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복기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정리해야 할 내용이 한둘이 아니었다.
얼핏 들어서 알게 된 소식만 열댓 가지가 넘어간다. 제국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고, 마왕군에 사천이라는 까마득한 존재가 있고, 조금 있으면 마왕이 부활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릴 여유가 어디에 있을까.
에테르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연구실로 돌아왔다. 상세한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아카샤도 따라붙었다.
“야, 진짜 갈 거야?”
아카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에테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야지.”
“그러면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텐데.”
“그냥 가면 가는 거지, 뭘 그렇게까지 서둘러?”
“틸레트에서 한 번 들켰잖아. 잠입할 거면 단단히 준비하고 가야지. 외모도 바꾸고, 위조 신분증도 만들고.”
아카샤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그 성격 좀 바꿔야 해. 안 그러면 입학하기도 전에 걸린다.”
아카샤가 보기에, 지금 에테르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중이다.
물론 이걸 가지고 히스테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이는 그만큼 예전 에테르의 성격이 모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오죽하면 로즈마리가 다 식겁하겠는가.
이래서야 일리야드에 가도 정령에게 금방 들킬 게 뻔했다.
“교수 말도 잘 듣고, 거기 애들과도 어울리는 척을 해야겠지. 거기 가선 우리 둘 다 착하게 지내야 해.”
“내가 애냐.”
“언니는 가끔가다 그런 면이 있어.”
에테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뭐, 입학 준비도 해야 하나?”
“그므는. 뭐 어쩌려고 했어?”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아카데미 학생으로 들어가야 한다.
같은 걸 반복하는 건 별로였다. 일 때문인 건 알겠지만, 에테르는 이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일리야드는 틸레트보다 입시제도가 다양하다고 들었어. 보아하니 특례입학도 있는 모양이야.”
“특례입학은 또 뭐야.”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말 그대로 특례로 입학하는 제도. 적극적 우대조치라고도 하는데, 정령 없는 금안족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인가 봐.”
“별로 쓸모없는 제도겠군.”
“알아. 누구 때문에 금안족이 마수라는 소문이 사방팔방 나서 커트라인이 확 올라갔을지도 몰라.”
“금안족 전체가 마왕군에 소속된 건 아니다.”
“하지만 마왕군 수뇌부는 죄다 금안족이지.”
들키기 전이라면 모를까. 정체가 한 번 까발려진 뒤로는 다시 잠입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것 때문에 마왕군에도 일련의 내규가 있다.
만약 잠입에 실패해서 도망친다? 못해도 백 년 정도는 잠입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고, 그나마 마왕군의 최고 전력 중에는 에테르만큼 평범하게 생긴 자가 없었다.
“하여튼 이 얘기는 자료를 취합해서 가져올게. 그동안 나는 자리를 비울 수도 있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블루베리한테 부탁하고.”
아카샤는 그 말을 끝으로 연구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다가 클라이스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읏….”
클라이스는 옅게 신음했다.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똑같은 에테르의 쌍둥이 여동생. 클라이스에게 있어선 에테르와 더불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카샤는 클라이스의 눈빛에 여린 회한이 스며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게 그때 저지선 넘어오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는데 말이야…. 네 업보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투. 클라이스는 또 다른 에테르의 조롱을 들으며 처연하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사실, 마왕군의 회의를 반추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고, 또 알린다고 해서 마왕군의 쾌진격을 멈출 수도 없었다.
클라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가장 가까이서 절망을 지켜보는 것뿐.
그랬기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떻게 했어야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아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면의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리려던 찰나였다.
“흐윽…!”
에테르가 목줄을 휘어잡은 채로 클라이스를 끌어당겼다.
뇌로 공급되는 산소가 틀어막히는 감각. 클라이스는 숨을 헐떡이며 연구실 책상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이렇게 한 번 끌어당겨질 때마다 클라이스의 상태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목이 막힌 탓에 침이 입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고, 채찍질을 당한 암말처럼 펄쩍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찬 바람이 부는 바깥에 나갔다 와서 그런지 양 뺨이 손찌검을 당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앉아.”
클라이스는 캑캑거리며 에테르의 지시를 따랐다.
에테르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클라이스가 그 곁에 다소곳이 허리를 내리며 앉았다.
기역자 형태의 책상을 두고 서로의 시선이 직각으로 맞물린다.
과거 클라이스가 에테르를 데리고 스크롤 작업을 할 때와 똑같은 자리배치였다.
“저기….”
“기다려.”
에테르는 책상다리에 쇠사슬을 걸고 단단히 묶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물쇠를 채워 못 도망가도록 장치했다.
꿀꺽.
클라이스가 목울대를 넘기며 긴장하고 있던 사이, 에테르는 책장에서 서적 세 권을 꺼냈다.
[전계마도총론]
[전자기 방정식의 실험적 유도 방법]
[기초수학 및 기호학]
턱, 턱, 턱.
세 권의 책이 코앞에 놓인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클라이스는 멀뚱거리는 눈으로 가장 위에 놓인 책 표지를 훑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들, 설마 전부 당신이 쓴 책인가요?”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에테르는 책에 대한 목차를 하나씩 펼치더니, 만년필을 들고 몇몇 챕터를 동그라미 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음 책은 이쪽부터 저쪽까지. 마지막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기행에 클라이스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무언가 불안하다.
그리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거의 틀렸던 적이 없었다.
“목차에 동그라미 친 곳 있지? 전부 읽고 이해해 놓도록.”
“언제까지요?”
“이번 주 끝날 때까지.”
클라이스는 경악성이 튀어나오려던 걸 겨우 참아냈다.
“왜. 이 정도도 못 하나?”
“이, 이것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
“네?”
“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어. 여기 청소도 하고, 시키는 거 있으면 그때마다 다 해야 한다.”
이번 주가 지나가기까지 앞으로 닷새.
그 안에 못해도 1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을 주파해야 한다. 단순히 소설책 읽듯이 읽어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공식을 곁들인 전문적인 내용을 한 자 한 자 심독(深讀)하며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요구였다.
“이 정도도 못 하냐고.”
“…힘들어요.”
“힘든 거랑 불가능한 건 다른 이야기지.”
마음 같아선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다간 체벌이 따라올지도 모르겠지. 자신은 노예이니 말이다.
그런 숱한 고통은 많이 겪어보았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클라이스는 에테르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예 막 나가도 손해볼 건 없었다.
“죽어도 안 하겠다는 얼굴이군.”
“……아, 아뇨.”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는 있지만, 살 수만 있다면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게 정상이다.
왜 갑자기 이런 걸 명령하는지는 모르겠다. 뭔갈 연구하려는 건가? 클라이스는 에테르의 눈치를 보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어쨌거나, 모욕적인 요구가 아니라면 따르는 편이 나았다.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클라이스는 고개를 소심하게 끄덕였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그렇게 마(魔)의 첫 주가 시작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연구실을 청소한다. 그러고 나면 곧바로 마왕성을 한 바퀴 돈다.
이 산책 시간이 제일 싫었다. 개처럼 목줄을 차고 돌아다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핑계와는 달리, 장딴지는 점점 예전의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첫째 날만 하더라도 걷는 게 힘에 부쳤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걷고 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격한 운동을 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였지만.
그렇게 산책 아닌 산책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오면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클라이스는 오늘도 에테르가 읽으라고 한 책을 펼쳤다.
쉬운 책들은 아니었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클라이스조차도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게 생겼을 때 질문할 곳도 마땅찮았다. 에테르가 자리를 자주 비우는 것도 모자라, 간단한 걸 물어보려고 하면 알아서 찾아보고 이해하라며 성깔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활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짜증이 치솟았지만 클라이스는 어찌하지 못했다.
에테르가 주인이고, 자신이 노예라서?
아니.
자신도 옛날에 저랬으니까.
거꾸로 당해 보니까 알게 되었다. 재능 있는 아이를 무자비하게 굴릴 줄만 알았지, 그 아이가 받을 고통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에 한 일을 떠올리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 클라이스는 에테르 앞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이건 대체…….”
또 어려운 게 나왔다. 클라이스는 머리를 싸매며 책장을 넘겼다.
전계마도라는 개념은 아직도 생소했다. 그렇다고 어디 질문할 데도 없어서 배로 힘들었다.
몇 시간을 고민해도 이해되지 않는 챕터가 있었다. 이럴 땐 일단 다른 곳부터 읽거나 다음 날로 미루었다. 어려운 전공서적을 하루 16시간 3교대로 읽다 보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으윽….”
자리를 떠나고 싶어서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그러나.
철컹.
목줄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기에 함부로 일어나지도 못한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아무데도 못 가고 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클라이스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거, 완전히 고문이었다.
몸만 멀쩡할 뿐이지, 정신을 왕창 갉아먹는 고문.
주삿바늘에 찔려서 생긴 몸의 멍자국은 점점 낫고 있건만, 눈가는 날이 갈수록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불과 닷새 만에 정신은 피폐해졌고, 조금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그 즉시 졸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과장 좀 보태서 아사할 것 같았다.
“어디 가요?”
“금방 돌아올 거다.”
뱃속이 꼬륵꼬륵하는 소리를 에테르도 들은 모양인지, 바깥에 나가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방울토마토가 가득 든 비닐봉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