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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1

       엔리가 키득거리는 소리를 지나쳐 VR룸 한 켠에 있는 거울을 보자 곰방대를 문 내 모습이 비친다.

       

       현실과 달라진 점은 무복을 입었다는 것 뿐이다만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천마로서 군림하던 세월이 오래 되어서 그런 것일까. 무게를 잡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방송 시작도 안 했는데 오천 명이 몰렸네요. 아라 씨. 인기 넘치시는 데요?”

       

       콧노래를 부르는 엔리에게서는 일말의 긴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천의 관객을 앞에 두고 있는데 저리 여유로울 수 있다니.

       

       공포게임을 할 때에는 겁쟁이가 따로 없었는데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하니 장군이 따로 없어 졌구나.

       

       믿음직스러워서 마음에 든다. 엔리.

       

       “아. 참. 엔리. 시작하기 전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뭔데요?”

       “그대는 어찌 그 많은 사람들과 여유로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

       

       나는 지금 엔리에게 많은 것을 맡긴 입장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함으로써 그녀의 짐을 덜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방송에 문외한인 나라도 할 수 있을 만한 건 나를 보러 온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일 테니.

       

       “별 요령은 없어요. 그냥 올라오는 것 중에서 원하는 거만 읽고 대답하면 돼요.”

       “내 멋대로 하라는 것이구나.”

       

       그거라면 자신 있지.

       

       내 천마신교에서 떠 받들어 질 무렵 매일 하던 것이 그런 일이니 말이다.

       

       장로들의 헛소리를 흘려보내듯 채팅창의 헛소리도 흘려보내면 되겠구나.

       

       “아라 씨 옆에도 채팅창 띄워 드릴까요?”

       “그리 해다오.”

       

       이미 방송의 채팅창에선 사람들이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나라는 사람에 대한 기대였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나라는 사람이 보여 줄 내용에 대한 순수한 기대 말이다.

       

       이런 걸 받아보는 건 처음이군. 내게 다가오던 기대는 대개 다른 의도를 담고 있었으니까.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

       

       텅 빈 집 안에 돌아온 배인석은 허물을 벗듯 바닥에 옷을 내던지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위에서는 갈궈대고 아래에서는 문제를 일으키고. 언제 쯤이면 중간관리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본래라면 아피스에 접속해 검을 휘두르며 스트레스를 풀었을 그였으나 오늘은 VR기기를 착용하지 않았다.

       

       시작을 기다리는 방송이 있었기에.

       

       얼마 전 평소처럼 아피스를 즐기던 그는 한 유저를 만났다.

       

       지금 모든 아피스 커뮤니티 화제의 중심이 된 사람. 화령.

       

       당시 화령은 종이처럼 깨끗한 전적을 가진 뉴비였다.

       

       그러나 평범한 뉴비는 아니었다. 나름 아피스의 고인물이라 자부하는 인석을 가지고 놀 정도로 재능 있는 뉴비였지.

       

       그 날 인석은 화령이 얼마 안 가 유명해지리라 생각했다. 그 어떤 천마 유저보다도 천마 같은 그녀에게는 그만한 매력이 있었으니까.

       

       화령과 헤어진 후 인석은 시간이 날 때마다 커뮤니티를 뒤지며 화령의 흔적을 쫓았다.

       

       데케이의 방송에서 외신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았고.

       

       여러 커뮤니티에서 화령에게 당한 사람들의 원망을 들었고.

       

       천마가 삼장로를 쓰러트리는 영상은 수십 번도 넘게 돌려 보았다.

       

       그는 이미 화령의 열렬한 팬이었다. 

       

       방송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화령이 나오기로 한 엔리의 방송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 있었다.

       

       채팅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화령이라는 유저에게 호기심을 느낀 이들이었다.

       

       – 엔리는 어떻게 화령을 섭외한거야? 이 사람 알려진 거 없잖아.

       – 나도 궁금하네. 화령은 친추고 뭐고 아무것도 안 받는다던데.

       

       방송이 켜지길 기다리던 인석의 눈가에 채팅창의 글이 들어왔다.

       

       저건 나도 궁금한데.

       

       – 지난 번에 엔리 방송에 나왔던 여우 씨가 화령이라는 말이 있음.

       – 여우 씨는 누군데 씹덕아. 알아듣게 말해라.

       – 마이 튜브에 엔리 파공장 검색해봐. 바로 나올 걸.

       

       창을 하나 더 띄워 검색하자 바로 영상이 나왔다.

       

       “벌써 조회수가 백만이네.”

       

       이름 있는 마이 튜버의 영상도 아니었다. 엔리의 팬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대충 편집해 만든 클립의 조회수가 백만이 넘은 것이다.

       

       영상의 제목은 보스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법이었다.

       

       인석도 인터넷 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이라 파공장의 악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VR공포게임의 걸작이자 기절제조기. 언젠간 이 게임을 하다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나올 것이란 소리를 듣는 악몽 같은 게임.

       

       이전에 인석은 마이 튜브로 파공장의 영상을 보다 무서워서 끈 적이 있는 프로 겁쟁이였다.

       

       파공장의 보스면 신사곰이지? 그 추격전 진짜 더럽게 무서웠는데.

       

       차마 영상의 시작버튼을 누르지 못한 그는 아래로 내려 댓글부터 확인해 보았다.

       

       <신사곰이 불쌍해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단언컨대 장난감을 장난감으로 만드는 영상.>

       

       하나 같이 신사곰을 동정하는 여론뿐이었다. 여우 씨라는 사람이 뭘 했길래 이런 반응인 거야?

       

       결국 인석은 호기심에 못 이겨 영상을 시작했다.

       

       영상은 어느 방에서 시작되었다.

       

       닫힌 문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고, 엔리는 머리를 쥐어 싸맨 채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운데에 여우 가면을 쓴 여자가 있었다.

       

       저 사람이 여우 씨인가?

       

       콰앙!

       

       얼마 안 가 문이 날아가며 곰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엑.”

       

       활짝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이빨의 향연에 인석이 앓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 배고파 죽을 거 같았는데 식욕을 싹 날아가게 해주네. 이 영상만 있으면 다이어트도 할 수 있겠다. 불면증도 같이 오겠지만.

       

       신사곰의 등장에 엔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지만 여우 씨는 달랐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신사곰에게로 다가갔다.

       

       미끼가 될 생각인가? 그래봐야 시간을 길게 끌진 못할 텐데.

       

       곰인형은 제 발로 다가온 사냥감을 도끼로 반겨주었다. 도끼가 저 위로 들리고 이내 장작을 패듯 아래로 꽂…

       

       히지 않았다.

       

       여우 씨는 신사곰의 손목을 붙잡더니 유도를 하듯 매쳐버렸다.

       

       쿠웅!

       

       곰인형의 등이 바닥에 떨어진 후 연이어 도끼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침묵이 방 안에 자리 잡았다. 황당함이 만들어 낸 침묵이었다.

       

       그 후 여우 씨는 신사곰을 정말 인형 다루듯 가지고 놀았다.

       

       매치고. 집어 던지고. 넘어 트리고.

       

       인석은 자신이 알던 공포의 존재였던 곰신사가 저 인형과 똑같은 존재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멍한 눈으로 영상을 구경하던 인석은 저도 모르게 영상을 다시 한 번 틀었다.

       

       이번에 그는 여우 씨라는 사람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인석은 저게 왜 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알기로 곰신사의 무게는 수백 키로에 달했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 넘어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근데 어떻게.

       

       “엔하! 오늘따라 시청자 분들이 많네요!”

       

       인석의 생각은 밝은 여성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그는 즉시 마이 튜브를 끄고 다시 터렛을 켰다.

       

       터렛의 방송화면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쪽은 엔리였다.

       

       백금 색의 머리카락과 밝은 청색의 눈동자. 본인의 현실 외모와 똑같이 커마를 한 것으로 유명한 엔리였기에 인석도 그녀의 아바타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저 쪽이.

       

       화령의 VR아바타를 본 순간 인석은 기시감을 느꼈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백색의 무복과 무복보다도 새하얀 피부.

       

       아래를 내려다 보는 오만한 눈빛과 그 속에 선명히 자리 잡은 검은 색의 눈동자.

       

       저건 아피스의 천마 잖아.

       

       분명했다.

       

       아피스 속 캐릭터보다 머리카락이 깔끔해졌고, 눈빛이 조금 더 선명해 졌지만 확실하다. 

       

       인석이 요 며칠 간 천마 캐릭터를 몇 번이나 봤는데 착각을 하겠는가.

       

       “오늘의 컨텐츠는 바로바로 장인 초대석입니다!

       

       옆에 계신 분은 최근 아피스 커뮤니티의 주인공이 되신 분이죠?

       

       천마 부캐라는 별명으로 시작해 진짜 천마가 되어가는 중인 유저. 화령님입니다!“

       

       엔리의 호들갑스러운 소개가 끝나고 나서야 여성이 곰방대를 입에서 땠다.

       

       그녀는 조금의 긴장도 느끼지 않는 듯 여유로히 연기를 뱉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네. 본인은 천마 백화령이라고 하네.”

       

       여태 천마를 자칭한 스트리머는 수도 없이 많았다.

       

       천마는 어렵지만 멋 하나는 끝장나는 캐릭터였다.

       

       당연 장인보다는 충이라 부르는 게 맞을 수많은 원챔 유저들을 양성했고, 대다수의 천마 유저는 본인이 진짜 천마라 외치고 다녔다.

       

       상황이 이러니 누군가가 천마를 자칭한다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웃음이었다.

       

       단 한 사람.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게이머이자 살아있는 천마라 불리는 한서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 화령이 천마를 자칭했을 때도 부정적인 반응이 나와야 했지만 채팅창은 고요했다.

       

       거의 모든 이들이 감탄사만을 내뱉고 있었다.

       

       – 눈나. 나 죽어.

       – 목소리 봐라. 진짜 지릴 것 같다.

       – 곰방대 뭔데 절케 잘 어울리냐.

       – 아피스에서 그대로 나온 것 같네. 저게 그 메소드라는 거냐.

       

       그도 그럴 것이 화면 속의 여성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천마처럼 보였으니까.

       

       단순히 컨셉을 잘 잡았다 수준이 아니었다.

       

       시선을 주는 것도. 손을 움직이는 것도.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어투 하나하나조차도.

       

       화령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그녀를 천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가끔 가다 지가 뭔데 천마라 그러냐고 투정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채팅창의 화력 앞에 의견을 피력하지도 못하고 사라질 뿐이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어색하다만 다들 환영을 해주어 기쁘네. 나를 초대해 준 엔리에게도 감사하군.”

       “다 제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걸요.”

       

       화령은 단언컨대 지금 가장 뜨거운 인물이었다.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시청자 수가 가볍게 만을 돌파한 것이 그를 증명했다.

       

       인터뷰를 위해서인지 구독과 후원은 꺼져 있었지만 방송의 광고 수익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이 영상이 마이 튜브에 편집되어 올라가면 그 조회수는 얼마나 될까. 가볍게 백만을 넘기지 않을까.

       

       “다들 화령 씨의 플레이를 기대하고 오셨겠지만. 일단은 먼저 인터뷰부터 진행을 할게요. 다들 궁금해 한 게 많잖아요?”

       “내 성심성의껏 답변할 것을 약조하지.”

       “감사합니다. 우선 화령 씨는 아피스의 뉴비라고 알려졌는데요. 혹시 다른 VR게임을 하다 오신 분이신가요?”

       “아닐세. 내 VR기기를 산지가 한 달이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야.”

       

       VR자체가 생소한 사람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채팅창의 반응은 인석의 생각과 비슷했다.

       

       – ?

       – 아피스가 첫 게임이란 소리임?

       – 컨셉충이잖아. 적당히 걸러 들어.

       – 맞음. 컨셉에 미쳐버린 사람이 어케 VR뉴비임. 말도 안 되지.

       

       사람들은 화령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거지가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대 VR시대를 맞이하며 인터넷 세상엔 여러 컨셉러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말과 행동 뿐만 아니라. 외모나 목소리조차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과몰입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지 않은가.

       

       중2병들은 자신의 흑역사를 캐릭터로 만들어 만천하에 공개했다.

       

       오타쿠들은 자신이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어딘가에는 진실로 암컷타락을 해버린 불쌍한 남자도 있었다.

       

       VR시대가 되고서 시간이 오래 흐른 지금 사람들은 다들 컨셉러에게 익숙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기에 화령은 훌륭한 컨셉러 중 한 명이었다.

       

       저토록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VR이 처음이라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차라리 저 사람이 무림에서 날아온 진짜 천마라는 말을 믿고 말지.

       

       채팅창이 어떤 반응을 하건 간에 인터뷰는 계속 진행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5백명이 코 앞! 여러분 덕분에 글 쓸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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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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