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걸레를 짜는 것도 클라이스에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쇠약해진 손으로 걸레를 비트는 것도 힘든데, 바닥이나 실험기구, 선반까지 먼지 하나 없이 닦아내느라 반나절 고역을 치렀다.
그나마 바닥은 쉬웠고, 선반조차도 까치발을 들면 어찌어찌 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실험기구였다.
세심하게 다뤄야 하는 실험기구의 덮개나 바깥면을 조금이라도 빡빡 문질렀다간 에테르가 성을 내기 십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현미경이나 초전도 자석 같은 것들은 걸레나 행주로 닦으면 안 된다. 이런 물품들은 화학약품이나 다른 수단을 사용하여 청소해야 했으므로 클라이스가 고통받는 시간은 곱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꼴에 교수라고.”
에테르는 책장을 넘기며 클라이스가 실험기구를 세척하는 일일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딱 이거 할 때만 감시했다. 다른 걸 청소할 때는 일말의 관심조차도 안 가졌는데.
“…다 했어요.”
클라이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에테르를 불렀다.
자존심이 상했다.
원래도 존댓말을 하는 성격이었지만, 주인 입장에서 하는 존대와 노예 입장에서 하는 존대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깨끗하게 했나?”
에테르는 다른 부분은 대강 둘러보기만 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실험도구가 얼마나 청결해졌는지에 가 있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 검사에만 30분 가까이 걸렸다. 클라이스는 몇 번이고 침을 꼴딱꼴딱 삼켜야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이런 적이 있었다.
에테르를 노예로 들이고 1년 동안에는 실험 기구 닦는 걸 직접 관리 감독했다. 조금이라도 먼지가 있었으면 크게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물론 실험기구를 청결하게 유지해야 하는 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클라이스도 대학원에 다닐 땐 마전지 하나 제대로 못 관리한다고 욕을 먹었었다. 그만큼 마도구는 취급에 주의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하지만 테뉴어까지 달아놓고 학부생 정도 되는 소녀에게 역으로 조인트를 까이니 뼈가 시릴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네.”
에테르가 마지막 도구 점검을 끝내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창가로 달빛이 넘어오는 중이었다. 에테르는 하품을 하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른 책을 꺼내며 일어났다.
클라이스의 상체가 앞으로 천천히 당겨졌다. 에테르가 목줄을 잡아당긴 것이다.
“따라와.”
어디 멀리 이동할 것도 없었다. 연구실 곁에 붙어있는 작은 방이었다.
“앞으로 일과가 끝나면 이 방에서 보내라.”
에테르는 책 목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어두칙칙한 방구석을 가리켰다. 가구를 다 뺀 것인지, 침대나 옷장 하나 없었다.
특별히 이상한 곳은 아니었다. 원래 다른 실험 기구가 놓여 있던 장소였을 뿐이지.
방을 둘러보던 클라이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
“저…. 어디서 자요?”
노예에게 침대가 과분하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하다못해 잠자리를 꾸릴 만한 모포와 짚단 정도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잠자리? 아무데나 누우면 그게 잠자리지.”
“하지만….”
“하지만 뭐.”
클라이스는 항의하는 걸 그만두었다. 4년 전. 에테르를 동물 축사에 넣어놓고 알아서 생활터를 마련하라고 했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왕성에서 지내면서 공주님 취급 받길 원했나? 사지 멀쩡히 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그 말대로였다.
당장 고개를 내리면 주삿바늘에 찔려 멍든 팔이 보인다. 옷을 입어 가리긴 했지만, 다리나 목도 별반 다르진 않다.
과장 좀 보태서 조혈모세포가 피를 만들 새도 없을 정도로 수 개월 동안 쥐어짜였다. 그에 비하면 잠자리를 알아서 마련하라는 것 정도는 배려에 가까웠다.
덜컥. 문이 닫혔다.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들어선 클라이스가 깊게 탄식했다.
“……부질없네요.”
붙잡힌 순간부터 모든 게 끝났다.
마왕성에서 탈출해 돌아간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설령 탈출하더라도 눈바람 휭휭 불어대는 3차 저지선 부근에서 아사하거나 동사하기 딱 좋고 말이다.
클라이스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새우잠을 자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받은 로브를 이불 삼아, 그나마 멀쩡한 왼팔을 베개 삼아 졸음을 맞이했다.
한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클라이스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그러나 길몽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악몽에 가까웠다.
– 클라이스, 이것밖에 못 하느냐?
아버지에게 호통을 맞는, 두렵고도 위축되는 꿈이었다.
– 전선에서 싸우는 언니 오빠들을 봐라. 이곳 북부에선 강해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거라.
그 꿈에서 클라이스는 열셋 정도에 불과한 소녀였다.
한창 사춘기.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가끔은 푸른 초목 사이에서 뛰놀고 싶었던 나잇대의 소녀였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봄을 생각하던 소녀에게, 엘랑카야의 겨울은 너무나도 추웠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으실으실했다. 클라이스는 잠결에 머리를 내려놓고 양팔을 안쪽으로 꽉 끌어안았다.
– 죄송합니다. 부인을 지키지 못한 죄, 제 목으로 받아 가십시오!
– 공작님, 둘째 공자께서…. 공자께서 기간토피아에게 변을 당하셨습니다……!
– 언니, 우리 클로디에 언니는 언제 돌아와요?
그걸 몰라서 묻니?
설원에서, 눈밖에는 먹을 게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모두 싸늘하게 식었단다. 아버지의 심장도 같이 식는 듯하구나.
하스펠트는 불의 공작을 상징하는 가문이란다. 제국이 막 개국되었을 때. 초대 황제께서 북부대공의 자리를 불의 마도사에게 내린 것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 법이란다.
해야 할 건 단순하단다.
우리가 이 겨울을 몰아내야 해.제국의 꺼지지 않는 가로등이 되어야만 해.인류의 꺼지지 않는 조명이 되어야만 해.
다시 한번 말할 테니까 이것만큼은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듣거라. 나의 자랑스러운 딸아.
설령 우리 가문에 몰락이 찾아오더라도, 이곳을 사수하지 못하면 세계는 끝장이라는 것을.
“…….”
전기 충격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인지,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다만, 창밖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시간이 꽤 흐른 것만큼은 자명하다.
클라이스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데도 시야가 흐릿하다.
옷소매를 문지르며 고양이 세수를 한 클라이스는 굳게 닫혀 있는 문부터 올려다 보았다.
이 문을 열고 나가기가 두렵다. 어제는 첫날이었으니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오늘부로 무슨 일을 시킬까 봐 두려워서.
겨우 이틀째인데도 조마조마했다. 무리한 요구라도 받는다면 어떡하지? 잘 넘길 자신이 없었다.
“아….”
바닥을 내려다본 클라이스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느새 아침식사가 코앞에 놓여있었다.
어제보다 쇠고기를 많이 갈아넣은 미음과, 어린아이도 먹기 쉽도록 찢어놓은 빵. 거기에 입가심하라고 준 듯한 방울토마토 몇 개까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식단만 보면 그녀가 옛날 에테르에게 해줬던 것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었다. 클라이스는 그 점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부터 대체 얼마나 고된 노동을 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잠깐.”
이건 함정일 수 있다.
아니, 무조건 함정이다.
클라이스가 아는 통상의 노예는 식사조차도 통제받는다. 주인이 ‘먹어’라고 말할 때까지 절대로 음식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에테르는 혹시 모를 일이다. 노예 시절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클라이스는 식어가는 미음을 내버려 둔 채로 문고리를 슬쩍 돌렸다.
에테르는 밤을 새워 책을 읽다가, 조심스레 다가오는 클라이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했으면 가지고 나와.”
“아직 안 먹었어요.”
“뭐?”
에테르는 아무렇게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눈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았는데 왜 안 먹어?”
“……먹어도 돼요?”
“등신이 따로없군.”
“…….”
“10분 내로 준비하고 나와라.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잽싸게 방으로 돌아온 클라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했던 반응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구 호통치며 화를 내지도 않았고, 신경질을 부리는 기색은 있지만 그마저도 이성으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토끼를 사냥해 놓고 정작 물어뜯지는 않는 사자를 눈앞에 둔 느낌.
“……대체 뭐죠?”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시장기가 돌았다. 클라이스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남기지 않고 죽그릇을 비웠다.
후식으로 남겨둔 방울토마토는 당장 먹지 않고 모조리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이 이상 먹으면 속이 뒤집어질 뿐더러, 에테르가 채비하고 나오라고 했던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 와.”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목줄을 잡힌 클라이스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이대로 바깥으로 나간다고?
제아무리 마수밖에 없는 곳이라지만 목줄을 찬 채로 외출이라니, 이보다도 굴욕적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