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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5

       

       ‘후후…… 이렇게 된 거, 이 기회를 이용해 시라바야시 상에게 저의 너그러운 모습을 각인시켜 보여줘야겠군요.’

       

       렌까는 그렇잖아도 백철연을 포섭하기 위해,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런 이메-지를 말이죠.’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딱 좋은 기회가 아닌가. 마침 부하가 자신을 두려워하며 쩔쩔매고 있는 상황. 여기서 너그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백철연 역시 보고 느끼는 것이 많을 터.

       

       ‘시라바야시 상은, 제가 부하를 너그럽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테니까요. 지금부터 보여드리죠.’

       

       그렇게 생각한 렌까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까히로를 불렀다.

       

       『다까히로 상.』

       『예, 예!』

       

       다까히로는 각잡힌 태도로 차렷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렌까는 온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 경성분조를 보살피느라 노고가 많았어요.』

       『……예?』

       

       렌까가 그렇게 말해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을까. 다까히로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렌까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훗. 허언이 아니랍니다. 격무에 지쳤을테니, 공기 좋은 충청도나 강원도 등으로 휴가라도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요?』

       『예? 에? 에엣…… 가, 감사합니다……?』

       

       렌까는 그렇게 말하며 백철연을 곁눈질로 흘깃 바라보았다.

       

       ‘보셨나요? 제가 이렇게 부하를 아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게 백철연이 보는 앞에서, 부하에게 고생했다며 휴가도 주고. 백철연 역시 다소 놀란 눈치였다.

       

       ‘저를 따르면 이렇게 좋은 일만 있으리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죠. 후후……’

       

       렌까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

       

       

       

       ‘왜 웃지.’

       

       다까히로가 말하길 렌까는 분명 화났을 것이라고 했는데. 저렇게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으니 오히려 불안한 느낌이다.

       

       ‘무섭게.’

       

       다까히로를 용서한 걸까? 아니면 별로 화가 안 난 걸까? 아니면 다까히로의 말대로, 내가 함께 와서 누그러진 걸까?아니면 화가 났는데 안 난척 하는 걸까? 

       

       휴가를 보내준다는 것도 그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까 다까히로에게 듣기로 충청도나 강원도에도 광산에서 나오는 마수 때문에 시마즈구미의 출장소가 있다던데, 그 쪽으로 좌천을 보내려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쉬다가 오라는 건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까히로도 우선은 감사하다고 했지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을 보니 이녀석 역시 렌까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불안하기란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그리 화난 건 아닌가.’

       

       다까히로에게 듣기로, 렌까가 정말 화났을 때는 저렇게 빙글빙글 웃거나 하지 않고, 말도 거의 없이 무표정으로 정색한다고 한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저렇게 웃으며 재잘재잘 말하는 모습을 보면, 딱히 화가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자니, 렌까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홱, 나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아라, 시라바야시 상! 오랜만입니다.』

       

       이제서야 나를 발견한 것마냥 싱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한 2주만이지. 잘 지냈어?』

       『후후! 저를 염려해 주시나요? 시라바야시 상이 이렇게 염려도 해주시고 모처럼 배웅까지 와주시다니. 황공해서 몸을 둘 곳을 모르겠군요.』 

       『…….』

       

       왜 이렇게 오버하는 것인지, 진심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렌까는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부터 저의 자택으로 향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시라바야시 상도 와주시겠습니까?』

       

       렌까의 집에?

       

       ‘으음……’

       

       애초에 내가 여기 나온 것은 다까히로 때문이었다. 렌까가 화났을 것을 우려해서, 내가 다까히로를 변호해주기로 나온 것이었지.

       

       그런데 렌까가 다까히로에게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으니, 굳이 계속 따라다닐 필요는 없었다.

       

       『아니. 난 하숙집으로 돌아가려고. 그렇잖아도……』

       

       나는 렌까에게 내가 총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축약해 전해주었다. 총독부의원의 치유술이 대단해서 이미 다 낫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 돌아다니기는 힘들다고.

       

       『그런……! 편치 않은 몸인데, 저 때문에 괜한 발걸음을 했군요. 대단히 면목이 없습니다.』

       『뭘. 나도 오랜만에 네 얼굴이나 보려고 겸사겸사 온 건데.』

       『……!』

       

       렌까는 잠시 흠칫 놀란 듯 하더니, 다시 미소를 띄우며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호의를 보이지요. 하숙집까지 태워다 드리는 것으로 좋을까요? 다까히로!』

       『예!』

       

       다까히로는 부리나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고, 나와 렌까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시라바야시 상과 이렇게 함께 차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출발하겠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다까히로가 그렇게 말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고 잠시 뒤, 내 옆에 앉은 렌까가 문득,

       

       『아라……』

       

       하며 내가 허리에 패용하고 있던 검을 보고 물어왔다. 

       

       『그 검은 무엇인가요? 일전에 저로부터 받았던 검은 어디에 가고……』

       『아. 그거 말이지.』

       

       저번 창경원 동물 마수화 사건 때 내가 주워서 그동안 요긴하게 썼던 렌까의 검은, 일전에 아오끼 소좌와 싸우다가 부러져 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양산형 공장제 일본도. 

       

       『네가 줬던 건 아오끼 소좌랑 싸우다가 깨져버렸어. 미안하다.』

       『저런! 하지만 미안할 것은 없답니다. 아니, ‘좋은 일’에 쓰이다가 옥처럼 부서졌으니, 검이라는 도구으로써는 그 책무를 다한 것. 그러니 오히려 제가 시라바야시 상에게 감사해야지요.』

       

       약혼자였던 아오끼 소좌가 죽은 것이 ‘좋은 일’이라니. 아무리 원치 않은 혼약이었다지만 무서운 계집애였다.

       

       『아무튼— 검을 다루는 사람에게 있어서, 검은 그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죠. 시라바야시 상에게 그런 하등품은 어울리지 않으니, 제가 조만간 새 검을 가져다 드리죠.』

       『어, 고맙다.』

       『후후! 천만의 말씀이예요. 시라바야시 상은 저의! 친구니까요. 그렇죠?』

       

       뭔가 ‘저의(わたくしの)’에 강조를 준 듯한 느낌이었는데 착각이려나. 

       

       『으응.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니, 렌까가 문득 다시 은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시라바야시 상—. 조선에는 그런 속담이 있지요? 자고 있다가 떡이 나온다, 라는……』

       『어, 그렇지.』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라는 조선 속담을 말하는 듯 했다. 갑자기 왜 속담 얘긴지 모르겠지만 렌까는 말을 이었다.

       

       『내지에서도 그것과 비슷하게, 선반에서 떨어진 모란떡(棚から落ちた牡丹餅), 이라고 하는 말이 있답니다. 뜻밖의 횡재를 뜻하는 말이지요.』

       『그렇구나. 근데 갑자기 그런 말은 왜?』

       

       내가 묻자 렌까는 웃으며 말했다.

       

       『후후…… 저와 함께하는 시라바야시 상에게 딱 어울리는 속담이 아닐까요? 마침, 시라바야시 상에게 드릴 것이 하나 더 있으니까요.』

       『나한테 줄 것? 검 말고 또?』

       『예. 가고시마를 떠나기 전, 특별히 갖추어 온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렌까는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수트케이스에서 작고 납작한 종이상자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조선에는 아직 이러한 풍습이 없지만, 내지에는 고향이나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주변인들에게 토산품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지요.  가고시마의 오미야게(お土産), 사쓰마이모(薩摩芋) 화과자(和菓子)랍니다.』

       

       렌까는 나에게 상자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종이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것은 달콤한 고구마 향이 물씬 풍기는 일본 전통 과자였다. 렌까가 설명을 이었다.

       

       『가고시마 땅에서 자란 고구마로 만들어진 과자랍니다. 아시나요, 시라바야시 상? 가고시마는 고구마로 유명하지요.』

       

       고구마 과자라니. 

       

       ‘나에게 고구마를 먹이겠다는 암시인가?’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렌까의 고향 가고시마의 특산물이라니까. 아무튼 렌까가 날 위해서 사온 것이었으니 나는 일단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잘 먹을게.』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덜컹!

       

       차가 위아래로 덜컹 흔들리고.

       

       —툭!

       

       그 반동 때문에 렌까의 무릎 위에 열려져 있던 수트케이스에서 뭔가 차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렌까가 탄성을 내뱉었다.

       

       『앗……!』

       

       ‘인형?’

       

       나는 우연찮게 내 발치로 굴러떨어진 인형을 주워들었다. 금발에 푸른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었다.

       

       『인형이네.』

       『갸앗……!』

       

       렌까는 작게 비명을 지르더니, 내 손에서 인형을 황급히 빼앗아 다시 수트케이스에 쑤셔넣고는 허둥대며 외쳤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나는 렌까에게 물었다.

       

       『그것도 누구 줄 선물이야? 설마 네 것은 아닐테고.』

       『예? 선물? 그, 그, 그렇답니다! 서, 설마 이런 인형이…… 저, 저의 남에게 못할 이야기를 밤마다 속삭이고 침대에서 껴안고 자는 그런 용도의 인형일 리가 없잖아요?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죠? 터무니없어서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요!』

       

       ‘아무 상상도 안 했는데……’

       

       렌까의 예시가 묘하게 구체적인 것이 신기했다. 뭐, 렌까도 이래저래 발이 넓을테니, 어디 고위층 인사의 따님한테 줄 선물이려나.

       

       『어린 여자아이가 좋아하겠네. 네 말마따나 밤마다 안고 자겠는걸.』

       『읏……!』

       

       왠진 모르겠지만 얼굴이 새빨개진 렌까는, 

       

       『다까히로 상!』

       

       앞좌석에서 운전을 하던 다까히로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다까히로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옛!』

       『일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건가요? 차가 몹시도 흔들리는군요!』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만, 이쪽의 길은 언덕도 많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탓에—』

       『변명은 그만두세요! 손님을 태웠는데 심하게 운전을 하다니요! 덕분에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렌까는 방금 전까지 온화했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얼굴이 빨개진 채 정색하고 다까히로를 호되게 갈구기 시작했다.

       

       ‘렌까가 정색하면 진짜 빡친 거라던데.’

       

       나는 그런 렌까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분노조절장앤가.’

       

       친구라면 모를까, 상관으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타입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고, 웃었다가 화냈다가 도무지 감정을 종잡을 수도 없고, 높으신 분의 딸이라서 함부로 개기지도 못한다.  

       

       ‘다까히로 녀석도 힘들겠구만. 이런 렌까 밑에서 일하려면……’ 

       

       나는 다까히로를 위해 작게 묵념하며 생각했다. 난 절대로 렌까같은 애 밑으로는 안 들어가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어엄청 예전에도 TMI로 썼던 것 같지만, 렌까가 ‘저’라고 할때의 1인칭 표현은 와타쿠시(私; わたくし)입니다. 경어 표현에서 널리 쓰이는 와타시(私; わたし)보다 좀더 정중하고 격식있는 표현인데, 너무 딱딱하고 구식인 느낌이 들어 현대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네요. 한자로는 둘 다 私로 씁니다.
    덧붙여, 렌까가 주로 쓰는 2인칭은 아나타(貴方; あなた)이며, 작중에서는 ‘당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저는 목요일에—어린이날이네용??응애!!!나어린이!!!!!—다시 돌아오겠습니당! 맛난 저녁 드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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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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