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력탄.
마교가 앞선 전쟁에서 악명을 떨친 이유 중 하나이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공포의 상징.
오래전, 마교의 총군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그 물건은 화약과 철 쪼가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합해 현대의 수류탄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폭발을 만들어내는 물건.
그렇기에, 마교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앞선 두 번의 정마전쟁에서 우위를 잡곤 했다.
도검이 주류인 정파로서는 벽력탄을 막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으니까. 1차 정마대전때 사천당문을 정파로 끌어들인 것도 벽력탄의 탓이 컸다.
허나 벽력탄이라고 해서 만능일 수는 없으니.
당장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진형을 펼쳐 벽력탄의 범위에서 벗어난 맘루크들이 그 증인이었다.
‘아쉽군.’
몇 명이라도 피해를 입었으면 좀 더 수월해졌을 테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윌리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들과 싸우는 건 오랜만이군.”
“기사와 다시 싸우는 일이 생길 줄은 우리도 예상 못 했네. 고작 한 명뿐이지만 말일세.”
압둘인가.
윌리엄은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파르스의 부관이자 오른팔.
뿜어내는 기세에서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낀 윌리엄은 목경에게 말했다.
“조심해라. 저놈들은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정예병들이니.”
“예, 은공.”
정예병.
전쟁터조차 오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정예병이 가지는 무게감은 아주 무거웠으니.
작정하고 이슬람 왕국들이 돈을 퍼부어 키운 맘루크들은 괴물 중의 괴물들이었다.
기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선이 다시 밀려날 정도로. 그렇기에 기사들은 그 누구보다 맘루크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맘루크뿐이고, 실제로 그들은 창칼을 부딪치며 싸우곤 했으니까.
“저놈들이 탄 말을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사람의 다리라고 생각해. 그리고 검을 맞댈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저놈들의 검강은…극한의 절삭력을 가진다. 같은 검강끼리 부딪혀도 잘려 나간다.”
극한의 예기(銳氣).
곡도를 주로 사용하는 이슬람 전사들이 추구하는 길.
그 예기는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기사들처럼 작정하고 공격보다 방어에 투자하는 특이한 부류가 아닌 이상 그들과 검을 맞대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으니.
‘그런 맘루크가 스물…’
저 중에 마스터는 얼마나 될 것인가.
압둘은 확실하지만, 다른 맘루크의 경지는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
‘여유롭게 알아볼 시간 따위는 없다.’
뒤에는 마교요, 앞에는 맘루크.
절체절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을까.
윌리엄은 검을 고쳐쥐고 땅을 박찼다.
전질보.
벽력삼보라는 상승 보법의 묘리가 섞인 그것은 더 이상 전질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강맹한 움직임으로 윌리엄의 몸을 쏘아냈다.
“잔재주를 배웠구나!”
“잔재주인지 아닌지는 대봐야 알겠지.”
그의 목표는 압둘. 일단 이 중에서 제일 강할 압둘을 잡아두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다른 맘루크도.
여기서 맘루크들을 상대해본 것이 그뿐이었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압둘!”
“말 없는 기사와 싸움이라.”
압둘의 발이 말의 배를 차자, 말이 투레질하며 땅을 박찼다. 사람이 박찬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박력과 진동.
압둘의 몸이 순식간에 가속하더니, 윌리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윌리엄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
윌리엄은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오러블레이드를 슬쩍 보곤 무릎을 꿇었다.
말을 타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회피.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간 검은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빈틈…이라고 하기엔 말이 너무 건장하군.’
말조차 오러를 다루는 것.
그게 정예기병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이니.
윌리엄은 자신을 향해 오러가 담긴 앞발을 휘두르는 압둘의 말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아래는 말발굽, 위는 오러블레이드. 여전히 골치 아프군.’
곡도는 그렇게까지 길지 않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오러든 오러 블레이드든 길게 늘여 길이를 보충하면 그만일진대.
어느 한쪽에 정신이 팔리면 그대로 목숨이 날아가는 죽음의 이지선다. 허나 윌리엄에겐 무림인들과의 친선비무보다 이쪽이 더 익숙한 것이었다.
사람이 끊임없이 갈려 나가는 성전에서 이런 일은 흔했으니까.
윌리엄은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나 오랜만의 환영 인사에 쓴웃음을 지었다.
“피가 끓는 걸 보니 나도 아직 이쪽 사람이구만.”
“전쟁터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전쟁터에서 나오지 못하는 법일세.”
“너희들처럼?”
“전쟁을 위해 키워지고 길러졌으니, 전쟁을 찾아 떠도는 것 또한 알라께서 부여한 운명이지 않겠나.”
“서쪽에서 계속 놀지 그랬나.”
“아쉽게도 고향은 가증스러운 침략자들과 평화협정을 맺었지. 우리는 그곳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었네.”
“너희도 도망쳐 온 건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런 셈이지.”
‘…아직까진 잘 싸우고 있는 듯한데.’
무려 초절정고수만 다섯이니 못 싸울 리가 없지만, 문제는 맘루크들 전원이 전투에 참여한 게 아니라는 점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한 사람당 세 명.
압둘의 뒤에 네 명.
세 명씩이어도, 맘루크들은 경지의 모자람에도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상태였다.
“말을 탄 놈들이 뭐 이리 날랜 건지!”
“기이할 정도의 기마술이오!”
“은공이 왜 거듭 경고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변칙적인 움직임.
검을 들다가도,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 활을 쏘는 기이한 전술.
철저하게 지켜지는 진형.
삼면에서 파고드는 공격 탓에 별동대도 쉽사리 반격하지 못했다.
멀쩡한 상태도 아니고, 지친 상태에서 무리하면 손해를 입는 것은 이쪽이 될 것이므로.
그런 식으로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닥칠 터.
‘시간이 더 끌리면 위험하다.’
“이대로 순순히 잡히는 게 어떤가? 포로 대우는 잘해줄 자신이 있다네.”
“댁 상관을 생각하면 그것만큼 끔찍한 말이 없는데.”
‘미치광이 밑에서 포로노릇 하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데.’
‘타개할 방법이 필요해.’
벽력탄이 더 있었다면 윌리엄의 얼굴에 생긴 주름이 하나는 줄었겠지만, 아쉽게도 벽력탄은 모두 사용한 상태. 그러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방법?
윌리엄의 머리에 번뜩이는 발상이 스쳐 지나갔다.
‘무림인이니 다들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선배들! 최대한 화려한! 화려한 검초를 펼쳐십시오!”
“알았네!”
“하하하! 내 칠성검무를 색목인들에게 보여줄 때가 됐군!”
무림의 검법이 가진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려함에 있었다.
핏물 속에서 태어난 기사와 맘루크의 검과 다르게, 실전성을 조금 버리더라도 이상을 담는 것.
도인은 도를.
스님은 열반을.
무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무(務)를.
중원인들의 성향과 더불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화려함으로 승화되었으니.
“이건…!”
“갑자기 꽃잎이라니…!”
매화만리(梅花萬離).
중원인들이 보았다면 모두가 넋을 잃고 보았을, 매화이십사수검법의 스물네 번째 초식.
검이 지나가는 곳에 매화가 피어난다는, 화려함의 극치.
백자기의 검에서 꽃잎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검이 꽃잎을 뿜어낸다는,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검술에 맘루크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냄새까지…’
제대로 된 꽃조차 없는 말라붙은 산맥에 휘몰아치는 매화향이 맘루크와 말들의 코를 사정없이 자극한다. 그들의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맘루크들이야 얼굴을 찡그리는 선에서 그쳤지만, 말들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지독한 매화향이 코를 찔렀으니까. 그 냄새를 맡은 말들이 주춤댔다.
그리고 그들이 내준 실낱같은 빈틈은 초절정고수들에게 있어서는 값진 물건이었다.
백자기를 따라 화려한 초식을 펼쳐 그들의 코와 눈을 어지럽힌 별동대원들의 검이 맘루크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맘루크들은 예상외의 사태에도 기민하게 반응했지만, 전과는 다르게 아예 피해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라흐만!”
무림 고수들의 검에 베인 맘루크들이 쓰러졌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지만, 그대로 놔두면 상처가 곯아 죽으리라.
예상치 못한 반격에 피해를 본 맘루크들의 눈이 스산해졌다.
“동쪽 사람들은 신기한 검을 쓰는군.”
“더 신기한 것도 많이 남았는데.”
“한 번 통했다고 너무 기고만장 한 게 아닌가?”
“글쎄. 일단 너부터 걱정하지 그러냐.”
윌리엄은 다시 한번 압둘에게 달려들었다.
전질보.
그저 우직하고 빠르기만 한 보법.
압둘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는 네 명의 맘루크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빈틈없는 진형, 완벽한 컨디션.
윌리엄의 무모한 돌진 정도는 쉽게 받아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윌리엄이 아무런 생각 없이 땅을 박찰 리가 없었다.
‘저건!’
윌리엄의 품에서 튀어나온 목함.
그리고 윌리엄은 손가락 두 개를 튕겨 불꽃을 만들어냈다.
삼매진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잡한, 그저 오러를 단단하게 뭉쳐 마찰열로 만들어낸 불꽃. 불꽃은 이내 목함에 옮겨붙더니, 천천히 목함을 태우기 시작했다.
‘마인들이 썼던 그 기술인가!’
그 목함의 모습에 압둘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전후 상황을 따져 윌리엄이 직전에 던진 벽력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압둘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지근거리에서 벽력탄이 터지면 아무리 맘루크들이라도 몸이 성할 리가 없으니까.
그건 윌리엄도 마찬가지겠지만, 윌리엄은 기사였다.
튼튼한 것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운.
윌리엄은 작정하고 몸을 보호하면 찰과상으로 끝날지언정, 이슬람의 전사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특히 귀중하디 귀중한 자원인 말은 더.
순식간에 맘루크들의 진형이 넓어지고, 윌리엄의 손에 쥐여진 목함이 압둘을 향해 던져졌다.
“이랴!”
위기를 감지한 압둘의 말이 뒤로 급하게 물러나고, 목표를 잃은 목함이 바닥에 떨어져 내용물을 드러냈다.
‘…벽력탄이 아니라니!’
예상치 못한 임기응변.
압둘이 바닥에 떨어진 벽곡단에 당혹스러움을 드러냈을 때, 윌리엄의 몸이 맘루크들에게 짓쳐 들었다.
말이고 뭐고 들이박은 무식한 돌격.
하지만 전보다도 더 빠른.
‘뭐 이리 빠른…!’
기사시절에는 없었던 움직임.
극단적으로 속도와 위력을 추구한 보법이 윌리엄의 몸을 하나의 포탄으로 만들어냈다.
아무리 말이라도 그 정도 속도로 들이받는 적을 쉽게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윌리엄의 몸이 말의 다리를 전부 부러트리고 난 다음에야, 맘루크는 가까스로 말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말 없는 기마병은…”
“젠장!”
맘루크의 검에서 날카로운 오러가 뿜어져 나와 윌리엄을 향해 휘둘러졌다. 전력을 담은 오러.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리 절삭력을 올렸다고 한들 오러로 오러블레이드를 벨 수는 없는 법이다.
“우선 하나.”
그의 검에 산맥에 또 하나의 시체가 생겨났다.
“이쪽은 둘일세. 자네 좀 더 정진해야겠구먼.”
“하하! 이쪽도 둘이오!”
“…은공, 하나입니다.”
“더 다치기 전에 빠지지 그래?”
윌리엄은 어깨를 으쓱이며 압둘을 노려보았다.
‘약아빠진 녀석.’
압둘은 한숨을 쉬며 외쳤다.
“부상자들을 수습해라!”
“길도 비켜주지?”
“네 놈에게 또 한 번 골탕을 먹는군.”
“잔말 말고.”
“허나 이번에는 피해 가지 못할 것이다.”
압둘의 경고.
윌리엄은 그의 경고에 코웃음 쳤다.
“그렇게 말한 놈들치고 내 창에 꿰이지 않은 녀석이 없었는데.”
“압둘 님…!”
“길을 열어라!”
부상자를 수습한 맘루크들이 옆으로 갈라졌다.
“그럼 다음엔…”
“전장에서 보도록 하지. 그 전에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압둘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산맥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과 교대하듯이 마교의 마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흐흐흐…! 지친 정파 놈들이로구나!”
직전의 싸움에서 도망쳤던 독마와 염마, 그리고 마인들과 심상치 않은 고수들.
그들이 별동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쫒고 쫒기는 추격전이 다시 한번 시작되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