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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4

     

    “오오오!”

    “선! 생! 님! 선! 생! 님!”

    “고트! 베르크!”

     

    앰브로시아를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가니 치유사들이 연신 나를 부르며 환호해줬다.

     

    나는 그들의 환대에 응대하며 연기자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의원의 밤에 온 의사와 치유사 친구들 모두 환영하고. 그래, 파벌 상관없어. 다들 성녀님 축복 받았잖아. 한잔해.”

     

    연회장의 열기가 뜨거워진다.

     

    나와 앰브로시아에게 모든 내의원 치유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이런 자리에서 교훈성 연설을 하는 건 재미없지만, 중요한 이야기고.

     

    마지막으로 전해둘까.

     

    “자자, 한 가지 공지사항. 앞으로 내의원에 파벌 정치는 없어질 예정이야.”

     

    내 폭탄 발언에 치유사들이 깜짝 놀랐다.

     

    “주치의 따라다니며 구역 나누고, 업무 나누고, 그거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일하기도 바쁜데 언제 상사 눈치 보고 있어. 잘 하는 분야 가서 환자 보고 실력대로 월급 받아가야지. 안 그래?”

     

    “저, 저희야 그렇지만…”

    “그 말씀을 상사 본인이 하시나…?”

     

    의아해하는 치유사들.

     

    “앞으로는 파벌 구분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녀. 적어도 월광궁은 그렇게 할 거야. 여기 이렇게 깜찍한 성녀님이 계신데 다른 주치의를 왜 따라? 제정신이냐?”

     

    내 발언에 앰브로시아를 부르는 외침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성녀 칭호가 자랑스러웠는지 발꿈치를 들며 조그마한 몸집을 쭉 뻗었다.

     

    “앞으로 내의원 모든 의사와 치유사는 성녀님을 따르며 환자에게 봉사한다. 주치의도 마찬가지. 너희와 똑같아. 알았지?”

     

    “앰브!”

    “로시아!”

    “성녀!”

     

    적어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내의원의 정치 파벌을 완화하는 타개책.

     

    성녀라는 주치의의 상위 계급이 나타났으니, 그녀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준다.

     

    황실에 황족이 너무 많고, 주치의도 그만큼 많아 내의원 최고 권한이 분산된 지금 형태가 근본적인 원인이었으니.

     

    당분간 고생 좀 해, 앰브로시아.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성녀님! 성녀님!”

    “내의원! 내의원!”

     

    성녀와 함께 내의원 생활을 해나갈 신입 치유사들은 아주 신이 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월광궁 치유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월광궁! 신입들에게 알려줄 것. 우리는 환자를 보기 앞서 어떤 선서를 하지?”

     

    선배가 될 치유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왼손을 심장에, 오른손은 펼치고 입을 모아 외친다.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 히기에이아, 파나케이아에게 증언하노니,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다음 선서와 서약을 이행한다!

     

    갑작스레 시작된 합동 선서에 치유사들이 깜짝 놀란다. 박력 있는 모습이다.

     

    ―나는 내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위한 식이요법을 사용하며,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

     

    ―나는 약제를 다룸에 있어, 요청을 받더라도 위험한 약은 처방하지 않으며, 제안하지도 않는다. 나의 삶과 의학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유지한다.

     

    ―치료 중에도, 아닐 때에도, 환자의 삶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은 누설해서는 안 되며, 나는 그것을 신성한 비밀로 여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사가 의학을 펼치기 전 지킬 윤리를 담은 내용이다.

     

    기원전에 작성된 내용이라 현대의학과는 조금 상충하기에 칼을 쓴다든지 하는 부분은 살짝 바꿨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 선서를 지키는 한 나는 존경과 건강을 누린다. 나는 자유의사로서 명예를 걸고 서약한다!

     

    그들의 선서가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감명받은 치유사들이 눈을 번쩍 뜨고 감탄을 연발했다.

     

    “감동적인 선서로군.”

    “이게 치유사… 의사가 가져야 할 정신인가!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이 남았어.”

    “환자를 위해서…!”

     

    열정적인 대학 새내기들 같아서 보기 좋네.

     

    뭐, 의학도 치유술도 공부할 건 점점 산더미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악성 환자를 만나면 별별 생각이 다 들겠지만.

     

    그래도 보람을 찾을 녀석은 찾을 거다.

     

    힘내라. 빡세겠지만.

     

     

     

    ***

     

     

     

    잠시 후, 분위기가 진정된 연회장에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아아, 고트베르크. 내 친우여.”

     

    게오르크 2황자였다.

     

    “전하. 황가의 후미진 장소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난처한 입장인 모양이더군.”

     

    그가 레이스가 화려하게 휘날리는 복장을 뽐냈다.

     

    무슨 용건으로 나를 찾아왔을까.

     

    “제게 무슨 난처할 일이 있을지요. 내의원 치유사들과 한껏 송년회를 즐기던 참이었습니다만.”

     

    “하하, 아셀라에게야 한 수 접겠다만은 나도 황궁 돌아가는 일에야 늘 귀를 기울이고 있다네. 헤이케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지 않았나.”

     

    그가 앞머리를 튕기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국가 경영이란 곧 사업이지. 영지 건이라면 내게 먼저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알고 계셨군요.”

     

    “먼저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섭섭해하고 있었네. 그대와 내 사이 아닌가.”

     

    황족쯤 되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나.

     

    아무리 역사를 들춰봐도 내가 게오르크에게 먼저 찾아가 상담을 할 정도로 친해진 적은 없건만, 그는 머릿속에서 좋을 대로 기억을 왜곡한 모양이었다.

     

    하긴 아셀라도 당장 내일부터 태양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라고 명령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진심으로 여기고 있을 것 같고.

     

    이런 분들 덕에 천동설이 대세가 됐겠지.

     

    아니,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려나?

     

    “중요한 안건이기에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공식 발표 전까지는 기밀로 지켜야 하는 건입니다. 제국에 소속된 수백 귀족가에서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게오르크가 후국 독립에 대해 알게 된 건 꽤 귀찮은 일이었지만 지금 그는 내게 적대적인 태도가 아니니 문제가 되진 않는다.

     

    무엇보다 이전에 세워놓은 협약이 하나 있다. 나는 그에게 빚을 하나 지우고 있다.

     

    “옳은 판단이었네. 사전에 새어나갔다간 오히려 반란을 부추기는 정보가 될 테지. 상황을 보니 월광궁조차 파악하지 못한 정보 같네만.”

     

    “그렇습니다.”

     

    “하하하, 본디 아내에게 비밀로 할 이야기는 친우와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게오르크가 껄껄 웃었다.

     

    “그대를 급히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네, 고트베르크. 시기를 놓치면 후국 독립은 불가능해진다고 알려주려 왔네.”

     

    “과연,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간단하다.”

     

    게오르크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팍을 엄지로 가리켰다.

     

    “내가 곧 기사단을 일으켜 황궁을 접수할 예정이기 때문일세.”

     

    “아하, 그렇군요.”

     

    서슴지 않게 말한 것 치고는 꽤 정신 나간 내용이었다.

     

    게오르크는 방금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선언했다.

     

    “곧 국장 기간이 끝난다. 폐하께서는 그대의 올바른 판단으로 후계자를 고를 준비를 마치셨을지 모르겠으나, 그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황제가 내건 승계의 조건은 마왕군 토벌이었다.

    확실히, 미래에서도 그건 5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제국에는 통치자가 필요하네. 한순간이라도 비어선 안 돼. 승계전이라는 말랑한 명분을 귀족가가 납득할 리가 없지.”

     

    “즉, 무력으로 그 자리를 접수하실 생각이시라는.”

     

    “바로 그렇다네. 그때가 되면 황실은 혼란이 잠식할 걸세. 그런 상황에서 1황녀가 옥새를 찍어주리라 생각하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오나.”

     

    나로서는 게오르크의 이야기는 상당히 갑작스러웠다.

     

    “저는 3황녀님의 측근이지요.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흘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대와 맺은 약속이 있잖는가. 그대에겐 짐이 군사를 일으킬 날짜를 정할 권리가 있다네.”

     

    “흠, 제가 이 정보를 입수했다면 분명 약조를 빌미로 전하를 저지하려 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거사 때문에 먼저 찾아오다니.

    자식, 의리 있네.

     

    “전하께서도 깊은 고심 끝에 내리신 판단이시니 무르실 수는 없으시겠지요.”

     

    “물론이다, 고트베르크.”

     

    게오르크의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병력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얼마 안 가 헤이케와 아셀라에게 제압되고 말겠지.

    승계전에서 탈락하는 결과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필요했던 마지막 피스가 되어줄 것이었다.

     

    게오르크가 일으킨 혼란에 아셀라가 정신 팔린 틈을 타, 나는 황실을 떠날 수 있다.

     

    “날짜는 닷새 후가 어떻겠습니까.”

     

    “25일로군. 알았네. 그때까지 준비를 마쳐놓길 바라겠네.”

     

    나는 게오르크와 악수를 나누었다.

     

    “황실을 떠나는가. 그대가 그립겠군.”

     

    “저는… 글쎄요.”

     

    “하하, 솔직한 점이 그대의 매력이지. 닥터 파우스트에게 안부 전해주게나.”

     

    게오르크와 헤어지고, 나는 호위기사를 불렀다.

     

    “브루노.”

     

    “예.”

     

    “준비하자. 후작령으로 떠날 사람을 모아.”

     

     

     

    ***

     

     

     

    국장 기간이 끝나고도 아셀라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월광궁은 황제의 일을 넘겨받아서 새 체제를 만드느라 바빠졌다.

     

    이제는 승계권자들이 합쳐 온전히 황제 구실을 해야 한다. 경쟁자들끼리 협력해야 하는 구도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제국 안쪽만으로도 신경 쓸 일이 태산인데, 연합군도 끼어 있으니 일이 두 배다.

     

    아셀라는 시간에 쫓긴다고 느껴질 때마다 얼마 전 라스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와 함께 후작가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고려할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길을 포기한 자신에게는 대체 어떤 가치가 남는다는 말인가.

     

    마법이야 남아 있겠지만.

     

    오직 마법을 자신만의 업적으로 만족하여 스러져간, 역사의 수많은 마법사들과 자신은 달랐다.

     

    고위계의 대마법을 개발한다 한들 활용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스의 아내가 되면… 후작 부인이 되는 거겠지.’

     

    지금보다야 의무는 적어지겠지.

     

    하지만 자신의 마법이 빛도 발하지 못하고,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고, 역사책에 기록되는 일도 없이.

     

    북부 시골에서 한가로이 따분한 인생을 보내야 한다니.

     

    자신도 그저 황실 가계도에 이름 세 글자만 적힐 범인으로 살다 끝난다?

     

    아셀라는 죽어도 싫었다.

     

     

    …그래도 혹시.

     

    그러자고 대답했으면 라스는 기뻐했을까.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했다는 건.

     

    이제는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궁금하다.

     

    ‘됐어.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생기지도 않을 일이다.

    라스는 자신이 황제가 될 때까지 주치의로서 몇 년은 더 보조해줘야 하며, 그 후에는 국서의 자리에서 정치를 도와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미 없는 가정이다.

     

    라스도 전쟁터를 태어나 처음 보고 기분이 싱숭생숭해져서 그런 소릴 했겠지.

     

    ‘무엇보다, 용사를 거부했잖아.’

     

    라스가 파티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쏙 들어간 걸 보면, 정황으로 보아 라스는 황실에 남기로 한 게 분명했다.

     

    월광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일단 그를 감금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아예 격리시킬 생각이었건만.

     

    그 날 자신에게 한 권유가 어쩐지…

     

    …프로포즈 같아서.

     

    일단은 지켜보기로 한 아셀라였다.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심지어 오늘은 12월 25일.

     

    아셀라의 생일이다.

     

    라스는 그녀의 생일마다 선물을 들고 나타났다.

     

    센스는 그냥 그랬어도, 나름 올해는 무엇일까 기대하는 재미는 있었다.

     

     

    “황녀 전하, 급보입니다.”

     

    도중, 비서장으로 승격한 시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보를 가져왔다.

     

    문서를 받아든 아셀라.

     

    그녀도 내용을 확인하고는, 금방 미간을 찡그리게 되었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의 후국 독립이 승인되었다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성원에 힘입어 자매님의 이미지를 업데이트했어요! 다음화는 일러스트가 준비되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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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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