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라흐는 샌님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이러냐고요? 그야 재미있기 때문이죠. 당신이 연구를 할 때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저는 정령을 가진 녀석들을 괴롭히는 게 너무나도 좋아요. 어찌나 좋은지 하루종일 해도 질리지 않을 지경이랍니다. 으하하하!”
에테르는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1천 년이나 넘게 살았으면서 아직도 사춘기를 못 벗어났군.”
“칭찬 감사합니다. 흐흐흐!”
예전에 마왕이 말하길, 길라흐가 예전부터 이런 정신나간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길라흐가 정령을 극도록 싫어하게 된 이유는 하나.
하이엘프로 태어났으면서 금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정령을 한 마리씩 먹어치울 때마다 젊어지는 느낌이 들곤 하더군요. 조금씩 복수를 해 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이엘프는 그 어떤 종족보다도 정령의 목소리를 듣기 수월한 종족. 일각에선 이들을 선택받은 종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엘프인 동시에 금안족으로 태어났던 길라흐는 성인이 될 때까지 결코 그 어떤 정령의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 버림받을 만큼 끔찍한 저주였다. 그때의 아릿한 상처가 남은 길라흐는 마왕의 꼬드김에 넘어가 지금처럼 변했다.
“마왕님께서 부활하시어 정령계를 다시 한번 쑥대밭으로 만드는 그날까지, 저는 제 능력을 이곳에서 양껏 펼치고 있겠습니다. 아, 별다른 힘도 안 들이니 예열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까요?”
말투가 따갑긴 하다만, 지향하는 곳은 같다.
에테르도 저 빌어먹을 정령 때문에 쌍욕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이미 무력화된 포로를 가지고 그래봤자 딱히 바뀌는 건 없다. 할 거면 전쟁터에서 하든가.”
어디까지나 효율의 문제였다. 에테르는 철저한 시간 관리 없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길라흐가 달갑지 않았다.
굳이 잡힌 정령마도사를 왜 고문하는 걸까? 당장 머리를 쥐어짜내 다음 작전을 생각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 얘긴 그만하고. 여기 온 용건이 뭐냐.”
“예? 딱히 없습니다.”
“없다고?”
“네. 그냥 새 노예를 받았으니 자랑 좀 하러 온 것뿐입니다. 흐하하하!”
순간, 뇌졸중이라도 온 것처럼 머릿속이 탁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연구 방해하러 온 거다, 이 말이지?
에테르는 눈빛을 달리하며 길라흐를 노려보았다. 손에 핵버튼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기세였다.
“할 말 없으면 꺼져.”
감정을 억누르며 냉담하게 말하긴 했지만, 속은 이미 탄산수처럼 부글부글 끓는 중이다.
일분 일 초라도 더 일찍.
이 빌어먹을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싶다.
그런데 귀중한 시간을 방해해? 네까짓 게?
막말로 손에 핵버튼이라도 있었더라면 당장 길라흐에게 궤도폭격을 갈기고도 남았다.
“다, 당신…….”
에테르가 흑주 시뮬레이션을 열심히 돌리고 있던 사이, 쓰러져 있던 여자가 비틀비틀 일어나며 말을 걸었다.
“혼이 두 개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툭, 하고 내뱉어진 말.
에테르의 표정이 다 타고 남은 양초 심지처럼 굳어버렸다.
“조금 전에 뭐라고….”
“내가 허락 없이 다른 녀석과 말 섞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
무어라 물어보기도 전에 길라흐가 갈고리를 쳐들며 성큼 움직였다.
여자의 입에서 아, 하고 공포감이 담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체벌이다. 피하면 알지?”
길라흐는 이를 아득빠득 갈며 오른쪽 갈고리를 내리쳤다. 여자는 헛숨을 삼키며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피할 수 없으니 주요 장기라도 보호하려는 것이다.
쐐애애액! 갈고리가 허공을 가르며 내려오는 순간, 여자는 조금 전의 고통을 떠올렸다.
아프다.
뜨겁다.
제발, 그만.
“윽…!”
여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카앙!
철제 양동이를 두드리는 것처럼 맑고 카랑카랑한 소리가 귓전을 아플 정도로 때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팔이나 다리가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은 들지 않았다.
“아….”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탄식을 내뱉었다.
좋은 향이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나풀거린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인가요?”
갈고리를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에테르였다.
스태프를 꺼낼 시간도 없었던 에테르는 재빨리 팔을 짓쳐 올려서 여자에게로 떨어지던 초승의 식을 봉쇄했다.
카칵! 까가각!
“이, 이게 돌았나…….”
길라흐는 이를 갈며 팔에 체중을 실었으나, 에테르가 힘의 방향을 물 흐르듯 바꾸며 다른 쪽으로 밀어냈다.
금안족과 수인족이 사용하는 체술이었다.
“잠깐 네 노예에게서 확인할 게 생겼다.”
에테르는 갈고리를 밀쳐내며 동시에 쇠사슬을 끊었다. 길라흐가 목줄을 끌어당겨 질식시킬 위험을 차단한 것이다.
“확인할 거 말인가요?”
“그래. 시간 좀 내어 줬으면 좋겠는데.”
“호오. 이건 또 흥미롭네요.”
길라흐는 그제야 갈고리를 거두며 표정을 풀었다.
정령마도사를 가지고 노는 것도 한 가지 재미였지만, 그보다는 다른 사천이 자기 노예에게 왜 관심을 보이는지가 더 궁금했다.
“설마 동정심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럴 리가.”
초면인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에 동정심이 들었더라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에테르는 여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정령마도사냐?”
“…그래. 그것보다, 당신 괜찮아?”
“뭐가?”
“팔이 갈고리에 맞닿았는데…….”
에테르는 코웃음을 쳤다.
정작 자신은 몇 번이고 갈고리에 찍혔으면서, 동료끼리 한 번 치고받은 정도로 걱정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포로 따위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에테르는 사족을 붙이지 않고 딱 잘라 물었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지?”
“어떤 거?”
“본관의 영혼이 두 개라는 것 말이다.”
정령마도사가 마수의 악의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까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혼까지 구분한다니, 금시초문이다.
“그냥, 말 그대로야. 직관적으로 봤을 때 영혼이 두 개가 보였어.”
여자가 한 말에서 함의를 짚어낸 에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걸 보니 확실하다.
정령마도사는 정령이 알려준 내용을 직관이라는 단어로 종종 포장하여 노련한 점쟁이 행세를 하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흐릿해. 한쪽이 완전히 주도권을 꽉 쥐고 있는 느낌? 그렇다고 다른 혼이 지금 혼을 빼앗으려고 들지도 않아. 마치 원래부터 둘이 하나였다는 것처럼 그러는 것 같아. 아니면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거나….”
홍옥처럼 빛나는 여자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추상적인 말을 잘 늘어놓는군. 이러다가 네 주인인가 뭔가 하는 녀석한테 엊어맞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나?”
“알아. 그래도 말해 주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어.”
“허어?”
“넌 여기 있는 다른 놈들과는 달라. 그쪽 혼이 썩지 않았거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길라흐가 갈고리를 내리쳤다. 여인은 다시 한번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채앵!
“대화 중이다. 건드리지 말라고.”
“하아, 내가 저거 버릇 좀 제대로 들이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뜻대로 안 되는군요.”
길라흐가 투덜거렸지만 이미 안중에 없었다.
이 여인의 말대로라면 오랜만에 되찾은 몸의 주도권을 잘못하면 다시 내어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신체를 다시 내어주는 조건은 하나.
괴물인 걸 알면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할 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 유토피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더 그럴 듯하게 들리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오랜만에 되찾은 몸이다. 또 다른 인격에게 다시 주도권을 내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여자군. 길라흐. 이 노예, 나한테 팔 생각 없나?”
생각을 마친 에테르가 길라흐에게 물어보았다.
이 여자를 곁에 두고 살살 굴려먹으면 일리야드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까지 좋은 교보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갑자기 뭔가요? 아니, 아니지. 안 돼요. 제가 오랜만에 마음에 든 장난감이었는데! 흐흐!”
“잠입 전까지 약점 보완에 써먹을 예정이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셔야죠. 사천씩이나 되었으면서 남의 장난감에 손을 대려는 건가요?”
흥정은커녕 매매 자체를 거부하는 길라흐.
길라흐의 고집과 아집은 갓 쌓아 올린 토성처럼 완고했다.
이런 경우에는 괜한 말싸움을 벌이느니 노예에게 싫증이 나서 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결국 시답잖은 자랑하러 온 거로군.”
이래서야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버리는 꼴이 된다.
“아아, 이거. 완전히 제대로 끊어 놓았네요. 언제 다시 연결한담.”
이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낼 순 없다. 에테르는 번갯불과도 같은 시선을 여자에게 던지며 물었다.
“그쪽, 이름은?”
“…클라라, 클라라 하스펠트.”
에테르는 씩 웃으며 초전도 연구실로 향했다.
**
클라이스는 스크롤을 깎다 말고 투정을 부렸다.
“이런 환경이면 집중할 수 없어요….”
안 그래도 조용한 환경에서의 작업을 선호하는데, 문밖이 저리도 시끄러워서야 스크롤에 온 신경을 기울일 수 없다.
– 하아아아악!
맨 처음에는 분명 새된 비명에 불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비명이 몇 번이고 들리자, 점점 귀에 익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 그, 만……! 제발…!
끝내 언어가 섞인 절규가 들렸을 때.
클라이스는 사각거리던 식각용 펜을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가 내는 것처럼 토막이 난 여성의 목소리.
클라이스는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그것도 매우 자주.
“클라라 언니?”
저도 모르게 고인이 된 가족의 이름이 입밖으로 튀어나온다.
클라라 하스펠트.
수 년 전,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사망 처리된 자신의 언니.
그 언니가 자신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목소리와, 저 절규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음색, 높낮이, 어조, 주로 사용하는 단어, 말의 템포까지.
“언니…? 언니예요?”
클라이스는 현재 자신의 처지도, 해야 할 일도 전부 잊어버린 채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탄력이 붙은 발이 점점 가속한다. 쇠사슬이 짤랑거리는 것도 듣지 못한 채 몸이 내쏜 화살처럼 전진했다.
그러다가.
덜컥!
“헉, 커흑……!”
자물쇠가 단단히 걸린 쇠사슬이 클라이스를 후욱 끌어당겼다.
“아, 학…! 하악… 아, 아아, 악……!”
책상에 연결된 목줄이 머리를 하늘로 쳐올렸다. 그 때문에 앞으로 넘어지며 허리가 활대처럼 휘었다.
“악, 아으, 아하악…….”
뚝, 뚝. 융단 위로 침이 방울져 떨어진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위가 산성액을 토해내며 경련한다.
숨결은 토막 났고, 언어는 정제되지 못한 채 신음만을 내뱉는다. 세상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귀에선 이명이 들렸다.
클라이스는 한동안 바닥에서 나뒹굴며 찔끔 눈물을 흘렸다.
“하아, 하아…….”
카펫 위에서 고통의 춤사위를 벌이기를 몇 분.
정상적인 심박수를 되찾은 클라이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허망하게 일어났다.
“그래요, 제가 미쳤죠.”
요 며칠 새에 에테르에게 정신없이 굴려졌다고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모양이다.
틀림없이 이 환청은 언니가 맞이한 최후와 비슷할 터.
이곳 마왕성의 마수들에게 끔찍하게 고문당하면서도 끝까지 절개와 지조를 유지하다가 명예롭게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낸 클라이스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기분이 멍했다.
먼저 떠나간 가족을 생각하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들 마수에게 죽었는데. 그래서 자신도 마수를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했는데.
그걸 위해서 화계마도에, 플레어에 모든 걸 갈아 넣었는데.
“…….”
분명, 지금 느끼는 감정은 고뇌일 터이다.
마수에 대한 증오와, 노예로 부렸던 소녀에 대한 회한과, 그 소녀가 실은 마수였다는 점에 대한 당황과, 왜 소녀가 그때 노예를 자처했는지에 대한 의문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현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그 모든 복잡미묘한 감정이 실타래처럼 얽혀간다.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툭.
클라이스는 손바닥에 난 땀을 털어낸 뒤 식각용 펜을 쥐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나.
혼자 남기고 전부 떠나버린 언니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클라이스는 자매들과 나누었던 예전의 추억을 잠시나마 되새기며 스크롤을 마저 깎았다.
뚝, 뚝.
스크롤 위로 소금기를 머금은 침이 새어 나온다. 목의 아릿한 통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까닭일까?
그 통증을 잊고자, 몇 시간이나 마전지를 갈아엎고 있을 때였다.
“야, 네 언니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