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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7

     

    아셀라가 성벽에 걸터앉아 나를 향해 살랑살랑 손짓했다.

    데자뷰인가. 분명 마지막 회귀 전에 그녀가 이러고 있는 장면을 본 것 같은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봤다.

    다행히 구멍이 뚫려서 용군단이 쏟아지고 있진 않았다.

     

    자세히 보면 아셀라의 웃음이 걸린 눈꼬리에는 애정이 넘쳐흐른다.

    분명 나와 함께한 아셀라였다.

     

    엔딩 열람권으로 체험하는 세상은 마치 진짜인 양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입으로 들어오는 텁텁한 공기부터 손끝의 감각까지.

     

    그런 만큼 내 몸 상태도 잘 느껴졌다.

     

    디버프가 성장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시야가 흐리멍텅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엔딩 시점이니 회귀한 10년을 모두 보낸 게 틀림없겠지. 내가 있던 시간에서는 대략 5년 후다.

     

    “이리 와, 라스.”

     

    내가 멍하니 있자 아셀라가 다시 한 번 손짓했다. 홀린 듯 다가가 성벽에 걸터앉으니 아셀라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황녀님, 이건…”

     

    “황녀님?”

     

    “실례했습니다, 폐하. 옛날 꿈을 꾼지라.”

     

    “아직 잠이 덜 깨었니. 괜찮단다. 함께 다시 침대로 들어가겠니?”

     

    굉장히 친절한 아셀라의 태도에 놀랐다.

    마음의 동요를 숨기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도 국정을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잠이 덜 깼구나, 라스. 국정이라니,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래.”

     

    “예?”

     

    내가 아는 아셀라가 맞나, 의구심이 들 발언이었다. 그녀가 황제로서 의무를 다하지도 않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농땡이를 치고 있다니.

     

    그때였다. 성벽 끝에서 우당탕 소란스러워졌다. 보초를 서던 호위기사 한 명이 자리에서 쓰러지며 갑옷이 부딪친 소리였다.

     

    “뭐지?”

     

    나는 그에게 달려가 보았다. 바닥을 구르며 입에 거품을 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진단.”

     

     

    ―――――――――――

    · 체력 : 13 / 51

    · 상태 : 환각을 보며 약물 부작용이 심각함

    · 부상 : 마약 중독

    · 기분 : 행복함

    ―――――――――――

     

     

    “마약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그에게 응급처치를 시행하고 있으니 아셀라가 다가왔다.

     

    “폐하, 궁에 약제로 위장하여 독이 풀렸습니다. 대응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아셀라.

     

    “독이라니? 라스, ‘행복해지는 약’이라면 우리가 함께 제국 전역에 배포했잖니.”

     

    “…예?”

     

    그러고 보면 다른 기사들도 동공이 확대되어 있다. 환각 증세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약을 흡입했다.

     

    성벽 아래 제도에도 여기저기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제국민이 가득하다.

     

    나는 그제야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셀라와 마주한다.

     

    “폐하, 저희가 마왕군에게 패배했습니까?”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라스.”

     

    아셀라가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내게 몸을 붙여왔다.

    양팔로 허리를 감으며 나를 끌어안아 체온을 나눈다.

     

    “이해해. 앞으로 수명이 얼마 안 남았으니 정신이 무너지는 게 당연하지. 걱정 마렴. 네 마지막 날까지 내가 함께할 테니.”

     

    “수명.”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

    이름 : 라스

    성 : 뷔르템펠트

    나이 : 26

    직업 : 국서 / 주치의

    소속 : 천황궁

    재능 : 연금술 – B (S)

    의학 – A (S)

    목표 : 배드엔딩을 회피 (완료)

    남은 시간 : 16시간

    ―――――――――――

     

     

    이 히든엔딩은 내가 아셀라의 곁에 남았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결말이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라면.

     

    ‘연금술이 B랭크밖에 안 돼.’

     

    즉시 스킬창을 연다.

     

     

    ―――――――――――

    ◎ 연성 목록

     

    · 엘릭서 = ??? + 원시룡의 역린 + 세계수의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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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끝났다고?’

     

    내 수명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엘릭서 제조에 실패했다.

     

    두 번째 재료까진 알아냈으나 마지막 재료는 뭔지도 모른다.

     

    “폐하, 혹시 마왕에게는 어떻게 승리하였는지요?”

     

    “머리를 다친 것 같진 않은데… 용사 파티가 훌륭하게 활약해서 2년 만에 승리하지 않았니. 마지막에 역공을 당했지만 네가 비장의 수도 꺼내든 덕분에 토벌했지.”

     

    “그 비장의 수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는 이 나도 꽤 놀랐단다. 네가 전설의 존재인 천룡과 아는 사이였을 줄이야.”

     

    내가 천룡에게 협공을 부탁했었나.

    하지만 엘릭서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도 천룡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은 한 가지뿐이다. 나는 ‘원시룡의 역린’을 구할 기회를 놓쳐버린 건가.

     

    연금술의 성장이 늦어서 이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고, 결국 나는 디버프에 잠식되어 요절할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게 합리적인 추측일 듯했다.

     

    내가 심각한 얼굴로 있으니 아셀라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라스, 설마 지금 와서 우리가 했던 합의에 불만이 생겼다는 말은 아니겠지?”

     

    “합의… 말입니까.”

     

    아셀라가 내 목에 팔을 걸치고는 눈을 마주쳐왔다.

    뱀에게 휘감겨 먹히길 기다리는 토끼가 된 기분이다.

     

    “네가 죽는 그 날까지, 우울한 건 전부 잊고 함께 모든 욕망을 풀자고 약속했잖아.”

     

    나를 잡아먹으려는 아셀라의 눈빛. 그녀의 팔이 달라붙어 점점 목을 옥죄어온다.

    이미 이 시점의 나에게 동화되어서 그랬을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일말의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그 합의에 동의했다고요.”

     

    “처음에야 들은 척도 안 했지. 내가 1년 동안 너를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 1년도 지금처럼 즐기기만 했으면 얼마나 행복했겠어. 보렴!”

     

    아셀라가 성벽 아래로 와인을 뿌리고는 잔을 던져버렸다.

     

    어느 때보다도 즐겁게 깔깔 웃는 아셀라.

     

    “네 약은 최고야! 제국민들도 슬픈 일은 모두 잊고 이렇게 행복하잖니! 라스, 너도 그렇지? 원하는 걸 전부 주었잖아. 재물도, 명예도, 여자도, 이 제국에서 가질 수 있는 건 전부!”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제 수명은 며칠도 안 남았을 겁니다. 그 다음에 폐하께선… 어떡하시게요?”

     

    아셀라가 실실 웃으며 검지로 내 턱을 쓸어올렸다.

     

    “그 대답도 몇 번이나 하지 않았니.”

     

    중독자의 눈.

    뇌의 신경계가 망가져 감정도 사고회로도 정상이 아닌.

     

    탁해진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네가 없는 세상 따윈 필요 없어.”

     

    아셀라의 대답은 확고했다.

     

     

    히든엔딩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이 루트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다.

     

    욕망의 길이라는 설명이 확실히 어울린다. 어떤 의무도 지지 않고, 더 머리 아플 필요도 없고.

     

    우울하고 슬픈 감정은 연금술로 마약을 만들어서 취해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몸을 망치든 말든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시한부라 남은 수명도 얼마 안 되니.

     

    놀고, 먹고, 즐기며, 사랑을 나누는 일만 하루 종일. 1년 내내. 2년이 넘었을지도.

     

    그간 내가 굴렀던 보상을 최상급의 도파민으로 보상받는 길이다.

     

    아셀라도 행복해 보인다. 그녀는 내가 떠나지 않아 함께해온 시간에 만족했겠지.

     

    제국민 누구나 약에 취해 행복할 것이다. 행복한 죽음을 맞는 사람은 흔치 않다.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을 테니 꽤 괜찮은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래도.

     

     

    “라스.”

     

    내 생각이 길어져서 기다리기 지루해졌는지 아셀라가 팔을 잡아당겼다.

     

    별안간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며 긴장감에 말라가던 혀가 타액으로 촉촉해졌다. 정신을 차리면 아셀라가 자신의 혀를 폭력적으로 내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윽.”

     

    동시에 시야가 홱 가속하며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약을 먹였나.

     

    “후후, 표정이 돌아왔네.”

     

    끈적한 키스로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아셀라는 입맛을 다시고는 내 팔을 낚아챘다.

     

    깔깔대는 그녀에게 끌려간다. 황제의 침실이다.

     

    벌컥, 아셀라가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분홍빛 레이스와 장미꽃으로 장식된 침실.

    커다란 침대는 열 명도 누울 수 있을 사이즈다.

     

    “…이게 무슨.”

     

    그곳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넋이 나간 나에게 유혹하듯 손짓하는 아셀라.

     

    몽롱한 채로 끌려 들어간다.

     

    침대에는 이미 시중을 들 준비가 끝난 반나체의 시녀가 열 명은 누워있다.

     

    이상한 건 그 사이에 기슈타와 리셰도 섞여있었다는 점이었다.

     

    “라스.”

     

    “…예, 폐하.”

     

    악마 같은 눈웃음을 치며, 아셀라가 말했다.

     

    “오늘도 즐기자꾸나. 해가 지고, 또 다음 해가 뜰 때까지.”

     

    그녀의 손이 내 옷깃을 파고들어 쇄골을 어루만졌다.

     

    멀어지는 의식 속, 질문을 하나 던졌다.

     

    “폐하.”

     

    “응?”

     

    “혹시 제가 그 날, 폐하를 떠나 도망쳤다면 어쩌셨겠습니까.”

     

    “어쩌고 자시고 할 게 있겠니.”

     

    아셀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가 되려 더 필사적으로 달렸겠지. 그래야 너를 되찾았을 테니.”

     

    나는 사고를 놓으며, 침대 위 가득한 살덩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히든엔딩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만족했다]를 열람 완료했습니다.

     

    ―――――――――――

     

     

    열람을 마친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바닥에 넘어진 상황이다. 내 위에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셀라가 얼굴을 가슴에 파묻고 있다.

     

    오랜만에 본 황제와 비교하면 아직 풋풋한 그녀였다. 히든엔딩의 황제는 눈이 좀 피폐하기도 했고.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셀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체감상 한두 시간으로 느껴진 하루였다.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구미는 당길 만한 엔딩이네.’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다. 욕망을 바라는 대로 분출해도 아무도 말리지 않고 권장하기만 한다.

     

    그로 인해 얻을 행복의 정도도 상당하겠지. 행복감이란 결국 뇌의 시냅스에서 신경작용물질이 얼마나 분비되어 역치를 넘기는가에 의해 결정되곤 하니까.

     

    ‘하지만.’

     

    여태 이뤄온 모든 걸 내다 버리고 마약에 취해 아셀라와 욕망에 몸을 던진다.

     

    행복의 정도는 높을지 몰라도, 그 종류를 선택할 권리는 내게 있다.

     

    아니, 다른 것보다도.

     

    ‘죽으면 뭔 소용이야.’

     

    엘릭서 제조에 실패해?

     

    그 미래의 나는 길 가다 넘어져서 지능이 퇴화하기라도 했나. 멍청하기는.

     

    “황녀님.”

     

    나는 아셀라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자리에 마주 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친다.

     

    “고심했습니다만.”

     

    “떠난다고는 하지 마.”

     

    “알려드려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아셀라가 납득할, 내가 주치의직을 은퇴해야하는 명확한 이유.

     

    나는 그 비밀을 입에 담았다.

     

    “저는 시한부입니다. 얼마 안 있어 목숨을 잃습니다. 황실에서는 제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뭐?”

     

    내 고백에 아셀라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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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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