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에테르는 클라이스를 데리고 마왕성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조금 전에는 가야 할 곳이 있다 말해놓고, 성 주변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클라이스는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채고는 숨을 씩씩 내쉬었다.
그렇다.
지금 에테르는 자신을 ‘산책’시키고 있는 것이다.
“와, 군인 출신은 길들이기 힘들던데. 어쩌면 이렇게나 순종적이에요?”
“자, 개처럼 짖어 봐. 멍멍!”
“팔다리가 멀쩡히 달려있네요? 혹시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연락주세요. 요새 실험에 쓸 사지가 부족하거든요.”
조금 걷다 보면 마수들이 나타나 에테르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때마다 클라이스도 덩달아 주목받았다.
목줄 찬 클라이스를 본 인간형 마수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들은 클라이스를 인간으로 인식하고는 있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며 대우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당신….”
목줄에 느껴지는 압박감을 두려워하면서도, 클라이스는 에테르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눈치 보면서 밥을 먹고, 청소를 시켜서 한 것까지는 이래저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짓밟는 행동은 도저히 당하고 싶지 않았다.
한겨울인데도 몸이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마치 클라이스 자신이 애완견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저에게 앙금이 남아있는 거라면 차라리 죽이세요.”
“뭐?”
“그냥 죽이시라고요!”
하스펠트 가문의 신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예이다.
하스펠트는 목숨 구걸 따위 하지 않는다. 굽히지 않기로 한 상대에게 싹싹 빌지도 않는다.
죽을 때조차도 명예롭게.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라면 제 한 몸 정도는 초개처럼 내버릴 수 있다.
“차라리 제 형제자매 곁으로 보내주세요. 살아서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어요!”
그 말에 에테르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라. 누가 살려서 보내준다고 했나?”
“그런 건 알고 있으니 그냥 죽이세요.”
“그렇게 죽어서 형제자매 볼 면목은 있고?”
“당신에게 죽는다면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생기겠죠.”
“궤변 늘어놓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클라이스.”
에테르는 더욱더 세게 목줄을 잡아끌었다. 목이 졸린 클라이스가 사슬을 잡아당기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조금 전 먹은 미음이 역류했다. 클라이스는 입을 틀어막고 위산 섞인 죽물을 간신히 아래로 내려보냈다.
몸을 뒤척였기 때문일까? 코트 주머니에 욱여넣었던 방울토마토 두어 개가 눈밭 위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허어?”
에테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떨어진 방울토마토와 클라이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맹금류의 눈.
죽음을 각오했던 클라이스조차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싸늘했다.
“바닥에 뭘 떨군 거지?”
“남겼어요. 이따 먹으려고.”
에테르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토마토를 가리키며 대화를 이어갔다.
“주워.”
“주워서 먹으라고요?”
“잘 아는군.”
“싫어요.”
“조금 전엔 먹으려고 쟁여두었다며?”
“바닥에 떨어진 걸 먹을 수는 없어요.”
“참 나.”
인간은 여전히 이러하다. 줏대 없고 이중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점에, 에테르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사람밖에 없으니 마음 편하게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도 상관없다. 더는 도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지?”
“주제라면 알아요.”
“그러면 주워서 먹으라고.”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어요.”
“죽을 만큼 배고파 봐야 정신을 차리지?”
에테르가 노예였을 시절에는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도 주워먹곤 했다.
클라이스가 그러라고 명령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녀가 준 돈으로는 한 끼 식사를 만족스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년. 그만한 시간 동안 허기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계속 그렇게 뻔뻔하게 나와 봐라.”
에테르는 열불이라도 난 듯 어느 때보다도 목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몸이 훅 끌어당겨졌다. 클라이스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냈다.
“으읍…!”
정신을 차렸을 땐 입에 방울토마토가 들어온 뒤였다. 신음이 새는 동안 에테르가 토마토를 주워서 입에 쑤셔 넣은 것이다.
“여기 눈은 생각보다 깨끗하다. 군말 말고 씹어 삼켜라.”
클라이스는 의도치 않게 토마토를 씹어 넘겼다.
새콤달콤하고 싱그러운 식감. 오랜만에 맛보는 신맛과 감칠맛이 미뢰를 자극한다. 막상 뱉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씹게 되는 그런 맛이다.
“아…….”
목울대를 넘긴 순간, 클라이스는 탄식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시장기는 여전했던 참이었다. 밍밍한 미음만 먹어서 속은 비었지. 아침식사 후 계속 걸어대서 배는 꺼졌지. 심지어 잔뜩 채혈당한 팔다리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지…. 그런 상황에서 먹은 방울토마토는 산해진미 부럽지 않은 요깃거리였다.
“굼뜨지 말고 주머니에 있는 것도 다 털어먹어라. 회의 들어가면 몇 시간은 서 있어야 하니까.”
에테르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막상 먹어보니 한두 알 가지고는 부족했다. 클라이스는 주머니에서 토마토를 꺼내 전부 털어넣었다.
맛있었다. 정말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위장이 활기를 되찾는 듯하다.
포도당 수액이나 하트만 용액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방울토마토는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에테르는 손목시계를 체크했다.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클라이스는 계속 걸어야 했다.
**
‘제가 도대체 무슨 주접을…….’
시간이 지나고 나니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막상 다 먹고 나니까 뻘쭘해진 것이다.
정작 죽이라고 당당히 말할 때는 언제고, 조금 전엔 뻔뻔하게 토마토를 먹었다. 귀족으로서 명예 실추였다.
“아, 저렇게 훈련하는구나.”
심지어 그 광경을 본 마수들이 있다. 회의장까지 따라온 그들은 클라이스를 보며 키득거렸다.
죽고 싶다.
진짜, 이번에는 거짓말 안 하고 죽고 싶었다.
클라이스는 에테르를 따라 회의장이 있는 철병팔진에 입성했다. 그녀가 어제까지 있던 곳이자, 탈출을 시도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저번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이곳에서 잡혀버리고 말았다. 클라이스에겐 안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저기 뒤쪽. 로즈마리에게 얻어맞고, 아카샤에게 머리째로 잡혀 질질 끌려간 경험이 있었던…….
이젠 ‘맡언니’의 시중을 드는 행색이라니. 우울증이라도 온 걸까? 클라이스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됐으니 편하게 눈 감았으면 좋겠다. 극독에 당하든, 강력한 마법에 당하든 좋으니까. 그 정도로 마수에게 붙잡혀 노예처럼 부려먹힌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창천께서 들어오십니다.”
“호천께서도 곧 오신다고 합니다.”
사천이 하나둘씩 모이고 있었다. 텅 비었던 회의장이 점점 떠들썩해진다.
클라이스는 이들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전부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거물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의는 왜 하는 건가?”
가장 늦게 도착한 요르문간드가 아무에게나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핀잔뿐이었다.
“게으른 건 여전하군.”
“흐하하하하하하!”
“나가.”
사천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짧고 담백한 말이었다. 요르문간드는 문자 그대로 꼬리를 내리고 앉았다.
“웃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군.”
“이번 건 정기 회의다. 운 좋게도 상천의 복귀 시기와 겹쳐서 열리게 되었군.”
제대로 대답해준 건 공동 2석인 아카샤였다. 그녀는 에테르와 함께 널찍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나저나 너희 둘은 왜 같은 의자에 앉는 거지?”
“그야 우린 쌍둥이니까.”
아카샤는 자신만만하게 몸을 뒤로 밀어넣었다. 등받이 의자에 허리를 딱 붙이고 서류를 뒤적거리자 뒤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로즈마리였다. 로즈마리는 언니 둘이 달라붙어 있는 걸 보고 못내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나도 두 언니와 함께 세쌍둥이 자매였다면 좋았을 텐데. 의자매라는 점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기 안건 보고라지만 잘하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군. 왜 그런지는 얼추 감 잡히지?”
아카샤가 원탁 위로 종이를 던졌다. 엘프국 수도의 대략적인 지도가 그려진 종이였다.
“다들 알다시피 제국은 이제 끝났어. 남은 건 카우렐리아뿐이지.”
아카샤의 말을 들은 클라이스가 화들짝 놀랐다.
제국이 끝났다고? 멸망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수도는? 틸레트 아카데미는? 자신의 아버지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백발 소녀에게 따져들고 싶었다. 도대체 제국 어디가, 어떤 식으로 끝난 것이냐고. 그러나 클라이스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제국 이야기는 건너뛰어지고 말았다.
애간장이 탔다. 클라이스는 마수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바람의 로드스톤은 신록의 세계수 뿌리 부분에 위치해. 여길 출입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얻는 건 어렵지.”
“그냥 불태우고 가져오면 안 되나? 흐히히!”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아카샤는 펜을 들어 설명을 보조했다.
그녀가 그은 곳은 ‘메르헤름’, 엘프국의 수도였다.
“세계수가 위치한 곳은 이곳 수도의 중심부. 이곳 주변에는 반경 1백 킬로미터 내외로 결계가 쳐져 있어. 정령들이 깔아놓은 가증스러운 결계지. 서투르게 악의를 표출했다간 이 결계에 감지되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정령들이 나선다. 상급 정도면 모를까, 최상급부터는 사천이라도 경계해야 한다.
심지어 대정령이라 불리는 정령왕 급이 오기라도 했다간…… 일을 벌이기도 전에 당하고 만다.
파스모와 길라흐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둘은 정령왕에게 져서 봉인당했던 몸이다.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를 직접 공격하기는 어려워. 요르문간드 정도는 되어 봐야 유효타를 먹일 수 있겠지.”
물론 이마저도 계획을 성공시킨다는 보장은 없다.
요르문간드의 주특기는 일대일. 최상급 정령 수백 마리에게 둘러싸이기라도 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잠입밖에 답이…….”
“잠입은 개뿔이.”
아카샤의 말을 에테르가 끊고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카샤가 물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그럼.”
에테르는 다리를 꼬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노예, 클라이스 하스펠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차고도 넘친다.”
클라이스는 우뚝 굳어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