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괜찮으십니까?”
“허허, 이 정도는 아침 운동 수준이라네…쿨럭…”
내상도 입으신 분이 왜 허세실까.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기침을 하는 장 선배에게서 눈을 떼곤 우리가 만들어낸 지옥을 바라보았다.
“…다 죽었군요.”
“그래, 우리가 다 죽였다네.”
토막 난 시체들. 그리고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들이는 모래밭. 사막의 양분이 되어버린 마인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으며 널부러져 있었다.
“…머리를 챙기게나.”
백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공, 제가 잘라 오겠습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 조심하고.”
무림은 귀식대법인가 하는 죽은 척하기 기술이 있으니 조심해야지. 물론 목경이도 초절정에 이른 만큼 그런 수에 쉽게 걸리진 않겠지만…
나는 목경이가 독마의 머리를 자르는 모습을 지켜보다, 염마와 백 선배가 가리킨 마인들의 머리를 잘라 보따리로 감쌌다.
보따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꼴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지만, 우리의 전공을 증명할 거리는 필요했기에 나는 대충 어깨에 보따리를 짊어지고 별동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동안 추격은 없을 겁니다.”
“한동안?”
“맘루크 놈들은 사막에서의 전투에 익숙합니다. 전열을 재정비 후 추격해올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그거참 기운 빠지는 소식이로구나.”
“팽 장로님. 그래도 그리 쉽게 따라오진 못할 겁니다.”
우리가 그냥 걸어서 도망친 것도 아니고, 경공을 펼쳐서 도망친 거였으니 이 사막에서 우릴 추적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소모될 터.
그러니 신속하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몸 성히 청해성에 도착할 수 있을 법했다.
“가능하면 수원지를 찾는 것을 목표로 움직이겠습니다. 지금 가진 식량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하다못해 그늘이라도 있으면 좋겠구나.”
“남궁 선배,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에잉, 남궁 놈아. 늙은 티를 내는구나, 고작 이 정도 더위에 질 거라면 여기서 누워버리는 게 어떻겠느냐?”
“이보게 팽 장로. 자네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실랑이를 벌이는 둘을 내버려 두고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색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지평선 너머에 청해성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 한참을 가야 나오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사막은 정말 끔찍하게 넓었으니.
당장 여기서 청해성까지 가는 거리가 한반도 팔도여행을 가는 거리보다 길 거다.
끔찍하다 끔찍해.
하지만 사막에서 미이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으니, 우리는 부지런히 발을 놀려 사막을 돌파해야 했다.
…아니지, 아예 북쪽으로 움직여서 천산을 경유해볼까?
문제는 그쪽은 그쪽대로 불안하다는 건데.
마교의 전 병력이 야영지로 이동한 건지, 아니면 일부만 이동한 건지 알 길이 없으니.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사막이 더 안전할 거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가혹한 환경이라는 건 추격자에게도 가혹한 환경이라는 뜻이니까.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가는 길에 물 한 모금 마실 연못이라도 있길 빌죠.”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행군을 다시 시작했다.
———————–
사막 탈출 나흘째.
“벌써 나흘째 연못이 하나도 없구나…에라이. 이러다 인간 육포가 되겠구나.”
“입 열지 말게. 있던 물기도 빠져나가니.”
백 선배의 말에 장 선배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지적은 타당했다. 괜히 입 열었다 모래바람과 건조한 바람이 입안으로 들어와 입안을 바싹 말려버릴 테니.
…그래도 꽤 많이 움직인 것 같은데, 사람 하나 안 보이네.
여기 사막을 지나는 행상 정도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청해성에서 막고 있겠구나.
뜨거운 햇볕에 며칠 내내 노출되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으니, 당연한 사실도 뒤늦게 떠올리게 된다. 이대로 가면 최초로 사막에서 말라죽은 초절정고수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속으로 한탄하며 하염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내 눈에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헛것이 아니라 신기루인가?
“은공, 저건…”
“신기루인가.”
“호수입니다.”
목경이의 말에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를 쳐다보았다.
신기루 원리가 뭐였더라. 빛의 굴절? 어릴 적 학습만화에서 신기루가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너무 낡은 기억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막에서 조난당할 일이 평생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어차피 기억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만…일단 오아시스가 어딘가에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문제는 받아들인다 쳐도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야 할 거라는 건데.
나는 고개를 돌려 별동대원들을 살폈다. 별동대원들은 애써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으니, 무작정 달려가다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탈진할 수도 있었다.
“선배님들. 아마 저 멀리에 호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급하게 달려가면 없는 체력도 다 사라질 테니, 천천히 움직이겠습니다.”
“알았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행스럽게도 별동대원들은 인내심 하나는 오랫동안 품고 살았을 노고수들이라 그런지, 내 말에 모두 수긍해주었다.
“그럼 가보자.”
“예, 은공.”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신기루를 향해 나아갔다. 마침 청해성이 있는 방향이었으니, 거리적으로 손해는 없다는 점이 나름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우리는 점점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멈추어 섰다.
“다시 밤이 찾아올 겁니다. 그 전에 호수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아마 힘들 테니 야영 준비를 하겠습니다.”
야영이라고 해봐야 그나마 쉬기 좋게 모래를 적당히 파서 쉬는 것뿐.
우리는 며칠 간의 경험으로 순식간에 그럴듯한 야영지를 만들어냈다.
목경이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허허, 옆구리가 시리구나.”
“좋을 때지, 좋아질 때야.”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자네 도사 아닌가?”
“흠흠. 젊을 때 화산을 자유롭게 뛰놀던 매화꽃잎 같은 시절이 있었다네…”
젊었을 땐 내가 좀 잘나갔다고 자랑하시는 건가.
“에헤이, 백 선배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인 손 한 번 못 잡아본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데 무슨 소리요?”
“그게 무슨 소린가! 나도 젊었을 적엔 인기가 꽤 있었다네!”
“하이고, 거 내가 옆에서 다 지켜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시오?”
“장무곡 네 이놈, 네 놈이야말로 여자랑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놈 아니더냐!”
“뭐요? 난 댁이랑 다르게 기루도 드나들어 본 몸이오!”
“이런…”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는 건가.
나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시키려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은공, 오늘도 어깨를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경이의 몸이 내 팔에 밀착했다. 눈에 띄게 도드라지는 굴곡은 없지만, 나름대로 푹신함은 갖춘 몸매가 팔에 달라붙자, 숨결이 내 목을 간지럽혔다.
“은공의 팔을 껴안고 있을 떄면,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그러냐.”
“은공은 어떠십니까?”
“…글쎄.”
나는 볼을 긁적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목경이의 시선을 피했다.
혜령이의 육탄돌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 목경이가 이런 식으로 달라붙는 건 색다른 느낌이라 적응이 잘 되질 않았다.
주기도문을 외워야 할 것 같다고 할까.
나는 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울 준비를 마치고 눈을 감았다.
“은공…”
“슬슬 자자. 내일도 강행군을 해야 할 테니.”
“…예.”
우리는 사이좋게 몸에 오러를 얆게 두른 채로 눈을 감았다. 한밤중의 사막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여름에는 사람을 산 채로 구워버릴 것 같은 열기로 넘치지만 밤에는 한겨울보다도 추워지는 곳이 사막이었으니까.
“은공, 안녕히 주무십시오…”
“너도 잘 자라.”
————————
보름째.
남궁원 장로가 쓰러졌다.
원인은 노인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환경과 전투로 입은 내상 탓이었다.
“버리고 가게나…”
“업히십시오.”
“날 업고 갈 수나 있겠느냐. 버리고 가거라.”
“아닙니다.”
나는 한사코 거절하는 장로를 억지로 업고 몸을 일으켰다.
“은공…”
“목경아, 주변을 잘 경계해다오.”
우린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이대로 싸우면 절정이 뭐냐, 일류한테도 질지 모르는 상황.
나는 등을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를 견디며 발을 내디뎠다.
슬슬 청해성이 보일때가 되었지만 , 아직도 청해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나?
“…도대체 청해성은 어디에 있는 건지.”
등에 업힌 남궁 선배의 몸이 뜨겁다. 지쳐 쓰러진 상태에서 사막의 열기를 그대로 쐬고 있기 때문이겠지.
“은공, 빨리 찾지 못하면…”
“그래도 초절정고수시니 오래 버티시겠지.”
이어진 연전에 지치고 다친 몸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쓰러지실 분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평범한 환자보다는 오래 버티리라.
문제는 나도 선배를 업고 다니느라 체력소모가 격렬하다는 건데…
“은공, 제가…”
“아니, 넌 힘을 아껴둬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
“…예, 은공.”
내 계산대로라면, 슬슬 청해성이 보여야 할 터. 하지만 아직까지 청해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왜일까.
방향이 잘못되어서?
우리가 너무 느려서?
아니면…진법에라도 걸려서?
만약 정말로 진법이라면 어떻게 하지? 이미 별동대원 모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아니지, 진법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우린…
“…은공!”
“왜.”
“저쪽을 보십시오! 성입니다! 성!”
“뭐?”
나는 목경이의 말에 깜짝 놀라 목경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젠장, 방향이 어긋난 거였나.”
“저흰 살았습니다!”
“…저게 신기루만 아니었으면 좋겠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다가갈 때까지 굳건한 성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은공?!”
내 의식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뜌땨…
뚜땨아 뚜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