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은 사천을 임명했을 때 한 종류의 강함만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일대일 공격에 특화되어 있고, 또 누군가는 정령을 상대했을 때 최대의 위력을 발휘한다. 또 다인전에 특화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방어력이 무식하게 높은 녀석도 존재한다.
에테르는, 사천 중 가장 비대칭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사천이 비대칭전력인 건 맞다. 이들은 숙련된 마도사 수천 명을 상대로 활약할 수 있다. 일당백이 아닌, 일당천인 것이다.
다만 에테르는 그 정도가 궤를 달리한다.
본체는 상대적으로 뒤처지지만, 펜을 몇 번 굴려낸 결과로 일대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다.
강력한 무기를 창조할 수 있는 힘. 그것으로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어버리는 능력.
후열 포지션을 담당하는 그녀는, 동료들이 시간만 벌어준다면 적진에 핵겨울(上天)을 선사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시간만 벌어준다면 세계수를 뿌리째로 뽑아주겠다.”
에테르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설마 그저께 보여준 그 폭탄을 투하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에테르. 그러나 동료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정도 폭발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맞아요. 유리창 깨고 열감 만드는 거? 사천 중에 그걸 못하는 머저리가 있나요? 으하하하!”
그 말들은 곧 에테르를 돌려서 까는 소리와도 같았다.
원자폭탄 개발을 착실히 진행하는 동안이라면 모를까. 이전까지 에테르가 보여준 능력이 그저 그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파스모와 길라흐가 봉인되기 전까지는 그녀가 유달리 낸 실적이 없었다. 당시 에테르는 연구에 권태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대전쟁에서 싸우긴 싸웠지만 창천이나 호천에 비하면 그다지 큰 활약을 하지 못했었다.
“그만들 해라.”
창천과 호천이 호탕하게 웃어대던 도중, 요르문간드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리가 전계마도를 쓸 수 있는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뭡니까, 민천. 꼴에 동료라고 감싸시는 겁니까?”
길라흐는 배를 잡으며 끅끅 웃었다.
“전계마도요? 아, 당연히 마왕님 덕택이지요. 마왕님께서 연구개발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그 누가 해냈겠습니까?”
“멍청이들. 겉으로만 그런 거지, 실상은 저 아이가 다 만들었다.”
요르문간드는 에테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흰 몰랐겠지. 정령을 도륙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상천이 무얼 하는지 한 번이라도 연구실에 들어가는 봤나?”
요르문간드는 에테르가 무얼 하는지 가끔가다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호기심? 그런 것보다는 드래곤의 습성 탓이었다. 동료가 잘 살아는 있나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습성 말이다.
“전계를 이루는 기초적인 방정식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홀로 쌓아올렸지. 마왕이 봉인된 이후로도 계속 말이다. 상천이 책을 한 권 낼 때마다 우리가 마력초를 물고 쓸 수 있는 마도가 몇 개씩이나 늘었다. 알고 있었는가?”
민천은 잘려나간 뿔을 매만지며 두 사천을 일갈했다. 파스모와 길라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에테르는 요르문간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번 회의에서 처리하기에는 맹랑한 주제다. 넘어가자.”
“동지여, 여는 동료를 폄훼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본관은 괜찮다.”
에테르가 몇 번 달래자 요르문간드는 그제야 언성을 낮추었다.
회의는 곧 정상적인 궤도로 되돌아왔다.
아카샤가 말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번 회의가 열린 목적은 하나. ‘어떻게 하면 바람의 로드스톤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거다. 내 언니가 낸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너희도 반대한다면 이것 때문에 반대하는 거 아니야?”
아카샤의 물음에 창천과 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폭탄을 하나 생산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3석에게 초도 생산 물량을 주문했다. 열 기에 꼬박 한 달이 걸린다더군.”
“신록의 세계수에는 얼마나 쏟아부을 건데요?”
“못해도 150기.”
“배, 백오십 기?”
비현실적인 숫자에 길라흐가 눈살을 찌푸렸다.
“1년하고도 한 계절이 더 지나야 한다고요?”
“미쳤군.”
이건 어쩔 수 없이 에테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일 년 이내로 마왕을 부활시키고 싹 다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흑주’가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선 이 정도 폭발이 한계다.
“어지간한 계산은 다 마쳤다. 이 정도 되는 분량이 없으면 계획은 확실하게 성공하지 않아.”
“그러면 그것 말고 더 빠른 방법을 찾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려고.”
에테르는 클라이스에게 연결되어 있는 목줄을 더 세게 쥐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중차대한 요건이 아니라면 부르지 마라. 못해도 3개월 내로 일 하나를 끝낼 생각이다.”
“그러면 3개월 이후 일정은 어떠신가요?”
“뭐?”
“마침 저도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거든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지, 길라흐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잠입 말이죠, 제가 보아하건대 당신이 하면 적격이 아닐까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쓸데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신만큼 악의를 숨기는 데 능숙한 사천이 없어요. 조금 전에 민천을 다스린 것도 그렇고, 제 조롱에도 의연하게 넘어가신 걸 보면 말이죠. 어떻습니까? 마왕님의 부활을 위하여 먼저 적진을 답사하시는 건.”
길라흐의 말은 즉,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잠입하라는 소리였다.
“본관이 일리야드에 들어가라고?”
“신록의 세계수를 살피려면 그곳에 있는 게 편하죠. 가장 위험하긴 하지만 그만큼 리턴이 있을 겁니다.”
“귀찮다. 네가 가라.”
“전 안 됩니다. 학업과는 담쌓고 지냈거든요. 아카데미? 그런 곳을 뭐 하러 갑니까?”
말은 저렇게 해도 길라흐는 이미 실격이다. 그는 정령의 티끌만 보아도 경련을 일으키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파스모나 요르문간드는 더더욱 안 된다. 애초에 이 둘은 누가 봐도 마수처럼 생겼다.
“사천 중에서 가장 사람처럼 생긴 건 당신 정도이지요. 인족이나 엘프들이 흔히 인간형 마수라고 부르는…. 예, 그렇습니다.”
일단 외모는 합격점이다. 겉으로만 보아선 사람인지 마수인지 구분조차 안 된다.
성격?
에테르도 연구를 방해하면 두들겨 패는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다른 사천보다는 의중을 숨기고 심신을 다스리는 데 능숙했다.
“설마 이런 쉬운 일도 못 하신다는 건 아니겠죠?”
길라흐는 묘하게 에테르를 도발했다. 느끼하고 능글맞은 미소로 타인의 신경을 건드리려 한다.
1천년 전부터 그가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다. 구태여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굳이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발을 걸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지.”
1초도 안 되어 모든 손익을 계산해낸 에테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런 당당함에 도리어 길라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메르헤름의 구조를 담은 지도 정도야, 본관과 아카샤가 가면 한 달 안에 완성할 수 있다.”
초전도 연구에 석 달, 그런 지도의 작성에 한 달. 여기까지 도합 넉 달.
“학기 말까지 흑주와 백야를 마무리하고 세계수를 불태우면 딱 적당하겠군.”
거기까지 하면 도합 여섯 달.
그리고.
“남은 6개월을 정령과의 대전쟁에 할애하면…… 이래도 차고 넘치는군.”
이런 식으로 계산해서 최대 1년짜리 플랜이 완성된다.
“이쯤 했으면 됐겠지?”
“별다른 의견 없으면 해산이다.”
에테르와 아카샤가 가장 먼저 일어나면서 회의는 끝났다. 졸지에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길라흐는 헛웃음을 지었다.
파스모가 기다란 팔로 길라흐를 툭툭 두들기며 끌끌 웃어댔다.
“상천이 말한 저 작전이 성공한다면 차후 마왕님의 총애를 듬뿍 받겠군.”
“……젠장.”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말이었지만, 고명한 하이엘프 출신인 길라흐에게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는 말이었다.
정령도, 다른 사천도, 여신조차도 다 자기 위에 올라설 수 없다.
자신보다 위에 바로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마왕.
마왕님이 아닌 한, 같은 사천조차도 자신보다 뛰어나선 안 된다.
‘금안을 갖춘 하이엘프인 내가…. 실적으로 뒤떨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기 싫었다. 또한 인정해서도 안 됐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종족의 이름에 오욕을 남기는 꼴이 된다.
길라흐는 무어라 뇌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별로군요. 당신…. 이름이 뭐였죠?”
그러더니 자리를 벗어나려는 빌헬름을 대뜸 붙잡았다. 빌헬름은 머리에 달린 기관포를 삐그덕거리며 겸손하게 대꾸했다.
“빌헬름 폰 슈델가이거입니다.”
“그래요, 빌헬름. 당신이 이 시설 총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포로를 고문하며 즐기기도 하는 모양인데, 혹시 정령마도사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아요. 절 그쪽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실례합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길라흐는 멀어져 가는 에테르와 아카샤를 흘겨보았다. 그녀들의 곁에는 목줄을 찬 채로 끌려나가는 인간 노예 한 명이 있었다.
“저도 저런 장난감 하나 가졌으면 좋겠군요.”
“정령마도사에, 맷집 좋은 녀석으로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뭘 좀 아시는군요! 으흐흐흐!”
길라흐는 널찍한 빌헬름의 가슴팍을 쳐대며 입매를 씰룩였다.
“그렇다면 지하에 가둬놓은 이들 중에 쓸만한 자가 한 명 있습니다.”
“오호! 누구인데요?”
“상급 정령을 둘이나 달고 다니는 특이한 인간인데, 이곳에서 몇 년씩이나 버티는 중입니다.”
“그래요?”
길라흐의 눈빛이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번뜩였다.
엘프도 아니고, 인간이 정령? 심지어 두 체? 엄청난 인격자라는 소리이다.
심지어 3년이나 버텼다니. 정신력도 상당한 모양이었고.
무엇보다 상급이라는 점이 좋았다. 최상급 두 체라면 조금은 고민해 봤겠지만, ‘상급’인 이상 그가 도리어 당할 일은 없었다.
길라흐는 싱글벙글해하며 안내를 재촉했다.
“바로 갑시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원자폭탄의 초도 물량을 생산하라는 에테르의 지시가 있었지만, 빌헬름은 그런 일은 지금은 뒤로 미뤄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상천이든 호천이든, 그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상사였던 까닭이다.
에테르의 폭탄은 멀고, 길라흐의 갈고리는 가깝다.
까라면 까야지 뭐.
즐거운 설 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