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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2

     

    자신과 함께 후작가로 가지 않겠냐는 라스의 제안.

     

    아셀라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려버렸다.

     

    ‘내가 라스랑… 후작가로?’

     

    제국의 황제는 평생 그 옥좌를 벗어날 일이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둘 중 하나다.

     

    죽었거나, 감옥에 갇혔거나.

     

    라스의 제안은 즉, 처음부터 옥좌에 앉지 말라는 게 아닌가.

     

    “날 더러 네 아내가 되라는… 뜻이야?”

     

    라스가 대답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단어로 표현하기엔 그도 조금 멋쩍었던 모양이다.

     

    아셀라는 기가 찼다. 물론 라스와는 혼인이 약조된 관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그를 남편으로 맞아주는 것이지, 자신이 그의 아내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이 둘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문의 우위.

     

    아셀라는 황가의 사람이다. 황족의 신분을 유지하고 황제의 자리까지 차지하려면 기껏해야 후작인 라스가 자신의 밑으로 오는 게 당연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남첩을 늘린다 해도 그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왜 그래야 하는데?”

     

    아셀라가 반문했다. 단칼에 끊지 않고 이유를 물어본 것도 큰 발전이라고 라스는 생각했다.

     

    “함께 살 수 있잖아요.”

     

    “네가 은퇴하고 황궁에서 살면 되잖니.”

     

    “음… 전 후작가가 좋은데요.”

     

    슥, 아셀라가 라스의 턱을 얇은 손가락으로 받쳐 들었다.

     

    “그 이상으로 날 좋아하렴.”

     

    그녀다운 대답이라고 라스는 생각했다.

     

    “절대 안 될지요.”

     

    “절대 안 되지. 날 더러 승계권을 포기하고, 월광궁도 남의 손에 대리경영으로 맡기고 네 후작가로 오란 소리잖아.”

     

    “형태야 그렇겠습니다만.”

     

    “아니지. 그땐 내가 황제일 테니까 네 명제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해, 라스.”

     

    “만약 가능하다고 하면요?”

     

    “라스.”

     

    아셀라가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무엇이 될 여자로 보이니.”

     

    “…차기 황제가 되실 분으로 보입니다.”

     

    라스에게는 아셀라가 황제인 것도 태양이 동쪽에서 뜨는 일만큼이나 당연했으니 그 대답도 자연스럽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으면 잠이나 자자. 내일부터 국장을 시작해야 해. 쉴 틈 없을 거야.”

     

    “그럼 또 만약의 이야기인데, 혹시 제가 퇴직한다면…”

     

    “왜 자꾸 있지도 않을 이상한 소리를 해!”

     

    결국 아셀라가 짜증을 내며 라스의 팔을 찰싹 때렸다.

     

    역시 택도 없는 이야기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다시금 확인하니 라스는 한숨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죄송해야지. 주군을 짜증나게 하는 주치의가 어디에 있니.”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는 아셀라.

     

    ‘그냥 보내주진 않겠어.’

     

    라스는 생각했다.

    아셀라의 의지는 더없이 확고했다.

     

    그녀는 황제가 되라는 천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자신을 좋아한다 한들, 그 애정이 천명과 그녀의 의지를 깰 정도는 아니다.

     

    라스도 지금은 그녀가 바라는 걸 이뤄주고 싶었다.

     

    ‘굿엔딩.’

     

    분명 아셀라와 자신 모두에게 행복한 결과일 것이 분명했다.

     

    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배드엔딩을 피하는 건 필수.

     

    후작가로 돌아가야 최소한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걸 쓸 수밖에 없나.’

     

    여지껏 미뤄온, 이제는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해 어느새 잊어버리기 직전이 되었던 아셀라와의 계약.

     

    라스는 4년 전에 작성했던 편지봉투를 떠올리며, 오늘은 그만 잠을 청하기로 했다.

     

     

     

    ***

     

     

     

    거진 두 달 만에 돌아온 황실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 냉랭한 분위기였다.

     

    물론 계절 때문만은 아니겠지.

     

    대륙을 호령하며 제국을 최고의 전성기로 부흥시켰던 황제의 국장이 이뤄졌다.

     

    그를 추모하는 궁원과 기사단의 행렬이 일주일 내내 제도 길가를 전진했다.

     

    나 역시 며칠은 행렬에 참여하고, 며칠은 내의원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주간이 이어졌다.

     

    아셀라는 진료할 때가 아니면 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천황궁의 인수인계를 헤이케나 게오르크와 합의하느라 바빴다.

     

    제국이 어수선해진 와중에 아니나다를까, 독립하려는 귀족가가 하나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헤이케가 나에게 비밀리에 접촉해왔다.

     

    “고트베르크. 사전에 폐하께 이야기는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을 후국으로 독립시키라는 의지가 있으셨다.”

     

    “알고 있습니다.”

     

    “단, 그로 인해 제국이 가지게 되는 메리트도 확실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반란을 일으키려는 귀족가에 경고를 주어 제압하려는 용도니까.”

     

    “그 점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독립한 후국이 외교에서 타국에 우위를 점하고, 이 이점을 제국이 연합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제공하는 동맹 형태를 유지해야겠지요.”

     

    “제대로 이해하고 있군. 고트베르크 후국처럼 상당한 정치적 이권을 제국에 제공할 수 있어야만 독립을 허가한다. 선례가 목적이다. 즉.”

     

    헤이케가 내게 강조했다.

     

    “독립한 후국이 오히려 독이 된다고 판단되면 제국은 가차 없이 군을 일으켜 후국을 공격해야 한다. 이 점도 이해하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음. 쉽지 않은 역할을 맡기게 됐군.”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헤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할 일이니 걱정이야 하지 않는다만, 현 가주는 고트베르크 후작이 아닌가. 그가 군주를 맡고 그대가 외교 장관을 맡을 예정인가?”

     

    “아뇨. 그 자리는 여동생인 네리아 영애가 맡게 됩니다.”

     

    “제약 공장장이군. 주치의에서는 언제 퇴직해 돌아갈 생각인가. 후국 독립 절차도 같은 시기에 진행하도록 하지.”

     

    “내의원 파벌을 정리한 후로 생각합니다만, 그 퇴직이….”

     

    내가 말을 흐리니 헤이케가 바로 의미를 눈치챘다.

     

    “아셀라가 불허하였나? 예상은 했다만… 폐하께서 서거하시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 천황궁의 권한이 분리되니 정책을 한 번에 실행할 수가 없어.”

     

    헤이케가 고민에 빠졌다.

     

    “자네가 없으면 후작령의 독립은 하나 마나 아니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주치의 직을 정리하고 오게. 그 다음 남은 안건을 처리하지.”

     

    헤이케가 내게 서류철을 넘겨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목휘궁을 나섰다.

     

     

     

    ***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목휘궁을 나오며 타냐가 내게 생수병을 건넸다.

     

    “고민은 뭘, 별 거 없어.”

     

    “그렇습니까? 주치의 직에서 퇴직하시고, 후작령을 후국으로 독립하셔야 하시고, 황녀님에게서 도망치셔야 하겠지요.”

     

    “그래. 다 별일 아닌… 마지막은 뭐야.”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실 테니까요.”

     

    타냐가 어깨를 으쓱했다.

     

    흠, 맞는 말이긴 했다.

     

    “퇴직 자체는 간단해.”

     

    “그렇습니까? 황녀님께서 무조건 불허하시지 않겠습니까.”

     

    “계약을 이행해달라고 하면 돼.”

     

    “계약… 말입니까?”

     

    “그런 게 있어.”

     

    아셀라가 가지고 있는 편지봉투에는 지금도 그 문장이 그녀의 마법으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라스 고트베르크와 파혼하며, 그를 주치의 직에서 해임하고 안전하게 황실에서 내보낸다.]

     

     

     

    조건은 진작에 이뤄졌고, 기아스로 묶여있는 그녀는 싫어도 나를 주치의 직에서 해임시켜야만 한다.

     

    다만 저 문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황실에서 안전하게 내보낸다. 즉, 그 이후가 명시되지 않았어.’

     

    “단장, 내가 도망치면 황녀님이 쫓아오시겠지.”

     

    “당연하지요. 선생님을 좋아하시니까요.”

     

    “뭐… 그 문장을 적을 때만 해도.”

     

    나는 아셀라가 나를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미래에서 그렇게나 괴롭혀댔으니까.

     

    실제로 싫어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나? 뭐…”

     

    나도… 지금은 그런 아셀라가 싫지 않다.

     

    타냐가 내 표정을 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영영 헤어지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당분간 할 일이 있어.”

     

    적어도 모든 배드엔딩을 삭제하거나, 그에 가까울 정도로 확률을 떨어트릴 때까지만.

     

    인내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의 선택이시니 반대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꼭 필요한 일이신지요.”

     

    “필요해.”

     

    “그럼 황녀님께 함께 하자고 권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해봤어. 싫대.”

     

    “한 번 더 해보시죠. 좀 더 진심을 담아서요.”

     

    “한 번 더?”

     

    그렇다고 그녀가 황제의 길을 포기할까.

     

    뭐, 타냐의 조언이니 들어서 나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알았으니까 단장도 걱정 좀 해 봐. 도망치다가 잡히면 큰일이라고. 이번에야말로 월광궁에 갇혀서 평생 바깥 구경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니까.”

     

    사건에 관여할 수도 없이 세상이 멸망하는 꼴을 구경만 하게 되겠지.

     

    “텔레포트 게이트를 쓰면 안 됩니까?”

     

    “법령상 게이트는 제국령하고만 연결할 수 있어. 그때 후작령은 후국이니까 진작 파괴되어 있을 거야.”

     

    “후작령에 그런 큰일이 생기면 황녀님도 이번 건을 눈치채시겠군요. 거기에다 선생님께서 퇴직하셔야 독립이 가능하잖습니까.”

     

    “핵심을 짚었네. 타이밍이 중요하겠어.”

     

    일단 후작령으로만 돌아가면 아셀라는 더 쫓아올 수 없다.

     

    국경으로 나뉘게 되니 외교 문제가 발생한다. 억지를 부리려 하면 그땐 헤이케가 나서서라도 아셀라를 막을 터다.

     

    후국 독립 공표와 내 퇴직은 거의 동시에 이뤄져야만 한다.

     

    “이게 되나?”

     

    너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머리 아프네. 하나씩 처리하자고.”

     

    “예.”

     

    내의원에 들어선다.

     

    월광궁 사무실에서 휴고와 클로에를 비롯해 멤버들이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선생님, 곧 연말인데요오.”

     

    “클로에, 안경 새로 샀네.”

     

    “헉. 아, 아, 안 비싸요오…!”

     

    “안 물어봤는데.”

     

    “허어억.”

     

    클로에가 입을 다물고 구석에 쭈그려 버렸기에 휴고가 대신 용건을 전했다.

     

    “내의원 송년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작년처럼 파벌대로 모이지 뭐. 국장 때문에 분위기 안 좋으니까 축제 벌이진 말고.”

     

    “실은 그 파벌 때문입니다. 의사 쪽은 괜찮습니다만, 팔켄하인 경의 퇴직 이후로 치유사들의 결집이 약해졌습니다.”

     

    “연무회 때문에 자리 비우기도 했지.”

     

    “그 틈을 타 다른 파벌에서 저희 치유사를 빼가기도 했고, 이번에 화량궁 주치의로 새로 부임한 하르트만이라는 자가 송년회를 크게 기획해서 신입들을 채가려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정치 싸움이야. 지겨워 죽겠어.”

     

    이제 나는 내의원을 비워야 하건만.

     

    떠난 후에 월광궁 의사들이 정치 싸움에 밀려 환자를 못 보고,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건 사절이었다.

     

    기강 한 번 잡아?

     

    “휴고.”

     

    “예.”

     

    “성녀님 불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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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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