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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7

       내가 눈을 떴을 때, 이제 막 새벽 어스름이 가시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잠든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 것 치고 몸에 힘이 넘쳤다. 밤새 그렇게 격렬하게 일을 치렀는데도 날아갈 듯이 개운했다.

       데볼루트를 사용해 계속 체력을 회복한 덕분이었다.

         

       물론 내가 느끼는 이 고양감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신적인 해방감.

       그것이 가장 컸다.

         

       나는 내 허리를 꼭 껴안고 잠든 유라크네를 바라봤다.

         

       그녀의 몸 위에는 뜨거웠던 지난밤의 흔적이 가득했다.

       꼬집고, 물고, 때린 자국들이 몸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나는 데볼루트를 사용해 그녀의 몸에 있는 나의 자취들을 정리했다. 특히, 얼굴이나 목 같이 드러나는 부위는 좀 더 신경을 썼다. 내가 그녀의 피부 위로 손바닥을 한 번 쓸자, 흔적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팔이 여섯 개나 있었기에 작업은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그녀의 은밀한 부위에 있는 것들은 손대지 않고 두었다. 그녀가 자고 있어서 거기까지 건드리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어제 그녀와 나누었던 사랑의 증표들을 조금이나마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

         

       진화 연구소가 별빛의 약효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원래부터 유용한 기능이라 생각했지만, 어제 이후로 이 녀석에 대한 신뢰가 더 커졌다. 이 진단 기능 덕분에 나는 어젯밤 그녀의 약점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평선 너머에서 수줍게 솟은 햇빛이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그녀의 모습이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게 드러났다.

         

       항상 머리를 올려 비녀로 묶고 다니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머리를 모두 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찌나 구불거리는지 마치 바닷속의 해초 같았다.

       베개에 눌렸던 부분은 자기네들끼리 마구잡이로 엉켜있었다.

         

       이래서 늘 묶고 다녔던 거구나.

         

       몰랐던 그녀의 모습을 하나 더 알게 되어 기뻤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어젯밤의 일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민망한 것도 있었고, 절로 미소가 그려질 정도로 흐뭇한 것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과 그렇게 살을 부대끼는 것은.

         

       이곳에 와서 팔과 다리를 얻었지만, 몸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은 예전 그대로였다.

       악수라는 것은 팔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행하는 것이었으며, 걷는 것은 다리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행하는 것이었다.

         

       심리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기존의 형상 안에 가두어두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몸의 팔과 다리는 내 몸에 달린 부가적인 무언가, 즉, 맨튤라의 칼날과 같은 특성이지, 내 몸 자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나는 그 벽을 넘었다.

         

       말이라는 걸 머리와 귀로만 이해하던 벙어리가 드디어 입이 트였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몸으로 타인을 느끼고, 몸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신비한 경험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단순한 타인이 아닌, 내가 호감이 있던 여인이었다.

         

       서커스단에서 가장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이자, 내게 없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그녀와 몸을 섞었을 때 느꼈던 황홀경은 육체적 자극으로만 인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만족감도 컸다.

         

       “우움, 다, 단장님?”

         

       그녀의 머리카락을 너무 만진 탓일까.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창문 틈새로 들어온 햇빛에 반짝였다.

       그곳의 중심에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깨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였지만, 내게는 그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묘사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떼는 순간, 알림창이 떴다.

         

         

       [고유 특성 ‘웃는 남자’가 다시 적용됩니다.]

         

         

       내 얼굴 근육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의지와 하등 상관없는 미소가 내 입에 그려졌다.

       방금까지 들떠 있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것을 항상 끼고 살 때는 몰랐다.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다가 돌아오니 느껴졌다.

       내 감정에 목줄을 채우는 이 갑갑함이.

         

       더 화나는 것은 이러한 처지에 화를 낼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계속 웃었고, 아무리 분통을 터트리려고 해봐도 마음은 끊임없이 평정으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여전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생생한 날 것이 아니었다. 불쾌할 정도로 인위적인 냄새가 났다.

         

       원더스타인은 왜 이딴 특성 따위 몸에 심은 걸까.

         

       그녀의 눈동자로 비치는 내 모습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아주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다시 돌아온 건가요?”

       “……눈치채셨군요.”

       “다 보이는걸요. 이제 단장님의 몸에 대한 거라면…….”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였다면 다시 한번 반했을 그녀의 미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알 수 있나요?”

       “아뇨.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순 있어요. 어제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녀가 갑자기 내 뺨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주는 시늉을 했다.

       웃고 있는 사람의 눈가를 훔치는 어색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후후, 이제 유라 씨는 못 속이겠군요. 무슨 티가 난 건가요?”

       “아뇨. 그냥 알 수 있었어요.”

         

       나는 난처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큰일이군요. 앞으로 단장의 권위가 안 통하는 단원이 한 명 생겼네요.”

       “한 명 정도는 있으면 좋잖아요. 당신의 연기를 알아차려 주는 사람은.”

         

       우리는 침대를 내려와 욕실로 들어가 함께 샤워했다.

       그녀는 씻는 와중에도 간간이 그녀의 몸을 내 몸에 치댔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반응할 수 없었다.

         

       웃는 남자는 모든 면에서 나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자극에 대한 반응뿐만 아니라 사고 역시 그랬다. 그녀의 은근한 수작 역시 한 번은 고찰해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도 그것을 느꼈는지 내게 작업을 거는 것을 그만두었다.

         

       “단장님께서 저희 몸을 고쳐준다고 하신 약속 말인데요. 그거 단장님의 몸에도 적용되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릴의 파편에도 일시적이나마 해제되는 것을 보니, 원더스타인의 몸에 있는 고유 특성이 할지라도 다른 단원의 것과 구분되는 특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진짜 트릴이라면 이 몸을 고치는 것도 가능했다.

         

       “단장님의 연구가 꼭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그때가 되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데…….

         

       욕실을 나온 나는 손바닥의 체온을 60도 이상으로 올려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스킬북을 통해 익힌 기술로 그녀의 머리를 빗고 말아 올렸다.

       그녀가 어떻게 이 곱슬머리를 그렇게 단정하게 정리할 수 있었는지 이제 이해가 갔다.

       팔이 여섯 개나 있어야 가능한 기술이었다.

         

       작업을 끝낸 나는 4개의 팔을 모두 속으로 갈무리하기로 했다.

       그녀가 아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둘만 있을 때는 종종 이렇게 있을게요.”

       “정말요? 단장님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달린 여섯 개의 팔들로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짧은 키스를 나눴다.

         

       그러나 나는 아까와 같은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웃는 남자가 주는 인공적인 흥겨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상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건가?

         

       웃는 남자가 있어도 속으로는 얼마든지 슬퍼하고 화낼 수 있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진짜 감정에 비하면 이것은 흐릿하고 조악한 것이었다. 웃는 남자에 대해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아침 식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단사가 저택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단원들의 체형이 표준적이지 않다 보니, 아무리 치수를 재었다고 해도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단원들의 몸에 맞게 즉석에서 옷을 다시 고쳐주었다.

         

       이윽고 유라크네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 놀랍군요! 허허, 손님의 옷이 가장 고난도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팔들의 관절이나 움직임도 저희에게도 미지수라 제대로 된 옷이 나올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완벽하게 맞다니!”

         

       재단사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와 유라크네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녀가 어제 받은 진짜 옷은 걸레짝이 되어 그냥 버려버렸다.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내가 의상실의 능력을 통해 꺼낸 것이었다.

         

       재단사가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슬라그보르트 공작이 보낸 마차가 도착했다.

       나는 엘라, 마야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단원들이 별장 앞으로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다들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는데, 유라크네가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하얀 로브에 하얀 고깔모자에 안경을 쓴 할로윈 차림이었다.

       하얀 마녀는 내 옆에 앉은 엘라와 맞은편에 앉은 마야를 빠르게 훑었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살짝 웃고는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잘 다녀오세요, 단장님.”

         

       그녀는 마차에서 떨어지기 전에 기습적으로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그건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엘라나 레이나가 했던 것보다 짧았다. 심지어 저번에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했던 것보다도 더 짧았다. 그저 입을 살짝 갖다 댄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단원들을 경악으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핫핫핫핫, 유, 유라 씨가 드, 드디어, 풋, 하하핫, 다, 달리는 겁니까? 하핫핫핫핫!”

       “우워어어, 뭐예요? 뭐예요.?”

       “호, 호들갑 떨지 마, 우몬! 키, 키예프에서는 이, 일상적인 인사라잖아!”

       “그, 그래! 노, 놀랄 일이 아, 아니야 절대!”

       “너희들이 우몬보다 더 시끄럽거든?”

         

       과묵한 밴딕을 제외한 모두가 유라의 행동을 두고 소란을 피워댔다.

       가스통 영감도 뭐가 우스운지 배를 잡고 껄껄댔다.

         

       나는 변함없이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마차 뒤창을 통해 그녀가 단원들의 놀림감이 되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빽 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싸대기에 스벤의 머리통이 또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들어주었다.

         

       그렇게 별장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다시 앞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엘라와 마야가 나를 향해 눈을 흘끔거리며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근 몇 달간, 두 사람이 저렇게 친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나에게 들릴락 말락 한 크기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다 들을 순 없었지만 몇 가지는 귀에 들어왔다.

         

       엘라는 유라크네가 옷을 일부러 자기 치수보다 크게 맞췄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 딱 맞는 거 아니냐고 마야에게 말했고, 마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답했다.

         

       “살찐 거 같아.”

         

       아, 그랬던 건가? 그래서 옷이 터졌던 거였나.

         

       나는 그녀가 살찐 것에 감사했다.

       안 그랬다면 어제 옷이 찢어지지도 않았고, 그녀가 내 방을 찾아올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게 찐 거라면 찐 것도 좋군요.”

         

       나의 말에 엘라와 마야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둘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윽고 서로의 몸을 훑어봤다.

         

       마차가 광장에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은 살짝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몽디 님, 166코인 후원! 레이나의 일러스트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음 일러스트인 클라라의 것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있습니다!

    -도로시 님, 30코인 후원! 꾸준한 응원 감사드립니다!

    수위를 조절한 전체 이용가를 위한 화를 요청하신 분들도 계셨는데, 아무리 자르고 붙이고 더해봐도 흐름이 어색해서 안 되더군요…ㅠㅠ…
    몸 섞는 게 주가 되는 파트라지만, 주인공과 유라크네 두 사람의 서사가 다 몸과 분리할 수 없는 거라서 말이지요…ㅠㅠ…

    그래서 이번 화를 19금 파트를 뛰어넘어도 흐름이 어색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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