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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

       “…….”

       

       “…….”

       

       “……기, 기다리고 있었어?”

       

       한참을 기다려도 말이 없어서 내가 그렇게 물어봤더니, 신소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아니, 기다린 거 맞는 것 같은데.

       

       다니는 학교도 여기랑 정 반대면서. 하교하는 길에 들렀다고 하기에도 이상한 방향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 아니라면, 일부러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 외에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어, 아니, 그게.”

       

       무엇보다 ‘딱히’라고 대답한 주제에, 신소희의 표정이 엄청나게 언짢아 보였다. 한쪽 눈썹을 슬쩍 밀어 올리면서 나를 삐뚜름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니, 따지자면 할 말이 있어 보이기보다는 들을 말이 있어 보인다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다.

       

       “먼저 연락했으면 굳이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불안하게 손가락 끝을 마주대며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신소희가 피식 웃었다. 무표정하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꽤 자연스러운 웃음이라 순간 마음을 놓았지만—

       

       “아~ 연락?”

       

       그리고 어깨를 한 번 더 으쓱해 보인 뒤,

       

       “그거 내가 생각을 못 했네. 분명히 어제 내가 ‘다음엔 내가 살게,’라고 말을 했고, 너는 웃으면서 ‘기대하고 있을게’라고 대답한 건 기억하긴 하지만, 이상하게 내 머리에는 너에게 너의 연락처를 받은 기억은 없단 말야.”

       

       엑.

       

       “혹시 내가 받아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나 해서 폰을 뒤져봐도 네 이름은 없는 거 같고.”

       

       신소희는 내 눈앞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네. 생각해보니 나는 얘한테 내 번호를 준 적이 없었다.

       

       줄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신소희를 무시하거나 싫어해서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평소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평소에는 거의 항상 양혜인의 메이드복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고, 심지어 학교에 나올 때도 그냥 양혜인 주머니에 있는 채 그대로였으니까.

       

       예사라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는데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회장이었다. 당연히 바깥에 다닐 때 누군가와 연락할 수단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막을 생각이었던 거겠지.

       

       설마설마 담을 넘어서 도망 다닐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만.

       

       뭐, 예사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길들여진 존재였으니 그렇게 방심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만약 어제 양혜인이 회장에게 내 기행을 보고했다면 감시역이 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뭐,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대책을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흐, 그게…….”

       

       쌀쌀한 거리에서 나를 계속 기다리느라 짜증이 한가득 난 것으로 보이는 신소희에게 어떻게든 변명하려고 입을 여는데—

       

       탁, 하고 유하늘이 내 옆에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마치 체육 시간의 멀리 뛰기라도 하는 것 같은 포즈로 척 떨어진 유하늘은 그 짧은 순간에 나와 신소희 사이의 묘하게 냉랭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어색한 투명 오토바이 자세 그대로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니?”

       

       당연히 신소희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로 유하늘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아, 아니다.”

       

       신소희는 한숨을 푹 쉬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별일 아니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래……?”

       

       유하늘은 별로 믿지는 않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굳이 이야기를 캐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탁.

       

       마지막으로 이수아가 뛰어내렸다. 유하늘만큼이나 깔끔하게 자세를 잡아내는 그 모습은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녕?”

       

       이수아는 눈앞에 신소희가 있는 것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인사했다.

       

       “어, 그래…….”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제일 평범한 인물인 신소희는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

       

       아무튼,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대로 신소희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연락처가 없어서 직접 찾아온 김에 얼른 처리하고 싶다니, 우리가 딱히 거절할만한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뿐이었으니까. 나는 지금 당장 지갑도 없었다. 얘네들이 어디로 가서 논다고 해도 낼 돈이 없다는 뜻이었다.

       

       ……대한민국 재계 1위 집안의 영애치고는 참 우울한 이야기이기는 하다만, 예사라가 처한 환경이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어제 먹은 것을 갚겠다는 신소희의 말 덕분에 내가 돈을 써야 할 일은 없었지만.

       

       사실 얻어먹기가 조금 미안하긴 했다. 나로선 어제 대접한 식사는 내 돈을 썼다는 기분이 들진 않았으니까. 설령 그 저택이 정말로 나의 소유이고 내가 가진 돈으로 그곳을 관리하는 돈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는 철저하게 서민이었던 나는 내가 직접 결제한 돈이 아니라면 뭔가 돈이 나간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려웠다.

       

       내 추청 자산을 생각하면 그 정도 돈은 나가도 ‘진짜로’ 체감이 어렵기도 했고.

       

       그런데 신소희한테 그런 말을 하면서 거절하면 기분이 엄청 상하겠지.

       

       사실 신소희도 스스로 못사는 집이라고 하기에는 최소 중산층 이상이다. 일단 화영 고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땅값 비싼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CG로 보여진 집 구조도 그렇게 좁아 보이지는 않았고. 그런데 예사라의 뒷설정은 신소희의 집안 사정은 둘째치고, 화영 고등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를 ‘서민’취급해버릴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냥 입 다물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자.

       

       신소희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근처의 번화가였다. 지하철 환승이 가능한 큼지막한 전철역도 있고, 당연히 그 지하철 라인을 따라 역세권이 밀집해있는 곳이었다. 잘 찾아보면 비싸디비싼 고급 식당도 몇 개 있다.

       

       혹시 조금 무리해서라도 비싼 음식을 먹여보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뒤를 따르고 있는데, 앞장서서 걷던 신소희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자, 여기야.”

       

       신소희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나온 곳은—

       

       흔하디흔한 햄버거 프랜차이즈였다.

       

       아, 그렇다고 전 세계에서 제일 매장 수가 많다는 그 노란 M자 간판이 달려있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예전부터 가성비로 유명한 그 치킨버거 파는 곳이다. 요즘이야 조금 그 빛이 바랬다고 하지만, 그래도 매장에 따라 여전히 가성비 하나만큼은 적절하다고 불리는 그 국산 프랜차이즈. M사 매장도 없고 L사 매장도 없는 군부대 앞이라도 이상하게 하나쯤은 매장이 있다는 그 치킨버거 브랜드.

       

       “어…….”

       

       내가 조금 벙찐 표정을 짓자, 신소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때, 너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겠지?”

       

       아, 이제야 알겠다.

       

       보통 로맨스 만화나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서민-재벌 커플이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 서민이 보여주는 음식을 보고 무시하던 재벌이 억지로 한 입 먹은 뒤 그 음식에 중독된 듯 먹는 클리셰.

       

       사실 이건 굳이 매체가 아니더라도 몇몇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편견이었다.

       

       하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편견’일 뿐이다. 어느 사회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돈 많은 사람들은 서민들이 즐기는 유희부터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사치까지 전부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부자라고 해서 라면 안 끓여먹고 치킨 안시켜 먹는다는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빈도수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다만.

       

       뭐, 예사라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는 있겠다. 얘는 정말로 자기 저택에 갇혀서 주는 대로만 먹고 자랐으니까.

       

       문제는 내가 예사라가 아니라는 것일 뿐.

       

       어린 시절에 반지하에서도 살아봤고, 심지어 이쪽으로 오기 전에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수십 년 된 빌라에서 거주하던 아주 사전적인 의미의 흙수저였던 나는, 당연히 가성비 넘치던 이 브랜드를 안 먹어봤을 리가 없다. 굳이 이 브랜드만 한정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서민들이 어린 시절부터 접할만한 유희나 음식들은 거의 다 접해봤다. 그야 당연히 내가 서민이었으니까!

       

       아마 재산으로 따지면 신소희보다도 없었을걸?

       

       나는 신소희의 뒤를 따라온 나머지 두 명의 얼굴을 보았다.

       

       다행히 이수아는 이런 곳에는 한 번도 안 와 봤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배경이 한국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살던 한국과는 상식이 다소 다른 곳이다. ‘부자 아가씨 클리셰’라면 당연히 있겠지. 게다가 이수아는 서민 장학생인 유하늘 입장에서 공략하는 캐릭터였다. 내가 직접 게임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 서민-재벌 커플의 클리셰 이벤트 한 번 정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유하늘이었다.

       

       똑똑하고 공감력 좋은 유하늘답게, 그녀는 신소희가 어째서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얘도 서민 가정의 아이라는 것이다. 장학생으로 들어가서 학비 걱정이 덜할 뿐이지, 당연히 다른 화영 고등학교 아이들과는 다르게 웬만한 서민 문화는 다 즐겨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신소희야 당연히 우리와 같은 교복을 입은 유하늘도 엄청 좋은 집안의 영애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유하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

       

       나는 잠깐 고민했다.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먹어봤다고 할까? 어차피 부잣집에 살고 있으니까, 대충 궁금해서 배달해 먹어본 적이 있다고 하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신소희의 얼굴이 너무 자신만만했다.

       

       아마 자기 나름대로 고르고 골랐을 텐데.

       

       게다가 신소희도 부잣집 아가씨가 서민 음식에 감탄하는 이벤트를 생각하고 여기로 왔을 것이 분명하고.

       

       내가 이미 먹어본 적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엄청나게 실망할 거다.

       

       “……아니.”

       

       나는 결국,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씨익 웃어 보이는 신소희를 보며 생각했다.

       

       아, 그냥 거짓말하지 말걸, 하고.

       

       *

       

       “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신소희의 눈을 슬쩍 피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맛있다고! 맛있어, 이거! 와~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신소희의 표정이 점점 시무룩해졌다.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그래. 맛있었다. 당연히 맛있지! 닭다리살 치킨 패티에 소스, 양상추, 피클, 양파가 들어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지!

       

       그런데 이미 먹어본 맛인 걸 어쩌라고! 이미 알고 있는 맛인데 마치 처음 먹어본 것 마냥 감탄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한참 바라보던 신소희는,

       

       “하아…….”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하긴, 치킨이라면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먹어봤을 수도 있지. 역시 고기류를 고른 게 잘못이었나……?”

       

       그리고 혼자 원인을 분석했다.

       

       어, 아니, 그런 거 아닐 텐데. 물론 치킨이 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버거 형태로 먹은 적은 없었다. 보통은 비싼 양식 식당 같은 메뉴들이 나왔으니까.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한 입 더 먹으려는데, 신소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손에 쥐어진 치킨버거를 빼앗았다.

       

       설마 맛없게 먹을 거면 먹지 말라는 건가……?

       

       내가 경악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신소희는 그 버거를 탁 내려놓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너, 그렇게 많이 못 먹잖아. 이거 하나 다 먹으면 다음 메뉴는 입에도 못 댈 거면서.”

       

       다음 메뉴……?

       

       “오늘, 너가 먹고 만족할만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계속 돌 거거든.”

       

       아니, 만족했어. 만족했다고!

       

       그냥 감탄하지 않았을 뿐이야!

       

       물론, 이미 거짓말을 한 입장에서 인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수아와 유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수아는 아가씨 캐릭터답게 눈을 반짝이며 햄버거를 한입씩 베어먹고 있었지만—

       

       신소희의 그 선언을 들은 유하늘은 여전히 눈동자를 떨면서 반쯤 먹은 햄버거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긴 힘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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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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