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랑카야 산맥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건 밥부터 먹어야 일사천리로 해결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클라이스의 상태로는 연구 조수를 시키기는커녕 바닥 청소를 명령하기도 껄끄러웠다.
말 그대로 사람이 쓰러져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밥부터 먹여야 했다.
에테르는 클라이스에게 미음을 끓여서 줬다.
동화 몇 푼만도 못한 싸구려 식단이었지만, 오랫동안 정맥주사로만 영양을 공급받아 위가 비어버린 클라이스에게는 가뭄에 단비를 맞은 것처럼 기꺼운 음식이었다.
클라이스는 놋쇠그릇에 담긴 미음을 허겁지겁 퍼먹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정작 죽여달라고 했을 땐 언제고, 숨통이 트일 기미가 보이자마자 대뜸 살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버린 것이다.
“읏….”
혀를 데면서까지 뜨거운 죽을 먹는 모습이 꼭 부랑아 같았다. 놋그릇에 든 쌀죽을 소금간 하나 없이 싹싹 긁어먹는 모습을 본 에테르는 그녀가 식사를 마치는 동안 이론을 정리했다.
초전도에 관련한 이론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령을 어떻게 하면 빨리 족칠 수 있을지 그 기본을 탐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복잡한 비선형 편미분방정식을 푸는 것 이상으로 난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천(上天)의 에테르. 머리 자체가 수치해석을 간단하게 처리하기 위해 설계된 그녀이니만큼 모든 과정을 암산으로 해낸다.
“당신….”
때마침 숟갈을 내려놓은 클라이스가 에테르의 눈치를 알음알음 보았다.
지금 그녀의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미친년처럼 풀어헤쳤고, 반복된 채혈로 인해 팔다리 중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으며, 팔은 진달래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몸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캐미솔보다도 단면적이 좁은 천쪼가리 하나 걸친 것이 꼭 창녀 같았다.
때문에 클라이스는 숟갈을 입에 가져갈 때마다 반대 손으로 다른 곳을 가려야만 했다. 그런 그녀를 음흉한 시선으로 보는 자는 없었지만, 사람 의식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었다.
“당신, 에테르 맞죠? 왜 이런 곳에…….”
넌지시 그런 질문을 하면서도, 클라이스는 무의미한 발언이라고 느꼈다.
이미 눈앞의 소녀와 똑같이 생긴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카샤.
정황상 에테르는 그녀의 쌍둥이 언니 같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당신, 혹시 마수였나요?”
클라이스의 눈가에 곤혹스러움이 비친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테르는 한때 클라이스의 전속 연구노예였는데, 그때 클라이스는 마수를 쓰러뜨릴 스크롤 연구만 주야장천 해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에테르는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3년을 함께했다. 연구비가 급해진 자신이 2황자에게 에테르를 팔아버리려고 하기 직전까지 말이다.
드르륵.
에테르는 턱 끝을 괸 채로 회전식 의자를 돌렸다.
“그새 지능이 퇴화했나?”
한겨울 날씨처럼 싸늘한 눈빛. 클라이스의 몸이 우뚝 굳었다.
절멸급 이상의 마수가 내는 압도적인 기운, ‘위압’이다. 클라이스의 심장이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쿵쿵 뛰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망가지면 곤란해. 너처럼 스크롤에 도가 튼 녀석은 온 대륙을 다 뒤져도 찾기 어렵거든.”
에테르는 손톱을 다듬으며 무신경하게 내뱉었다.
“밥을 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안 그래?”
“이, 일이라뇨. 무슨…….”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수들이 포로를 상대로 이야기하는 일이란 대개 ‘고문’을 뜻한다.
당장 클라이스가 조금 전까지 받던 것도 고문이었다. 마수들은 마력을 모은다는 이유로 그녀를 감금했지만, 클라이스 입장에서는 몸의 피를 모두 뽑아내는 생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마수들은 인간과 엘프, 정령의 신음을 즐긴다. 세간에 알려진 금안족의 인식과는 정반대였다.
“글쎄, 무슨 일부터 시킬까.”
에테르가 침음을 삼키며 클라이스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클라이스는 굴로 숨어드는 뱀처럼 몸을 웅크렸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가 주도권을 잡아 에테르를 멋대로 부렸을 터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일이 불가능해졌다.
눈치껏 확인한 결과, 눈앞의 소녀는 마왕군에서 꽤 높은 서열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천지대계 앞에서도 당당히 탈출을 시도했던 클라이스였다. 그때 그녀에겐 플레어라는 비장의 수가 있었던 덕택이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 에테르는 자신을 제치고 플레어를 완성해낸 존재. 당연히 그에 대한 방어책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이 클라이스를 위축시켰다. 클라이스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쪼그라들었다.
“할 일이 많아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 본관도 누군가를 부려먹은 적은 손에 꼽아서 말이지.”
저 시선이 두려웠다. 무서웠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저절로 몸을 뒤로 내뺐지만 쉽지 않았다. 쩔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반신이 곧 앞으로 당겨졌다.
“아악…!”
목이 콱 조여들자 숨이 턱 막혔다.
“어딜 가려고.”
퉁퉁 부어오른 눈가에 눈물이 구슬지듯 맺혔다.
지옥, 아니.
노예 생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의외로 에테르가 처음으로 시킨 일은 ‘청소’였다.
전반적으로 연구실을 정리하는 것. 이는 클라이스가 노예 시절의 에테르에게 매일같이 시켰던 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연구실을 비웠더니 먼지가 많군. 여기도 정리하고, 저쪽 선반도 쓸도록. 다 했으면 부르고.”
빗자루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치욕이었다.
긍지 높은 전투마도사이자, 틸레트 아카데미의 교수였던 자신이 적진 한가운데에서 시종 노릇을 하고 있다니. 아버지가 본다면 분명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다.
클라이스가 바닥을 쓰는 동안 에테르는 책을 읽었다. 전계? 자계? 무슨 뜻인진 몰라도 어려운 책이라는 것만큼은 알겠다.
클라이스는 어깨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본질은 마도사. 호기심이 동한 까닭이다.
“뭐해. 안 쓸어?”
날카로운 목소리에 몸이 튀어올랐다. 목에 달린 쇠사슬도 덩달아 짤랑거렸다.
이래서야 진짜 에테르의 노예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기기묘묘한 감각이었다. 분명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위치가 정반대였는데…….
“흐으, 흐으….”
빗자루질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기에 연약해진 팔. 이런 팔로는 빗자루질은커녕 머리 빗질도 힘들다.
미음만으로는 부족해서 배도 금방 꺼졌다. 몇 번이나 바닥을 쓸었다고 위장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허기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옷이었다.
“저, 그, 그…….”
클라이스는 사시나무 떨듯 와들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에테르는 집중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선 섬광이라도 나갈 것처럼 진한 짜증이 서려있었다. 독서를 방해받은 것이 이유였다.
“다했나?”
“아뇨, 저, 그게…….”
“다 안 했으면 부르지 마라.”
에테르는 다시 뒤를 돌았다.
클라이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하, 하다못해 걸칠 거라도 주세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에테르가 이전보다 더 싸늘해진 시선으로 고개를 틀었다.
클라이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뭐?”
“그, 그게…. 너무 추워요.”
클라이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용건을 끝맺었다.
어찌 보면 위험한 짓이었다. 절멸급,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마수를 상대로 이런 정신나간 요구를 하다니.
간덩이가 부어도 제대로 부은 모양이다.
하지만 마왕성의 온도가 유독 낮았다. 어림잡아 0도에서 5도 사이. 청소하느라 창문을 다 열어놓은 탓이다.
“하다못해 어깨에 걸칠 거라도…….”
코트라도 하나 덮고 일하면 모를까, 가느다란 천 하나 걸친 것이 전부인 클라이스에겐 지옥 같은 날씨였다.
이가 와들와들 맞물린다.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차디찬 공기 때문에 팔뚝과 허벅지에 닭살처럼 오돌토돌한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라면 언제 얼어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라리 온도 조절이라도 되는 캡슐에 도로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마왕성에 잡혀 들어온 이상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피가 뽑혀 뒤지나, 얼어 뒤지나, 눈앞의 소녀에게 직접 뒤지나 똑같은 개죽음이란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오히려 후련해졌다.
이제 까딱하면 죽겠구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저기.”
“……네?”
“저쪽 옷장에 여벌로 쟁여둔 게 있다. 가서 아무거나 골라 입어.”
예상외의 말에, 클라이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졌다.
옷장을 열어보니 케이프가 달린 로브 몇 벌과 함께 보급용 내의가 들어있었다.
품이 조금 넓기는 해도, 바람을 막아줄 정도는 되었다. 보온 기능도 적당히 있었다.
“…아.”
옷을 차려입은 뒤.옆에 걸린 거울을 본 클라이스의 말문이 닫혔다.
이 옷, 자신이 에테르를 노예로 부려먹었을 때 입혀놓았던 옷과 디자인이 비슷하다.
그렇게 보니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지금부터 내 인생은 끝났구나. 아무리 잘 쳐줘도 순탄치 않겠구나.
눈앞의 마수는 지금, 날 상대로 복수를 하려는 거구나.
하지만.
왜지?
이런 권력과 힘을 가졌으면서 왜 노예 시장에 있었던 거지?
어째서 자신에게 모진 짓을 당하고도 도망치거나 불평하는 일 하나 없이 묵묵히 맡긴 일을 수행했던 거지?
대체 무엇 때문에, 자기 노예로 3년이나 있었던 거지?
그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클라이스는 입을 우물거리며 몇 시간이나 바닥을 쓸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