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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3

   EP.203

     

   [탑의 15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세계의 편린’입니다.]

     

   평소보다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포탈을 통과한 나.

   자욱하게 깔린 무거운 공기.

     

   그런 나의 시야에 가장 빠르게 들어온 것은 회색빛 도시의 전경이었다.

     

   “……응?”

     

   익숙하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을 낯익은 장소였다.

   ‘멸망’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광경.

     

   바닥에 큰 충격이 가해졌던 것인지 포장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한 아스팔트 도로가 완전히 뒤집어져 주변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여긴 아무리 봐도 서울인데.”

     

   주변에 있어야 할 빌딩 같은 높은 건물들은 허물어져 내린지 오래였다.

     

   탑에 들어오기 직전보다 훨씬 크게 붕괴된 서울의 모습.

   게다가 탑의 4층에 올랐을 때, 멀쩡한 과거의 서울을 봤던 기억이 있어 그 괴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 순간.

     

   띠링.

     

   […임무를 탐색합니다…]

     

   탑을 오른 이후로 처음으로 보는 유형의 메시지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보통은 탑이 임무를 주거나 이곳을 다스리는 성좌가 도전자에게 임무를 발송한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새롭게 떠오르는 메시지는 없었고 찝찝함을 느낀 나는 우선 주변을 탐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스릉.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폐허. 세상의 종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곳에 검을 뽑는 쇳소리만이 주변을 울려 퍼졌다.

     

   ***

     

   그로부터 3시간이 경과했다.

     

   […임무를 탐색합니다…]

     

   해당 메시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게임 속 로딩 화면이 오류로 넘어가지 않는 것처럼, 변화가 없는 메시지는 심적으로 은근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켰다.

     

   나와 시스템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 아득하기만 하던 무의 공간 또한 더욱 공허하게 느껴진다.

     

   “답답하네. 차라리 괴물이랑 싸우는 게 낫겠어.”

     

   이곳은 한국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샅샅이 주변을 살펴도 살아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나마 발견한 것이라고는 이곳이 파괴되기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작은 흔적 정도.

   아이들이 가지고 놀았을 법한 때묻은 인형이나 먼지와 건물의 잔해에 반쯤 파묻힌 편의점의 간판 정도가 내가 폐허에서 찾아낸 모든 것이었다.

     

   “이제 저기가 마지막인가?”

     

   모든 건물이 쓰러진 가운데 그나마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빌딩 하나.

   빌딩이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폐허에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빌딩은 누가 봐도 수상한 장소가 아닌가 싶었다.

     

   타타탓!

     

   나는 빌딩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탑을 오르며 경험했던 다양한 촉이 저곳에 무언가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

     

   빌딩과 가까워질수록 그동안은 왜 느끼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누군가의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빌딩을 지키듯 문 앞에 서서 나를 응시하는 남자.

     

   “왔군.”

     

   남자의 입이 열리자 흉흉한 기운이 그를 감싸며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색빛 재킷을 입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발검할 듯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 검을 부딪쳐야 한다는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곧장 반응하지 못했을 뿐.

     

   ‘……박조철?’

     

   그저 남자의 외모가 박조철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눈빛에 생기가 없고 복장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빌딩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틀림없는 박조철.

     

   하지만 만약 그가 진짜 박조철이었다면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팟!

     

   박조철의 신형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하지만 이 정도의 움직임은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수준.

     

   카아앙!!!

     

   그가 뽑은 검과 나의 검이 충돌하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나는 그의 모든 공격을 받아내며 그의 겉모습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훑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인상이 찌푸려지며 주변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펼쳐진 스킬은 나에게 있어 아주 익숙한 무공이었다.

     

   파팟!

     

   그의 검이 하늘을 향하자 몸에서 방출된 마력들이 빠르게 응축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인 마력의 광휘.

     

   월광검법 제일식 月光劍法 第一式

   신월 新月

     

   나는 가르친 적도 없는 월광검법의 초식이 박조철의…… 아니 그와 똑 닮은 인간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젠장!”

     

   더 이상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이 인간이 박조철인지 박조철을 닮은 누군가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계속해서 살초를 펼치는 적을 상대로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는 보법을 밟아 그의 공격을 일일이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격을 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가 펼치는 월광검법이 나의 움직임을 마치 찍어낸 듯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흐읍!!”

     

   그의 움직임에 대한 계산을 끝마친 나는 곧장 그에게 근접하며 손을 뻗었다.

     

   검을 쥔 박조철의 손이 보였다. 다음에 이어질 공격은 허초를 섞은 짧은 찌르기.

   그의 손이 뻗어지는 타이밍을 알았기에 나는 그 움직임에 맞춰 강하게 말아 쥔 왼손을 그의 손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빠각!

     

   손가락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들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에게 한 걸음 더 접근했다.

   그리고 즉시 오른발을 뻗어 균형을 잃은 그의 뒤꿈치에 가져다 댔고 동시에 비어 있는 오른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아아앙-!!!

     

   “크윽!!!”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가 내리꽂힌 박조철이 짧은 비명을 터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얼굴로 덤비지 마. 마음 약해지니까.”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그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큰 충격으로 몸에 힘이 빠진 듯한 모습에도 그 의지만큼은 살아 있었기에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죽여야 하나?’

     

   진짜 박조철이든 아니든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덤빈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스윽.

     

   나는 그의 머리를 붙잡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이것이 탑의 시련이든 뭐든 나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박조철의 눈동자가 보였다.

   분노라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대화라고 부를 만한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젠장, 역겨운 성좌 새끼들.”

   “……뭐?”

     

   “크큭! 내가 또 너희들의 장난에 놀아날 줄 알아? 그냥 죽여. 나도 이제 쉬고 싶으니까.”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성좌들을 욕한 것도 그렇고 성좌들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말은 그냥 흘려듣기에는 찝찝함이 앞섰다.

     

   스윽.

     

   나는 붙잡고 있던 박조철의 머리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서며 그의 반응을 살폈고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짓이지?”

   “아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하… 미치겠군. 이젠 말투까지 흉내 내고 말이야……”

   “쯧. 복잡하네. 우선 싸움은 내가 이겼으니까 뭐 하나만 물어보자.”

     

   나의 말에 박조철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말을 흉내 낸다고? 내가? 나는 난데?

     

   그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해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고 처음 나온 물음은 바로 그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박조철 씨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무슨 헛소리냐.”

     

   “아니, 그 전에 월광검법을 쓰는 것도 그렇고…… 나는 조철 씨한테 월광검법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

   “설마……?”

     

   나의 물음에 박조철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이를 가는 느낌이 아니라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설마…… 설마, 진짜 시인 씨입니까?”

     

   박조철과 똑같은 얼굴의 남자가 그와 똑같은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그의 눈이 당장이라도 눈물 쏟아낼 듯, 붉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 본 그의 슬픈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위로를 건네고 말았다.

     

   ***

     

   탑의 15층은 ‘세계의 편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박조철과 닮은…… 아니 평행세계의 박조철과 대화를 하며 이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평행세계고 이 세계의 나는 죽었다?”

   “평행세계인지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시인 씨가 죽었다는 말은 안 했는데?”

     

   이 세상의 박조철은 내가 자신이 알던 김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 나에게 반말을 했다. 나름 친근함의 표시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닌 것 같기도 했고.

     

   “그럼 왜 죽었다는 듯이 말을 했던 거지?”

   “거의 그런 상태니까. 성좌들에게 역습을 당한 이후로 우리 세상은 완전히 멸망했거든. 시인 씨는 여길 지키다가 다른 성좌 놈들에게 봉인 당했고.”

     

   평행세계의 김시인은 타 성좌들의 습격이후 그들에게 납치를 당한 상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근데 나는 왜 공격했던 거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내가 그 설명을 안 했군. 지금 시인 씨는 성좌들에게 붙잡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성좌들은 시인 씨의 몸을 가지고 실험체 따위를 만들며 놀고 있는 상황이지.”

     

   “그래서 내가 그 성좌들이 만든 장난감인 줄 알았다 그건가?”

   “맞아. 지금까지 수 백 명의 가짜가 이곳을 찾아왔었어. 처음에는 말도 못 하고 표정도 없는 인형 따위가 찾아왔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디테일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와 똑같이 생긴 괴물을 만들어 평행세계의 박조철에게 주기적으로 보낸다.

   그 인형들의 전투력을 떠나 그들의 표정과 감정은 점차 다양해졌고 최근에는 어느 정도 대화를 시도하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나는 왜 믿는 건데? 요즘 말도 통하고 한다며. 감정도 점점 발현되기 시작했으면 나도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의심을 하고 다시 칼을 내 목에 들이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박조철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고 나는 금방 그의 말을 납득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거든.”

   “뭐가?”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월광검법을 파악한 건 네가 처음이야. 충분히 새로운 경우라고 판단했고 나는 내 직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몸에 베인 습관이라는 건 무시하기는 어려운 것. 내가 알던 박조철이든 이 세계의 박조철이든 그들은 꽤나 섬세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건물은 뭔데 혼자 멀쩡하지?”

   “멀쩡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하자가 있는 것 같지만…… 이곳은 우리 쉘터다. 뭐랄까… 이 세상이 가진 최후의 방어선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최후의 방어선이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진 빌딩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외계인의 침공에 투쟁하는 생존자들을 보는 기분.

     

   “그런데 혹시……”

     

   그리고 이쯤 되니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뭐, 또 궁금한 게 있나?”

   “다른 사람들도 다 있어?”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거다. 아무튼 계속 밖에 있기도 뭐 하니 슬슬 들어가지. 비록 우리가 알던 시인 씨는 아니지만 다들 용기를 얻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15층에서의 첫 번째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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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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