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1

       21.

       

       

       “…저는 에제르니어엘 벨카드로스입니다. 혹 벨카르드로스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지요, 살아있는 죽음이시여?”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달빛조차도 세상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눈에 파묻혀버릴 밤이었지만, 그를 찾는 것을 어렵지 않았다. 핏빛의 안광을 흉흉하게 내뿜으며 목 없는 말을 타고 있는 자는 오로지 살아있는 죽음 하나뿐이다. 절벽 끝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마족들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제르피에드는 자신에게 다가온 네 명의 마족을 살펴보았다. 두 쌍의 남녀로 이루어진 그들은 모두 긴장에 얼어붙은 자들이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연히 기억하오, 벨카르드로스. 대악마의 칭호를 받은 드로우. 한때 그자와 계약을 맺은 적이 있소. 모든 종족을 억누르고 휘하의 동족과 함께 세계의 패자가 되기를 원했지.”

        

       네 명의 마족에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 오른다. 이번엔 여자의 옆에 있는 마족들이 차례대로 말을 걸었다.

        

       “저는 아젤 트라비에입니다. 살아있는 죽음이시여, 트라비에라는 이름은 기억이 나시는……!”

       “제 이름은 에시오노르 드라이카에요…!”

       “저는 레이테이아 라지엘…!”

        

       “알고 있소, 트라비에, 라지엘, 드라이카. 모두 벨카르드로스의 휘하에 있었던 장수들이었지.”

        

       두 쌍의 남녀는 서로를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피에드는 조용히 그들이 대악마와 장수들의 6대손 혹은 7대손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의 얼굴을 한번 훑으며 기억속의 모습과 그럭저럭 비슷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헌데 대악마와 그 장수들의 자손들이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어서 온것이오?”

        

       에제르넬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그에게 용건을 꺼냈다.

        

       “북진을 멈춰 주십시오. 살아있는 죽음이시여. 현재 다른 종족들이 당신과 대적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전 대륙이 그로인한 전란에 빠진 것도요. 당신을 비난하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과거 당신 덕분에 저희 드로우는 세계의 재패라는 꿈에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을 위상을 알리는데 성공했지요. 하지만 이 위쪽으로는 저희들의 터전입니다. 혹 그럴 일은 없겠지만 더 이상 북진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조를 받고 싶습니다.”

        

       제르피에드는 천천히 그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역시 기억 속의 얼굴들과 그럭저럭 비슷했다. 옛 기억을 마주한 것 같은, 그것과 비스무리한 느낌을 받으며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에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던 말이었기에, 그에 대한 답도 이전과 같았다.

        

       “몸을 피하시오.”

        

       당연히 그러지 않겠다는 약조를 생각하고 있던 에제르넬은 한 박자 늦게 대답해야 했다.

        

       “……예?”

       “몸을 피하시오. 북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오.”

        

       하지만 그의 말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시오. 적대할 의지가 없는 자들까지 공격할 생각은 없소.”

       “떠나라고?!”

        

       마지막 말은 아젤의 것이었다. 그의 눈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서 에시오노르와 레이테이아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어디로 말입니까?!”

       “세계의 북부는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고 남부는 역병이 들끓고 있어요! 그런데 떠나라고요?! 수백 년간 살아온 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라고요?”

       “……몸을 피하시오.”

        

       아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우리를 살려 둘 생각이 없는거로군. 다른 곳으로 가는게 자살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텐데. 다른 곳이 황무지로 변한 지 오래인데, 떠나라고? 하하하하……! 그나마 열매를 맺는 나무들과, 동물들이 사는 곳이 여기인데 다른 곳으로 가라고!!”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에시오노르도 마찬가지였다. 레이테이아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얼마나 꽉 깨물고 있는지 입술이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에제르넬은 그저 멍하니 제르피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아있는 죽음이 한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농담하시는거지요?”

        

       에제르넬이 무기력하게 질문했다. 제르피에드는 유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행동을 보는 순간, 에제르넬은 자신이 땅이 아닌 허공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르피에드는 진중하게 차분히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이번엔 어투에 확고함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활로임을 확실하게 알려야 했다.

        

       “몸을 피하시오. 나의 속도로 그대들이 기거하는 곳까지 도달하려면 닷새는 걸리겠지. 아무리 빨라도 사흘일 것이오. 그러니 하루빨리 몸을 피하시오. 나보다는 이곳에 기거하는 그대들이 지리를 더 잘 알 터이니.”

        

       구체적인 기한을 전한다면 보다 그들이 몸을 피하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최소한 사흘이라면 이곳을 몸을 빼는 데는 무리가 없는 기간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마족들이 그들이 기거하는 것으로 가 이 정보를 동족들과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미동도 없이 자신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들의 표정을 본 데스나이트는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하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고, 하나는 넋을 잃은 표정이었으며, 둘은 미친 듯이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둘 중 한 명은 입술을 터질듯이 깨물고 있었고, 나머지는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이오? 다시 한번 말하겠소. 하루빨리 몸을 피하도록 하시오.”

       “왜…라고…?”

        

       그것은 그들에게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몸을 피하라는 단순한 정보만 있던 그 사실은 구체적인 기한까지 정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들은 그 잔혹한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아젤은 미친듯이 웃었다. 꺽꺽거리며 웃던 그 남자는 웃었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검지로 제르피에드를 삿대질하며 거칠게 소리쳤다.

        

       “왜?! 왜냐고?! 그게 우리 보고 나가서 죽으라는 말과 뭐가 달라! 우리 드로우가 과거 세계의 제패를 선포했을 때, 너를 얼마나 믿고 따랐었는데!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 겨우 이거냐? 나가서 죽으라는 거?!”

        

       아젤의 몸에 마기가 둘러지기 시작했다. 눈에 핏발이 서며, 근육이 솟아오른다. 그가 등쪽에서 꺼낸 배틀 액스에 붉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날개를 펼치며 그는 제르피에드에게로 돌진했다.

        

       “이 배반자야!”

       “아젤! 잠깐…!”

        

       넋을 잃고 있다가 겨우 상황을 인지한 에제르넬이 그에게 손을 뻗었으나 이미 그는 자리를 박찬 후였다.

        

       제르피에드는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는 이 남자에게도 이전에 자신을 찾아온 마족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방도가 없었다. 그 마족들도 저 남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대우했으니. 그는 파르티잔을 한 번 휘둘렀다. 참격이 기괴한 소리로 포효하며 허공을 날아오른다. 건너편에 있던 절벽이 참격을 맞고서 내지르는 비명이 사방에 진동한다.

        

       -쿠구구궁!

        

       머리라는 중심을 잃어버린 몸은 비틀거리듯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잘려진 몸은 머리가 아직 있다고 착각하는 듯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에시오노르와 레이테이아가 비명을 지른 것이 머리가 잘려지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몸을 보았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 둘이 핏발 선 몸으로 데스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마기를 거의 한계치까지 두른 둘은 핏줄이 터져나갈듯한 몸을 하고 있었다. 또 다시 제르피에드는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일전의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휘둘렀다. 참격으로 인한 풍압이 요사스러운 소리를 내지른다.

        

       키이익!

        

       ‘……!’

        

       다음 순간, 제르피에드는 참격을 날리던 팔을 뒤틀 듯이 움직여야 했다. 벨카르드로스의 후손이 두 마족과 참격 사이로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간신히 뒤틀었지만, 이미 떠나가기 시작한 참격은 그 육중한 몸을 그다지 많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에제르넬은 울음도 나오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참격과 동료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막아야 했다. 무의미한 자살 행위였다. 아젤에 이어 둘까지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자신을 스치는 날카로운 참격의 바람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왼쪽이 화끈거렸다. 무기력한 몸은 너무나도 쉽게 뒤로 떠밀려졌다.

        

       공중으로 내던져진 그 아찔한 부유감 속에서 그녀는 간신히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였지만, 아젤과 같이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두 남녀의 형체를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녀가 스스로를 내던진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며 손을 뻗는 데스나이트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실소를 멈추기 힘들었다. 자신의 동료를 가볍게 참살해놓고, 자기한테는 손을 내미는 꼴이라니.

        

       그녀는 손을 뻗었으나, 데스나이트의 손을 붙잡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구하려고 내밀어진 그 손길을 가볍게 밀어버렸다. 에제르넬은 그렇게 절벽의 암흑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었다. 자신을 감싸 안는 암흑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눈물이 에제르넬의 뺨을 적셨다. 살아있는 죽음에게 멱살을 잡혀져 공중으로 들어올려진 그녀의 몸이 무력하게 들썩거렸다. 제압당한 그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팔다리를 볼썽사납게 놀리며 내려치는 것 뿐이다.

        

       “왜…나를 죽이지 않았었냐…! 왜 공격을 비껴 나가게 했어…! 왜 나만 살게 만들었냐고……!”

       “………적대할 의사가 없는 자들까지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반신을 거의 집어삼킬 듯이 혀를 날름거리던 불꽃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의지가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마신의 불꽃도 그 힘을 잃어갔다. 축 몸을 늘어뜨린 그녀를 제르피에드는 공동의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족들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수장을 지켜보았다. 반신인 그녀가 제압된 이상, 자신들이 달려들어봤자, 그녀를 구하지도 못하고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자조의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죽일거냐? 약 1, 000년전 내 동족을 죽였듯이 지금의 내 동족들도 그렇게 유린할거냐? 이제는 너를 공격했으니까?”

        

       땅바닥에 아무렇게 몸을 뉘인 채, 에제르넬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제르피에드는 입을 열었다. 한숨과도 같은 말이었다.

        

       “……에제르니어엘 벨카르드로스. 그대의 태조부는 명예를 아는 자였소. 벨카르드로스가 나에게 등을 맡긴 것처럼, 나도 그에게 나의 등을 맡기고 창을 휘두를 수 있었지. 트라비에, 라지엘, 드라이카…그들도 마찬가지였소.

        

       그 자들은 나의 옆에 있었고, 덕분에 나는 앞 만을 보며 진격할 수 있었소. 그러니 에제르니어엘 벨카르드로스. 우리를 그냥 보내 주시오. 내가 벨카르드로스와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도와 주시오.”

        

       “…명예? 크크큭…하하하…! 명예? 너가 감히 명예를 논해? 살려고 찾아간 우리를, 북진하지 말아달라고, 그저 살고 싶어 찾아간 우리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베어 놓고, 명예를 논한다고? 아니, 아니지…애초에 명예를 논한다는 새끼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냐? 그렇게 명예를 중시하시는 새끼가, 그 잘난 기사도에 따라 뒈져버리지 왜 여기에 두 다리 뻗고 서 있는 건데?”

        

       그 말에 살아있는 죽음의 몸은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열려고 했다. 열고 싶었다. 그저 마음가짐 뿐이었다. 그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가. 그는 그 말에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답한 것은 한 청아한 목소리였다. 제르피에드는 간신히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

        

       성녀는 그 청아한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였기에 에제르넬은 멍하니 되물어야했다.

        

       “뭐……?”

       “헛소리라고 했어요. 살려고 찾아갔다고요? 그저 살고 싶었다고요? 말도 안되는 헛소리하지 마세요.”

        

       “하…! 그저 살고 싶었던게 잘못이라는거야?”

        

       “당신들이 과거에 무슨 짓을 하셨는지 잊으셨나요? 대악마 벨카르드로스가 전 세계에 자신의 압제를 떨치려고 한 것을 잊어버렸나요? 그럼 그들은요? 당신들에게 맞선 다른 종족들은요? 그들은 살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들은 그저 목숨이 무의미하기에 버리려고 했던 건가요?

        

       기사님을 통해서 세계를 피로 물들여가며 패권을 쥐려고 해놓고,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생사대전때 반대의 입장이 되니 기사님을 비난해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중성이군요. 제가 비록 1, 000년은 살지 않은 애송이일 뿐이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당신들은 감히 기사님을 비난할 자격이 없어요.”

        

       그 싸늘하고 날카로운 말에 에제르넬은 웃음을 터뜨렸다. 쥐어짜는 듯한 웃음을 내뱉던 에제르넬은 에실리아에게 물었다. 빈정거림이 가득한 말이었다.

        

       “…정말 맹랑한 년이네. 너 성직자잖아. 성직자가 저 말도 안되는 언데드를 깨워서 데리고 다니는데, 결국 너도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뭐, 과거에 있던 신성제국을 다시 만들고 싶기라도 한건가? 그래서 그 전까지 너를 지켜 달라는 계약이라도 맺은 거야? 저 철 덩어리는 너가 저 녀석을 교화 시켰다는 본보기로 데리고 다니면서?”

        

       성녀의 입에서 떨리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결연한 말이었다.

        

       “……저는 살고 싶어요. 그저 그뿐이에요. …맞아요, 저는 성직자고 기사님을 깨웠다는 것 자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도 제 자신을 기사님에게 의탁하는 주제에 이분에게 비난을 물을 수 없을 거에요. 그러니,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당신들이나 저나 기사님을 비난할 수 없다고,”

        

       “……하.”

        

       에제르넬은 성녀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꾸가 아닌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야 했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거냐?”

        

       성녀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에제르넬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가리켰다. 에제르넬은 실소를 터뜨리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서 더 웃다가는 부상 입은 곳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태조부님의 유품이 목적이었냐?”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드리죠. 그 대가로 받아가겠어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성녀의 말에 답한 것은 켈크로드였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수장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모두? 모두를 어떻게 치유해? 저 바닥에 널려 있는 애들은 이미 죽었어. 거기다가 수백 명을 한꺼번에 치유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아니요, 죽지 않았어요.”

        

       에실리아는 더 말을 이어가는 대신 온몸에서 신성력을 발했다. 찬란한 금빛이 눈이 내리듯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켈크로드는 그런 세기의 신성력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기적을 목도한 것 마냥 시체처럼 널려 있는 자들의 상처가 붙고, 다시 생명력이 차오르는 걸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감지조차 하지 못했던 미약한 생명력을 그 와중에 정확히 데스나이트를 비껴서 내리는 금빛의 눈에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제르넬도 그 기적을 보며 황당함을 넘어서는 경이로움마저 느껴야 했다. 자신의 몸에 다시 차오르는 힘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 힘으로 살아있는 죽음을 이번에야말로 영멸 시키고 싶다는 유혹을 참으며,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비슷한 얼굴을 한 동족들이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놀라움에 빠진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한 일이다. 신성력이 정신적인 피로마저 해결해주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녀는 드로우의 수장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켈크로드에게 몸을 기대며 피로감이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다 꺼져버려. 다시는 여기에 오지마.”

        

       경쾌한 금속음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제르피에드가 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에실리아는 그를 지나쳐 자신의 앞에 떨어지는 은색의 목걸이를 허겁지겁 낚아채야 했다. 그런 그녀의 위로 데스나이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정제되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나가도록 하지.”

        

        

       –

        

        

       밖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장엄함을 깎아 만든 고대의 신전을 지나, 혹독한 칼바람에 버텨내어 용맹함으로 스스로를 날카롭게 벼려낸 얼어붙은 절벽들을 지나, 성녀와 데스나이트는 암흑을 은닉하고 있는 르바다임의 숲속으로 들어왔다. 다시 숲으로 들어서기 까지 데스나이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호위기사를 에실리아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모닥불에 몸을 쬐면서, 창백한 만월을 보고있는 데스나이트에게 성녀는 말했다.

        

       “…그래도 마침내 신성력을 막는 물품 가운데 하나를 얻었네요.”

       “…….”

       “…저…?”

       “……음? 미안하오. 뭐라고 하였소?”

       “…괜찮으세요?”

        

       제르피에드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성녀는 그것이 부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것은 부정의 행위가 아니라 잠을 쫓는 듯한, 상념을 없애는 듯한 동작에 가까웠다. 성녀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데스나이트에게 물었다.

        

       “기사님?”

        

       제르피에드는 몸을 흠칫 떨었다. 매우 작은 동작이었지만, 성녀는 그가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많이 본 동작이었으니까. 대성당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유하면서 저런 동작은 질리도록 보았다. 성녀는 앉아 있는 호위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사님, 정말 괜찮으신…….”

        

       성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보다 눈에 띄게 불안에 떠는 움찔거림이었다. 성녀는 덩달아 자신도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기사님? 대체 왜 그러시는…….”

       “에실리아,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제르피에드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기사…님…?”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듯 터져 나왔다. 몇 번 숨을 쉬던 제르피에드는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나는 그렇게 불릴 수 없소. 나는 감히 그 명예를 업으로 삼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호칭으로 불릴 만한 작자가 아니오….”

        

       성녀는 데스나이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단순한 직종으로서의 기사가 아닌, 명예를 추구하는 자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기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설 속이나 옛 이야기에 나오는 그 기사. 모든 기사라면 그러한 기사가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왜 지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제르니어엘의 말이 맞소. 내가 감히 명예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나 스스로의 실존만으로도 그것을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될 것이오…….”

        

       모닥불이 일렁인다. 어둠 속에 반 정도 잠겨버린 데스나이트의 형체를 짙은 음영이 더욱 집어삼킨다. 에실리아는 천천히 데스나이트의 갑주를 손으로 쓸었다.

        

       “무슨……?”

       “언데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아시오?”

        

       에실리아는 대강은 알고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성직자인 이상 기피할지라도 주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으니.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그녀의 답을 듣기도 전해 말을 했다. 마치 변명을 하려는 것 같았다.

        

       “보통의 언데드라면 사령술사가 스스로의 생명을 나누어 깃들게 한 다음 자신의 수하로 부리지. 하지만 나처럼 자아가 있는 언데드, 흔히 고위 언데드라 부르는 부류는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오. 자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술사가 아닌 대상의 의지를 깃들게 해야 하니. 그리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대상이 그것을 원해야 하오.”

        

       데스나이트는 더더욱 밤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시야에는 투구의 틈에서 일렁이는 핏빛 안광과 아무렇게 놓여진 발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에실리아는 띄엄띄엄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중얼거렸다.

        

       “그럼…당신을 누군가 언데드로 만들려고 할 때…그것을 원했다는……?”

       “오, 그것보다 더욱 끔찍하지.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이렇게 만들었소.”

        

       이제 보이는 것은 핏빛 안광뿐이었다.

        

       “아시겠소? 나는 스스로를 명예롭게 한다는, 마지막도 명예롭게 받아들인다는 기사도를 저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오. 나는 감히 그렇게 불릴 수 없겠지…너무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소…또 다시 그 사실을 보는 게 견디기 힘들어 애써 외면해 버린거야…나는….”

        

       뒤에 중얼거리는 자조 섞인 말들은 무슨 내용인지 완전히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성녀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성녀는 호위기사가 보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다른 게 아닌 그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성녀는 완고한 표정을 하고 자신의 호위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님.”

        

       핏빛 안광이 부들거렸다.

        

       “기사님.”

       “나는……!”

       “기사님. 나를 보세요.”

        

       데스나이트는 부들거리며 성녀와 눈을 맞췄다.

        

       “나를 똑바로 보세요.”

        

       제르피에드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떨리는 몸짓으로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갑주를 해제했다. 에실리아는 그 맑은 눈을 똑바로 핏빛의 눈동자와 맞췄다.

        

       “기사님. 공동에서, 제가 모든 마족들을 치유한 것 기억하시죠? 기사님이 쓰러뜨린 마족들마저. 기사님도 알다시피 이미 죽은 걸 살리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런데 저는 그들을 살릴 수 있었죠. 기사님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낸 마족들을요. 테시엔과 필레드도 한 번에 죽인 기사님이 그들을 못 죽일 리 없을텐데 말이에요. 일부러 그들을 죽이지 않으신거죠?”

        

       제르피에드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에실리아는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사님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셨죠?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 에제르넬이 기사님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걸요.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그래서 기사님은 충분히 그녀를 포함해서 모두를 죽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죠. 그저 묵묵히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면서요.  기사님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녀가 기사님 당신 때문에 복수에 미쳐버렸다는 걸요.”

        

       제르피에드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동자와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얼비친다…….

        

       “그런데, 이런 분이 그런 이중적인 비난 하나에 그렇게 골머리를 싸매고 계셨어요? 말했죠. 저도, 그 사람도 기사님을 비난할 자격 같은 건 되지 않는다고. 모두 기사님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말도 안되는 비난에 힘들어하지 마시고, 저를 지켜주는 것에만 신경 써주세요.”

        

       성녀가 생긋 웃었다. 구름이 걷히고 만월이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에 성녀의 단아한 모습이 비춰진다.

        

       “저는 기사님의 레이디이니까요.”

        

       데스나이트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눈을 감았다. 성녀에게 위로를 받는 데스나이트라, 아니 언데드를 통틀어서 그런 자는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성녀가 되었다. 처음보는 데스나이트의 웃음에 그녀는 눈은 깜빡이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제르피에드는 천천히 나무등치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며 속삭이듯이 그는 말했다.

        

       “고맙소, 레이디 에실리아.”

        

       

       

       

       새하얀 눈 위로 달빛이 소복하게 쌓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명 제 머릿속에 이 글을 쓰는데 예상했던 분량= 워드 기준 A4용지 4장 분량
    실제 나온 것=A4 용지 9장 분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돌아버리겠습니다. 아주ㅋㅋㅋㅋㅋ 그래도 어떻게 학교에 노트북 들고가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지하철 시간 짬내서 쓴 결과 다 쓸 수 있었네요.
    분명 전 화에서 이따가 올린다고 해놓고 지금 올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 중 하나라 대충 써서 올리는 건 도저히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부턴 지키지 못할 약속 하지 않을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봐주신 Ilham Senjaya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화 보기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The Death Knight Became The Saint’s Bodyguard

데스나이트는 성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Score 3.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trayed by her own Order*, the Saint begged the death knight to become her guard—the death knight who could destroy the world. *tl note: she was betrayed by the church, not her own doing. Author Notes: Contains Authentic fantasy, and wholesome love. I hope this brings you the reader a little bit of jo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