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벨아스크가 만들어낸 사슬 새장 속을 뒤덮은 흑염 앞.
별빛으로 이루어져 있던 역야성의 모습은 무척이나 작아져 있었다.
손에 잡힐 정도의 크기로 작아진 역야성이 휘청거렸다.
크라슈의 전심전력이 담긴 일격을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이 9성급 침식종이라 할만했지만.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남아 있는 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서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
철컹!
그 순간 에벨아스크의 사슬 새장이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역야성은 휘청거리는 몸으로도 포르르 날아 도망치려 했으나.
이 몸으로는 사슬 새장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사슬 새장이 완전히 역야성을 가두었다.
역야성의 자그마한 몸체와 같이 조여든 사슬 새장은 딱 그 말에 맞게 새장 크기였다.
역야성이 별빛으로 새장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의 별빛은 새장에 닿으면 사라질 뿐 새장을 부수지 못했다.
“―――――!”
녀석의 분노가 담긴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너, 무 그, 러지마라.”
동시에 한 소년의 목소리도 따라 울렸다.
역야성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자 밤하늘 아래 서서히 눈빛이 푸른색으로 돌아오고 있는 소년이 다가와 있었다.
“금, 방 꺼내줄, 거니까.”
소년은 가쁘게 숨을 쉬며 2호의 몸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야, 이 정도로 세계 침식의 힘을 폭주시켜 사용했다.
당연히 몸 내부에 있는 아우라가 그 자리를 메꾸자 몸 안에서 그야말로 전쟁이 벌어졌다.
두통이 머리를 강렬히 찔렀다.
몸 내부에서 울렁거림과 함께 찢어지는 감각이 연이어 느껴졌다.
크라슈는 의식이 자꾸만 끊기려고 했다.
그만큼 그의 몸에 울리는 통증은 정도를 넘어섰다.
몸의 열기가 뜨겁다.
한설아귀로도 도저히 열기는 잠재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왈칵!
그 순간 입에서 핏물이 올라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그러한 핏물조차 열기가 너무 강해 끓고 있을 지경이었다.
‘이번 건 꽤 위험한데.’
멸화나찰을 사용한 대가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크라슈!”
“이 바보가!”
그 순간 하링과 에벨아스크가 동시에 이쪽으로 뛰어왔다.
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링이 서둘러 크라슈를 감싸 안으며 달링이 만들어 두었던 약들을 먹였다.
에벨아스크는 치료 능력이 있는 시체를 불러 당장 크라슈에게 붙였다.
“쯧쯔, 무리한다 싶더니. 이리 보여봐라.”
둘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벨투아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병 하나를 꺼냈다.
곧 그의 손가락이 병 입구 안에 푸욱 하니 들어갔다.
그리고 곧 손가락을 따라 올라온 것은 검은색의 진득한 액체였다.
“입 벌리거라.”
크라슈가 열기가 흘러나오는 입을 벌리자 벨투아는 그 안에 액체를 툭 던져 넣었다.
그러자 크라슈는 목을 따라 검은 액체가 몸 내부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윽.”
한순간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격통 후, 조금씩 통증이 줄어 갔다.
크라슈는 이 저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몸에 느껴지는 통증과 부상을 후로 미루는 저주다. 임시긴 하지만 당장 숨넘어가는 건 막아주겠지.”
벨투아의 말대로 그저 숨통을 잠시 열어주는 저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걸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바로 사계부터 얻겠습니다.”
겨우 제대로 나오기 시작한 목소리에 크라슈는 하링의 부축을 받으며 섰다.
벨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새장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벨투아의 손아귀에서 검은 구름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역야성에게 피해 없이 사계를 분리하기 위함이었다.
역야성이 당황하여 새장 안을 포르르하며 날아다녔다.
하지만 지금의 역야성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시 후 벨투아의 검은 구름이 새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한 검은 구름 속에 당연히 역야성도 갇혀 버렸다.
얼마 동안 검은 구름이 새장 안을 꿈틀거렸을까.
“됐다.”
벨투아 쪽에서 목소리가 들린 즉시 크라슈는 손을 들어 올렸다.
크라슈의 손에서 블랙 후드가 발동되며 빛이 흘러나왔다.
대상은 역야성.
훔치는 것은 사계.
원래는 역야성의 몸의 일부가 되어 있는 사계를 훔치려면 다이얼을 풀어야겠으나.
벨투아 덕에 역야성과 분리된 사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 사계는 역야성에게 있어서 인식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몸에 품고 있지만 존재 자체를 모르는 마당.
당연히 크라슈의 블랙 후드는 조건 없이 사계를 훔쳤다.
팍!
그 순간 크라슈의 손아귀에 무언가 잡혀 들었다.
그것은 피부에 붉은색의 문신이 새겨진 새하얀 뱀이었다.
뱀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야, 대뜸 역야성과 분리되었다 싶더니 밖으로 끌려 나와졌으니까 말이다.
사계는 크라슈와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저주답게 대상을 옮기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 덕이었다.
그리고 이번 대상은 다름 아닌 크라슈였다.
사계는 흡수된 즉시 크라슈의 몸 내부로 뻗어갔다.
자신이 가장 먼저 삼키고, 대체할만한 것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계는 흡수된 순간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그야, 몸 내부에 꽉 차 있던 것은 세계 침식의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채워진 세계 침식의 힘.
게다가 그런 세계 침식의 힘이 없는 자리에는 아우라가 채워져 있었다.
이래서는 무얼 삼키려고 해도 입조차 댈 수 없다.
결국 사계가 선택한 것은 세계 침식의 힘을 삼키는 것이었다.
사계는 스스로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당장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부 막고 있는 세계 침식을 꿀꺽거리며 삼켜 나갔다.
사계는 빠른 속도로 세계 침식을 삼켜 나가기 시작했다.
괜히 최상위 저주가 아니라는 듯.
크라슈의 몸속을 가득 채운 세계 침식이라도 사계에게는 무척이나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사계가 세계 침식의 힘을 삼키자.
어느샌가 사계의 입에는 아우라도 덩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계 침식과 몸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느라 뒤섞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사계는 아우라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녀석은 먹성이 좋았다.
입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전부 먹을 수 있었다.
꿀떡꿀떡 삼켜가는 세계 침식과 아우라가 어느새 사계의 안에 가득 찼다.
그리고 곧 사계의 고유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삼킨 것을 자신이 그대로 대체하는 것.
사계가 세계 침식의 힘과 아우라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세계 침식의 힘과 아우라는 상반되는 힘이기에 서로 부딪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둔다면 본체가 터질 판이었다.
그러니 사계는 고유의 능력으로 둘의 상반 조건을 다르게 바꾸어 나갔다.
그것은 크라슈의 몸이 어느 하나의 힘을 소비할 때 맞춰 두 개의 힘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크라슈가 아우라를 사용할 때는 세계 침식의 힘마저 아우라로 바꾼다.
반대로 크라슈가 세계 침식의 힘을 사용할 때는 아우라마저 세계 침식의 힘으로 바꾼다.
그야말로 사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사계의 식탐은 아직 흉흉했다.
녀석은 더 많은 것을 삼키고 싶은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크라슈의 내면에 드리운 밤 위에 걸린 천살성이 일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천살성에서 솟아 나오는 거센 붉은 빛은 사계조차 기겁을 할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깜짝 놀란 사계가 몸을 움츠러트렸다.
천살성은 저주의 힘을 보다 크게 폭주시키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진 최상위 저주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제 의지가 있기에 폭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늘 자신의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 천살성은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두려운 존재였다.
자칫하면 폭주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결과물을 만드니 말이다.
사계는 결국 천살성에게 겁을 먹고, 아우라와 세계 침식의 힘만을 삼키는데 멈추었다.
크라슈는 사계가 잠잠해지는 것을 깨닫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던 열기의 연기는 더 이상 없었다.
사계가 세계 침식과 아우라를 삼키며 육체가 안정된 것이었다.
그제야 뒤늦게 저주 한설아귀도 자신의 힘을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달구어졌던 크라슈의 몸의 온도가 천천히 원래로 내려갔다.
멸천나찰을 쓴 대가로 몸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으나.
최소한 아우라와 세계 침식으로 인해 몸이 붕괴할 뻔한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겨우 안도한 크라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화가 잔뜩 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크라슈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왜냐하면 방금전 자기 위기보다 더한 위기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화난 두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벨아스크와 하링이었다.
에벨아스크는 잔뜩 성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하링은 무척이나 차가운 눈으로 크라슈를 보고 있었다.
그야,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었기 때문이다.
“너 진짜…….”
“푸하악!”
에벨아스크가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순간 그녀의 뒤쪽에서 괴음이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역야성이 빛을 사용하자마자 땅속으로 몸을 숨겼던 광도제가 있었다.
녀석은 땅 위를 기어 올라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내가 이딴 짓이나 하고 있고, 옘병, 진짜.”
땅 위에 올라온 그는 옷을 털다 말고 몰린 시선을 느꼈다.
그러고는 멈칫하더니 곧 눈을 찌푸렸다.
“왜, 뭐, 이만큼 했잖아. 왜 그렇게 보는데? 나 할 만큼 했다고!”
바보라서 다행이다.
광도제 덕분에 조금 풀린 분위기에 크라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벨투아가 다가와 자세를 낮췄다.
“몸 상태는 어떻지?”
“아까랑 비교하면 멀쩡한 편이죠.”
“흐음, 놀랍군. 설마하니 천살성을 이용해 최상위 저주를 이용할 생각을 했을 줄이야.”
벨투아는 이런 쪽은 전혀 예상 못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더더욱 흥미가 깃들었다.
크라슈라는 인물 자체를 향한 흥미였다.
“앞으로도 최상위 저주를 더 얻을 생각이겠지?”
벨투아는 크라슈가 최상위 저주를 이용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분명 앞으로도 여러 최상위 저주를 얻으려 할 터.
그러니 벨투아가 눈치 빠르게 질문하자 크라슈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이럴 때는 같은 과라서 마음에 든다.
“예, 더 얻을 겁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죄다 이용한다.
그것만이 크라슈의 지론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최상위 저주 또한 똑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하!”
벨투아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야, 그에게 있어 저주를 연구하는 것만이 삶의 낙이니까 말이다.
[ 또라이들 같으니. ]
정작, 크림슨가든은 벨투아와 크라슈를 미친놈 취급했지만 말이다.
“그럼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인 모양이군.”
벨투아는 그리 말하며 장대로 바닥을 쿠웅 찍었다.
그러자 크라슈와 모두의 발아래에서 저주 지네가 솟아 올라왔다.
“흑종귀들이 오기 시작했다.”
역야성과의 전투가 끝난 걸 알자마자 흑종귀들이 이쪽을 향해 몰아쳐 오고 있었다.
저걸 뚫고 빠져나가는 데에도 상당한 힘을 소비할 터.
“할아비가 특별 서비스해 주지.”
그 순간 벨투아의 저주 지네 옆.
마치, 종이를 자른 듯 공간이 지이이익 잘렸다.
그 공간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팔이 공간을 잡아 찢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러 개의 부적이 달린 팔을 달고 있는 산양이었다.
그 크기는 저주 지네보다도 커다래 밤에 뿔이 닿을 지경이었다.
산양이 기분 나쁘기 그지없는 소리를 냈다.
크라슈는 그 산양이 얼마나 많은 저주를 합쳐 만들어낸 합작품인지 알고 있었다.
[ 세상에 나오면 안 될 걸 만들었군. ]
크림슨가든조차 그 저주를 무척이나 끔찍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벨투아의 오리지널 저주
메르딕디오
놈은 나타난 즉시 입을 쩌억 벌렸다.
일반 산양과는 다르게 잔뜩 돋아난 이빨 앞.
모여든 검은색 빛이 압축된 그때.
피잉!
빛소리와 함께 뻗어 나간 검은색 광선이 몰려오던 흑종귀들을 휩쓸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그 순간 검은빛의 폭발이 일어나며 달려오던 흑종귀들이 일제히 소멸하였다.
문제는 메르딕디오는 멈출 생각 없이 또 다음 검은빛을 모으고 있었다는 거다.
한 발씩 쏘는 것도 아니고 연발이었다.
‘괴물 같으니.’
괜히 세계 최악의 저주사가 아니라는 듯.
벨투아가 만들어낸 오리지널 저주는 터무니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크라슈가 사슬 새장에 눈이 닿았다.
역야성에게는 이제 볼 일을 마쳤다.
새장 속에 축 늘어져 있던 역야성을 본 크라슈는 그 입구를 열었다.
그러자 역야성이 기회다 싶어 바로 별빛을 흩뿌리며 밖으로 나왔다.
크라슈의 앞에 선 채 별빛을 뿌리고 있는 역야성을 보며 크라슈는 짧게 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했다.”
역야성은 잠시 크라슈를 바라보다가 이내 포르르 날아갔다.
얼마 뒤에 녀석은 또다시 멈추지 않는 밤 속에서 별빛을 흩뿌리며 살아가겠지.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역야성에게는 평생 해야 할 일이리라.
날아가는 역야성을 바라보며 크라슈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여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중반에 이른 시점.
곧 있으면 2기생들의 6개월 훈련 과정이 끝마치고, 특급 반과는 별개로 그들도 아카데미에 정식 편입될 시간이다.
‘단끼리의 인재 쟁탈전이 시작되겠네.’
이만, 라헬른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