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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6

     

    황궁을 떠나야 한다는 라스의 말에, 아셀라의 머릿속은 오히려 간단하게 정리됐다.

     

     

    지금까지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해서 동앗줄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도 수십, 수백 개가 넘어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

     

    ‘왜 후국에 관해서 내게 알리지 않았니?’

    ‘언제부터 계획했니?’

    ‘주치의의 의무를 다한다던 말은 거짓말이었니?’

    ‘저 편지의 내용은 뭐야?’

    ‘왜 내가 저걸 좋아하리라고 생각했어?’

    ‘처음부터 나와 파혼하고 싶었어?’

     

    하지만 라스의 입에서 직접 들어버리니 다른 건 필요가 없어졌다.

     

    머릿속이 시뻘개진다. 문장이 조각나며 단어가 부서졌다.

     

    아셀라는 그 사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두 글자를 힘차게 외쳤다.

     

    “못 가!!”

     

    뿌득, 악문 이빨 사이에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몸싸움에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이 깔아뭉갠 라스의 얼굴을 스쳤다.

     

    “못 가, 못 간다고. 너는 내 주치의잖아! 주군의 곁에 있어야 하잖아. 그뿐이야?”

     

    멱살을 잡은 채 아셀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이마가 부딪칠 거리였다.

     

    “혼약자잖아! 앞으로 1년이면 나도 성인이야. 다음 해 오늘이 오면, 삼백 밤만 지나면! 나랑, 나랑 이 월광궁에서 식을 올려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어딜, 다 내팽개치고 어딜 가서 뭘 하겠단 소리야!!”

     

    “황녀님.”

     

    라스가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아셀라의 뺨을 만졌다.

     

    열기로 뜨거워진 얼굴. 라스는 천천히 그 손을 돌려 그녀의 뒷목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너무 흥분하셨어요. 조금 진정하시고…”

     

    “지금 장난칠 때야?!”

     

    탁, 아셀라가 라스의 팔을 쳐냈다. 그 눈에서 마나의 흐름이 더욱 격해졌다.

     

    마치 흥분한 코끼리를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격한 반응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진정제를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스는 핵심부터 말하지 않으면 영영 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황녀님.”

     

    “전하! 황녀 전하라고 해. 라스, 내가 너를 너무 기어오르게 내버려 뒀어. 감히, 네가 감히 내게 이런 반역이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해?”

     

    원망이 차올라 퍽, 퍽.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치는 아셀라.

     

    탁, 라스가 아셀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아셀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탁이 있습니다.”

     

    라스는 아셀라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와 함께 후국으로 가요.”

     

    아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망스럽게 그를 계속 노려볼 뿐.

     

    “…처음에는 황녀님이 미웠습니다.”

     

    라스는 천천히 고해성사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꽤 미워했어요. 황녀님은 모르시겠지만 제겐 오래 쌓아온 원한이 있었거든요.”

     

    라스는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서 누군가에게 전하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전장에서 수백 번을 회귀하며 이미 그의 감각은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그걸 되살리려면 집중이 필요했다.

     

    라스는 천천히 아셀라와의 기억을 되짚으며 그녀에게 한 마디씩 마음을 전하려 노력했다.

     

    “황녀님이 제 의학을 인정해주셨을 땐 꽤 기분 좋았어요. 주치의 일은 억지로 시작했어도 하다 보니 꽤 보람 있었고요.”

     

    “…그래서?”

     

    “황녀님이 저를 좋아하신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라스는 모든 단어에 솔직함을 담았다.

     

    “지금은 알아요. 제 편이 되어주신다는 황녀님의 말씀은, 한 치 거짓 없는 진심이시라는 걸.”

     

    “그건, 너도 내 편이니까.”

     

    “그럼요. 황녀님의 충직한 신하잖아요.”

     

    라스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 아셀라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의 얼굴로 자신이 가득 차는 기분이다.

     

    황실이니 궁이니 다른 모든 사정은 잊어버리고 지금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라스.”

     

    “네.”

     

    아셀라는 지금껏, 무서워서 그에게 하지 못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지금은 나를 좋아하니?”

     

    라스는 항상 보여줬던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예. 상당히 좋아합니다.”

     

    후국으로 같이 가자는 그의 권유에는 다른 어떤 의도도 없다.

     

    순수하게 자신을 원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건 도무지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다.

     

    왜, 왜. 어디부터 꼬였을까.

     

    왜 이렇게 됐을까.

     

    고개를 푹 숙인 아셀라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뭔데.”

     

    “저걸 적을 땐 황녀님께서도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맞아. 라스, 이 계약을 이뤄주길 원하니? 나와 파혼하고 싶어?”

     

    “지금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황실을 떠나 후국으로 가야 합니다. 황녀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보내주지 않으신다면…”

     

    라스가 말을 흐렸다. 그가 생략한 문장이 무엇인지 아셀라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체,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 응? 왜 꼭 떠나야 하냔 말이야.”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나와 파혼해서라도 해야 하는 일이?”

     

    “…예.”

     

    “웃기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

     

    아셀라에게 미래의 일을 전한들 믿어줄 리도 없고, 부정적인 영향만 갈지도 몰랐다.

     

    당신이 폭군이 되어 세상을 멸망시키고 나도 죽일 거란 이야기를,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어떤 말을 해도 변명이 될 뿐.

    지금은 진심을 전할 수밖에 없다.

     

    라스는 심호흡을 했다.

     

    “황녀님. 아니, 아셀라.”

     

    황금빛 머리칼이 뚝, 흔들림을 멈추었다.

     

    “나와 함께 가자.”

     

    두 사람만이 남은 월광궁 침실.

     

    바닥에 몸이 얽힌 채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이, 침묵이 맴돌았다.

     

    창밖 멀리에서 기사들이 함성과 함께 진격하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메아리 울려 조그마해진 배경음은, 서로의 숨소리에 집중한 두 사람의 고막에는 채 닿지 않았다.

     

    얼마나 대치했을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각자 무슨 생각을 담았을까.

     

    아셀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침묵을 깼다.

     

    “그럴 수 없단 걸 알잖니.”

     

    애원하듯 떨리는 목소리.

     

    “라스,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내게도 있어. 잘 알잖아.”

     

    “아셀라, 너는 황제가 되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럴 리가 없잖아.”

     

    아셀라가 딱 잘라 단언했다.

     

    그녀는 라스가 계속한 제안에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태어난 존재다.

     

    황족이란, 황제의 직계로 태어나 승계권을 가진 이는 이미 개인이 아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 의무를 뼈저리게 온몸으로 받으며 성장해온 아셀라였다.

     

    황실을 떠나 다른 삶을 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반대야, 라스.”

     

    “반대라니?”

     

    “내가 네게 제안할게. 네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이루어주겠어. 그 목적에 국가가 필요했니? 그럼 나라를 줄게. 조금만.”

     

    아셀라가 라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시간을 줘. 1년. 너와 혼인하는 그 날까지 다른 승계권자의 목을 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어. 권력이 가지고 싶니? 아니면 재물이? 네가 필요한 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줄게. …설령.”

     

    아셀라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처, 첩이 필요하다고 해도, 둘 정도는 허락해 줄 테니까. 그 야만인을 취하고 싶었니? 아니면 용사를? 뭐라도 좋아. 네 욕망은 전부 이뤄주겠어. 그러니까.”

     

    아셀라의 말이 라스를 달콤한 뱀처럼 휘감았다.

    라스는 늪에 가라앉듯, 조금씩 그녀에게 빠져들어 갔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아셀라의 부탁.

     

    라스로서도 상당히 충격이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모습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녀가 자신을 원하는지, 얼마나 보내기 싫어하는지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아셀라.”

     

    “…제발.”

     

    라스의 품에 머리를 묻는 아셀라.

     

    마치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어서 회피하는 태도였다.

     

    여지껏 한 번도 보인 적 없고, 볼 리도 없다고 생각했던 아셀라의 약한 모습에 라스도 마음이 동요했다.

     

    아셀라를 수술했을 때.

     

    라스는 진심으로 그녀의 쾌유를 빌었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아셀라에 대한 호의보다는 의사로서의 의무감이 크게 작용했었을 것이다.

     

    그녀를 진료할 때도, 치료할 때도, 항상 그녀가 건강하기를 바랐지만.

     

    이번에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 라스 고트베르크로서.

     

    처음으로, 그저 아셀라를 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셀라의 곁에 남는다면.’

     

    지금껏 준비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후국도 직접 관여하지 못해 외교와 제약공장, 국력 전반에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아셀라가 누구인가.

     

    입 밖으로 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해버리고 마는 강철 같은 여인이다.

     

    그녀라면 진짜 1년 안에 황제의 자리를 억지로 차지해서, 충분한 영향력을 미칠 자리에 올라서겠지.

     

    미래에서 그녀가 벌였던 철권통치를 생각하면 그때부터 후국이든 귀족가든, 연합군이든 하나 문제될 건 없다.

     

    제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앞세워 독재, 대륙을 독재하여 라스의 뜻대로 주무를 수도 있으리라.

     

    결과적으로 남은 배드엔딩을 지우는 일은 그 방법으로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말 가능한가?’

     

    설령 아셀라와 황실에서 맺어져 행복해진다 한들, 마왕군에게 제국이 멸망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고 뭐고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으면서 굿엔딩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길이 정말 있을까.’

     

    만사에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한 건 아셀라 본인이 아니었나.

     

    물론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하면, 거절할 이유야 어디에도 없지만.

     

    ‘…어쩐다.’

     

    라스가 고민하던 그때였다.

     

     

    [당신은 기로에 섰습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

     

     

     

    ―――――――――――

    ※주의

    · 당신은 기로에 섰습니다.

    · 이 선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 굿엔딩

     

    [화타의 길]

    · ■■년 후, 다시 ■■에서 61% → 65%

     

     

    · 히든엔딩

     

    [욕망의 길]

    · 주치의는 ■■■ ■치고 ■■■다 51%

     

     

    · 엔딩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

     

     

     

    상태창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이전처럼 지금이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이건… 굿엔딩과 히든엔딩의 루트를 고르는 거야. 여기서 내가 황실에 남으면.’

     

     

    ―――――――――――

    · ■■년 후, 다시 ■■에서 65% → 0%

     

    · 주치의는 ■■■ ■치고 ■■■다

    51% → 78%

    ―――――――――――

     

     

    ‘굿엔딩 루트가 사라져.’

     

    반대로 황실을 떠나면 굿엔딩의 확률이 남아 있게 된다.

     

    어느 쪽도 배드 엔딩은 아니다.

     

    그리고 단어로 보아 둘 다 아셀라와 엮이게 되리라 생각되고.

     

     

    눈앞에는 아직도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온몸으로 붙들어 맨 황금빛 머리칼의 황녀.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더 나은 길일까.

     

    ‘하나는 알아볼 수 있어.’

     

    상태창을 터치한다.

    지금이 바로 이걸 쓸 때였다.

     

     

    ―――――――――――

    · 엔딩 열람권을 사용합니다.

     

    · 히든엔딩 [주치의는 ■■■ ■치고 ■■■다]를 체험합니다.

    ―――――――――――

     

     

    시야가 암전하고.

     

     

     

    “라스.”

     

    눈을 떴을 때, 내 앞엔 그녀가 있었다.

     

    “후후, 이럴 때도 졸다니. 참으로 심성이 신비한 남자구나.”

     

    미래에서 몇 번이나 죽음의 순간에서 마주쳤던 얼굴.

     

    허리를 넘는 장발의 은발, 와인잔을 든 가는 손가락.

     

    황금의 마녀.

     

    황제 아셀라였다.

     

     

    그녀가 생긋 눈웃음을 흘렸다.

     

    “이리 오렴, 함께 세상의 멸망을 즐기자꾸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JimUL님 50코인 후원 감사해요!!@! 무언의 후원… 기대하시던 장면이셨단 뜻이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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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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