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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4

       이른 아침. 에테르는 클라이스를 데리고 마왕성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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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에는 가야 할 곳이 있다 말해놓고, 성 주변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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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곧 클라이스는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채고는 숨을 씩씩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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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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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에테르는 자신을 ‘산책’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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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군인 출신은 길들이기 힘들던데. 어쩌면 이렇게나 순종적이에요?”

       “자, 개처럼 짖어 봐. 멍멍!”

       “팔다리가 멀쩡히 달려있네요? 혹시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연락주세요. 요새 실험에 쓸 사지가 부족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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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걷다 보면 마수들이 나타나 에테르에게 말을 걸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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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마다 클라이스도 덩달아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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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줄 찬 클라이스를 본 인간형 마수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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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클라이스를 인간으로 인식하고는 있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며 대우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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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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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줄에 느껴지는 압박감을 두려워하면서도, 클라이스는 에테르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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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치 보면서 밥을 먹고, 청소를 시켜서 한 것까지는 이래저래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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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짓밟는 행동은 도저히 당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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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인데도 몸이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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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클라이스 자신이 애완견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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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나 저에게 앙금이 남아있는 거라면 차라리 죽이세요.”

       “뭐?”

       “그냥 죽이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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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스펠트 가문의 신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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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스펠트는 목숨 구걸 따위 하지 않는다. 굽히지 않기로 한 상대에게 싹싹 빌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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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때조차도 명예롭게.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몸 정도는 초개처럼 내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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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제 형제자매 곁으로 보내주세요. 살아서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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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에테르는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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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지 마라. 누가 살려서 보내준다고 했나?”

       “그런 건 알고 있으니 그냥 죽이세요.”

       “그렇게 죽어서 형제자매 볼 면목은 있고?”

       “당신에게 죽는다면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생기겠죠.”

       “궤변 늘어놓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클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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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더욱더 세게 목줄을 잡아끌었다. 목이 졸린 클라이스가 사슬을 잡아당기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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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 먹은 미음이 역류했다. 클라이스는 입을 틀어막고 위산 섞인 죽물을 간신히 아래로 내려보냈다.

       ​

       몸을 뒤척였기 때문일까? 코트 주머니에 욱여넣었던 방울토마토 두어 개가 눈밭 위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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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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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떨어진 방울토마토와 클라이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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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맹금류의 눈.

       ​

       죽음을 각오했던 클라이스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싸늘했다.

       ​

       “바닥에 뭘 떨군 거지?”

       “남겼어요. 이따 먹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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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토마토를 가리키며 대화를 이어갔다.

       ​

       “주워.”

       “주워서 먹으라고요?”

       “잘 아는군.”

       “싫어요.”

       “조금 전엔 먹으려고 쟁여두었다며?”

       “바닥에 떨어진 걸 먹을 수는 없어요.”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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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여전히 이러하다. 줏대 없고 이중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점에, 에테르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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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사람밖에 없으니 마음 편하게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도 상관없다. 더는 도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지?”

       “주제라면 알아요.”

       “그러면 주워서 먹으라고.”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어요.”

       “죽을 만큼 배고파 봐야 정신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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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노예였을 시절에는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도 주워먹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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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가 그러라고 명령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녀가 준 돈으로는 한 끼 식사를 만족스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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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그만한 시간 동안 허기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

       “계속 그렇게 뻔뻔하게 나와 봐라.”

       ​

       에테르는 열불이라도 난 듯 어느 때보다도 목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몸이 훅 끌어당겨졌다. 클라이스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냈다.

       ​

       “으읍…!”

       ​

       정신을 차렸을 땐 입에 방울토마토가 들어온 뒤였다. 신음이 새는 동안 에테르가 토마토를 주워서 입에 쑤셔 넣은 것이다.

       ​

       “여기 눈은 생각보다 깨끗하다. 군말 말고 씹어 삼켜라.”

       ​

       클라이스는 의도치 않게 토마토를 씹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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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콤달콤하고 싱그러운 식감. 오랜만에 맛보는 신맛과 감칠맛이 미뢰를 자극한다. 막상 뱉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씹게 되는 그런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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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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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울대를 넘긴 순간, 클라이스는 탄식하고 말았다.

       ​

       안 그래도 시장기는 여전했던 참이었다. 밍밍한 미음만 먹어서 속은 비었지. 아침식사 후 계속 걸어대서 배는 꺼졌지. 심지어 잔뜩 채혈당한 팔다리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지…. 그런 상황에서 먹은 방울토마토는 산해진미 부럽지 않은 요깃거리였다.

       ​

       “굼뜨지 말고 주머니에 있는 것도 다 털어먹어라. 회의 들어가면 몇 시간은 서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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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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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막상 먹어보니 한두 알 가지고는 부족했다. 클라이스는 주머니에서 토마토를 꺼내 전부 털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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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었다. 정말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위장이 활기를 되찾는 듯하다.

       ​

       포도당 수액이나 하트만 용액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방울토마토는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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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로 에테르는 손목시계를 체크했다.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클라이스는 계속 걸어야 했다.

       ​

       ​

       **

       ​

       ​

       ‘제가 도대체 무슨 주접을…….’

       ​

       시간이 지나고 나니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막상 다 먹고 나니까 뻘쭘해진 것이다.

       ​

       정작 죽이라고 당당히 말할 때는 언제고, 조금 전엔 뻔뻔하게 토마토를 먹었다. 귀족으로서 명예 실추였다.

       ​

       “아, 저렇게 훈련하는구나.”

       ​

       심지어 그 광경을 본 마수들이 있다. 회의장까지 따라온 그들은 클라이스를 보며 키득거렸다.

       ​

       죽고 싶다.

       ​

       진짜, 이번에는 거짓말 안 하고 죽고 싶었다.

       ​

       클라이스는 에테르를 따라 회의장이 있는 철병팔진에 입성했다. 그녀가 어제까지 있던 곳이자, 탈출을 시도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

       저번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이곳에서 잡혀버리고 말았다. 클라이스에겐 안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저기 뒤쪽. 로즈마리에게 얻어맞고, 아카샤에게 머리째로 잡혀 질질 끌려간 경험이 있었던…….

       ​

       이젠 ‘맡언니’의 시중을 드는 행색이라니. 우울증이라도 온 걸까? 클라이스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

       다른 건 됐으니 편하게 눈 감았으면 좋겠다. 극독에 당하든, 강력한 마법에 당하든 좋으니까. 그 정도로 마수에게 붙잡혀 노예처럼 부려먹힌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

       “창천께서 들어오십니다.”

       “호천께서도 곧 오신다고 합니다.”

       ​

       사천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었다. 텅 비었던 회의장이 점점 떠들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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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이스는 이들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전부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거물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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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번 회의는 왜 하는 건가?”

       ​

       가장 늦게 도착한 요르문간드가 아무에게나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핀잔뿐이었다.

       ​

       “게으른 건 여전하군.”

       “흐하하하하하하!”

       “나가.”

       ​

       사천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짧고 담백한 말이었다. 요르문간드는 문자 그대로 꼬리를 내리고 앉았다.

       ​

       “웃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군.”

       “이번 건 정기 회의다. 운 좋게도 상천의 복귀 시기와 겹쳐서 열리게 되었군.”

       ​

       제대로 대답해준 건 공동 2석인 아카샤였다. 그녀는 에테르와 함께 널찍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

       “그나저나 너희 둘은 왜 같은 의자에 앉는 거지?”

       “그야 우린 쌍둥이니까.”

       ​

       아카샤는 자신만만하게 몸을 뒤로 밀어넣었다. 등받이 의자에 허리를 딱 붙이고 서류를 뒤적거리자 뒤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

       로즈마리였다. 로즈마리는 언니 둘이 달라붙어 있는 걸 보고 못내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

       나도 두 언니와 함께 세쌍둥이 자매였다면 좋았을 텐데. 의자매라는 점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정기 안건 보고라지만 잘하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군. 왜 그런지는 얼추 감 잡히지?”

       ​

       아카샤가 원탁 위로 종이를 던졌다. 엘프국 수도의 대략적인 지도가 그려진 종이였다.

       ​

       “다들 알다시피 제국은 이제 끝났어. 남은 건 카우렐리아뿐이지.”

       ​

       아카샤의 말을 들은 클라이스가 화들짝 놀랐다.

       ​

       제국이 끝났다고? 멸망했다는 말인가?

       ​

       그렇다면 수도는? 틸레트 아카데미는? 자신의 아버지는?

       ​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백발 소녀에게 따져들고 싶었다. 도대체 제국 어디가, 어떤 식으로 끝난 것이냐고. 그러나 클라이스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제국 이야기는 건너뛰어지고 말았다.

       ​

       애간장이 탔다. 클라이스는 마수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저번에도 말했지만 바람의 로드스톤은 신록의 세계수 뿌리 부분에 위치해. 여길 출입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얻는 건 어렵지.”

       “그냥 불태우고 가져오면 안 되나? 흐히히!”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

       아카샤는 펜을 들어 설명을 보조했다.

       ​

       그녀가 그은 곳은 ‘메르헤름’, 엘프국의 수도였다.

       ​

       “세계수가 위치한 곳은 이곳 수도의 중심부. 이곳 주변에는 반경 1백 킬로미터 내외로 결계가 쳐져 있어. 정령들이 깔아놓은 가증스러운 결계지. 서투르게 악의를 표출했다간 이 결계에 감지되고 말 거야.”

       ​

       그렇게 되면 정령들이 나선다. 상급 정도면 모를까, 최상급부터는 사천이라도 경계해야 한다.

       ​

       심지어 대정령이라 불리는 정령왕 급이 오기라도 했다간…… 일을 벌이기도 전에 당하고 만다.

       ​

       파스모와 길라흐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둘은 정령왕에게 져서 봉인당했던 몸이다.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

       “세계수를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워. 요르문간드 정도는 되어 봐야 유효타를 먹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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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마저도 계획을 성공시킨다는 보장은 없다.

       ​

       요르문간드의 주특기는 일대일. 최상급 정령 수백 마리에게 둘러싸이기라도 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

       “결국 잠입밖에 답이…….”

       “잠입은 개뿔이.”

       ​

       아카샤의 말을 에테르가 끊고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카샤가 물었다.

       ​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그럼.”

       ​

       에테르는 다리를 꼬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노예, 클라이스 하스펠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

       “차고도 넘친다.”

       ​

       클라이스는 우뚝 굳어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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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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