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1

성국 젠더는 진실됨을 미덕으로 삼는 유일신 어니스트를 섬기는 종교 국가이다.

이 어니스트교는 최초의 교황이 신으로부터 내려받은 힘으로 마족을 몰아냄으로써 지지를 모아. 마침내 대륙 유일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 성국의 중심이자 랜드마크인 트랜스 대성당은. 궁전을 연상케 하는 새하얗고 아름다운 자태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평소에는 철저히 외부인을 금하고. 주일에만 대대적으로 개방하여 예배를 진행한다.

‘차라리 나도 기절시켜 줘···.’

이런 장엄한 배경을 업은 성지는 당연하게도 시대의 흐름에 쉬이 굴복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게 100년이 지나도록 생략은커녕 간소화된 절차 하나 없더라. 양어깨가 일행들 베개로 쓰일 동안 나 혼자 정신 말똥하게 버텼다.

찬송가만 몇 곡을 부르는지, 일주일 치를 몰아서 하는 느낌이다. 우리 마리아 초코빵 먹이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냠.”

그래도 막상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내심 또 뿌듯하다.

나는 원래 못 먹고, 아스트레아는 단 건 별로라 하여. 세 개를 독차지한 마리아는 흡사 다람쥐로 돌변했다.

그래,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다.

“그리 먹다간 금세 살이 찔지도 모르는 것이니라?”

“마리아, 살 안 찌는 체질. 먹어도 다 가슴으로 갈 거야.”

“흐응. 아해도 이 몸의 우월함이 부러웠더냐?”

이것들이 대성당에서 뭔 대화를 나누는 거야.

“마리아, 오빠가 안 썩게 보존해 둘 테니까 나중에 마저 먹자. 아침도 먹었잖아.”

“오빠 여자 만날 생각에 신나서 서두른다.”

“부탁이니까 성녀님 앞에서만이라도 그러지들 말아다오···”

“이보게 그대, 왜 이 몸까지 싸잡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느냐?”

그야 싸잡아서 말했으니까. 이 대성당 안에서 지 가슴 부여잡고 어린애한테 과시하는 여자야.

얘는 자기가 주요 우려 대상이라는 건 아마 꿈에도 모를 거다. 마리아는 그래도 황족한테는 존댓말을 쓰는 등, 사리 분별은 잘하던데.

한숨으로 답을 대신하곤 달아나듯 앞장서 걸었다. 제발, 제발 성녀한테 천마신교 전도만 안 하기를.

* * *

“그러니까 이게···황궁 서고관의 추천장이란 말입니까?”

“네. 혹시 뭔가 착오라도 있나요?”

일행이 성녀한테 실례를 범하는 걸 걱정했건만.

심상찮은 애들이 애지중지하는 딸한테 가는 걸 어니스트께서 아셨는지, 발을 채 들이기도 전에 입구에서부터 붙잡혔다.

“그, 확실히 추천장 자체는 황궁 물건이기는 한데···. 사인이고 도장이고 전부 심하게 휘갈기고 번져서 식별이 안 됩니다.”

“아아···”

그리고 신을 탓하면 보통 인간이 원인이고 잘못인 법.

추천장을 돌려받고 밖으로 나섰다.

“오빠. 이제 어떡해. 우리 성녀님 못 만나?”

“괜찮아. 방법이 다 있어.”

트랜스 대성당이 예배 절차의 근본을 지켰듯. 100년 넘게 거의 그대로 보존된 젠더의 길거리를 능숙하게 나아갔다.

“이 근처 어디에 분명···여깄다.”

내가 찾은 건 길목에 배치된 공용 통신구.

각 지역으로의 이동마다 통신구를 비롯한 아티펙트의 소지가 제한되기에.

제도는 물론, 성국 길거리에도 곳곳마다 이렇게 놓여 있다. 그냥 공중전화랑 똑같다.

“누구랑 통화하게?”

“세피로트.”

약점도 잡았겠다,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진작에 연락처도 따놨다.

그렇다고 나는 아무 때나 부려 먹을 심산은 아니었는데. 당사자가 이렇게 연락할 구실을 만들어줬네.

[화, 황궁 서고관···세피로트, 입니다···.]

“아, 네. 서고관님. 오랜만이네요.”

세피로트한테 받은 코드를 기입하기가 무섭게. 수신을 위한 지연 시간을 제하면 사실상 걸자마자 연결되었다.

어차피 한가하기도 할 거고. 누가 걸었을지 대충 짐작이 가서 허겁지겁 받았을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저, 저기이···제 손 브라 사진, 이 사라졌는데···]

“혹시 제가 가져갔냐고요? 그보다도 제가 왜 연락을 걸었냐면요.”

[우으으···]

꺼내서 보여줄까 하다가 참았다.

이건 대놓고 밝히기보단, 어느 쪽일지 확실치 않게 흔들어 놓는 게 더 미치게 해서 효과적이다.

인벤토리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니 도난 방면으로도 완벽하다.

“서고관님이 저한테 추천장을 써주셨었잖아요?”

[네에···그랬, 죠···?]

“근데 이게 사인도 도장도 상태가 엉망이라 빠꾸 먹었지 뭐예요. 어찌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던지.”

[예···? 에, 에에···?]

세피로트의 추천장은 내가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이자 약속의 증표다.

그런데 그걸 원활히 사용하지 못한 걸 넘어, 성국을 상대로 눈치까지 보게 되었다. 심지어 온전히 그녀의 과실로 인해.

“이렇게 되면 뭐···”

약속, 그러니까 비밀을 지켜주기에 곤란하다.

한쪽에서 먼저 신뢰가 깨졌으니, 다른 곳에서도 깨지는 것이 합당하리라.

이를 굳이 형언하지 않고 뒷말을 늘이는 것만으로도. 대마법사의 두뇌는 간단히 그 이치에 도달하였다.

[!@#$%^ 제, 제가 당장···거기로 갈, 게요···!!! 어, 어디신···가요??]

“에이. 바쁘신 우리 서고관님을 번거롭게 해드릴 수는 없죠.”

서고관씩이나 되시는 분이 번거롭게 행차하지 마시고, 거기서 소문 퍼지는 거나 얌전히 관람하시란 뜻이다.

세피로트가 울먹, 이다가 아예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을 시작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제가 잘못, 했어요···!! 제가, 갈게요···제발 가게 해, 주세요···!!]

“외간 남자한테 제발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다니. 어린 처자가 벌써부터 안 됐느니라.”

“심지어 말만으로 조교했어. 이런 건 인형술사인 마리아도 못 해.”

놀리는 건 이쯤 해둘까. 명색이 황궁 서고관인데 너무 깎아내리기만 해서 좋을 건 없었다.

무엇보다 이쯤 했으면 본인이 하도 하고 싶어 해서 그런 걸로 치부 가능할 거고.

“저희 지금 트랜스 대성당 근처 여관 앞에 있어요.”

“우와악···!!”

위치를 알려준 즉시 허공에서 포탈이 열려. 거기에서 세피로트가 추락하다시피 나타났다.

아니, 철푸덕 소리까지 내며 화려하게 추락했다. 순간 무슨 쓰레기라도 버린 줄 알았다.

“바, 바로 가요···! 제가 확실, 확실하게···보증해 드릴, 게요···!!”

그러나 이미 우리한테 온갖 꼴을 다 보인 세피로트는 그런 건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나 곧장 대성당으로 갈 것을 청했다.

“아이고. 마리아, 서고관님 먼지라도 털어드려.”

“응.”

“자, 잠깐···거기는 왜, 건드시는···하윽?!!”

“이 언니도···가슴 커. 우우.”

세피로트를 거지꼴에서 좀 지저분한 사람꼴로는 만들어준 뒤. 발걸음을 재차 대성당으로 옮겼다.

평소 서고에만 틀어박혀 계시는 서고관님이신지라, 도중에 그녀를 알아보는 이는 다행히 없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대성당에 도착한 세피로트는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곤. 자신만 아까 그 신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다시 나온 건 대략 5분 정도가 흐른 이후였다.

“이, 이제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장담하는 말에 다시 들어섰을 땐. 우리를 막아 세웠던 신부는 구석에 찌그러진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대충 황실의 위신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 뒤따르는 거듭 사죄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난 분명 추천장 관련 해명만 부탁했어.

“기, 기다리시긴···해야 할 거, 예요···. 성녀님께서···환자를 치, 치료···하시고 계신, 대요···.”

“그거면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손님 왔다고 얘기 넣는 것까지 어련히 했겠고. 고해성사면 모를까, 환자 치료는 얼마 안 걸릴 거다.

“그으···제 사진, 말인데요···.”

“네? 무슨 사진이요?!! 혹시 서고관님이···”

“입 다물, 게요···!! 부디 큰 소리로···얘기하지 말아주, 세요···!!!”

정작 더 시끄럽게 떠들던 세피로트가 후다닥 포탈 너머로 도망쳤다.

괜히 자극하는 것보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낫다고 본 거겠지. 과연 대마법사다운 판단이다.

“성녀님을 만나 뵈러 오셨다는 분들이시군요. 안내하겠습니다.”

한편. 조용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타이밍 좋게 대주교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성녀를 만나러 왔다지만 자그마치 대주교의 직접 등판이라니. 세피로트가 깽판을 치긴 제대로 쳤나 보다.

“여기 앉아 기다리시면 됩니다. 성녀님께서 어린 양을 굽어살피시는 중이시니,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 극진한 말투와 태도는 관용에 의한 걸까, 두려움에 의한 걸까.

복슬복슬 대형견 세피로트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려 그랬다.

“끄악, 끄아아악-!!”

“무, 무슨 일이죠?? 뭔가 사고라도 터졌나요??”

“성녀님의 치료 과정에서는 으레 있는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길.”

물결 한 점 안 이는 태연함을 보면 전자 같기도 하다.

근데 이게 성녀에 의해서 나는 소리라고?

여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보였는지. 대주교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대의 성녀님께선 질병이나 저주에 대항하는 은혜를 하사받지 못하셨습니다.”

“네? 제가 듣기론 성녀님은 분명 불세출의 천재시라고···?”

“예. 비록 질병이나 저주 등에는 취약하시나. 육체나 영혼을 수복하는 능력만큼은 역대 그 어느 성녀보다도 뛰어나십니다.”

···그렇다는 말은 설마.

“끄아아아-!!!”

“으음. 전신에 마기로 오염된 환자라 그런지, 확실히 평소보다 소란스럽긴 하군요.”

비명을 지르는 저 사람은 오염된 부분, 그러니까 전신을 작살낸 다음. 다시 온전하게 수복하는 방식으로 치료 중이란 건가···?

“예. 아마 지금 생각하고 계실 그게 맞을 겁니다.”

대주교는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탈모도 성녀님께서 고쳐주셨지요.”

‘이런 미친.’

멋쩍게 갈색 머릿결을 자랑하는 대주교를 보고 확신이 들었다.

대주교의 초연함은 다른 데 비결이 있는 게 아니었다. 성녀를 모시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마개조된 거다.

‘이 세계에 마취제가···있던가?’

내가 기억하기론 없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비명이 들려오는 걸 보면,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네가 무슨 성녀냐고 타박했던 100년 전 지인에게, 속으로 작은 사과의 말을 전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가 잘못 써줘 놓고 남의 탓탓
다음화 보기


           


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