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클라이스가 더 빨리 전계마도 지식을 습득할까.
그런 고민을 하던 에테르가 떠올린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시험 친다.”
“…또요?”
“불만 있어?”
“아, 아뇨.”
조곤조곤한 말투. 그러나 연구의 피로가 쌓인 건지 짜증이 살짝 섞여 있다.
에테르는 눈가를 비비며 클라이스가 보던 책을 빼앗았다.
“닷새 만에 어디까지 할 수 있게 되었나 보자.”
시험이라고는 해도 단순한 문답 형식이었다.
에테르가 클라이스의 노예였을 시절의 클라이스는 이런 문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는 순전히 에테르가 그녀를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틀릴 때마다 자잘한 정신 공격이 들어왔지만 감내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치는 횟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루에 다섯 번은 고사하고, 어느 날은 열 번 넘게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클라이스는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아버지에게 교육받던 시절로 회귀한 것만 같았다.
“전자기 방정식의 직관적인 의미.”
에테르가 책을 넘기지도 않고 물었다. 클라이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을 시작했다.
“전하는 자기장을 만든다. 자석은 홀극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느 세계로 치면 대학교 1학년 수준의 교육과정.
에테르, 혹은 ‘에테르’에겐 한없이 쉬운 내용이었지만 처음 공부하는 클라이스에게는 생소한 것투성이였다.
심지어 클라이스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에테르가 쓴 책으로 강제 독학을 밟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쉽다고 생각하던 내용이라도 체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기장이 바뀌면 전기장이 만들어진다. 전기장이 바뀌면…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왜 말꼬리를 올려.”
또 시작된 멘탈 공격.
자잘한 핀잔이었지만 이미 극한까지 내몰린 클라이스에게는 혀가 바싹 마르는 수준의 질책이었다.
“어, 어…….”
동공이 흔들린다.
여기서 말하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
무려 먹을 걸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것 말고 뭔가 더 있었는데….”
“그래.”
“아…. 전류가 흘러도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겨우 맥스웰 방정식의 함의를 읊어낸 클라이스. 비록 엄밀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치고는 만족스러운 성취였다.
아직 미숙했지만 상관없었다. 전자기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했다.
에테르는 봉투에서 방울토마토를 꺼냈다.
“나쁘지 않군.”
토마토를 건네받자 곧바로 입에 털어 넣는 클라이스.
새콤달콤한 식감과 톡톡 튀는 과즙에 혼이 쏙 나가버린다.
평소 굳은 얼굴로 돌아다니던 클라이스도 이때만큼은 소확행을 누리며 사춘기 소녀처럼 헤실거리게 된다.
남은 과즙을 음미하며 입맛을 다시던 클라이스가 은근히 재촉했다.
“더, 더 없나요?”
“문제 몇 개 더 낼 거다.”
그 뒤로 난이도가 높아졌지만 클라이스는 최선을 다해 답했다.
막상 처음 할 때가 긴장돼서 어려운 것이지, 한 번 불이 붙으니 금방금방 대답하고 토마토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백여 개 가까이 싸 왔던 방울토마토가 거의 절반으로 사라질 때까지 문답은 계속되었다.
“이대로라면 본 연구까지 금방이겠군.”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 사실. 클라이스는 원래 인간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천재였다.
일반물리학 수준은 물론이요, 전자기론의 핵심 챕터를 닷새 만에 주파하는 것부터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다른 인간이었더라면 제시간에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터.
곧 초전도 연구 조수로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에테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하루 쉬고 내일부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아…….”
방울토마토를 잔뜩 먹어 배불러진 클라이스에게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면 포상으로 먹을 걸 받는다는 점에서 견주가 강아지 훈련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개도 아니고.
하지만 이것이 미음을 먹는 것 외에 유일하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클라이스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
클라이스를 가르치는 일은 계속되었다.
‘에테르’는 그다지 좋은 선생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직접 알려주려 하질 않는다.
굳이 분류하자면 대학원식 방임 교육이었다.
아니, 이걸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건 혼자서 다 하고 에테르는 평가만 했으니 말이다.
그런 반쪽짜리 교육은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후우….”
클라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스크롤을 깎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고된 과정.
이것도 에테르가 시킨 것이다. 배운 전기소자의 특성을 살려 고온에서도 작동하는 스크롤을 만들어 보아라. 그런 명령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이걸 시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에테르가 자신을 연구 조수로 써먹기 위해 이런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것쯤은 단번에 유추할 수 있었다.
클라이스도 에테르를 처음 노예로 들였을 때 이런 과정을 거쳤다. 자신도 시간이 없었으니 최소한으로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스스로 공부해서 내 연구에 도움이 되어라…. 그런 식이었다.
막상 반대 입장이 되어서 해 보니까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 된 게 실제 대학원 시절보다 더 힘들었다.
“나갔다 온다.”
“…….”
“대답.”
“…다녀오세요.”
끝까지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최후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테르도 이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따로 지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으흐흐흐!”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길라흐.”
팔이 갈고리로 되어 있는 은발의 하이엘프. ‘교월’의 길라흐가 실실 쪼개며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흐하하!”
“여전히 좆같은 웃음소리구나. 아침 댓바람부터 기분이 잡쳐.”
“그렇게 독설을 퍼부으시면 속상합니다. 흐흐흐!”
웬일로 먼저 시비를 털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뭔 기분이 그리 좋으실까.”
“제 뒤를 보십시오. 흐흐흐흐흐!”
길라흐가 쥔 사슬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웬 인족 노예가 하나 있었다.
“저도 노예를 하나 들였습니다. 하하하하!”
노예의 모습을 확인한 에테르는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노예 면상보다는 갈고리손으로 어떻게 쇠사슬을 쥐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까닭이다.
“병신인 손으로 잘도 사슬을 쥐는군.”
“음? 그런 쪽이 관심이십니까? 재미없군요.”
“본관도 네놈 취미에 동조해 줄 생각은 없다.”
“그러지 말고 제 장난감이나 한 번 보시지요. 이거 진짜 상등품입니다!”
길라흐가 슬쩍 옆으로 비켰다. 그러자 절등한 외모를 지닌 여자가 이를 꽉 깨문 채로 에테르를 쏘아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모욕을 주려고!”
여자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홍옥처럼 반짝이는 눈에선 절망과 오기가 동시에 보였다. 에테르는 그녀를 보다 유심히 관찰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아마 쓸데없는 추측이겠지. 세상에 금발적안은 수도 없이 많다.
에테르가 피식 웃으며 가던 길이나 마저 가려던 찰나.
길라흐가 앞을 막아섰다.
“어디 특별한 점 없으신가요?”
“뭐.”
“이 노예 말입니다! 당신 노예와는 달리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느냐고요.”
“연구 중에 방해하면 다져버리겠다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을 텐데 말이야.”
으름장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싸우면 진다.
길라흐는 전열 특화였고, 에테르는 직접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두 사천 모두 이를 알고 있었기에 농이 섞인 악담으로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무시하고 다시 지나가려던 참에, 여자가 에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너도 마수냐.”
당연한 거 아닌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에테르는 대답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길라흐가 여자의 허벅지에 갈고리를 꽂아넣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 으, 하아아악…!”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정제되지 못한 비명이 복도를 메웠다.
초승처럼 생긴 오른쪽 갈고리가 정확히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다리를 부여잡은 여자는 중심을 잃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 탓에 상처가 대각으로 찢어지며 피를 철철 흘리기 시작했다.
“누가 제 허가도 없이 다른 이와 말을 섞으라고 했죠?”
길라흐는 낄낄 웃으며 대못처럼 깊게 박아 넣었던 갈고리를 빼냈다. 질 나쁜 선혈이 사방으로 낭자하게 흩어졌다.
바닥이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여자는 다리를 움켜쥐며 길라흐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쓰레기 새끼…….”
“말할 기운이 남아있나 봐요?”
곧바로 2격, 3격이 이어졌다. 반대쪽 다리도 관통당하자 여자는 죽을 듯이 울부짖었다.
길라흐는 오른쪽 낫으로 여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질질 끌었다. 두 다리의 피가 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복도를 장식했다.
여자의 눈은 죽은 동태처럼 흐리멍덩했다.
길라흐가 혀를 쯧쯧 차대며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을 지껄였다.
“이야, 이래도 정령을 안 꺼내나요? 정말로 독하군요.”
이대로 두었다간 누가 봐도 과다출혈로 죽을 수 있는 상태였기에, 길라흐는 왼쪽 갈고리를 쳐들어 상처가 난 부위에 쑤셔 박았다.
기절했던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피가래를 토해냈다.
“하, 앗……. 아악…! 그, 만……. 제발…!”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행색과는 다르게, 왼쪽 갈고리가 들어갔다 나온 다리는 점점 아물었다.
그믐에 해당하는 식(式).
고속 치유.
길라흐의 오른쪽 갈고리가 대상을 상처 입히는 갈고리라면, 왼쪽은 거꾸로 치료를 담당하는 갈고리였으니.
치유 과정에서 정신적인 고통을 다소 수반하기는 하지만, 상처는 말끔하게 낫기 때문에 포로 고문용으로 안성맞춤인 기술이었다.
여자를 바닥에 동댕이친 길라흐가 삿되게 웃었다.
“그래요, 이 정도는 버텨 주어야 가지고 놀 맛이 나죠.”
“저질이군.”
“이게 뭐가 저질인가요? 과거 인간들이 했던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데! 흐하하하하!”
마왕군이 포로를 대하는 방법은 대개 이러했다.
잔인하게 고문하며 타인의 고통을 음미한다. 그러다가 못 쓸 정도로 망가지면 버리고 다음 것을 취한다.
당장 아카샤나 로즈마리가 예전에 철병팔진에서 클라이스를 복날 개 패듯이 패고 난 뒤 끌고 갔던 것도 이와 비슷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 중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타락한 마수란 본디 그런 성정을 가지니까.
“불쾌하다.”
하지만 어디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아무런 성과도 없는 고문을 하니 저질이라고 말하는 거다. 방금 네놈의 행동이 우리 종족에게 어떤 이점을 가져다주지?”
마왕군에서도 이것을 아니꼽게 보는 자가 한 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