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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5

   필사적으로 빌더라도 현실은 바뀌지 아니했다.

   

   파트란 공작의 부탁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부탁. 퀘스트가 아니었으니 스킵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있나.

   

   패닉에서 빠져나온 나는 공작에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았기에. 허나 공작은 내 부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영애. 그대는 1왕자님을 상대로 승리했네. 그런 그대가 소감조차 내비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자칫 잘못하다간 1왕자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라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파트란 공작은 엄한 목소리를 냈다.

   

   허술 공작이라는 별칭에도 웃음을 흘리던 그가 저리 단호한 것은 조이의 친구인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겠지.

   

   그를 깨달은 내가 마지못해 고갤 끄덕이자 파트란 공작이 스릴러 영화에 나올 듯한 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했다는 의미의 미소 맞겠지? 그치?

   

   머리가 아프겠지만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공작이 떠나가 버린 후에 난 다급히 할배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비천한 머리로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좀 다오. 머리가 아프구나.>

   

   허나 할배라 하여 이 상황을 해결할 마법같은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스킬에 의해 행동이 제한되는 이상 할배가 아무리 정치에 비상하다 한들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일단 대전제다. 길게 이야기해선 안 된다. 어떤 방향으로 튀어갈지 알 수 없으니.>

   ‘그쵸.’

   <그 후에 생각해야 할 것은…>

   

   할배가 하는 이야기를 요약하면 피해의 최소화였다.

   

   메스가키 스킬이 있는 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순 없으니 폭발의 크기라도 줄이자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걸 알고 있었다면 그냥 1왕자한테 지고 나서 드레스를 입었을…

   

   아냐. 그건 좀 아니야.

   

   근데 여러 유력 귀족 앞에서 허접 좆밥 소리를 내뱉는 것도 그렇잖아?

   

   그를 되새기고 있으려니 결국 잔혹한 진실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그 끝에 남는 것은 지옥으로 향하는 길 뿐.

   

   난 허접 주신의 수작질을 분쇄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가 퀘스트를 내어 준 순간 난 결국 나락에 떨어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대체 어느 주신이 자기 사도를 함정에 빠트리냐! 이 허접 쓰레기 병신아아아아!

   

   *

   

   파트란 가문에서 벌어지는 파티에 참가하고자 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왕국에 몇 안 되는 공작가문이라는 권위.

   

   파트란 가문이 쌓아온 여러 위업에서 생겨난 명성.

   

   그들이 왕국에 보인 헌신에서 생겨난 명예.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진 파트란 가문이다.

   

   이 곳의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한 둘일까.

   

   그 때문에 파트란 가문의 파티는 언제나 참가자의 수보다 참가하길 소망하는 이들의 수가 훨씬 더 많기 마련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파티에 참석한 이들의 이름값도 결코 가볍지 아니했다.

   

   솔라딘 왕국의 두 왕자.

   

   버로우 가문을 제외한 다른 공작 가문에서 보낸 공작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

   

   검술명가인 켄트. 풍족한 땅을 바탕으로 막대한 재산을 쌓아온 럼리. 청색 마탑주의 가문인 벌컨을 비롯해 왕국의 힘이 되어주는 유력 귀족 가문들.

   

   주신 교회의 성녀. 여러 던전 공략의 최전선을 이끄는 발톱 용병단의 단장. 예술의 신을 모시는 사도. 대륙의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대상 용트름 상단의 차기 후계자 등.

   

   신분 여하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이름이 가벼운 이는 존재치 아니했다.

   

   그건 사실이었지만 대단함에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세상 모든 보석은 아름다운 빛을 내기 마련이지만 그 보석들의 가치는 저마다 다르다.

   

   이 파티에 참가한 자들도 똑같다.

   

   누구나 말을 걸기를 바라며 전전긍긍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는 자도 존재하기 마련.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파티장의 문 너머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가문의 이름은 단언컨대 전자였다.

   

   문 앞을 지키던 이가 마도구를 통해 무언가를 전해들은 후 숨을 크게 들이쉰다.

   

   “알른 백작 가문의 베네딕 알른 경과 루시 알른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파티장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집중되고. 거대한 문이 열리며 한 부녀가 파티장 안으로 발을 들인다.

   

   두 사람의 모습을 한 마디로 묘사하면 마물과 그에 사로잡힌 요정이었다.

   

   어지간한 남성을 어린 아이로 만들어 버릴 거대한 덩치와 양복을 찢고서 나올 것처럼 우락부락한 근육.

   

   험상궂은 인상.

   

   남자가 지닌 강함에서 나오는 기백.

   

   그가 만들어낸 전설과도 같은 일화에서 생겨난 경외.

   

   베네딕 알른.

   

   한 때 왕국의 송곳니라 불렸으며 영지에 칩거한 지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대륙 최강을 의논할 때에 항상 언급되는 이름.

   

   그를 향하는 시선은 동경이었고 감사였으며 경외였고 존경이었다.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 왕국을 지켜낸 그 이름에는 그만한 시선이 따라야만 했다.

   

   그런 그의 옆을 지키는 것은 베네딕의 허리춤에 올까 싶은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그녀가 입은 복장은 지극히 평범하고 수수했다.

   

   백색을 기본으로 하여 중간중간 금색으로 포인트를 줬을 뿐인 드레스.

   

   이름 모를 귀족 영애가 입고 나왔다면 촌년이라는 날 선 소리를 듣게 될 옷.

   

   허나 여자아이를 향해 그런 말을 던질 수 있는 이는 존재치 아니했다.

   

   촌년이라는 말을 내뱉기엔 그녀가 너무도 아름다웠으니까.

   

   새하얀 피부. 여유로운 미소. 순수함과 장난기를 뒤섞은 당당한 붉은 색 눈동자. 허공에 물결치듯 흔들리는 트윈 테일.

   

   신께서 심열을 기울여 조형한 천사와 같은 모습.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옷의 평가를 바꾸었다.

   

   수수함은 청백함이 되었고, 자신감이 되었으며, 깔끔함이 되었고, 여백이 되었다.

   

   저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탄성과 함께 매혹되어버릴 풍경이었으나 여자아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사교계에 오랫동안 참여했던 이들은 저 천사의 외모 아래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루시 알른.

   

   수많은 패악질로 명성을 떨쳤던 아이.

   

   베네딕 알른의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진즉 악마의 품에 안겼을 이.

   

   베네딕에게 모든 빛이 주어졌기에 신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여겨지던 꼬마.

   

   최근 아카데미에 들어간 후 루시 알른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곤 했으나 그를 믿는 이는 거의 존재치 않았다.

   

   그녀가 속에 지닌 유능함은 개화했을 지라도 그 천성은 그대로 일 테니까. 수많은 증오 속에서 드러내던 표독스러움이 바뀔 리가 없으니까.

   

   이것이 루시 알른을 마주하고 그 독기에 상처 입었던 이들이 내린 평이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루시 알른을 향하는 시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저 년이 왜 여기에…”

   

   누군가는 증오를 드러냈고.

   

   “파트란 영애의 자비에 기생하는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1왕자님께 대든 것도 웃겨요.”

   

   누군가를 질투를 드러냈으며.

   

   “악신과 계약이라도 한 거겠죠.”

   “맞아요. 그 쓰레기가 갑자기 성장하다뇨.”

   

   누군가는 당당히 모함의 말을 내뱉기도 했다.

   

   루시 알른이라는 여자아이에게 이 공간은 형벌의 장소였다.

   

   타인의 적의라는 바늘 속을 돌아다니는 형벌 말이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고통에 휘청거렸겠지만 루시 알른은 달랐다.

   

   그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공작 부부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보던 파트란 공작의 눈썹이 호선을 그린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트란 공작 부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술 공작. 허약 부인.”

   

   알른 가문의 부녀가 입장함에 따라 수많은 웅성임이 파티장을 채웠지만 그 모든 소리는 루시 알른이 인사말을 내뱉은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결례였다.

   

   너무도 심각한 결례였다.

   

   파티의 주최자에게, 그것도 단순한 귀족 가문도 아니고 대 파트란 가문의 부부에게 저딴 헛소리를 내뱉다니!

   

   자칫 잘못 말을 꺼냈다가 불똥이 튈까 모두가 숨죽여 눈치를 보던 그 때 파트란 공작 부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부인! 들었소?”

   “들었지요. 설마 이 자리에서까지 저렇게 부를 줄이야.”

   “강단이 있단 거지. 과연 베네딕의 딸다워.”

   

   그 웃음소리를 바로 앞에서 듣던 베네딕이 떠듬떠듬 목소리를 낸다.

   

   “죄송합니다. 두 분. 저희 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베네딕. 난 이 별명이 마음에 드네. 여태 아이의 앞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건 울음소리 뿐이었는데 허술 공작이라니! 다른 아이들도 좀 저리 친근하게 대해주면 좋겠군.”

   “저도요. 여태 별명이라곤 마귀니 마녀니 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허약 부인이라니.”

   

   두 사람이 미소와 함께 베네딕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만 베네딕을 포함해 그 누구도 저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딸의 친구이자 위대한 영웅 베네딕의 자식이기에 루시가 저지른 무례를 유하게 넘겨주었다고 여길 뿐.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을 내뱉는 이들은 파트란 가문에 관한 여러 무시무시한 소문의 중심이었으니까.

   

   누군가 겉치례로 채워진 저 말을 믿고 똑같이 무례를 저지른다면 그 자의 삶은 그 날로 끝나고 말겠지.

   

   “이런. 어쩌다보니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오랜만에 참여한 파티인데 즐겨야지. 이만 가보게.”

   

   파트란 공작의 공포스러운 웃음에 파티장 속 사람들이 애써 목소리를 낸다.

   

   파티를 즐기라는 공작의 말이 단순히 알른 부녀를 향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

   

   오랜만에 저택 바깥으로 나온 탓일까. 베네딕은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베네딕을 중심으로 원이 만들어질 지경이었지.

   

   그걸 구경하던 난 슬며시 베네딕의 곁을 떠나 파티장 구석으로 향했다. 베네딕과는 달리 나를 향하는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으니까.

   

   <적의가 무척 직설적이구나.>

   ‘그러게요.’

   

   아카데미에 있을 적에는 나를 싫어한다기보다는 날 두려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이 곳은 다르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나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잠시 저 앞에 나섰을 때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루시는 저걸 어떻게 버틴 걸까.

   

   이제는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야. 진심으로.

   

   <대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업보를 쌓은 게냐. 공작이 비호의 의도를 보였음에도 이 정도라니.>

   

   할배는 기가 차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지만 난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딱히 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일까. 할배도 곧바로 이야기를 바꿨다.

   

   <다만 모두가 적의로 가득한 건 아니란 게 그나마 다행이구나.>

   

   할배의 말대로 모두가 나를 날선 눈으로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귀족의 지위와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게 허접 주신이 내려 준 보상의 일부인 걸까.

   

   아직까지 체감은 잘 안 되네.

   

   눈에 안 띄는 구석에 도착한 난 가만 파티 회장을 둘러보며 지인을 찾았다.

   

   조이나 페이비는 이 파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두 사람은 저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레이는 구석에서 음식을 집어먹느라 여념이 없고. 아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아. 저기 애버리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려주었다.

   

   야.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 말하면 알지?

   

   그러자 애버리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성이 어쨌든 간에 눈치는 빠르다니까.

   

   그리 생각을 하며 턱을 괴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제프의 모습이 보였다.

   

   이 파티의 중심이 되어야 할 파트란 가문의 공자가 이 구석진 데까지 온다라.

   

   이유는 하나겠지.

   

   “알른 영애. 소감을 발표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아뇨. 안 됐는데요.

   

   준비는 했지만 발표는 안 하고 싶은 데요.

   

   패스하면 안 될까요?

   

   방금 보셨잖아요. 제가 단상에 서면 백퍼센트 문제가 일어난다니까요.

   

   파티에서 그런 참사가 일어나서야 되겠어요?

   

   속으로 투덜거리는 말을 내뱉던 나였지만 겉으로 나온 말은 그와 정반대되는 내용이었다.

   

   ‘네. 됐어요.’

   “물론이죠. 음흉공자님.”

   

   난 이 상황에서 탈주를 택할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 평판을 떨어트리러 가볼까.

   

   …

   

   진짜 가기 싫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탈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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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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