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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6

       클라이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복기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

       정리해야 할 내용이 한둘이 아니었다.

       ​

       얼핏 들어서 알게 된 소식만 열댓 가지가 넘어간다. 제국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고, 마왕군에 사천이라는 까마득한 존재가 있고, 조금 있으면 마왕이 부활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그러나 정신을 차릴 여유가 어디에 있을까.

       ​

       에테르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연구실로 돌아왔다. 상세한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아카샤도 따라붙었다.

       ​

       “야, 진짜 갈 거야?”

       ​

       아카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에테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

       “그래야지.”

       “그러면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텐데.”

       “그냥 가면 가는 거지, 뭘 그렇게까지 서둘러?”

       “틸레트에서 한 번 들켰잖아. 잠입할 거면 단단히 준비하고 가야지. 외모도 바꾸고, 위조 신분증도 만들고.”

       ​

       아카샤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

       “무엇보다 그 성격 좀 바꿔야 해. 안 그러면 입학하기도 전에 걸린다.”

       ​

       아카샤가 보기에, 지금 에테르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중이다.

       ​

       물론 이걸 가지고 히스테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이는 그만큼 예전 에테르의 성격이 모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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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죽하면 로즈마리가 다 식겁하겠는가.

       ​

       이래서야 일리야드에 가도 정령에게 금방 들킬 게 뻔했다.

       ​

       “교수 말도 잘 듣고, 거기 애들과도 어울리는 척을 해야겠지. 거기 가선 우리 둘 다 착하게 지내야 해.”

       “내가 애냐.”

       “언니는 가끔가다 그런 면이 있어.”

       ​

       에테르는 콧방귀를 뀌었다.

       ​

       “뭐, 입학 준비도 해야 하나?”

       “그므는. 뭐 어쩌려고 했어?”

       ​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아카데미 학생으로 들어가야 한다.

       ​

       같은 걸 반복하는 건 별로였다. 일 때문인 건 알겠지만, 에테르는 이것이 달갑지 않았다.

       ​

       “그래도 일리야드는 틸레트보다 입시제도가 다양하다고 들었어. 보아하니 특례입학도 있는 모양이야.”

       “특례입학은 또 뭐야.”

       ​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

       “말 그대로 특례로 입학하는 제도. 적극적 우대조치라고도 하는데, 정령 없는 금안족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인가 봐.”

       “별로 쓸모없는 제도겠군.”

       “알아. 누구 때문에 금안족이 마수라는 소문이 사방팔방 나서 커트라인이 확 올라갔을지도 몰라.”

       “금안족 전체가 마왕군에 소속된 건 아니다.”

       “하지만 마왕군 수뇌부는 죄다 금안족이지.”

       ​

       들키기 전이라면 모를까. 정체가 한 번 까발려진 뒤로는 다시 잠입하기가 어렵다.

       ​

       이러한 것 때문에 마왕군에도 일련의 내규가 있다.

       ​

       만약 잠입에 실패해서 도망친다? 못해도 백 년 정도는 잠입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

       그러나 사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고, 그나마 마왕군의 최고 전력 중에는 에테르만큼 평범하게 생긴 자가 없었다.

       ​

       “하여튼 이 얘기는 자료를 취합해서 가져올게. 그동안 나는 자리를 비울 수도 있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블루베리한테 부탁하고.”

       ​

       아카샤는 그 말을 끝으로 연구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다가 클라이스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

       “읏….”

       ​

       클라이스는 옅게 신음했다.

       ​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똑같은 에테르의 쌍둥이 여동생. 클라이스에게 있어선 에테르와 더불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

       아카샤는 클라이스의 눈빛에 여린 회한이 스며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비릿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

       “그러게 그때 저지선 넘어오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는데 말이야…. 네 업보다.”

       ​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투. 클라이스는 또 다른 에테르의 조롱을 들으며 처연하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

       사실, 마왕군의 회의를 반추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고, 또 알린다고 해서 마왕군의 쾌진격을 멈출 수도 없었다.

       ​

       클라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가장 가까이서 절망을 지켜보는 것뿐.

       ​

       그랬기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어떻게 했어야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

       아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내면의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리려던 찰나였다.

       ​

       “흐윽…!”

       ​

       에테르가 목줄을 휘어잡은 채로 클라이스를 끌어당겼다.

       ​

       뇌로 공급되는 산소가 틀어막히는 감각. 클라이스는 숨을 헐떡이며 연구실 책상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

       이렇게 한 번 끌어당겨질 때마다 클라이스의 상태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

       목이 막힌 탓에 침이 입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고, 채찍질을 당한 암말처럼 펄쩍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

       게다가 찬 바람이 부는 바깥에 나갔다 와서 그런지 양 뺨이 손찌검을 당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앉아.”

       ​

       클라이스는 캑캑거리며 에테르의 지시를 따랐다.

       ​

       에테르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클라이스가 그 곁에 다소곳이 허리를 내리며 앉았다.

       ​

       기역자 형태의 책상을 두고 서로의 시선이 직각으로 맞물린다.

       ​

       과거 클라이스가 에테르를 데리고 스크롤 작업을 할 때와 똑같은 자리배치였다.

       ​

       “저기….”

       “기다려.”

       ​

       에테르는 책상다리에 쇠사슬을 걸고 단단히 묶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물쇠를 채워 못 도망가도록 장치했다.

       ​

       꿀꺽.

       ​

       클라이스가 목울대를 넘기며 긴장하고 있던 사이, 에테르는 책장에서 서적 세 권을 꺼냈다.

       ​

       [전계마도총론]

       [전자기 방정식의 실험적 유도 방법]

       [기초수학 및 기호학]

       ​

       턱, 턱, 턱.

       ​

       세 권의 책이 코앞에 놓인다.

       ​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클라이스는 멀뚱거리는 눈으로 가장 위에 놓인 책 표지를 훑었다.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이것들, 설마 전부 당신이 쓴 책인가요?”

       ​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대신 에테르는 책에 대한 목차를 하나씩 펼치더니, 만년필을 들고 몇몇 챕터를 동그라미 치기 시작했다.

       ​

       이 책은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음 책은 이쪽부터 저쪽까지. 마지막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

       알 수 없는 기행에 클라이스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

       무언가 불안하다.

       ​

       그리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거의 틀렸던 적이 없었다.

       ​

       “목차에 동그라미 친 곳 있지? 전부 읽고 이해해 놓도록.”

       “언제까지요?”

       “이번 주 끝날 때까지.”

       ​

       클라이스는 경악성이 튀어나오려던 걸 겨우 참아냈다.

       ​

       “왜. 이 정도도 못 하나?”

       “이, 이것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

       “네?”

       “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어. 여기 청소도 하고, 시키는 거 있으면 그때마다 다 해야 한다.”

       ​

       이번 주가 지나가기까지 앞으로 닷새.

       ​

       그 안에 못해도 1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을 주파해야 한다. 단순히 소설책 읽듯이 읽어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공식을 곁들인 전문적인 내용을 한 자 한 자 심독(深讀)하며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요구였다.

       ​

       “이 정도도 못 하냐고.”

       “…힘들어요.”

       “힘든 거랑 불가능한 건 다른 이야기지.”

       ​

       마음 같아선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다간 체벌이 따라올지도 모르겠지. 자신은 노예이니 말이다.

       ​

       그런 숱한 고통은 많이 겪어보았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클라이스는 에테르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예 막 나가도 손해볼 건 없었다.

       ​

       “죽어도 안 하겠다는 얼굴이군.”

       “……아, 아뇨.”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아니었다.

       ​

       죽음을 각오하고는 있지만, 살 수만 있다면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게 정상이다.

       ​

       왜 갑자기 이런 걸 명령하는지는 모르겠다. 뭔갈 연구하려는 건가? 클라이스는 에테르의 눈치를 보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

       어쨌거나, 모욕적인 요구가 아니라면 따르는 편이 나았다.

       ​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클라이스는 고개를 소심하게 끄덕였다.

       ​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

       **

       ​

       ​

       그렇게 마(魔)의 첫 주가 시작되었다.

       ​

       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고 연구실을 청소한다. 그러고 나면 곧바로 마왕성을 한 바퀴 돈다.

       ​

       이 산책 시간이 제일 싫었다. 개처럼 목줄을 차고 돌아다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

       그런 핑계와는 달리, 장딴지는 점점 예전의 힘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

       첫째 날만 하더라도 걷는 게 힘에 부쳤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걷고 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격한 운동을 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였지만.

       ​

       그렇게 산책 아닌 산책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오면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

       클라이스는 오늘도 에테르가 읽으라고 한 책을 펼쳤다.

       ​

       쉬운 책들은 아니었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클라이스조차도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

       ​

       그렇다고 모르는 게 생겼을 때 질문할 곳도 마땅찮았다. 에테르가 자리를 자주 비우는 것도 모자라, 간단한 걸 물어보려고 하면 알아서 찾아보고 이해하라며 성깔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

       활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짜증이 치솟았지만 클라이스는 어찌하지 못했다.

       ​

       에테르가 주인이고, 자신이 노예라서?

       ​

       아니.

       ​

       자신도 옛날에 저랬으니까.

       ​

       거꾸로 당해 보니까 알게 되었다. 재능 있는 아이를 무자비하게 굴릴 줄만 알았지, 그 아이가 받을 고통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

       과거에 한 일을 떠올리며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 클라이스는 에테르 앞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

       “이건 대체…….”

       ​

       또 어려운 게 나왔다. 클라이스는 머리를 싸매며 책장을 넘겼다.

       ​

       전계마도라는 개념은 아직도 생소했다. 그렇다고 어디 질문할 데도 없어서 배로 힘들었다.

       ​

       몇 시간을 고민해도 이해되지 않는 챕터가 있었다. 이럴 땐 일단 다른 곳부터 읽거나 다음 날로 미루었다. 어려운 전공서적을 하루 16시간 3교대로 읽다 보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

       “으윽….”

       ​

       자리를 떠나고 싶어서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

       그러나.

       ​

       철컹.

       ​

       목줄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기에 함부로 일어나지도 못한다.

       ​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아무데도 못 가고 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

       클라이스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이거, 완전히 고문이었다.

       ​

       몸만 멀쩡할 뿐이지, 정신을 왕창 갉아먹는 고문.

       ​

       주삿바늘에 찔려서 생긴 몸의 멍자국은 점점 낫고 있건만, 눈가는 날이 갈수록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

       불과 닷새 만에 정신은 피폐해졌고, 조금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그 즉시 졸기 일쑤였다.

       ​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과장 좀 보태서 아사할 것 같았다.

       ​

       “어디 가요?”

       “금방 돌아올 거다.”

       ​

       뱃속이 꼬륵꼬륵하는 소리를 에테르도 들은 모양인지, 바깥에 나가서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

       방울토마토가 가득 든 비닐봉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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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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