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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8

     

    “시, 시한부라니.”

     

    더듬더듬, 아셀라가 양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지금 죽는다는 뜻은 아니었건만, 아셀라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무슨 말이야, 라스. 그렇게 많이 아팠다고? 얼마나 심각한 병이길래.”

     

    “지금으로선 손쓸 도리가 없어요. 조금씩 몸을 갉아먹고 있어서… 쿨럭.”

     

    의도한 건 아니었건만, 타이밍 좋게 기침이 나왔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피가 묻어나온다. 소독용 티슈를 꺼내 슥슥 닦아 폐기했다.

     

    그런 나를 본 아셀라가 창백해졌다. 반쯤 입을 벌리고 당장에라도 실성할 기색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몇 년은 멀쩡할 거예요.”

     

    체력을 회복할 때였지. 나는 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아셀라가 포장지를 집어들어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그냥 사탕이 아니었구나. 약이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퍽, 아셀라가 원망 가득한 눈을 하며 나를 때렸다.

     

    “네 비밀이 이거였어? 왜 말을 안 했어!”

     

    “주치의가 제 몸도 간수를 못 해서야 황족의 건강을 관리한다는 중책을 착실히 수행한다고 신뢰를 드릴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황실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이유도 큽니다. 부디 이해를…”

     

    “절대 못 보내!!”

     

    오히려 아셀라는 더 악을 쓰기 시작했다.

    번쩍 뜬 그녀의 눈은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실핏줄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고칠 수 있는 거지? 약재가 필요해? 그럼 내가 구해주면 되잖아!”

     

    “황실에선 불가능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데?”

     

    “저는 알아요.”

     

    “나도 알아. 알 수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밖에 나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아? 너는 용사 파티에 차출되고 말 거야. 싫어도 저 멍청한 용사가 너를 꾀어갈 게 분명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세 번 계속되면 네가 거절할 수 있겠니? 네 몸이 그 험난한 원정을 버텨내겠어? 죽어버린다고!”

     

    아셀라가 내 멱살을 필사적으로 흔들었다.

     

    “죽을 거면 내 옆에서 죽어. 명령이야.”

     

    이미 대화는 평행가도였다.

     

    내게 황실에 남는다는 선택지는 없고, 아셀라에게 황제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도 없다.

     

    합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

     

    차분한 내 말투에, 아셀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요구를 할지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람을 읽는 데 능숙한 아셀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안일했다.

     

    “이―!”

     

    아셀라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편지를 집어 들더니 순식간에 옷장을 향해 뛰었다.

     

    덜컹, 손톱이 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옷장을 연 그녀는 안에서 예비용 지팡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 단숨에 황금빛 마나가 뿜어져 지팡이에 휘감긴다.

     

    “황녀님!”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깨달았다.

     

    기아스는 시전이 완료된 후엔 절대 해제가 불가능하기로 유명한 단단한 마법이다.

     

    하지만 우리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편지에 적힌 내용을 이행한다’다. 기아스 자체를 깰 순 없지만, 편지의 문장을 식별할 수 없게 되면 무효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 편지도 어지간해선 훼손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보호이기에 훨씬 강력한 고위계 마법을 때려박으면 뚫릴 수도 있다.

     

    아셀라의 노림수는 그것이 분명했다.

     

    “라스, 다 널 위해서야!”

     

    아셀라의 눈동자에서 황금빛 마나가 세차게 불타오른다.

     

    지팡이 끝에서 순식간에 여섯 개의 진이 그려진다.

     

    하지만 벌벌 떨리는 손은 침착하게 집중하지 못하고, 그녀의 마나는 스파크를 튀기며 안정되지 못한다.

     

    “황녀님.”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아셀라에게,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저희를 위해서입니다.”

     

    “아냐, 안 돼.”

     

    나는 오른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그러지 마!”

     

    “맹약을.”

     

    “안 돼!!”

     

    “이행해주십시오.”

     

    “싫어!!”

     

     

    ―번쩍.

     

     

    그녀의 황금빛 마나와 나의 새하얀 마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합쳐지고, 회전하고, 이내 분리되어, 소멸한다.

     

    “아아… 아.”

     

    계약이 이행됐다.

     

    기아스의 강제력이 아셀라를 스멀스멀 지배해나간다. 그녀가 지팡이를 떨어트리고 양손을 파르르 떨었다.

     

    “황녀 전하!”

     

    그때였다.

     

    밖에서 비서관 누님이 방으로 들어왔다. 마법의 흔적이 보여서 큰일이라도 났나 걱정이 되었나 보다.

     

    “전하… 주치의 선생님.”

     

    바닥에 무릎 꿇은 아셀라를 보고 그녀가 심히 당황했다.

    그러기도 잠시, 아셀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비서관.”

     

    “…아, 괘,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밖이 소란스럽구나. 보고해라.”

     

    “그것이, 게오르크 2황자가 군사행동을 일으켰습니다. 천황궁을 점령하였으며 헤이케 1황녀가 대치 중입니다.”

     

    아셀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황궁의 황제관을 차지해 승계를 이루겠다는 뜻이겠어. 게오르크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헤이케가 승계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지. 참전하겠다. 군을 일으켜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셀라가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짓이겼다. 그 바람에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 황녀 전하….”

     

    비서관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으나 아셀라는 신경 쓰지 않고 명령했다.

     

    “고트베르크 주치의는 현 시간부로 해임했다. 그가 휘말리지 않도록 호위를 붙여 안전하게 황실 밖으로 내보내라.”

     

    “…예? 주치의를, 말입니까?”

     

    비서관 누님이 의아한 눈으로 나와 아셀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아셀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간 신세졌습니다, 전하.”

     

    상태창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 굿엔딩

    · ■■년 후, 다시 ■■에서 65% → 68%

     

    · 히든엔딩

    ·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만족했다

    51% → 0%

    · 엔딩이 삭제되었습니다

    ―――――――――――

     

     

    아셀라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망치게 안 놔둬.”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게 올바른 선택이다.

     

    우리 둘을 위해서.

     

     

     

    ***

     

     

     

    “옥좌가 비어있는 제국을 제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망국이다! 짐이! 게오르크 폰 뷔르템펠트가! 망국의 지배자가 되어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감사하여라! 그리고 고개를 조아려라! 하하하하하!!”

     

    월광궁을 나선다. 황실은 꽤 개판 나 있었다.

     

    여기저기 봉화를 꽂아놔 불꽃이 피어올랐다. 대낮에도 저녁놀이 진 것처럼 사방이 시뻘개져 있었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월광궁 기사 웬델이 나를 호위해줬다. 그를 따라 황궁 남쪽 성벽과 연결되어있는 내의원까지 향한다.

     

    어딜 가도 하늘에 게오르크의 얼굴이 떠 있었다. 비전 수정구로 천황궁에서 실시간 중계를 하고 있었다. 하여튼 화려한 걸 참 좋아하는 친구다.

     

    황실은 게오르크 덕분에 비상이 걸려 난리가 났다. 기사들이 사방에서 뛰어다니느라 나를 신경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이런, 길이 막혔군요.”

     

    남쪽 성벽에 도착했을 때 웬델이 보고했다. 당장 궁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긴장 상태다. 헤이케가 발 빠르게 황실 곳곳을 폐쇄해놨다.

     

    시간을 너무 끌어버렸네.

     

    “내의원으로 들어가자.”

     

    “내의원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내의원 내부는 완전히 봉쇄하지 못했을 터.

    제도 광장과 연결된 건물이다. 돌파할 길이 있을 게 분명했다.

     

    입구로 들어가서 클로에와 마주쳤다.

     

    “선, 선생님! 지금 떠나시는 건가요?”

     

    “그래. 시간이 없어서 송별회는 못 하겠어.”

     

    “으으… 제가 선생님의 빈 자리를 잘 이어갈 수 있을까요… 도무지 자신이 없어요. 선생님은 제 삶의 은사셔요. 아직도 선생님께 배울 게 너무 많…”

     

    “고트베르크 선생!!”

    “선생!!”

     

    클로에의 감동적인 작별인사를 들을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앰브로시아와 알베리치를 비롯한 주치의 군단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선생! 주치의 직에서 해임됐다는게 대체 무슨 말이오?!”

    “제국을 떠난다는 게 사실이요?!”

    “내의원의 기둥이 대체 어딜 간단 말이오! 내 황녀님께 함께 항의하러 가주겠소!”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주치의들.

    소문 참 빠르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을 붙잡히게 생겼다.

     

    “클로에, 논문 가지고 있는 거 줘봐.”

     

    “논문이요? 여기 있어요.”

     

    나는 클로에에게 논문을 한 뭉텅이 받아들어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도망간다!”

    “잡으시오!”

    “선생, 고트베르크 선생!”

     

    층계참을 뛰어 올라간다. 이놈의 계단은 몇 번을 올라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논문을 몇 장씩 잡아 그들을 향해 던졌다.

     

    “아니, 이건?!”

    “복강경 수술 아티팩트 제작법이라니?!”

    “치유주문으로 의술을 시전한다고?!”

    “성녀님이 선생과 친척이었소?!”

    “뭣이라고?!”

     

    그들이 논문을 줍느라 정신 팔린 사이 복도를 달려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었다.

     

    옥상으로 나갔을 땐 땀이 흠뻑 백의를 적셔놨다. 웬델이 마지막까지 나를 호위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클로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선생, 이제 막다른 곳이오.”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오!”

     

    앰브로시아와 알베리치가 눈을 번뜩이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등 뒤는 옥상 난간.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논문을 그들에게 모두 뿌려주며 외쳤다.

     

    “인생은 짧고, 의학의 길은 멀다! 약제란 곧 과학이자 예술이리니!”

     

    만개하여 흩날리는 종이 잎 사이.

     

    얼빠진 주치의들에게 가벼운 손경례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망설임 없이 난간 뒤로 몸을 던졌다.

     

    “저런!”

    “맙소사, 선생!”

     

    몸이 중력을 받아 낙하하기도 잠시.

     

    폭신한 감촉과 함께 착지한다. 짐마차의 볏짚 위에서 일어났다.

     

    나는 대기하고 있던 브루노에게 말했다.

     

    “출발하자고.”

     

    “옙.”

     

    나무바퀴가 덜컹거리며 마차가 움직인다. 내의원 옥상에서 빼꼼, 앰브로시아부터 클로에, 알베리치, 다른 주치의들이 얼굴을 내밀고 나를 바라본다.

     

    그들을 향해 크게 팔을 흔들어 주었다.

     

     

    자, 게오르크가 시선은 끌어주고 있지만 지금부터 고향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추격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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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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