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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5

     

    “제국 황제 폐하의 뜻을 따라 그 권한을 대행하는 자로서, 현 시각을 가해 고트베르크 후작령이 고트베르크 후국으로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쾅, 헤이케가 문서에 힘차게 옥새를 찍었다.

     

    후작가 가주에서 후작 각하로 승격한 아버지가 헤이케와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아직 제국 주치의 신분으로서 예법을 갖추어 축하를 표했다.

     

    이로써 절차는 마무리됐다. 후작령은 엄연한 한 나라로서 그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축배라도 들어야 하겠지만 공식 발표는 연합군 무역로가 개통된 이후일세. 당분간은 기밀일세.”

     

    “이해하고 있습니다, 황녀 전하.”

     

    “음. 고트베르크 주치의, 확언한 대로 그대의 퇴직 절차는 금일 내로 처리되는가?”

     

    헤이케가 내게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오늘 주치의에서 사퇴하고 후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헤이케와는 지금까지 신뢰관계를 돈독히 쌓아온 덕분에 일을 먼저 처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후국은 제국과 신뢰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는 구조다. 그 중심엔 황제의 권한을 대다수, 특히 외교 분야 전부를 인계받은 헤이케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지금부터 아셀라 3황녀 전하를 알현하러 갈 예정입니다.”

     

    “당분간 자주 못 만나서 아쉽게 되겠군.”

     

    “…그렇습니다.”

     

    아셀라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를 많이 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당치도 않은 바람이겠지.

     

    그래도 이야기는 충분히 나눠보고 싶다.

     

    “후작 각하, 바로 후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시죠. 금방 뒤따르겠습니다.”

     

    “음, 그러마.”

     

    아버지는 먼저 황실 밖으로 가시도록 했다.

    지금부터 황실은 조금 격해질 예정이니까.

     

    “전부 모였어?”

     

    “준비됐습니다, 선생님.”

     

    내의원 앞에선 휴고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후국으로 떠날 의사, 기사들도 함께였다.

     

    그간은 헤이케가 정보가 새는 걸 막았지만 공식 승인이 났으니 슬슬 이쪽 움직임도 아셀라에게 전해졌겠지.

     

    ‘게오르크가 움직이기까지 30분.’

     

    움직일 때가 됐다.

     

    “브루노,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마차 대기해 놓고 있어.”

     

    “예.”

     

    심호흡을 한다.

     

    “후우, 가볼까.”

     

    “마지막 호위 임무로군요. 모시겠습니다.”

     

    타냐가 내 뒤에 붙었다.

     

    아셀라를 만나러 가는 길.

     

    조금, 아니. 상당히 긴장됐다.

     

     

     

    ***

     

     

     

    “헤이케가 독립을 승인했다고?”

     

    아셀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제국에서 일개 귀족가의 독립을 허가한다니,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제아무리 헤이케라도 이런 짓은 막무가내로 진행할 수 없다.

     

    황제의 황명이라도 없다면.

     

    “황명이 있었구나.”

     

    아셀라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황제가 죽기 직전 라스를 찾아와 나눴던 이야기가 이 내용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비밀로 한 이유는 반대해서 방해했을 게 뻔했기 때문에.

     

    굳이 혼란의 시기에 귀족가가 독립한 선례를 남긴 황제의 진의까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에서 라스의 의지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라스가… 황실을 떠나려고 해?’

     

    그제야 아셀라는 라스가 했던 질문에서.

    그와 자신이 인식한 시기에 서로 큰 차이가 있었다고 깨달았다.

     

    아셀라는 먼 훗날을 가정하는 줄로만 알았다. 주치의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앉은 이상 그 권력을 먼저 놓으려 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으니. 당장 퇴직하는 주치의들만 봐도 죄다 오늘내일하는 노친네들 아닌가.

     

    하지만 라스는 당장 있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그는 진짜로 아셀라에게 와주길 바랐다.

     

    승계전을 그만두고, 황제의 꿈을 접고.

     

    후국으로 와서 자신과 함께 해주기를.

     

    ‘…왜.’

     

    핑, 아셀라의 머리가 빈혈이라도 온 듯 어지러워졌다.

     

    ‘그딴 게 불가능하다고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았니.’

     

    스멀스멀 라스에게 원망이 피어난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면 주군인 자신에게 먼저 보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설령 황명이 있었다 한들, 황제를 배반해 그 목이 날아가더라도 자신의 명령을 듣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어쩌면 라스가 휘말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라스는 황실을 떠나 후국을 세울 의지였고, 황제는 그 뜻을 들어준 것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

     

    이쪽이 더 말이 된다.

     

    그 결론에 도달한 아셀라는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한없이 자신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라스가 배신자처럼 느껴진다.

     

    그의 생각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확인해야 해.’

     

    아셀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치의를 찾아. 당장 본녀의 앞에 대령시켜라.”

     

    “받들겠습니다.”

     

    “당장!”

     

    신경질적인 아셀라의 명령에 비서장과 기사단장이 바쁘게 자리를 뛰쳐나갔다.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아셀라는 다시금 자료를 검토했다.

     

    내의원 월광궁 파벌의 현황표, 고트베르크 제약공장의 보고서, 계약서.

     

    글자 안에서 라스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 처절하게 머리를 굴린다.

     

    그럴수록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당연히 그의 진의는 알 수 없고, 어떤 가능성도 열려 있었기에.

     

    “…아.”

     

    도중, 아셀라의 생각이 마침내 한 장소에 도달했다.

     

    라스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권력인지, 재산인지, 국가인지.

     

    알아낼 수 있는 명확한 단서가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편지.”

     

    아셀라는 체통을 지키는 것도 잊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서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 서랍 제일 아래 칸에 고이 보관된 한 장의 편지봉투.

     

    라스가 자신에게 기아스의 맹약까지 요구하며 원했던 계약.

     

    그의 소원이 날것 그대로 적혀 있는 바로 그 봉투였다.

     

    “라스가 원하는 게 이 안에 있어.”

     

    어쩌면 안에 적힌 내용이 ‘후작령을 후국으로 독립시켜달라’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라스는 처음부터 오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황실에서 세력을 넓혀왔다는 뜻이 된다.

     

    즉, 첫 만남부터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는 뜻.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으니 그를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그게 진짜라고 밝혀지면, 아셀라는 배신감에 젖어 치밀어오를 분노를 절제할 자신이 없었다.

     

    ‘아냐, 그건 최악의 상황일 때의 얘기고.’

     

    라스는 이 안에 자신도 좋아할 만한 내용을 적어놨다고도 했었다.

     

    자신만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이라고도 했고.

     

    지금이라도 그의 바람을 이뤄준다면 라스는 다시금 충성을 바치려 하지 않을까. 아셀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슥, 봉투를 꺼내는 아셀라.

     

    기아스의 마법에 의해 보호되어, 처음 그와 만났을 때 적었던 그 모양 그대로 구김 하나 없는 모습이다. 개폐부는 고트베르크의 인장으로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다.

     

    이 봉투는 라스가 원할 때만 열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어지간한 힘으로는 열리지 않았다.

     

    “마법을 쓰면 여는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 나도 전보다는 마력이 강해졌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아셀라가 봉투 끝 인장에 손을 댔다.

     

    그 순간.

     

    ―톡.

     

    몇 년간 철통같이 닫혀 있던 봉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도 쉽게 입을 벌리며 내용물을 훤히 드러냈다.

     

    “…어?”

     

    아셀라는 홀린 듯 편지지를 꺼냈다.

     

    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내왔다.

     

    어째서일까. 이걸 봐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단서를 기반으로 이성적으로 추론한 게 아니었다. 적이 사방에 가득했던 황실에서 살아온 아셀라의 신체가 본능에서 보내오는 경고였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언제나 공포를 이기는 법.

     

    팔락, 아셀라가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

     

    황금빛 눈동자의 새카만 동공이 좌우로 움직이며 글자를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뭐?”

     

     

     

    아셀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왜?”

     

    허망한 숨이 섞인 목소리로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아니, 이게 무슨 뜻…”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라스 고트베르크와 파혼하며, 그를 주치의 직에서 해임하고 안전하게 황실에서 내보낸다.]

     

     

    그 문장의 단 한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필체, 라스의 것이 분명했다. 몇 번이나 그의 보고서를 읽어온 아셀라가 혼동할 리는 없었다.

     

    ‘라스가 주치의를 그만둔다.’

     

    ‘라스가 황실을 떠난다.’

     

    그 어느 것도 아셀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라스와 파혼한다.’

     

     

    그런 가정은.

     

    그런 단어는.

     

    아셀라의 머릿속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었기에.

     

    마치 미지의 존재와 마주한 듯, 그녀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공포에 간신히 두 다리를 붙잡으며,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다잡는 게 고작이었다.

     

    “라스가, 왜?”

     

    왜, 왜, 왜.

     

    평소라면 단서를 바탕으로 인과를 추론하고 뒷면의 내막까지 파악할 아셀라였겠으나 지금은 머리가 마비되어 일차적인 질문밖에 할 수 없었다.

     

    왜.

     

    대체 라스가 왜?

     

    왜…

     

    왜 나랑 파혼해?

     

    그게 라스의…

     

    소원이라니?

     

     

    ―콰아앙!

     

    창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봉화가 피어올라 붉게 물든 바깥 풍경을 그녀는 인식하지 못했다.

     

    “어떡, 어떡하지.”

     

    갓난아기로 돌아간 양, 발만 동동 구르던 아셀라.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일단 라스를 찾는다.

     

    지금 그를 놓치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 판단하고 일단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황녀님.”

     

    침실에서 달려나가려는 그녀의 앞.

     

    이미 열린 방문에서 아셀라를 향해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펄럭이는 기다란 백의.

     

    하얗진 않다. 그의 새하얀 머리칼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노을 같은 붉은 섬광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라…”

     

    아셀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멈추었다.

     

    불길한 예감이 쾅쾅, 심장을 때려대며 경고한다.

     

     

    이 광경을, 그녀는 안다.

     

    어느 악몽보다도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장면이다.

     

     

    뚜벅, 라스가 아셀라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냐.”

     

    아셀라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 말을 꺼내면 안 된다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알고 있다.

     

    “아냐, 기다려…!”

     

    아셀라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라스가 뭐라고 할지 알기에, 금언의 마법이라도 걸려 했지만.

     

    “주치의직에서 사퇴하고 싶습니다.”

     

    “그만해!!”

     

    아셀라는 냅다 라스에게 뛰어들었다. 그를 당장에라도 기절시킬 의지였다.

     

    ―쿠웅!

     

    아셀라가 밀친 라스가 문지방에 뒤통수를 찧었다.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만, 그만.”

     

    아셀라는 라스의 품에 반쯤 안긴 모습으로, 그를 구속하고자 멱살을 잡고 몸으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라스가 그런 아셀라와 눈을 마주쳤다.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눈이었다.

     

    결국 아셀라는 그의 입을 막지 못했고.

     

    덤덤한 선고는, 그녀의 얼음창보다도 차가운 필살의 마법처럼 심장을 꿰뚫었다.

     

    “저는 황궁을 떠나야 합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WintersRain님 50코인 후원 감사해요! 항상 재밌게 봐주신다니, 그보다 더 기쁜 말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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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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