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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4

   1왕자는 너무도 간단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자신이 먼저 시작한 내기인데다가, 그 마지막 승부에서 상대가 정상과는 한참 거리가 먼 방법을 사용했으니 무어라 어라 이야기를 하리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1왕자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오랜만에 흥이 나는 승부였노라 무덤덤하게 이야기하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그의 주변에서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음에도 그랬다.

   

   할배는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네게 좋은 일이지 않냐며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난 이 상황을 도저히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저 놈이 어떤 인간인지 아는데 어떻게 이걸 좋게 넘기냐고.

   

   1왕자에게 히키코모리 왕자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가 단순히 수도에 칩거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성격적인 부분에서의 하자가 더 컸다.

   

   아서조차 올려다 볼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과 뛰어난 실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그 성격은 얼마나 치졸하며 치밀한지.

   

   왕궁 루트를 타며 1왕자를 적대하게 된 유저들은 대부분 그가 파놓은 무수한 함정에 치를 떨며 저 새끼만큼은 조지겠다고 마음먹기 마련이었다.

   

   자신을 적대하면 신분여하와 성별, 강함을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짓밟던 인간이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이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가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상대를 괴롭힐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갈 것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군중을 해치며 떠나가는 1왕자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오죽하면 허접 주신이 함박웃음을 지을 걸 각오하고 의도적으로 퀘스트를 실패하는 편이 나았을 거란 후회까지 했다.

   

   생각해보라. 내가 패했더라면 1왕자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트란 영지 축제에서 장대한 흑역사를 써내려갔겠지만 그래도 후환은 없었을 것 아닌가.

   

   젠장. 오랜만에 게임에서 하던 것처럼 던전을 공략하다 들떠버린 게 문제야.

   

   최소한의 이성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고민이라도 했을 텐데!

   

   이게 다 노점상 때문이야!

   

   그 인간이 나한테 썩은물은 참을 수 없는 뉴비 파티를 보여준 탓에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고!

   

   “루시. 듣고 있니?”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던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오늘 따라 베네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알겠지? 지금까지 벌인 일은 괜찮다. 1왕자님께서 좋게 넘어가셨으니까. 허나 파티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부디 이 파파의 위장을 생각해주렴.”

   

   영지의 일을 끝내고 파트란 축제에 방문하자마자 나와 1왕자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을 들은 베네딕이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을까. 그리고 일이 커지지 않았단 사실을 듣고 얼마나 안도했을까.

   

   베네딕이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분명 루시일 거야.

   

   몇 번이고 이야기를 하고도 걱정스러운 듯 날 지켜보던 베네딕이지만 파티를 준비해야 한다는 시종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감에 따라 에린을 비롯한 여러 시녀들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내가 파트란 영지로 향하며 챙긴 여러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저 중의 절반은 과거 루시가 사교계에서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였다.

   

   저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에 하던 후회가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1왕자건 악신이건 간에 죽어라고 구르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그렇지만 저 옷은 다르다.

   

   페도 변태 주신이 히히덕거리며 벌칙으로 제시한 저 옷은 내가 대처할 수 없는 재앙이며, 내 영혼에 크나큰 상처를 새길 악몽이었다.

   

   일부러 지기는 뭘 일부러 져.

   

   그냥 저걸 입은 후에 정체도 모를 추가적인 벌을 받겠다고?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네.

   

   동화 속의 엘프가 입어도 ‘아줌마 너무 주책맞은 거 아니에요?’ 라는 소리를 들을 화려한 옷들을 모두 걸러냈다.

   

   예전에 입었던 옷이니 맞지 않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사이즈는 맞을 겁니다. 이전에 재어보았을 때 그대로였으니까요.”

   

   ‘…그래도 마음에 안 드니까 빼주세요.’

   “시끄러워. 허접 에린. 주인이 시키면 그냥 해.”

   

   “알겠습니다.”

   

   분명 저걸 루시가 입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이삼년 전일 텐데 사이즈가 그대로라고?

   

   지금 루시의 나이는 한창 몸이 자랄 나이 아니던가?

   

   몇 개월만 지나도 옷이 맞지 않아 새로 바꾸어야 하는 그런 시기잖아.

   

   근데 왜 변화가 없지? 설마 이미 루시의 성장기는 끝나버린 건가?

   

   이 짧달막한 꼬맹이인 상태에서?!

   

   아냐. 그럴 리 없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트롤과 혼혈인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베네딕과 환상에서 보았을 때 평균 이상의 키를 지녔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루시다.

   

   키가 유전자에 큰 영향을 받는단 걸 생각해보면 루시는 작은 것보다 과하게 큰 걸 걱정하는 게 맞단 말이다.

   

   근데 왜 키가 안 자라는 거지?!

   

   대체 왜!?

   

   주신인가?

   

   페도에 변태인 주신이 내 키가 크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건가?!

   

   보통이라면 개소리라고 생각한 후에 넘겨버릴 텐데 허접 주신의 이름이 붙으니 설득력이 있어 보여.

   

   “아가씨. 이 중에서 무얼 입으시겠습니까?”

   

   에린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남은 드레스를 살폈다.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옷을 모두 걸러버렸기에 남은 건 모두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그래봐야 드레스이긴 했지만 앞서 루시의 과거 옷을 입을 각오를 해서 그런 건지 저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중에서 뭐가 제일 나을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을 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난 효율충이었으니까.

   

   무슨 장비가 제일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라면 몇날며칠을 떠들 수 있지만 어떤 룩이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할아버지.’

   <뭐든 어떠냐. 그대에겐 잘 어울릴 거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안다. 그렇지만 본인은 이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

   

   한 마디 할 때마다 타박 당하던 때가 떠오른다는 할배에게선 좋은 답변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사실 할배의 말이 맞다. 뭘 입더라도 루시의 외모를 생각해보면 잘 어울릴 거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들 이야기하니까.

   

   하아. 그래. 뭐 이런 걸 고민하고 있냐.

   

   그냥 저 중에서 제일 무난해 보이는 걸 고르면 그만이잖아.

   

   “아가씨.”

   

   뭐가 제일 눈에 덜 띌까를 고민하던 순간 에린이 목소리를 냈다.

   

   “제가 추천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낸 것인지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나왔다.

   

   내가 분명 타박할 것이라 생각한 거겠지.

   

   그걸 본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갤 끄덕였다. 무슨 말을 꺼내건 독설로 바뀔거란 걸 알았으니까.

   

   그러자 에린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아가씨께 안 어울리는 옷은 없지만 그래도 더욱 잘 어울리는 옷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줄줄 흘러나오는 에린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최면에라도 걸린 것마냥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이미 드레스를 입혀지는 중이었다.

   

   …에린. 무서운 아이.

   

   파티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 과정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미고. 갑옷보다도 복잡해서 도저히 혼자 입을 엄두가 안 나는 드레스를 걸치고.

   

   그래서 나는 시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에 다른 생각을 했다.

   

   인형놀이의 인형이 되는 걸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으니까.

   

   그 과정이 어찌되었든 간에 내가 허접 주신의 수작질을 분쇄한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라서 보상이 지급되었지.

   

   허접 주신이 도저히 신앙할 수 없는 페도에 변태에 마조고 사디인데다 무능하고 치졸한 쓰레기 같은 신인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단 하나. 믿음직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바로 보상에 관한 것.

   

   여태까지 제일 쓸모 없었던 베네딕의 호칭에 관한 조언도 후일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난 이번에도 허접 주신이 내려 줄 보상을 기대했고 동시에 걱정하기도 했다.

   

   이번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아르마디를 욕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지라.

   

   메스가키 스킬의 강화 같은 괴악한 게 나오면 어쩌나 싶었지.

   

   처음으로 지급된 보상은 퀘스트가 지급될 때부터 명시되어 있던 것이었다.

   

   [당신의 평판이 급증합니다!]

   [당신의 유능함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대륙의 호사가들이 당신의 능력과 재능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평판의 증가.

   

   그 아래의 설명에는 여러 요란한 소리가 적혀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체감이 되는 보상은 아니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평판 수치가 몇 만큼 올랐다 같은 게 안 보인단 말이야.

   

   그래도 저를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메시지로 떠올랐다는 건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는 거고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체감이 될 테니.

   

   그 다음에 떠오른 메시지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여태 추가 보상으로 준 것이 대부분 스킬과 관련된 거라던가 장비의 강화라던가 무슨 아이템이라던가 하는 부분이었으니까.

   

   [당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신체적 패널티 대부분이 사라집니다!]

   

   신체적 패널티의 삭제.

   

   이 보상은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본래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도핑의 패널티가 가까워지며 점차 몸이 무거워지는 중이었거늘 갑자기 신체가 상쾌해진 것이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처럼.

   

   며칠 동안 앓아누울 각오를 하던 나였기에 이 보상은 무척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았던 만큼 이 이상의 보상을 기대했던 나였지만 보상은 이걸로 끝이었다.

   

   그래도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사도의 상황을 보고 세심하게 신경을 써준 티가 나서.

   

   보상 지급이 끝난 후 나는 허접 주신이 새로운 퀘스트를 주리라 예상했다.

   

   여태까지 최소한 한 개의 퀘스트는 남겨뒀으니까.

   

   허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아카데미 2학기를 기다려달라는 문구가 나올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난 그걸 남은 기간 동안 편히 쉬라는 주신의 배려라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번 파티만 넘기면 남은 기간은 편하게 보낼 수 있단 소리야.

   

   이 밤만 아무 문제없이 넘겨버릴 수 있다면 휴가가 찾아오는 거라고!

   

   이미 계획은 짜두었어

   

   이번 파티 내내 구석에 짱 박혀 있을 거야.

   

   그림자 속에 숨어서 음침하게 시간이나 때울 거라고.

   

   누구와 만나지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치장이 끝나가는 거울 속 루시를 바라보며 그리 결심하던 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술 공작일세. 잠시 실례해도 되겠나?”

   

   파트란 공작? 지금 제일 바쁘실 분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파트란 공작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별 생각하지 않고 그를 안쪽으로 들였다.

   

   “미안하네. 제일 정신없을 때인데.”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허술 공작. 원래 그런 분이잖아요?”

   

   “아하하. 이해해주어서 고맙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대에게 전할 용무가 있어서야.”

   

   용무? 뭐지? 1왕자와 관계된 일인가?

   

   “알고 있겠지만 이번 파트란 축제에서 그대가 학살자의 칭호를 거머쥐지 않았나.”

   

   ‘네. 그렇죠.’

   “그게 왜요?”

   

   “이번 파티 중간에 내가 그대를 불러 칭호를 수여해야 하거든. 그 때에 말할 소감은 준비해두는 편이 낫지 않나 싶어서 말이야.”

   

   똑똑하고 당찬 영애이니 잘 할 거라 생각한다며 파트란 공작이 미소를 지었지만 난 도저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여러 유력 귀족은 물론이고 유력 왕위 계승자까지 있는 파티에서 소감을 이야기하란 소리지?

   

   메스가키 스킬이 정상작동하는 상태에서?

   

   …

   

   허접 주신!

   

   아니 아르마디님!

   

   면제권!

   

   면제권 쓸게요!

   

   제발 스킵시켜 주세요!

   

   제바아아아알!

   

   이 위기를 넘겨 달란 말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레스와 수상 소감의 이지선다!

루시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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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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