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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3

     

    “하르트만 교수님, 송년회 연회장이 준비되었습니다. 출발하시지요.”

     

    “그러지. 조수들, 따라오게.”

     

    통칭 교수, 하르트만이 게오르크의 새 주치의로 부임하여 화량궁 치유사 파벌을 새로이 출범한 지도 몇 달이 됐다.

     

    교수라는 칭호가 있지만 딱히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했던 건 아니다. 자칭이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어머, 좋은 오후에요, 교수님!”

     

    내의원 복도를 걸으면 그를 보는 치유사들이 연예인이라도 본 듯 반가워하며 인사해온다.

     

    한 손에는 차트를 들고 당당히 걷는다. 뒤에는 조수 치유사들을 군단처럼 대동했다.

    걸음걸이는 당당하게. 발소리가 크게 나도록 구두굽은 튼튼한 상아굽으로 했다.

     

    “저기 하르트만 교수님 지나가신다.”

    “회진 가시나 봐, 멋지다.”

     

    말단 치유사들이 길을 비키며 고개를 숙이고 소근댄다.

    하르트만은 그들과 일부러 눈을 마주치며 씨익 미소를 지어주었다.

     

    “와, 주치의께서 우리도 봐주셨어….”

    “화량궁은 치유사 대우가 그렇게 좋다던데 사실인가 봐.”

     

    하르트만은 자신과 화량궁을 향한 칭찬을 즐기며, 일부러 느긋하게 내의원을 한 바퀴 돌았다.

     

     

    몇 달 만에 벌써 내의원에서 꽤 자리를 잡은 화량궁 파벌이었다.

     

    내의원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게오르크의 산더미 같은 돈이 있으니 사방에 그것을 뿌려대면 그만이었다.

     

    마침 그 방식은 하르트만의 전문 분야였다.

     

    “내의원 치유사들 사이에서 저희 파벌의 평이 좋습니다.”

     

    조수의 말에 하르트만이 참지 못하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광고의 힘이다.”

     

    “광고, 말입니까?”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나?”

     

    “연회장 아니셨습니까?”

     

    “출구는 진작 지났네. 일부러 내의원을 한 바퀴 돌고 있지.”

     

    하르트만이 지금 연출하는 자신의 모습에 다 모티브가 있었다.

     

    바로 월광궁의 고트베르크 팀이었다.

     

    “다 게오르크 전하의 재원 덕분이야. 고트베르크야 그 이미지를 만들기까지 고생깨나 했겠지만, 후발주자는 자본이 있으면 간단하거든.”

     

    물론 치유사로서 실력도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그는 실력 이상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마케팅한 덕분이었다.

     

    하르트만은 따지자면 상인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막 아카데미와 육성소를 졸업한 치유사들은 궁핍하기 마련이야. 당장 봉급을 5프로만 더 줘도 오게 돼 있어.”

     

    “맞는 말씀입니다.”

     

    “월광궁! 얼마가 들든 무조건 그들보다 많이 주는 게 핵심이야. 지금 제국에서 고트베르크를 모르는 이는 어디에도 없지. 이제는 키우는 강아지가 아파도 그의 휘장이 그려진 약 봉투를 뜯어야 하잖나.”

     

    “그렇습니다.”

     

    “그렇게나 돈을 쓸어 담는 고트베르크의 월광궁보다도 우리가 봉급을 많이 준다. 그 정도로 화량궁이 치유사를 우대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겠나.”

     

    “과연, 혜안이시군요.”

     

    “연무회 때문에 다른 주치의들이 자리를 비운 건 기회였다. 나는 대리를 보내고 내의원에 집중하겠다고 전하께 말씀드렸지.”

     

    덕분에 신입이 들어오는 기간에 대부분 화량궁으로 포섭한데다, 다른 파벌도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르트만은 계획이 잘 흘러가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수십 년 몸 담을 내의원이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었다.

     

    그리고 이 송년회에서 제대로 결정타를 먹일 수 있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게오르크의 금고를 빌려 황궁 최고급 파티장인 2연회장에서 송년회를 연다. 비싼 음식과 악단, 즐길 거리가 준비됐다. 사회초년생들은 눈이 돌아갈 퀄리티다.

     

    황제의 국장 때문에 규모를 조금 축소하긴 했으나, 오히려 그것도 호재다. 다들 엄숙한 분위기에서 놀 변명을 찾으려 할 터.

     

    내의원에 일주일이나 광고를 해 놨으니 사람이 바글바글할 게 틀림없었다.

     

    송년회는 매년 중요한 행사로 여겨진다. 신입 치유사들의 본격적인 배치 전에 파벌이 얼추 정해지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다.

     

    여기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히고, 이빨 빠진 호랑이인 알베리치부터 시작해 점점 월광궁도 갉아먹어 무너뜨린다.

     

    자신이 고트베르크를 뛰어넘어 내의원 최고 파벌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니다. 하르트만은 야망에 부풀어 있었다.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 하르트만은 잠시 화량궁으로 돌아가 대기한 후, 해가 어둑해질 때가 되어서야 연회장을 찾았다.

     

    얼마나 많은 치유사가 자신의 이름을 외칠 것인가. 그는 기대와 함께 주인공처럼 2층 발코니를 통해 연회장 홀로 들어섰다.

     

    ―덜컹!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하르트만.

     

    “…뭣?”

     

    그리고 그의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몇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 홀에는 서너 명이 드문드문 있을 뿐, 그것도 잘못 들어온 눈치였다.

     

    “여기 음식 죽이네.”

     

    “동감이다만, 발렌. 숲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인가. 어쩌다 보니 흡혈귀에 언데드 군대와도 싸우지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까진 우리 일이 아니었던 듯한데…”

     

    “몰라? 일단 먹고 생각하자고.”

     

    심지어 치유사들을 위해 준비한 고급 음식은 웬 귀쟁이들의 뱃속으로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르트만이 조수에게 물었다. 그가 상황을 파악해서 보고했다.

     

    “그… 저희 동태를 파악했는지, 같은 시간에 송년회를 잡은 파벌이 있습니다.”

     

    뿌득, 하르트만이 이빨을 갈았다.

    그게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고트베르크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라고! 신입들은 고트베르크를 만난 적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쪽으로 전부 우르르 몰려가냔 말이야!”

     

    그때, 홀에서 치유사 한 명이 동료에게 외쳤다.

     

    “이봐, 월광궁 파티에서 성녀 간택을 공식 발표한대!”

    “성녀님이라니, 그게 진짜인가?!”

    “자네 몰랐어? 앰브로시아 자매님이 연무회에서 성녀로 간택됐다는 소문이 돌았잖아!”

    “맙소사, 그게 그 소리였나? 자매님이 성녀셨다니, 당장 세례받으러 가자고!”

     

    그나마 남아있던 치유사들도 우르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악단이 처량하게 연주하는 곡조만이 텅 빈 홀에 울려 퍼졌다.

     

    하르트만은 홀로 내려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크아아아악!!”

     

    쨍강, 쨍강. 그가 뒤엎은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져간다.

     

    “이 아저씨 뭐 한대, 음식 귀한 줄 모르고.”

     

    엘프들이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집어 봉투에 포장해갔다.

     

     

     

    ***

     

     

     

    “자매님! 자매님!”

    “자매님! 자매님!”

    “앰브로시아아!!”

     

    월광궁 송년회는 성녀 선언을 한 앰브로시아 덕분에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무대 위의 앰브로시아에게 조명이 집중되어 있고, 스탠딩 객석 같은 구조의 아래쪽에서 치유사들이 그녀를 향해 환호를 보낸다.

     

    거의 아이돌 콘서트장이 아닌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뭐, 생각해 보면 성녀가 이 세상에서는 유일무이한 아이돌과 비슷한 개념이니 꼭 틀린 비유도 아니었다.

     

    연회장은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인파가 꽉 찼다. 기사들을 동원해서 안전 통제를 해야 했다.

     

    “크, 크흠! 치유사들! 체통을 지키시오! 국장 기간이오!”

    “축복!”

    “세례를!”

    “어, 어쩔 수 없군… 자자, 보시오. 이제 소녀는 이런 주문도 쓸 수 있소!”

    “오오오오!!”

     

    앰브로시아의 고위계 신성주문을 보고 치유사들이 눈이 뒤집어지며 환호했다.

     

    황제를 오래 섬겼으니 주군을 보내고 좀 더 침울해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에 금방 적응했다.

     

    실력을 보면 짬이 있어서 네리아보다도 훨씬 낫지 싶다. 나중에 현장에서도 잘 해줄 그림이 절로 그려졌다.

     

    “선생님은 안 드십니까.”

     

    바에 앉아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자니 휴고가 물어왔다.

     

    “마, 맞아요오. 전에 끼고 싶어하셨잖아요.”

     

    위스키 병을 들고 벌써 얼굴이 벌개진 클로에. 타냐와 한 잔 걸치고 있던 모양이다.

     

    “기왕 늦으신 거, 선생님께선 성인이 된 후의 첫 잔을 특별한 분과 함께 마실 생각이신 게 아니겠습니까.”

     

    타냐의 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생에서 아직 술을 먹은 적은 없지만, 환자를 봐야 해서 그랬지 특별한 의미는 없었는데.

     

    “언제 응급실 호출 들어올 줄 알고. 나 말고 심장 쨀 수 있는 사람 있냐.”

     

    “선생님께서 ER에 나가셔셔야 되겠습니까. 이제 그런 일은 신입을 키워서 맡기시죠.”

     

    “신입 말이지.”

     

    내의원에 인재는 많이 들어오고 있다.

    후작령 육성소도 듣자 하니 최근 들어 생도 풀이 좋아졌다고 하고.

     

    의사회가 제국 전역에 활동하기도 했고, 약품이 대중화된 덕에 치유사 붐이 불었다.

     

    월광궁은 이제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겠지.

     

    “한 가지 가정. 내가 내일 퇴직하면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히에엑, 가, 갑자기 왜 끔찍한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난데없는 벼락같은 이야기였겠지.

    클로에는 기겁했지만 휴고는 침착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군요. 황녀 전하의 주치의는 클로에님께서 맡으셔야겠습니다.”

     

    “제가요오?!”

     

    “그 외의 적임자는 생각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맙소사… 주, 주치의는 진료만 보는 게 아니잖아요. 화, 황녀님이랑 외부 활동은.”

     

    “걱정 마시죠.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타냐가 든든하게 말하니 클로에가 컥컥대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확실히 타냐는 리셰나 월광궁을 위해서 황실에 남아줄 필요가 있다.

     

    소드마스터라는 중역까지 후국에서 차지해 버리면 국제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고.

     

    “너는? 휴고.”

     

    “저는 선생님과 함께 가고 싶군요. 내의원에 큰 뜻은 진즉 없었으니 말입니다.”

     

    “에리나 사귀는 아가씨는 어쩌고?”

     

    “같이 가면 그만이지요.”

     

    쿨하게 대답하는 휴고였다.

    그가 따라와 주면 나야 고맙다. 육성소에서 후임 양성을 맡아주면 큰 도움이 된다.

     

    “저도 선생님과 가고 싶은데요.”

    “내의원을 나가서 개인병원이라도 여신다는 말씀이신지요. 나중에 그럴 일이 있으면 저도 지원하겠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엿들었는지 다른 팀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끼어들었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어디서 신성력이 날아와 연발로 내 몸에 작렬했다.

    한껏 분위기에 취한 앰브로시아가 축복을 난사한 것이었다.

     

    “선생! 고트베르크 선생! 이리 올라오시오!”

     

    성녀님의 러브콜이다. 무시할 수야 없지.

     

    가까이 가니 앰브로시아가 조막만한 손으로 낑낑대며 나를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꿀꿀도야지님 50코인 후원 감사해요!! 꾸준히 지켜봐 주셔서 기쁠 따름이에요! 전작들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독자님들 덕분이에요! 본격적으로 연재를 시작한 게 22년 7월부터니,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네요. 엑… 벌써…?
    글 쓰는 일은 항상 너무 어려워서, 더더 재밌게 잘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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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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