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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6

       흐릿한 동공으로 빛이 스며든다.

         

       “아침…, 인가.”

         

       정신이 몽롱하다.

         

       멍한 눈빛으로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꿈을 꾼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치료를 이어가며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뭐였지….”

         

       정확히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비몽사몽했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치료를 끝마쳐갈 즈음,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짓고 있던 표정 한 자락.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다잡았다.

         

       무엇을 위한 다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리라.

         

       “좀 서글프네.”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5,700자 한 번 썼다고 마왕 모가지 딸 운명에 처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무림까지.

         

       심지어 마지막 상대가 다름 아닌 전 여친이다.

         

       심지어 아직 사랑해 마지않는, 미련이 뚝뚝 묻어 나오다 못해 질질 흐르는 전 여친.

         

       “꼬여도 단단히 꼬였어, 아주.”

         

       쓰게 웃으며 백우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개운하다.

         

       무림에 온 이후로 이렇게까지 좋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최상이다.

         

       불안정하게 타오르고 있던 체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다.

         

       단순히 상태만 괜찮아진 게 아니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기는 더욱 짙어졌고,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 바람의 가호라도 깃든 것처럼 가볍고 표홀해졌다.

         

       “이건….”

         

       아무래도 지난밤의 치료가 단순히 마기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은 모양.

         

       백우진은 곧장 검을 뽑아 기운을 흘려 넣었다.

         

       검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검기(劍氣).

         

       평소였다면 여기가 끝이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가며 타오르는 검기는 그 뒤로 주기적으로 적은 양의 내공을 소모하여 형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오늘의 끝은 검기가 아니었다.

         

       검기를 이룬 뒤에도 검은 게걸스럽게 내공을 먹어 치웠다.

         

       과도하게 몸을 부풀린 아지랑이가 얇은 실오라기로 변해 검을 촘촘하게 감쌌다.

         

       그렇게 촘촘하게 짜여 올라간 실오라기는 또 하나의 검이 되었다.

         

       두꺼운 무쇠조차 두부 썰 듯 갈라버릴 수 있는, 검강(劍罡)의 발현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올라섰네.”

         

       범인은 평생을 두드려도 허물지 못할 벽을 하룻밤 사이에 부수고 넘어가 마침내 화경(化境)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

         

       인지의 벽을 허물자, 감각이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더 많은 소음, 한층 강렬해진 존재감, 살갗에 닿는 공기로부터 느끼는 예민함까지.

         

       화경에 처음 오른 이들은 이 부분에서 제법 괴로워한다.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초월해버린 감각이 미쳐 날뛸 때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강제적으로 느껴야만 하기에.

         

       그러나 백우진은 이러한 감각이 괴롭다기보다 오히려 반가웠다.

         

       “이제야 좀 살만하네.”

         

       감각은 단순히 넓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더 예민해지고, 더 깊어진다.

         

       한껏 치장한 화려한 겉부분을 강제로 들어내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화경의 고수들에게 얕은수나 속임수가 잘 통하지 않는 이유다.

         

       “이런 느낌이라면….”

         

       그는 노인에게서 전해 들은 천마신공의 구결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고작 하루, 이틀 전까지만 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두리뭉술한 구결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백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마신공을 익히는 데에 있어 높다란 장벽으로 작용하던 구결들이 대다수 해소되었다.

         

       ‘가능하다.’

         

       지금 상태라면 천마신공이 어떤 무공인지 맛 정도는 볼 수 있을 듯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천마신공은 고금 제일의 무공으로 불리는 걸까.

         

       제아무리 닳고 닳아도 무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역대 천마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에 한 발 더 다가서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마신공의 구결을 마음속으로 읽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안 되지.’

         

       그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여기선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초절정에서는 느끼지 못 했던 은밀한 시선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러한 일이 가능한 사람은 천마신교, 아니, 무림 전체를 통틀어도 몇 존재하지 않을 터.

         

       천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감시인가, 아니면 단순히 관찰인가.

         

       백우진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까무룩 잠들기 전 보았던 그녀의 표정을 상기했다.

         

       그는 그녀를 잘 안다.

         

       용사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달고 있는 백우진에게 사명감, 이타심, 배려심이 무엇인지 알려준 누구보다 정의롭고, 다정한 사람.

         

       그런 그녀가 필연적으로 남을 짓밟아야만 하는 천마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평생 가꿔온 제 삶의 가치를 모두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가지고 싶은,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일 터.

         

       ‘멈출 수는 없겠지.’

         

       어쭙잖은 각오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

         

       그랬다간 도리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테지.

         

       더 단단한 결의와 결심이 필요하다.

         

       먼 훗날 칼을 맞대게 되리라는 단순한 예상과 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반드시 그녀를 죽이고 말겠다는 비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둘러싸야만 한다.

         

       백우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쉽겠냐고….”

         

       그에게 있어 동료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친구, 연인, 가족.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백우진에게 동료란 이 모든 걸 포함한 포괄적인 존재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았던 이가 있었겠냐만.

         

       ‘안제.’

         

       안젤리카 하츠.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각별했다.

         

       그녀는 한 사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될 의미를 수없이 가져간 사람이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첫 친구였고, 예견된 험난한 가시밭길에 흔쾌히 함께 올라서 준 첫 동료였으며, 언제나 혼자였던 제 곁에 다가와 준 첫 가족이었다.

         

       동시에.

         

       첫사랑이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않고 떠올리는 열렬한 첫사랑.

         

       제게서 그토록 많은 의미를 훔쳐 간 사람을 죽이겠다고 결심을 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게 업보라는 거겠지.”

         

       이곳에서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순간, 백우진은 후회했다.

         

       조금 더 이기적으로 나갔더라면.

         

       그녀의 검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뻔뻔한 태도로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그러다 문득,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제 말이라면 믿고 따르는 조원들과 죽어서도 자신을 사랑하겠다 맹세한 여인들.

         

       그때에 대한 후회는 그들 모두를 제 알량한 후회 속으로 밀어 넣는 일임을 깨달았다.

         

       “…보고 싶네.”

         

       밤마다 당돌하게 유혹해오는 당선영, 소매를 잡고 좌우로 세 번씩 흔들면 그것이 신호라고 말하며 매일 같이 흔들어대던 제갈연지.

         

       먹을 거 주면 되게 좋아하는 설수연, 남들은 혐오하는 주인님이란 단어에 집착하는 송희연, 그다지 오랜 시간 곁에 있지는 못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도경.

         

       차가운 표정으로 제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혈수마녀, 정혜까지.

         

       아, 덤으로 뺀질거리는 장삼과 구왕수도.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녀 또한 잃고 싶지 않다.

         

       “음.”

         

       백우진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지만, 해낼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내가 강해지면 되는구나?”

         

       그녀가 어떤 수를 사용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되면 된다.

         

       대략 천마 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되지 않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가능성은 엿보았다.

       

       천마신공.

       

       고금 제일의 무공이라 불리는 그것을 제대로 익히고, 나름대로 변형을 가할 수만 있다면.

       

       그는 곧장 전각을 나섰다.

       

       목적지는 마경.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고, 동시에 활로를 엿보게 한 사지로 그는 다시금 걸어 들어갔다.

         

         

       * * *

         

         

       지독한 두통이 몰려온다.

         

       “크으으…!”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그는 이 고통이 싫지 않았다.

         

       그가 그로써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일러주는 것이기에.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내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남들은 거기서 거기인 곳으로 보일 테지만, 그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어렵지 않게 가늠이 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해질 만큼,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위치를 가늠한 그는 곧장 달렸다.

         

       그가 멈춰 선 곳에는 제법 커다란 동굴이 존재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벽면에 바를 정(正)자가 수도 없이 새겨져 있다.

         

       그것들을 토대로 날짜를 가늠하던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점점 더 길어지고 있군….”

         

       사흘, 나흘, 닷새 그리고 일주일.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남은 결말은 뻔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 평생 마경을 헤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거나.

         

       어느 쪽도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선택지뿐이었다.

         

       “정녕 안 되는 것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쳤건만.

         

       그럼에도 부족했던가.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으음…?”

         

       으레 느껴지는 마인 또는 마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

         

       “사람…, 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느꼈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게 대체 얼마만인지.

         

       그는 곧장 동굴을 나섰다.

         

       목표는 기척이 느껴졌던 장소.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니, 적어도 사람으로 죽게 해주마.”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대체 무슨 연유가 있기에 이곳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며 마인이 되게 두느니, 고통 없이 삶을 끝내주는 것이 나으리라.

         

       넝마주이를 휘날리며 도착한 그는 마경을 거니는 사내를 발견하고 제 눈을 의심했다.

         

       ‘마경에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어떤 식으로든 마경에 흘러 들어온 이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공포와 두려움.

         

       헌데 사내의 얼굴에는 그러한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집 앞마당에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표정이며 걸음걸이가 여유롭기 짝이 없다.

         

       느긋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내, 백우진의 시선이 마침내 그와 마주쳤다.

         

       그가 잠시 긴장하는 사이, 백우진은 매우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 영감. 거기 계셨수?”

         

       그는 눈가를 좁히며 백우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말투.

         

       ‘이미 본 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자신이 정신을 잃고 이곳을 헤매는 사이 마주쳤던 모양.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백우진이 선심 쓰듯 말했다.

         

       “자, 약속대로 왔으니 술래잡기나 다시 합시다. 대신 놀이 끝나면 나한테 천마신공 가르쳐주는 거 잊지 마시고.”

       “……?”

         

       이를 들은 노인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뭘 하고, 뭘 가르쳐?

         

       “이번에는 내가 술래였던가? 그럼 어서 숨으쇼.”

         

       익숙하게 나무에 얼굴을 파묻고 숫자를 세는 백우진.

         

       그 모습을 본 노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수, 술래잡기 따위를…?’

         

       노인은 기껏 돌아온 정신이 다시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_ _)

    최근에 잠이 자꾸 제멋대로 들었다가 언제는 금세 깨고, 또 언제는 길게 잠들었다가 깨고 그러네요.

    어제는 밤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나서 부랴부랴 쓰느라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최대한 생활 패턴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아서 연재 시간도 안정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지 하나가 올라갈 예정입니다.

    휴재에 관련된 내용인데요.

    2월부터 대략 반 년 동안 쭉 1일 1연재를 이어오고 있는데, 제 체력이 좀 약한 탓에 슬슬 한계에 부딪히는 느낌이더군요…

    죄송스럽게도 무리하게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는 것도 체력 약화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기적인 휴재일을 마련해볼까 합니다.

    매주 하루씩 생각을 하다가 그러면 에피소드 진행 도중에 맥이 끊기는 것 같아서, 한 에피소드를 끝마칠 때마다 하루씩 휴재를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물론 너무 짧은 에피소드 끝냈다고 쉬거나 하지는 않을 예정이고요.

    일주일에 하루 이상 쉬는 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없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보다 나은 글과 제 건강을 위해 늦게나마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독자분들의 너른 양해바랍니다.

    마경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고, 다음 에피소드 ‘천마신공’으로 찾아뵐 예정입니다.

    하루 쉬면서 잠을 좀 제대로 자고, 전체적인 내용 정리도 할 겸해서 하루 휴재 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휴재와 관련된 내용은 공지로도 따로 작성해서 걸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매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즐거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_ _)

    다음화 보기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sent a 5,700-character message and ended up transported into a novel world once. Then after returning, I got reincarnated into a second martial arts novel by the same damn author. Only this time, I really didn’t writ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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