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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3

       물걸레를 짜는 것도 클라이스에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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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약해진 손으로 걸레를 비트는 것도 힘든데, 바닥이나 실험기구, 선반까지 먼지 하나 없이 닦아내느라 반나절 고역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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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바닥은 쉬웠고, 선반조차도 까치발을 들면 어찌어찌 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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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실험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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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하게 다뤄야 하는 실험기구의 덮개나 바깥면을 조금이라도 빡빡 문질렀다간 에테르가 성을 내기 십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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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그뿐인가. 현미경이나 초전도 자석 같은 것들은 걸레나 행주로 닦으면 안 된다. 이런 물품들은 화학약품이나 다른 수단을 사용하여 청소해야 했으므로 클라이스가 고통받는 시간은 곱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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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꼴에 교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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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책장을 넘기며 클라이스가 실험기구를 세척하는 일일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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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이거 할 때만 감시했다. 다른 걸 청소할 때는 일말의 관심조차도 안 가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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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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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에테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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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심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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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도 존댓말을 하는 성격이었지만, 주인 입장에서 하는 존대와 노예 입장에서 하는 존대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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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하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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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다른 부분은 대강 둘러보기만 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실험도구가 얼마나 청결해졌는지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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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 검사에만 30분 가까이 걸렸다. 클라이스는 몇 번이고 침을 꼴딱꼴딱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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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자신도 이런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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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를 노예로 들이고 1년 동안에는 실험 기구 닦는 걸 직접 관리 감독했다. 조금이라도 먼지가 있었으면 크게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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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실험기구를 청결하게 유지해야 하는 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클라이스도 대학원에 다닐 땐 마전지 하나 제대로 못 관리한다고 욕을 먹었었다. 그만큼 마도구는 취급에 주의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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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테뉴어까지 달아놓고 학부생 정도 되는 소녀에게 역으로 조인트를 까이니 뼈가 시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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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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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마지막 도구 점검을 끝내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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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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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가로 달빛이 넘어오는 중이었다. 에테르는 하품을 하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른 책을 꺼내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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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의 상체가 앞으로 천천히 당겨졌다. 에테르가 목줄을 잡아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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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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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멀리 이동할 것도 없었다. 연구실 곁에 붙어있는 작은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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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일과가 끝나면 이 방에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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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책 목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어두칙칙한 방구석을 가리켰다. 가구를 다 뺀 것인지, 침대나 옷장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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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이상한 곳은 아니었다. 원래 다른 실험 기구가 놓여 있던 장소였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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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을 둘러보던 클라이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

       ​

       “저…. 어디서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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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에게 침대가 과분하다는 것쯤은 안다.

       ​

       그래도 하다못해 잠자리를 꾸릴 만한 모포와 짚단 정도는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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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 아무데나 누우면 그게 잠자리지.”

       “하지만….”

       “하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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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항의하는 걸 그만두었다. 4년 전. 에테르를 동물 축사에 넣어놓고 알아서 생활터를 마련하라고 했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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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성에서 지내면서 공주님 취급 받길 원했나? 사지 멀쩡히 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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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대로였다.

       ​

       당장 고개를 내리면 주삿바늘에 찔려 멍든 팔이 보인다. 옷을 입어 가리긴 했지만, 다리나 목도 별반 다르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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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장 좀 보태서 조혈모세포가 피를 만들 새도 없을 정도로 수 개월 동안 쥐어짜였다. 그에 비하면 잠자리를 알아서 마련하라는 것 정도는 배려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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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컥. 문이 닫혔다.

       ​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들어선 클라이스가 깊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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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질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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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잡힌 순간부터 모든 게 끝났다.

       ​

       마왕성에서 탈출해 돌아간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설령 탈출하더라도 눈바람 휭휭 불어대는 3차 저지선 부근에서 아사하거나 동사하기 딱 좋고 말이다.

       ​

       클라이스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새우잠을 자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

       받은 로브를 이불 삼아, 그나마 멀쩡한 왼팔을 베개 삼아 졸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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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클라이스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그러나 길몽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

       굳이 분류하자면, 악몽에 가까웠다.

       ​

       – 클라이스, 이것밖에 못 하느냐?

       ​

       아버지에게 호통을 맞는, 두렵고도 위축되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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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선에서 싸우는 언니 오빠들을 봐라. 이곳 북부에선 강해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거라.

       ​

       그 꿈에서 클라이스는 열셋 정도에 불과한 소녀였다.

       ​

       한창 사춘기.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가끔은 푸른 초목 사이에서 뛰놀고 싶었던 나잇대의 소녀였다.

       ​

       그러나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봄을 생각하던 소녀에게, 엘랑카야의 겨울은 너무나도 추웠다.

       ​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으실으실했다. 클라이스는 잠결에 머리를 내려놓고 양팔을 안쪽으로 꽉 끌어안았다.

       ​

       – 죄송합니다. 부인을 지키지 못한 죄, 제 목으로 받아 가십시오!

       – 공작님, 둘째 공자께서…. 공자께서 기간토피아에게 변을 당하셨습니다……!

       – 언니, 우리 클로디에 언니는 언제 돌아와요?

       ​

       그걸 몰라서 묻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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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원에서, 눈밖에는 먹을 게 없는 이 허허벌판에서 모두 싸늘하게 식었단다. 아버지의 심장도 같이 식는 듯하구나.

       ​

       하스펠트는 불의 공작을 상징하는 가문이란다. 제국이 막 개국되었을 때. 초대 황제께서 북부대공의 자리를 불의 마도사에게 내린 것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 법이란다.

       ​

       해야 할 건 단순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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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 겨울을 몰아내야 해.제국의 꺼지지 않는 가로등이 되어야만 해.인류의 꺼지지 않는 조명이 되어야만 해.

       ​

       다시 한번 말할 테니까 이것만큼은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듣거라. 나의 자랑스러운 딸아.

       ​

       설령 우리 가문에 몰락이 찾아오더라도, 이곳을 사수하지 못하면 세계는 끝장이라는 것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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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 충격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인지,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다만, 창밖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시간이 꽤 흐른 것만큼은 자명하다.

       ​

       클라이스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데도 시야가 흐릿하다.

       ​

       옷소매를 문지르며 고양이 세수를 한 클라이스는 굳게 닫혀 있는 문부터 올려다 보았다.

       ​

       이 문을 열고 나가기가 두렵다. 어제는 첫날이었으니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오늘부로 무슨 일을 시킬까 봐 두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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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이틀째인데도 조마조마했다. 무리한 요구라도 받는다면 어떡하지? 잘 넘길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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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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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을 내려다본 클라이스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

       어느새 아침식사가 코앞에 놓여있었다.

       ​

       어제보다 쇠고기를 많이 갈아넣은 미음과, 어린아이도 먹기 쉽도록 찢어놓은 빵. 거기에 입가심하라고 준 듯한 방울토마토 몇 개까지.

       ​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

       식단만 보면 그녀가 옛날 에테르에게 해줬던 것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었다. 클라이스는 그 점에 위화감을 느꼈다.

       ​

       이제부터 대체 얼마나 고된 노동을 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

       “…잠깐.”

       ​

       이건 함정일 수 있다.

       ​

       아니, 무조건 함정이다.

       ​

       클라이스가 아는 통상의 노예는 식사조차도 통제받는다. 주인이 ‘먹어’라고 말할 때까지 절대로 음식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

       그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에테르는 혹시 모를 일이다. 노예 시절의 앙금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

       “어쩌면…….”

       ​

       클라이스는 식어가는 미음을 내버려 둔 채로 문고리를 슬쩍 돌렸다.

       ​

       에테르는 밤을 새워 책을 읽다가, 조심스레 다가오는 클라이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식사를 했으면 가지고 나와.”

       “아직 안 먹었어요.”

       “뭐?”

       ​

       에테르는 아무렇게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

       “눈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았는데 왜 안 먹어?”

       “……먹어도 돼요?”

       “등신이 따로없군.”

       “…….”

       “10분 내로 준비하고 나와라.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

       잽싸게 방으로 돌아온 클라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예상했던 반응과는 완전히 달랐다.

       ​

       마구 호통치며 화를 내지도 않았고, 신경질을 부리는 기색은 있지만 그마저도 이성으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마치 토끼를 사냥해 놓고 정작 물어뜯지는 않는 사자를 눈앞에 둔 느낌.

       ​

       “……대체 뭐죠?”

       ​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시장기가 돌았다. 클라이스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남기지 않고 죽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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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식으로 남겨둔 방울토마토는 당장 먹지 않고 모조리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이 이상 먹으면 속이 뒤집어질 뿐더러, 에테르가 채비하고 나오라고 했던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

       “이리 와.”

       ​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목줄을 잡힌 클라이스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

       이대로 바깥으로 나간다고?

       

       제아무리 마수밖에 없는 곳이라지만 목줄을 찬 채로 외출이라니, 이보다도 굴욕적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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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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