

       ​

       이래서야 진짜 에테르의 노예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기기묘묘한 감각이었다. 분명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위치가 정반대였는데…….

       ​

       “흐으, 흐으….”

       ​

       빗자루질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기에 연약해진 팔. 이런 팔로는 빗자루질은커녕 머리 빗질도 힘들다.

       ​

       미음만으로는 부족해서 배도 금방 꺼졌다. 몇 번이나 바닥을 쓸었다고 위장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

       하지만 허기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

       바로 옷이었다.

       ​

       “저, 그, 그…….”

       ​

       클라이스는 사시나무 떨듯 와들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에테르는 집중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

       눈에선 섬광이라도 나갈 것처럼 진한 짜증이 서려있었다. 독서를 방해받은 것이 이유였다.

       ​

       “다했나?”

       “아뇨, 저, 그게…….”

       “다 안 했으면 부르지 마라.”

       ​

       에테르는 다시 뒤를 돌았다.

       ​

       클라이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

       “하, 하다못해 걸칠 거라도 주세요!”

       ​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에테르가 이전보다 더 싸늘해진 시선으로 고개를 틀었다.

       ​

       클라이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

       “뭐?”

       “그, 그게…. 너무 추워요.”

       ​

       클라이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용건을 끝맺었다.

       ​

       어찌 보면 위험한 짓이었다. 절멸급,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마수를 상대로 이런 정신나간 요구를 하다니.

       ​

       간덩이가 부어도 제대로 부은 모양이다.

       ​

       하지만 마왕성의 온도가 유독 낮았다. 어림잡아 0도에서 5도 사이. 청소하느라 창문을 다 열어놓은 탓이다.

       ​

       “하다못해 어깨에 걸칠 거라도…….”

       ​

       코트라도 하나 덮고 일하면 모를까, 가느다란 천 하나 걸친 것이 전부인 클라이스에겐 지옥 같은 날씨였다.

       ​

       이가 와들와들 맞물린다.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차디찬 공기 때문에 팔뚝과 허벅지에 닭살처럼 오돌토돌한 소름이 돋았다.

       ​

       이대로라면 언제 얼어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라리 온도 조절이라도 되는 캡슐에 도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마왕성에 잡혀 들어온 이상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피가 뽑혀 뒤지나, 얼어 뒤지나, 눈앞의 소녀에게 직접 뒤지나 똑같은 개죽음이란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오히려 후련해졌다.

       ​

       이제 까딱하면 죽겠구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

       “저기.”

       “……네?”

       “저쪽 옷장에 여벌로 쟁여둔 게 있다. 가서 아무거나 골라 입어.”

       ​

       예상외의 말에, 클라이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

       뭐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졌다.

       ​

       옷장을 열어보니 케이프가 달린 로브 몇 벌과 함께 보급용 내의가 들어있었다.

       ​

       품이 조금 넓기는 해도, 바람을 막아줄 정도는 되었다. 보온 기능도 적당히 있었다.

       ​

       “…아.”

       ​

       옷을 차려입은 뒤.옆에 걸린 거울을 본 클라이스의 말문이 닫혔다.

       ​

       이 옷, 자신이 에테르를 노예로 부려먹었을 때 입혀놓았던 옷과 디자인이 비슷하다.

       ​

       그렇게 보니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지금부터 내 인생은 끝났구나. 아무리 잘 쳐줘도 순탄치 않겠구나.

       ​

       눈앞의 마수는 지금, 날 상대로 복수를 하려는 거구나.

       ​

       하지만.

       ​

       왜지?

       ​

       이런 권력과 힘을 가졌으면서 왜 노예 시장에 있었던 거지?

       ​

       어째서 자신에게 모진 짓을 당하고도 도망치거나 불평하는 일 하나 없이 묵묵히 맡긴 일을 수행했던 거지?

       ​

       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 노예로 3년이나 있었던 거지?

       ​

       그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

       그러나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클라이스는 입을 우물거리며 몇 시간이나 바닥을 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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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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