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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6

       아니, 어쩌면 그건 분위기를 아주 정확하게 읽어서 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소희가 브이자를 날린 것을 보고, 어쩌면 얘네들은 나한테 고백하기 전부터 서로 이미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렘물에서 히로인들이 서로 같은 사람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도 클리셰다.

        

       그리고 보통은 그중에서 제일 솔직하고 평소에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히로인조차도 주인공한테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는 몰라서 막막해하곤 하는데……

        

       얘네들한텐 그거 안 통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시대가 변한 건가? 내가 일본 러브 코미디 하렘 만화나 라이트노벨만 읽다가 한국인이 쓴 게임용 시나리오에 적응을 못 하는 건가?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완전히 돌처럼 굳어버린 나머지 세 명을 생각하면 지금 내 상황이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라도 굳어있는 것 같다. 이제 네 명이네.

        

       그리고 그 굳어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손아름이었다.

        

       “너너너너너너너—”

        

       물론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은 아니다.

        

       “너희들, 지금 무슨 짓이야!?”

        

       한동안 버퍼링 잘못 걸린 동영상 같은 모습을 보이던 손아름은 그렇게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무슨 짓이라니?”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소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이거 별로 안 좋은데.

        

       하지만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왜, 이것도 불순 교제라서?”

        

       “다, 당연한 거 아니야?”

        

       “지금 내 행동에 불순한 부분이 있었어?”

        

       소희가 마치 뽐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뭐, 어?”

        

       손아름은 뭔가 설명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기가 찬 나머지 그게 제대로 언어가 되어서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봐, 우리는 이제 십 대 중반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에서도 대놓고 벗는 것만 빼면 다 나오잖아. 키스 장면도 엄청 진하게 나오고.”

        

       ……그리고 사람 죽이는 장면도 나오고, 사기치는 장면도 나오고, 고문하거나 때리는 장면도 나올 텐데?

        

       물론 소희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닐 거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는 행동이 남들 다 하는 행동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겠지.

        

       문제는, 그, 뭐냐…….

        

       “영화에 나온다고 다 따라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러면 너는 안 할 거야?”

        

       “어……?”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직 고등학교 다니고 있다면서 손도 안 잡고 살 거냐고.”

        

       “아…….”

        

       “응? 막 좋아하는 사람이 안아주려고 하면 ‘아직 우리는 너무 어려……!’같은 말이냐 할 거냐? 벽에 밀어붙이면 비명이나 지르고 있을 거냐고! 아니잖아!”

        

       “…….”

        

       그리고 손아름은 소희의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 했다.

        

       아무래도 기꺼이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 아니,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그냥 입술끼리 붙은 건데 그런 걸로 쩨쩨하긴.”

        

       “……!”

        

       손아름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지만, 소희는 전혀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저기, 사라야.”

        

       그리고,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표정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담기지도 않았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거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걸까.

        

       어쩌면 저 얼굴에서 나오는 빛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런 거지? 오늘 소희랑도 키스했다는 거지?”

        

       “…….”

        

       하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 했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소희가 덮쳤다. 내 위를 몸무게로 누르고, 팔을 손으로 잡았다. 조금 전에도 그러지 않았냐. 수아하고도 했다. 나는 그냥 선물 받는 상황인 줄 알고 있었는데 수아가 갑자기 볼에 뽀뽀해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키스까지 해 버렸다. 아니, 물론 거기서 피할 타이밍이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 피해버렸으면 지금 분위기가 어땠겠냐. 하늘이랑도 했고 소희랑도 했는데 수아만 하지 않았다는 건 너무 좀 그렇지 않은가? 따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하늘이도 만만치 않다. 하늘이도 엄청 기습적으로 달려들었으니까. 솔직히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키스했으니 하늘이랑 수아의 경우는 서로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는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닐까? 사라의 몸에 있으니까 겉보기에는 미소녀 같아도 내용물이 남자이다 보니 여자애들의 첫 키스 상대라는 것에 그저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 사실 내가 전후 관계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변명이 엄청나게 기네.

        

       전후 맥락 없이 한순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의 덩어리를 보고, 사라가 아주 냉정하게 평가했다.

        

       분명히 사라는 의식 속에 있는데도, 어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꼭 사라가 다른 몸을 가지고 이 방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잖아.

        

       솔직히 내가 먼저 달려들어서 한 적은 없다고!

        

       “…….”

        

       그런데 나한테 첫 키스를 바친 애들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

        

       “소희랑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아마저 그렇게 반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많기는 했다.

        

       그런데 내가 실질적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랑……?”

        

       손아름이 입을 헤 벌린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

        

       아, 몰라.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겠다.

        

       *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하늘이는 겨우 진정한 것 같았다.

        

       아니, 진정하긴 했는데 완전히 진정한 건 또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조금 화가 난 모양이긴 했다.

        

       “……그래, 알아. 나도 알아. 내 멋대로 붙어서 키스 한 거니까, 너한테는 잘못이 없지.”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애들도 똑같았을 거고.”

        

       수아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심지어 이 상황을 만든 소희조차도 그 말을 들으니 민망한 감정이 느껴졌는지 시선을 회피했다.

        

       손아름은 아까부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이쪽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꼭 로맨스 영화를 직접 관람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팝콘이라도 줄까?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뭐, 그래. 솔직히 우리가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고백만 했고, 일방적으로 키스했고, 뭐 그런 정도니까.”

        

       이건 함정이다.

        

       내가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미친 듯이 울렸다. 절대로 저 말에 동의하지 말라고,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나의 본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알고 있어.

        

       이성이 말했다.

        

       그래서 아까부터 닥치고 있잖아.

        

       거 참 대단한 지성인 납셨네.

        

       하지만 내 머릿속을 그대로 읽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전부 무승부인 거잖아. 안 그래?”

        

       무승부라니.

        

       뭔가 승부라도 벌이고 있었다는 건가? 나를 두고서?

        

       내가 미간을 살짝 모으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하늘이는 내 기분도 그렇게까지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아니, 그, 그러니까!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으니까, 모두에게 기회는 있는 거 아니냐, 이런 말이었지, 응!”

        

       그래, 생각해보니까 지금 내가 혼자 당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선 조금 뻔뻔하게 나가도 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그, 그럼, 키스도 같은 횟수로 하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해.”

        

       제일 정상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제일 미친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

        

       “예?”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뻔뻔한 대사는 내 정신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 수아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사라 본인의 의견도 중요하잖아.”

        

       조금 전까지 화가 나 있던 것 치고는 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아마 하늘이는 내가 조금 짜증 나는 것을 감지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수아는 하늘이의 말을 듣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휴, 다행이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막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키스머신이 되는 것은 좀 그렇지.

        

       이 세 명은 자기 몸을 좀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도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기왕이면 내 몸— 아니, 사라 몸도.

        

       …….

        

       그래. 기왕이면 내 정신도.

        

       “그래, 당연히 내 키스니까 나의 의견이 중요—”

        

       “……싫었어?”

        

       “하— 예?”

        

       내가 다시 한번 뻔뻔한 대사를 뱉으려는데, 그 말을 도중에 수아가 잘라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수아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톡 건드리면 그대로 흘러내릴 것처럼.

        

       “……그렇구나, 사라는 싫었구나.”

        

       “어, 아, 아니, 잠깐만!”

        

       나는 황급히 말했다.

        

       아니, 그렇게 나와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고!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내가 여자한테 키스했는데, 그 여자가 ‘싫었다’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것도 내 첫 키스라면.

        

       “…….”

        

       ……음, 울 만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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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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