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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9

     백은(白銀).

     사실 이거, ‘은’ 쪽이 메인이다.

     백은을 직접 구강섭취하면 피의 흐름이 빨라지고, 신체 활력이 왕성해지며, 근력이 순간적으로 늘어난다.

     제국의 암살자들이 죽기 직전의 발악으로 쓰는 약물.

     기분이 좋아지는 건 그런 건강해진 몸이 가져오는 쾌락이며, 강해진 육신을 바탕으로 무언가 건강한 신체적 활동을 하는데서 오는 충족감이다.

     실상은 어떠한가?

     

     ‘흡혈귀뼛가루를 마셔서 흡혈귀와 같은 힘을 가지게 되는 것.’

     순간적으로 인간을 초월한 힘을 얻는다는 것 뿐.

     잠깐이나마 ‘마족’의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악마의 약과 다를 바가 없는 약물이다.

     솜누스 꽃 가루는 그저 흡혈귀 뼛가루가 가진 독성을 중화하는 요소.

     캐롤라인도 마찬가지다.

     캐롤라인과 백은의 차이점은 중화제로서 순수한 솜누스 꽃을 사용했느냐, 아니면 적당히 대충 들판에 자라는 아무 솜누스 꽃을 사용했느냐.

     둘 다 도핑용 약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 정도는 은의 중화된 정도 차이.

     흡혈귀 뼛가루의 독성을 얼마나 몸에 더 집어넣어, 마족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

     딱 그 차이다.

     백은을 빤다고 흡혈귀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백은을 지속적으로 섭취한다면, 인간은 그 백은이 가져오는 신체적 활성감에 중독되어버린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활력.

     사람 머리통 하나는 으스러뜨릴 수 있는 근력.

     흡혈귀 뼛가루 자체에 깃들어있는 농축된 마력.

     무엇보다 백은을 사용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 마족이기도 하지만 짐승과도 같은 정력.

     종합적으로 다양하게 힘이 좋아지는 만큼, 목숨을 건 전투에서도 백은이 주로 쓰이는 일이 많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국 그림자들이 죽기 직전에 발악하기 위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백은이다.

     일발역전을 위해 예로부터 사용하던 것.

     백은이 8년 전부터 왕실에서 사용된 걸로 추정된 만큼, 제로스 바르셀 후작이 백은을 사용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침대가 아닌, 나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지금 이 순간에.

     “크아아아ㅡㅡㅡ!!”

     짐승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검을 휘두른다.

     오러에 백은 특유의 은빛이 휘감기고, 내가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이 순식간에 갈라진다.

     서걱.

     검이 땅에 닿자마자 박히는 게 아니라 땅이 베인다.

     피하지 않았다면 저 은빛이 서린 오러에 반으로 갈라지는 건 땅이 아닌 나였다.

     ‘피했지만.’

     부ㅡ웅, 붕, 부ㅡㅡ웅!

     대검의 칼날이 다시 크게 날아온다.

     원래 대검의 폭보다도 더 넓게 퍼진 오러의 검날이 내 목을 스친다.

     “약은 짓을.”

     뒤로 물러나며 지팡이를 세운다.

     지팡이와 대검이 닿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오러를 일으켜, 오러에 오러로 맞부딪치며 대검을 흘린다.

     “오러의 검날 폭을 이용한 장난질로 여태까지 이겨온 모양인데, 그런 거 안 통해.”

     

     흔히들 오러는 폭이 일정하다고 생각하기 마련.

     나만 하더라도 오러가 검날의 끝에서 0.1cm 정도 균일하게 늘어난 상태로 적을 베어내지만, 제로스 단장의 오러는 경우가 달랐다.

     “눈속임. 좋지. 모르면 당한다. 좋은 말이야.”

     앞에서 보이는 대검의 오러 폭은 약 1cm.

     하지만 그 간격을 보고 피하는 순간, 서서히 오러의 검날이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러니까.

     사선을 그리고 있어, 중간 부분의 오러는 검날이 약 2cm 정도는 될 정도로 넓다.

     1cm 차이.

     엄지손톱의 폭보다도 더 짧은 거리를 이용해 목을 벤다.

     누군가에게는 잡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1cm의 검날이 그대로 목을 베고 들어오면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죽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베이지 않는다.

     검날은 수평으로 들어오고, 오러에 오러로 대응하며 튕겨내면 막아낼 수 있다.

     

     “흠.”

     단지, 마스터간의 대결이 오러만 부딪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무기, 기술, 체력.

     내가 대검을 흘리는 게 아니라 정면에서 받아친다면, 당연히 근육이라거나 허리힘이라거나 하는 ‘체급’도 중요하다.

     이미 어른에 가까운 18살이라고는 하지만, 8년 전부터 이미 왕국 제1 기사단 단장 자리를 맡았던 자를 상대로 정면대결을 펼치는 건 능사가 아니다.

     “크아아아아ㅡㅡㅡ!!”

     특히, 지금처럼 짐승과도 같이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상태라면 더더욱.

     “씁.”

     어쩐다.

     계속 공격을 받아치는 것도 의미는 없다.

     “죽어라, 민족의 배신자ㅡㅡ!”

     “이제는 민족까지 걸고 넘어지는 건가.”

     대화는 이미 진작 통하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 심하게 나를 압박하며 들어온다.

     

     “여자 하나 좋다고 나라를 팔아먹은 쓰레기!”

     “대검보다 입이 더 날카로운 것 같은데.”

     “크아아아!!”

     칭찬을 했을 뿐인데, 무슨 머리를 베는 게 아니라 후려칠 기세로 대검을 수평으로 휘두른다.

     “정말이지.”

     아슬아슬하게 피하느라 잠시 붕 뜬 머리카락 일부가 잘렸다.

     눈 앞에 회색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 살랑거린 순간, 바로 제로스 단장은 대검을 번쩍 든다.

     “죽어라, 매국노!!”

     

     피하거나, 받아치거나.

     ‘어디보자.’

     주변은 넓은 공간.

     다른 기사들이 일부 보고 있지만, 주변은 말 그대로 공터.

     ‘쓸까? 누아르 제압기.’

     보일까?

     보일 것이다.

     ‘합스베르크에게 쓰려고 한 기술 중 하나이기는 한데.’

     만일 보고 있다면, 분명 이건 통하지 않겠지.

     자세라는 게 쉽게 바꿀 수 없기에, 이곳을 보고 있다면 다음에 싸울 때 내 손동작을 보고 바로 대응할 것이다.

     ‘한 번 보여준 패는 통하지 않아. 그게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쓴 기술이라고 해도.’

     하지만.

     ‘보여주는 걸로 이득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아.’ 

     합스베르크만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도 보고 있다면.

     ‘써야겠네.’

     안 쓸 이유가 없다.

     “죽-”

     “하나, 알려주지.”

     앞으로 파고든다.

     대검이 내려오기 전, 상체를 낮추며 ‘왼발’을 앞으로 크게 뻗는다.

     “마스터가, 약을 하면 약해지거든.”

     언젠가, 회귀 전의 합스베르크 황제가 그런 농담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누아르가 그랬고.’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내가 해봐서 알지.’

     인간으로서 강해진 자가 경지에 올랐을 때, 괴물의 힘을 빌리면 그건 그냥 괴물이 될 뿐.

     “하…!”

     제로스 단장이 붉게 물든 눈동자로 대검을 내려친다.

     본래 황금빛으로 빛났어야 할 오러는 짙은 은빛으로 반짝이고, 머리카락은 흡혈귀의 그것처럼 하얗게 물든다.

     원래도 이기지만, 흡혈귀가 되어간다면 더 상대하기 쉽다.

     왼손에 쥔 지팡이를 움켜쥐고 당기며, 그 끝을 팔과 평행하게 맞춘다.

     동시에 칼집에서 검이 빠져나온다.

     이미, 칼집에서 뽑아내는 순간부터 검에는 회색의 오러가 반짝이고 있다.

     오러와 오러의 대결.

     대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칼이 상대적으로 가볍기에, 무게에서는 밀린다.

     만.

     

     애초에.

     ‘대검 쓴다고 마스터 달았으면, 도끼 쓰는 대머리가 아버지를 이겼겠지.’

     무기의 무게로 찍어눌러 무조건 이길 수 있었다면, 지브롤터는 검술명가가 아니라 망치명가가 되지 않았을까?

     카ㅡㅡㅡㅡ앙!!

     오러가 부딪친다.

     대검의 오러가 그대로 나를 짓이길 듯이 눌러오고, 나는 한손으로 쥔 칼날의 오러가 깨지지 않게 마나를 흘리며 공격을 막아낸다.

     오러와 칼등을 타고 팔에 전해지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크하하! 고작, 그 정도로 베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본데.”

     왼다리에 힘을 주고, 팔 전체로 칼등을 받치며 대검을 밀어낸다.

     충격은 분명 있었으나,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왜 베어낸다고 생각하지?”

     사람을 베기는 하지만, 이런 거 자칫 잘못 베었다가는 그대로 대검이 뭉텅 잘려서 나한테 날아온다.

     “막으려고 한 건데.”

     “……!”

     제로스 단장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애초에.”

     하지만 늦었다.

     “왜, 당신이 더 마나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 응?”

     “……!!”

     이미 준비가 끝난 나의 오른손에는 마나가 반짝이고, 미끄러지듯 앞으로 빠져나간 오른발은 제로스 단장의 발 앞까지 파고들었으니까.

     “크윽!”

     제로스 단장이 억지로 몸을 비틀려고 한다.

     내가 어떤 공격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랫동안 싸워온 본능이 그 몸을 움직이게 한 게 틀림없다.

     “늦었어.”

     푸ㅡ욱.

     

     “이미, 닿았으니까.”

     비어있던 오른손에서 뻗어나간 오러 블레이드가 단검과도 같이 튀어나와, 정확하게 황금갑옷의 인장 가운데를 가르며 안으로 파고든다.

     ‘누아르 잡을 때는 주먹으로 심장을 때렸는데.’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심장이나 명치를 때려 제압하겠지만, 죽일 목적이라면 인간의 급소를 한 번에 노리면 끝이다.

     푸화아아악!!

     손을 비틀자, 단면에서 붉은 피가 솟구친다.

     머리부터 아래까지 그대로 피분수를 덮어쓰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크, 허, 허억…?”

     제로스 단장이 뒤로 물러나기 때문에.

     대검이 옆으로 미끄러지고, 본능적으로 뒤로 거리를 벌리며, 시선이 자신의 가슴을 향한다.

     “으, 카흑…?”

     불의의 기습에 당했다는듯 눈동자가 크게 떨리지만, 백은으로 한창 날뛰고 있는 심장의 근육이 오러의 칼날에 놀라 그 칼날을 꽉 붙잡고 있지만.

     꾸우욱.

     한 번 찌르고 칼날을 비틀고, 손잡이를 아래에서 위로 받쳐들듯 움켜쥐고 아래를 향해 오러의 칼날을 내리긋는다.

     ‘아버지가 이걸 봤다면 뭐라고 할까. 막고, 찌르기?’

     간결하다.

     무슨 복잡한 기술명 붙일 필요 없이, 과정과 결과를 한 줄로 빠르게 요약할 수 있다.

     상대보다 더 많은 마나로 오러를 빚어내 한손으로 막고, 빈손에 오러의 칼날을 만들어 급소를 찌른다.

     막고, 찌르기.

     끝.

     

     “욱….”

     제로스 단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

     무언가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하는 듯,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핏발이 잔뜩 서지만-

     “말이라도 하려면, 끝까지 검에 힘을 줘서 버텼어야지.”

     나는 오러의 칼날을 놓고 대검을 막아낸 칼을 두 손으로 움켜쥔 다음, 그대로 사선으로 휘둘렀다.

     서걱.

     “아.”

     하늘로 솟구치는 제로스 단장의 머리가, 나를 향해 정확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매국노라.”

     입모양이었기는 하지만.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잠시, 까먹었다.

     ‘백은 빨고 죽은 인간들, 피가 엄청 튀는데.’

     푸화아아아ㅡㅡㅡㅡㅡㅡ악!!

     “…….”

     피분수가 아니다.

     그냥 피분수라고는 말할 수 없고, 피가 흡사 수도관이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콸콸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씁.”

     비릿하고도 짙은 혈향.

     그리고 그 안에 남아있는, 명백한 백은의 향기.

     ‘이래서 약쟁이들이 싫어.’

     베든 쏘든, 혈관 하나 터지면 전신의 피가 몸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튀기에, 나는 회귀 전에도 백은에 중독된 이들을 죽이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하.”

     이렇게 전신이 피에 절여진 거, 아스타시아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지내며 너무나 많은 피를 봐왔기에, 그리고 황손녀가 되기 이전부터 많은 사생아들이 피흘리며 죽어나가는 걸 봤기에, 그녀는 피를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도착하자마자 포옹하거나 키스도 못하고 말이야.’

     남의 피를 묻힌 채로 아스타시아와 접촉할 수도 없으니, 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가.

     “…아.”

     생각해보니, 이번은 그래도 다행이다.

     ‘나, 지브롤터로 가는 중이었지.’

     아스타시아를 떠나서 잠시 백작령으로 가던 도중에 습격을 받았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았다.

     “흠….”

     뭐.

     ‘머리는 중간에 계곡에서 물로 씻으면 되고, 옷은 갈아입지는 않아도 되니까.’

     붉은색 정장과 코트라서, 피에 흠뻑 젖었어도 옷 색깔이 크게 변하거나 하지 않는다.

     “…후ㅡ하.”

     정말이지.

     ‘황제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봤는데, 안 되더라.

     이번에는 통할까.

     그렇다면, 정말 좋을텐데.

     “……아.”

     백은의 향기에 취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었지.”

     전방.

     내가 시선을 보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기사들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봐. 나머지.”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경악으로.

     “도망가면 고통스럽게 죽여주고, 안 도망가면 깔끔하게 한 번에 죽여주마. 어때. 괜찮은 조건이지? 지금, 좀 뛰기 귀찮은….”

     “으아아아ㅡㅡㅡ!!”

     “…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덤비는 놈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나.”

     이러니까 나라가 망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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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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