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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9

     

    “게오르크 폰 뷔르템펠트. 그대를 제국의 위험요소로 판단한다.”

     

    스릉. 헤이케가 절도있게 장식검을 치켜들며 선언했다. 그녀의 칼끝이 천황궁의 최상층 발코니를 향했다.

     

    게오르크는 선전포고를 받고도 한결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가 양팔을 벌리며 하늘이 떠나가라 웃었다.

     

    “위협? 근시안적인 사고로군, 1황녀여. 짐만큼 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성군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대는 황제 폐하의 황명을 어기고 신성한 승계전을 혼란으로 이끌었다. 분권에 의한 새 체계를 잡아가는 시기다. 귀족가의 반란을 막기도 급급한 차에 어찌 경솔한 행동인가.”

     

    헤이케는 논리적으로 게오르크를 나무랐다.

     

    황제가 자식들의 궁에 나누어 전례 없는 분권 체제로 황실을 운영하도록 명령했다. 연합군 운영과 마왕군 토벌 공적에 따라 차기 황제가 정해지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당분간의 혼란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전대 폐하겠지! 폐하는 서거하셨다. 옥좌는 비어있어선 안 된다. 빈 옥좌는 자체만으로 분열과 혼돈을 불러오는 법 아니겠는가?”

     

    “제국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게오르크가 당당한 헤이케를 비웃었다.

     

    “유일한 강대국일 때는 그렇겠지. 지금은 마족이, 마왕군이라는 위협적인 강국이 있다. 실제로 서부에서 어떠했나? 마족이 직접 습격하지 않았음에도 공작령이 쑥대밭이 되었을 정도다. 왕국을 비롯한 소국은 말할 것도 없다! 머잖아 인간계의 많은 국가가 쇠망하리라.”

     

    게오르크가 난간에 팔을 얹고는 씨익 웃으며 제안했다.

     

    “어떤가, 1황녀여. 짐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사라니?”

     

    “마왕군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막강하며, 강대하다. 이대로는 제국이 망가지고 조각나는 일도 시간문제 아니겠나? 아니면!”

     

    게오르크가 헤이케를 강하게 가리켰다.

     

    “그대에게 전대 폐하만큼 위대한 업적을 세울 자신이 있단 말인가? 아니, 그분만 한 위인은 인류사에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터! 제국의 전성기가 지나갔음은 동네 꼬맹이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손에 든 술잔을 쭉 들이킨 후, 게오르크가 호탕하게 외쳤다.

     

    “짐이 망국의 황제가 되어주마! 감사하여라! 그대는 망나니 형제를 둔 덕분에 역사책에 제국을 쇠락시켰다는 최악의 황제로서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하하하!”

     

    할 말을 마치고 털썩 자리에 앉는 게오르크.

    헤이케의 눈매가 굳었다.

     

    “할 말은 그것뿐인가.”

     

    “아아, 잘 알고는 있다, 나의 배다른 누님이여. 앞뒤 꽉 막힌 그대는 짐을 저지하기 위해 곧장 군사를 동원하겠지.”

     

    “정답이다, 형제여. 그대가 오판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헤이케가 오른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제국은 결코 망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홰액!

     

    헤이케가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동시에 그녀의 기사단이 방패를 앞세우며 일제히 천황궁의 담을 넘어 돌격했다.

     

    ―콰앙!

     

    헤이케의 정예병들이 선두에 섰다. 소드익스퍼트들의 날카로운 검기가 단숨에 바리케이트를 뚫어낸다. 백병전이 개시됐다.

     

    “좋은 기세로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 짐도 황제관의 승계를 미룰 생각은 없으니.”

     

    게오르크가 남은 술을 흩뿌리고는 발코니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 싸움이라고 헤이케는 판단했다.

    천황궁에는 제국 황제의 상징인 황제관이 있었다. 게오르크가 그것을 자신의 마나로 물들여 승계를 마치면 공식적으로 13대 황제는 그로 기록된다.

     

    게오르크를 시해해 자신이 14대 황제가 될 수는 있겠으나, 그리되면 전대 황제의 직계가 아니게 된다. 자신의 황조는 정통성이 없는 쿠데타 황실 딱지가 붙으니 귀족가 통솔에 문제가 생긴다.

     

    ‘골치 아프게 됐어.’

     

    헤이케는 승계전에서 게오르크와 아셀라 둘 다 만만찮은 적수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황제라는 억제력이 없어지면 지금처럼 게오르크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가능성도 있다고도 예상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이르다.

    게오르크가 막무가내이긴 해도 계산은 정확한 남자다. 지금의 군사력으로 자신을 막아낼 수 없단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을 터.

     

    무리해서 승산 적은 도박에 나선 진의가 무엇인가.

     

    혹시 어겨선 안 될 계약이라도 있었다든가.

     

    생각할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콰아앙!!

     

    거대한 얼음창이 쏘아지며 천황궁의 벽면이 박살났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 헤이케는 난입한 3세력에 대응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

     

    “전군!”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헤이케의 등을 서늘한 감각이 훑었다.

     

    흙먼지 속에서 기사단과 함께 나타난 황금의 마녀.

     

    ―쿠웅, 쿠웅!

     

    그녀가 손짓할 때마다 창이 쏘아지고 궁이 무너진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황금빛 마나를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얌전히.”

     

    아셀라가 섬뜩한 경고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야…!”

     

    ―콰아앙!

     

    마법진이 그려질 때마다 길이 뚫린다. 그녀의 기사들이 궁으로 진입한다.

     

    “어서, 어서 쫓아가야 해. 안 그러면 영영 놓쳐버려.”

     

    실성한 광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셀라를 보고, 헤이케는 할 말을 잊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광기와 분노에 물들어 이성을 놓아버렸다. 도무지 한 나라의 통치자가 가질 태도는 아니었다.

     

    “하하하하! 그런가, 고트베르크는 무사히 도망쳤는가!”

     

    어느새 게오르크가 얼음창으로 난 구멍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아셀라를 비웃었다.

     

    “너…! 하필 이럴 때!”

     

    “좋은 표정 아닌가, 아셀라. 불만이 있다면 와서 직접 호소하여라!”

     

    다시 궁 안으로 숨어버리는 게오르크.

     

    아셀라는 이빨을 뿌득 갈고는 그를 쫓기 위해 천황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목표가 코앞에 있다! 잡아라!”

    “월광궁이 수배를 내걸었다! 금화 천만이다!”

    “반드시 생포해!”

     

    황실을 떠난 지도 2주, 우리 꽁무니에는 말을 탄 추격자가 잔뜩 붙어있었다.

     

    친 월광궁 백작령을 지나가다가 검문에 걸려서 그대로 도주하던 중이었다.

     

    “백작의 기사단이군요. 따라잡히겠는데요.”

     

    “아이, 거 귀찮게. 휴고, 친자검사서 줘봐.”

     

    “예.”

     

    드르륵 창문을 열었다.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외쳤다.

     

    “린데만 백작은 전 가주의 친자가 아니다! 증거는 여기에 있다!”

     

    내 폭탄 발언에 그의 친위대 기사들이 당황했다.

     

    “뭣이라고?!”

    “그, 그게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농노가 반란을 일으키게 돼!”

     

    휙, 두루마리를 반대편으로 던졌다.

     

    “저 사실이 알려져선 안 된다!”

    “회수해!”

     

    우르르 분산되는 기사단.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하하! 이것도 잡아보라고!”

     

    사상 삐라를 뿌리듯 사방으로 두루마리를 던져대니 기사단이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분주해졌다. 말들이 발이 꼬여 서로 충돌하고 난리가 났다.

     

    “후국령이 코앞입니다!”

     

    브루노가 보고했다. 꽁무니에 붙은 백작령 추격대는 셋.

     

    그들이 우리를 향해 그물망을 펼치는 찰나.

     

    ―쿠우웅!!

     

    하늘에서 커다란 도끼가 떨어져 그들 앞에 박혔다. 마저 남은 추격자들도 고꾸라졌다.

     

    “어이쿠!”

     

    우리를 보호하며 나선 이들이 있었다. 우락부락한 야생의 전사들이 악귀 모양의 등 근육을 자랑하며 나타났다.

     

    천둥족이었다.

     

    “여긴 우리 구역이다!”

    “그래, 당장 꺼져!”

     

    마침내 후국의 국경을 넘어온 것이었다.

     

    “히이익!”

     

    천둥족의 당당한 기세를 본 백작령 기사들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우리도 마차를 멈추고 나는 내려서 그녀와 주먹을 부딪쳤다.

     

    “잘 돌아왔다, 라스.”

     

    “그래, 나도 반갑… 오우.”

     

    그녀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허리를 냅다 끌어안았다. 3번 요추가 나갈 뻔했다.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시다. 후작가까지 호위해주마.”

     

    “부탁할게.”

     

    우리는 천둥족과 함께 후국으로 들어섰다.

    동행한 의사들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방 시골이니 구경할만한 건 없었다.

     

    “정말 제국을 떠나왔군요.”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네요.”

    “수간호사님은 잘 계시겠지요.”

     

    후국이 되었지만 아직 미발표 상태이기도 하고, 후작령의 모습은 떠나기 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고트베르크 선생님!”

    “의사 선생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다만 가는 곳마다 나를 찾으며 환영했기에 시끌벅적한 건 조금 귀찮았다.

     

    “다들 어떻게 알고 있지?”

     

    “아, 내가 소문냈다.”

     

    “잘 했어. 그런데, 기슈타.”

     

    “음?”

     

    “혹시 지금 천룡이 어디 있는지 알아?”

     

    “어머니 말이냐? 그때 서쪽으로 날아가셨으니 중간계 어딘가 침소에 계실 것 같다만.”

     

    중간계라. 꽤 어려운 단어가 나왔다.

     

    “천룡한테 소원권을 쓰려면 아무래도 직접 찾아가야겠지?”

     

    “음…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싶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만물을 지켜보실 순 없으니.”

     

    이 소원권은 엘릭서의 재료인 역린을 얻을 때 써야 한다.

     

    뭐,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 일단 후국의 입지를 어느 정도 굳힌 후여도 되겠지.

     

     

    상태창을 열어본다.

     

    ‘남은 배드엔딩은 스무 개.’

     

    리셰에 관련된 여섯 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마왕군에게 패배하는 열셋. 이걸 해결하면 사실상 모든 배드엔딩을 삭제하는 게 된다.

     

    내가 후국에서 연합군과 용사 파티에 영향을 주어 확률을 낮추어야 할 엔딩들이다.

     

    그리고 조금 성질이 다른 마지막 하나.

     

     

    [No. 077 : 질투의 화신 16%]

     

     

    이게 사라지는 날이 오긴 할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매일 그녀를 보던 일상이 사라진 게 굉장히 어색했다.

     

    그렇다고 영영 못 만날 거란 생각은 안 든다.

     

    비록 지금 서로 가는 길은 달라도.

     

     

    [· ■■년 후, 다시 ■■에서 68%]

     

     

     

     

    ***

     

     

     

    게오르크의 쿠데타는 열흘 만에 제압됐다.

     

    고급 방어구와 무기는 갖추었으나 인적 자원은 턱없이 부족한 그의 기사단이었다. 애초에 그의 군사행동이 성공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제로에 가까웠다.

     

    “게오르크는 승계권을 잃었다. 황제관을 강탈한 건 폐하에 대한 반역과 같지. 다만 그에게 벌을 내릴 권한도 우리에겐 없기에 우선 무기한 구금하게 되겠다만.”

     

    상황이 종료된 후 헤이케가 아셀라와 라우가에게 설명했다. 아셀라는 엉망진창으로 마법을 난사한 덕에 지쳐 보였다.

     

    “사망자가 안 나온 건 기적적이군. 내의원에서 즉각 대처하기도 했지만 게오르크에게도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가? 라우가, 아는 정보라도 있는가.”

     

    “내가 쟤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포승줄에 묶인 채 호탕하게 웃는 게오르크를 보며 라우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셀라, 너는…”

     

    “늦었어.”

     

    아셀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후처리를 위한 회담을 더 이어가지도 않고 등을 돌려 월광궁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를 헤이케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라우가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월광궁에 도착한 아셀라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황녀 전하.”

     

    그런 그녀에게 기사단장이 보고했다.

     

    “고트베르크 전 주치의를 놓쳤습니다.”

     

    비보였다.

    게오르크 때문에 병력을 동원할 수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쾅!

     

    그녀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꽃병이며 액자, 고급 장식품이 사방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든 기사도, 시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주군이 폭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 입을 놀리면 목이 날아간다.

     

    누구라도 그 자리의 공기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지팡이를 너무 세게 휘두른 나머지, 아셀라의 손바닥이 까져 따끔했다.

     

    그 상처를 돌봐줄 주치의는 궁에 없었다.

     

    “…하.”

     

    언제까지고 이럴 리는 없어.

     

    평생이고 그가 내게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어.

     

    그래, 우선 후국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것부터.

     

    월광궁의 라인을 이용해 네 손발을 묶어놓으면 돌아와서 빌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리 생각한 아셀라는 바닥에 흩어진 잡동사니 속에서 깃펜과 종이를 찾아 들었다.

     

    후국에 전할 서류를 작성한다.

     

    손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자신의 생각보다도 먼저 글자를 적어 내려간다.

     

    “…어?”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고 아셀라는 얼빠진 숨을 내쉬었다.

     

     

    [파혼 서약서]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멋대로 손이 써버린 글자.

     

    아직 맹약의 이행은 끝나지 않았다.

     

    저주나 다름없는 마법의 효력에, 아셀라는 분노하며 종이를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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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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