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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3

        

         “…….”

         

         옷은커녕 피부에까지 밴 것 같은 매캐한 냄새, 길거리를 응축시킨 것처럼 느껴지는 찌든 내에 콧등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 해진 코트 옷자락, 먼지 묻은 슬랙스, 빛바랜 셔츠.

         전체적으로 허름한 차림새와 그늘이 짙게 진 음울한 눈동자가 어우러져 삭막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뭔가… 바에서 만나서 끈질기게 술을 샀다면, 한 대여섯 잔쯤 돌았을 때 세상 우울한 가정사와 더불어 은근슬쩍 누레진 사진 한 장을 꺼내며 어린 딸이 있다는 하소연을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아, 얼굴을 아는 인물이 아니기에 이건 전부 멋대로 짜맞춘 망상에 불과하다는 점은 분명히 해 두겠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여러 차례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배경을 유추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상대를 알면 뭐가 어떻게 굴러갈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으니.

         

         ……솔직히 인상의 강렬함으로 따진다면 한국에서 이십 년 동안 만난 사람들보다 이 동네에서 일년간 마주친 괴물들이 훨씬 존재감 농도가 짙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크허허흠! 아니 이 친구가 글쎄, 오늘만 벌써 1200만 가량을 포커로 따낸 행운아라 하지 뭔가? 파산시켜서 내보낸 다른 손님만 열 명이 넘어간다 하니 우리 테이블에 딱 맞는 인재다 싶어서 모셔왔네. 어서 인사들 하지!”

         

         활짝 웃는 얼굴로 알프레드 씨가 반갑게 손짓했지만 남자는 그 환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그것도 그럴 게 저렇게 말하는 노인만 해도.

         눈치가 있다면 아까 몇 사람이나 카지노가 무너져라 꺼이꺼이 울면서 퇴장하게 만든 주범이란 걸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다.

         

         단지 그 이상으로 이 하이 레이팅 테이블에서 플레이함으로 얻는 기회 비용이,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에 비해 터무니없이 크다는 계산이 섰으니까 속아 넘어가준 거겠지.

         

         “……그냥 존(John)이라 불러주시오.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긴장을 풀 듯 숨을 한 번 고른 그가 입을 열었다.

         존이면 역시 존 도(John Doe; 신원 미상의 남자에게 붙이는 이름)를 뜻하는 거려나? 슈거 만큼이나 노골적인 가명이네.

         

         “오늘 카드가 좀 붙나 봐 아저씨? 잘 부탁해!”

         “뭐, 잘 부탁드립니다.”

         “…….”

         

         존이라 불리길 원한 남자의 시선이 테이블을 순서대로 훑었다. 막 자리에 앉는 알프레드 씨를 기점으로 모두를.

         

         착석하자마자 가면이 흔들릴 정도로 얼굴 근육을 떠는 노인, 방금 전의 작은 여흥으로 몸이 달았는지 요염하게 입술을 핥는 여자, 마지막으로 특별한 반응없이 팔짱 낀 채로 기다리고 있는 중년 남성까지.

         

         …차례대로 나열해 놓고 보니까 뭐 이런 음흉한 악당 소굴이 다 있나 싶다.

         특별히 돈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엄한 사람 지갑 터는데 보람을 느끼는 인간이 이렇게 한 무더기나 존재하다니 정말 말세가 따로 없다.

         

         엉? 그렇게 따지면 이겨서 돈 따낼 생각이 만만한 내가 제일 위험한 거 아니냐고?

         무슨 소리야. 일단 테이블에 놓인 칩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니까? 이거 다 합의 하에 진행되는 게임이야! …크흠.

         

         “…그럼 염치 불구하고 첫 라운드 컷 오프(Cut off; 프리 플랍 단계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베팅을 보고 마지막으로 액션을 취하는 위치)는 내가 좀 잡겠소. 아무래도 여러분처럼 여유가 넘치는 몸이 아닌지라.”

         

         “칩이 없으면 또 그때 가서 할 얘기가 많겠지만… 그게 편하다면야 얼마든지 그러시게!”

         

         찌이익…!

         

         알프레드 씨가 무서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날카로운 테이프 뜯는 소음이 포커 개시를 알렸다.

         

         이게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 하면… 저벅저벅 걸어간 존이 가장 좌측, 슈거 씨 옆자리에 주저앉고 가져온 칩을 정리하는 걸 확인한 딜러가 곧장 새로운 카드 덱의 포장을 잡아뜯는 효과음이 되시겠다.

         

         이쪽 베팅 규모에 맞춰서 낮은 액면가를 가진 옐로우, 그린 칩들을 미리 바꿔왔는지 약간의 푸른색과 얼마 안 되는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그의 탄약고는 꽤나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방심은 위험하다.

         

         어쨌거나 나도 비슷한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해서 말도 안 되는 클러치 히트(Clutch hit; 적시타)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몸집을 불린 셈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갉아 먹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플레이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어디… 새 게임의 첫 끗발은 어떨까요~”

         

         스윽 하고.

         탁자에 얹은 내 손등 근처로 정렬된 두 장의 핸드를, 이제는 얼추 능숙하게 덮고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직 뻣뻣한 감촉이 조금 더 명확하게 살아있는 신품 카드의 옆면이 엄지손가락을 살포시 긁어주는 게 느낌이 아주 좋았다.

         

         잠깐 쉬면서 상식과 평화를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던 대뇌가 다시금 약탈과 도박에 절여지는 감각 교란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또 그런 흐름에 올라타는 게 올바른 행동이겠지.

         

         왜,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기 힘들다는 말도 있으니까.

         

         ………물론 그게 이런 확률에 의존하는 게임에 적용되는 격언은 절대 아니겠지만! 야! 나도 진지하게 한 생각은 아니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참고 있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라?!

         

         – 뭐, 실제로 현재 승률이 굉장히 높으신 건 사실이니 따로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이번 라운드는 특히나 스타팅 핸드가 강하시군요. –

         

         ‘어.’

         

         슬쩍 들추고 있던 카드 끄트머리를 나보다 먼저 확인한 제로가 공통 카드 한 장 안 깔린 상태에서 섣부른 축하를 건네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정말이었다.

         

         트럼프에서 가장 문양이 단조롭고, 흰 여백이 많음에도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카드가 한 장, 두 장. A-A로 이루어진 원 페어. 즉, A포켓이라는 별칭까지 가진 자타공인 텍사스 홀덤 최강의 핸드가 초장부터 떡하니…!

         

         – 높은 밸류를 가진 프리미엄 핸드(AA, KK, QQ, JJ, Aks의 5종)를 수령하실 확률은 2.1%. 그 중에서도 A페어는 불과 0.45%의 등장률과 약 2.32배율의 EV(Expected Value; 수익 기댓값)와 50% 내외의 승률을 지닌 도미네이션 핸드입니다. 물론 공통 카드가 공개되기 이전 통계에 기초한 수치이므로 주의를. –

         

         “……씁.”

         

         군침…. 아니, 입맛을 돌게 만드는 긍정적인 분석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제어.

         행여나 누가 이쪽을 힐끔거리더라도, ‘어떻게 베팅해야 할지 고민이네….’ 수준의 인상만 남기고자 최대한 노력했다.

         

         바꿔 말하면, 이 커뮤니티 포커는 최강의 핸드를 들고도 고작 반반의 승률만 가까스로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공용 카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기에.

         

         하기야 이 복잡한 베팅 과정 자체가 2장과 5장을 꿰어 맞추는 응축된 심리전이나 다름없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막상 낮은 확률을 뚫었는데도 편한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너무 억울하다 해야 할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겁먹고 접도록 세게 베팅하거나, 그저 그런 핸드인 척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주도권은 나에게 생겼으니 이걸로 어찌저찌 요리해서 잡아먹어야겠지.

         

         “으음… 100. 미스터 존이 너무 겁먹으면 안 되니까, 처음에는 적당히 갈까?”

         “200만으로 레이즈! 작게 걸면 작게 따는 법이거늘. 조금 더 가진 우리가 그릇을 키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득달같이 시작된 두 변태들의 찍어 누르기 때문에 금세 내 액션 순서가 돌아왔다.

         얼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억눌렀다. 여기서는 생각을 잘 하는 게 맞다.

         

         무작정 크게 지르면 상대는 죽는다. 그렇다고 레이즈 해주기를 기다리며 콜만 해서는 팟의 크기가 쉽게 커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베팅 규모를 끌어올리면서도 강한 핸드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가능한 숨겨야 한다는 것인데…. 마침 너무나도 적절한 핑계가 있어서 곤란하다. 음, 곤란해.

         

         정말 비슷한 무리로 묶이는 건 사양하고 싶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패의 강함과 별개로 일단 레이즈를 일삼고 보는 두 악질 플레이어가 있으니.

         허면 저들의 ‘기선 제압’에 편승해서 블러프인 척 조금씩 손을 보탠다면. 불확실한 승리 가능성에 과하게 칩을 넣는 것도 방지하면서, 자연스럽게 판돈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네.

         

         “그, 으흠! 200은 살짝 게임이 늘어질 것 같은데. 300만으로 높이죠.”

         

         “……콜.”

         “흐하핫!!”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레드 칩 세 장을 박스로 밀어 넣으며 선언된 내 참전 소식을 들은 누군가는 흥미를 보일 줄 알았다면서 마구 웃었고, 여전히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지키느라 바쁜 슈거 씨는 그냥 침착한 태도로 벳을 받아들이셨다.

         

         그런데 이제 첫 라운드의 첫 베팅인데 뭐가 늘어지냐고…? 몰라! 그냥 대충 나오는 대로 주워섬겼는데 이유가 어딨어.

         

         본의 아니게 저 변태 군상들의 은밀한 취향을 돌아가며 엿들은 바로는, 갈등의 과정보단 그 클라이막스를 더 즐기는 것 같아서 동조하는 흉내를 낸 건데…. 사실 어찌됐든 먹혔으면 그만이지 뭐.

         

         그렇게 어영부영 콜 하는 분위기는 만들어졌으니.

         충분히 만족스럽고 흡족한 결과임이 틀림없는데… 저 미스터 존을 자칭한 남자가 희번덕이는 눈동자로, 내 회심의 함정을 피해간 게 살짝 거슬리는 건 어째서일까.

         

         “폴드.”

         

       

       

         ……거 혹시 진짜 포커 좀 치시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쟈와쟈와.

    중간에 쓰인 수치들은 모두 실제 포커 통계로부터 발췌되었습니다.
    그리고 쫄아서 죽은 건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크흠.

    항상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추천 모두모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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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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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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