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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5

       마왕은 사천을 임명했을 때 한 종류의 강함만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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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일대일 공격에 특화되어 있고, 또 누군가는 정령을 상대했을 때 최대의 위력을 발휘한다. 또 다인전에 특화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방어력이 무식하게 높은 녀석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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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사천 중 가장 비대칭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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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천이 비대칭전력인 건 맞다. 이들은 숙련된 마도사 수천 명을 상대로 활약할 수 있다. 일당백이 아닌, 일당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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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에테르는 그 정도가 궤를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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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체는 상대적으로 뒤처지지만, 펜을 몇 번 굴려낸 결과로 일대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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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한 무기를 창조할 수 있는 힘. 그것으로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어버리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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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열 포지션을 담당하는 그녀는, 동료들이 시간만 벌어준다면 적진에 핵겨울(上天)을 선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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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이 시간만 벌어준다면 세계수를 뿌리째로 뽑아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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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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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설마 그저께 보여준 그 폭탄을 투하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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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에테르. 그러나 동료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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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정도 폭발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맞아요. 유리창 깨고 열감 만드는 거? 사천 중에 그걸 못하는 머저리가 있나요? 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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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들은 곧 에테르를 돌려서 까는 소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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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 개발을 착실히 진행하는 동안이라면 모를까. 이전까지 에테르가 보여준 능력이 그저 그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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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파스모와 길라흐가 봉인되기 전까지는 그녀가 유달리 낸 실적이 없었다. 당시 에테르는 연구에 권태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대전쟁에서 싸우긴 싸웠지만 창천이나 호천에 비하면 그다지 큰 활약을 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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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들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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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천과 호천이 호탕하게 웃어대던 도중, 요르문간드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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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전계마도를 쓸 수 있는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뭡니까, 민천. 꼴에 동료라고 감싸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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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라흐는 배를 잡으며 끅끅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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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계마도요? 아, 당연히 마왕님 덕택이지요. 마왕님께서 연구개발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그 누가 해냈겠습니까?”

       “멍청이들. 겉으로만 그런 거지, 실상은 저 아이가 다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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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문간드는 에테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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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흰 몰랐겠지. 정령을 도륙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상천이 무얼 하는지 한 번이라도 연구실에 들어가는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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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문간드는 에테르가 무얼 하는지 가끔가다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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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 그런 것보다는 드래곤의 습성 탓이었다. 동료가 잘 살아는 있나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습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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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계를 이루는 기초적인 방정식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홀로 쌓아올렸지. 마왕이 봉인된 이후로도 계속 말이다. 상천이 책을 한 권 낼 때마다 우리가 마력초를 물고 쓸 수 있는 마도가 몇 개씩이나 늘었다. 알고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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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천은 잘려나간 뿔을 매만지며 두 사천을 일갈했다. 파스모와 길라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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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지켜보던 에테르는 요르문간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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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회의에서 처리하기에는 맹랑한 주제다. 넘어가자.”

       “동지여, 여는 동료를 폄훼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본관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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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가 몇 번 달래자 요르문간드는 그제야 언성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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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는 곧 정상적인 궤도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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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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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번 회의가 열린 목적은 하나. ‘어떻게 하면 바람의 로드스톤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거다. 내 언니가 낸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너희도 반대한다면 이것 때문에 반대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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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샤의 물음에 창천과 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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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폭탄을 하나 생산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3석에게 초도 생산 물량을 주문했다. 열 기에 꼬박 한 달이 걸린다더군.”

       “신록의 세계수에는 얼마나 쏟아부을 건데요?”

       “못해도 150기.”

       “배, 백오십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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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현실적인 숫자에 길라흐가 눈살을 찌푸렸다.

       ​

       “1년하고도 한 계절이 더 지나야 한다고요?”

       “미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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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어쩔 수 없이 에테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가능하면 일 년 이내로 마왕을 부활시키고 싹 다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흑주’가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선 이 정도 폭발이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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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지간한 계산은 다 마쳤다. 이 정도 되는 분량이 없으면 계획은 확실하게 성공하지 않아.”

       “그러면 그것 말고 더 빠른 방법을 찾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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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클라이스에게 연결되어 있는 목줄을 더 세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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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중차대한 요건이 아니라면 부르지 마라. 못해도 3개월 내로 일 하나를 끝낼 생각이다.”

       “그러면 3개월 이후 일정은 어떠신가요?”

       “뭐?”

       “마침 저도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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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지, 길라흐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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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잠입 말이죠, 제가 보아하건대 당신이 하면 적격이 아닐까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쓸데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신만큼 악의를 숨기는 데 능숙한 사천이 없어요. 조금 전에 민천을 다스린 것도 그렇고, 제 조롱에도 의연하게 넘어가신 걸 보면 말이죠. 어떻습니까? 마왕님의 부활을 위하여 먼저 적진을 답사하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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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라흐의 말은 즉,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잠입하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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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이 일리야드에 들어가라고?”

       “신록의 세계수를 살피려면 그곳에 있는 게 편하죠. 가장 위험하긴 하지만 그만큼 리턴이 있을 겁니다.”

       “귀찮다. 네가 가라.”

       “전 안 됩니다. 학업과는 담쌓고 지냈거든요. 아카데미? 그런 곳을 뭐 하러 갑니까?”

       ​

       말은 저렇게 해도 길라흐는 이미 실격이다. 그는 정령의 티끌만 보아도 경련을 일으키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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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모나 요르문간드는 더더욱 안 된다. 애초에 이 둘은 누가 봐도 마수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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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 중에서 가장 사람처럼 생긴 건 당신 정도이지요. 인족이나 엘프들이 흔히 인간형 마수라고 부르는…. 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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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외모는 합격점이다. 겉으로만 보아선 사람인지 마수인지 구분조차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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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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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도 연구를 방해하면 두들겨 패는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다른 사천보다는 의중을 숨기고 심신을 다스리는 데 능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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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이런 쉬운 일도 못 하신다는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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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라흐는 묘하게 에테르를 도발했다. 느끼하고 능글맞은 미소로 타인의 신경을 건드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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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천년 전부터 그가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다. 구태여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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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굳이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발을 걸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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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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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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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초도 안 되어 모든 손익을 계산해낸 에테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런 당당함에 도리어 길라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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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헤름의 구조를 담은 지도 정도야, 본관과 아카샤가 가면 한 달 안에 완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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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전도 연구에 석 달, 그런 지도의 작성에 한 달. 여기까지 도합 넉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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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기 말까지 흑주와 백야를 마무리하고 세계수를 불태우면 딱 적당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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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까지 하면 도합 여섯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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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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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6개월을 정령과의 대전쟁에 할애하면…… 이래도 차고 넘치는군.”

       ​

       이런 식으로 계산해서 최대 1년짜리 플랜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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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 했으면 됐겠지?”

       “별다른 의견 없으면 해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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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와 아카샤가 가장 먼저 일어나면서 회의는 끝났다. 졸지에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길라흐는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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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모가 기다란 팔로 길라흐를 툭툭 두들기며 끌끌 웃어댔다.

       ​

       “상천이 말한 저 작전이 성공한다면 차후 마왕님의 총애를 듬뿍 받겠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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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말이었지만, 고명한 하이엘프 출신인 길라흐에게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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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도, 다른 사천도, 여신조차도 다 자기 위에 올라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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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보다 위에 바로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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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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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님이 아닌 한, 같은 사천조차도 자신보다 뛰어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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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안을 갖춘 하이엘프인 내가…. 실적으로 뒤떨어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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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하기 싫었다. 또한 인정해서도 안 됐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종족의 이름에 오욕을 남기는 꼴이 된다.

       ​

       길라흐는 무어라 뇌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기분이 별로군요. 당신…. 이름이 뭐였죠?”

       ​

       그러더니 자리를 벗어나려는 빌헬름을 대뜸 붙잡았다. 빌헬름은 머리에 달린 기관포를 삐그덕거리며 겸손하게 대꾸했다.

       ​

       “빌헬름 폰 슈델가이거입니다.”

       “그래요, 빌헬름. 당신이 이 시설 총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포로를 고문하며 즐기기도 하는 모양인데, 혹시 정령마도사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아요. 절 그쪽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실례합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

       길라흐는 멀어져 가는 에테르와 아카샤를 흘겨보았다. 그녀들의 곁에는 목줄을 찬 채로 끌려나가는 인간 노예 한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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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저런 장난감 하나 가졌으면 좋겠군요.”

       “정령마도사에, 맷집 좋은 녀석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뭘 좀 아시는군요! 으흐흐흐!”

       ​

       길라흐는 널찍한 빌헬름의 가슴팍을 쳐대며 입매를 씰룩였다.

       ​

       “그렇다면 지하에 가둬놓은 이들 중에 쓸만한 자가 한 명 있습니다.”

       “오호! 누구인데요?”

       “상급 정령을 둘이나 달고 다니는 특이한 인간인데, 이곳에서 몇 년씩이나 버티는 중입니다.”

       “그래요?”

       ​

       길라흐의 눈빛이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번뜩였다.

       ​

       엘프도 아니고, 인간이 정령? 심지어 두 체? 엄청난 인격자라는 소리이다.

       ​

       심지어 3년이나 버텼다니. 정신력도 상당한 모양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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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상급이라는 점이 좋았다. 최상급 두 체라면 조금은 고민해 봤겠지만, ‘상급’인 이상 그가 도리어 당할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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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라흐는 싱글벙글해하며 안내를 재촉했다.

       ​

       “바로 갑시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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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폭탄의 초도 물량을 생산하라는 에테르의 지시가 있었지만, 빌헬름은 그런 일은 지금은 뒤로 미뤄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

       상천이든 호천이든, 그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상사였던 까닭이다.

       ​

       에테르의 폭탄은 멀고, 길라흐의 갈고리는 가깝다.

       ​

       까라면 까야지 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즐거운 설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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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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