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1

       *

        

        

        확증편향이란 말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자신의 견해에 맞춰 취사선택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참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 엔리케의 상황이 딱 그랬다.

        

        

        “저 미친놈 저거 위험해 보이는데.”

        

        

        나흘이다. 나흘간 이 녀석은 건량을 씹으며 잠복하고 있다.

        

        암살조에 처음 들어갈 때, 엔리케는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쳤었다. 비가 오든 벌레가 앉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목표를 관찰하라고.

        

        그게 저런 의미로 쓰란 뜻은 아니었는데.

        

        흡혈귀인 자신과는 달리 저 녀석은 인간이다. 햇살이나 축복 정도만 피하면 상성 자체가 없는 그녀와는 달리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엔리케는 태양 아래 내성이 있는 엘더였다.)

        

        잠, 식사, 휴식 같은 기본적인 것들.

        

        엔리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반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이 먹고, 저 나이 먹은 녀석을 케어하라니. 농담도 이 정도면 악질적이다.

        

        

        “야, 제자야.”

        “….”

        

        

        이반은 대답 없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이 거리에서 목소리도 감지하지 못할 지경이면서.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봐선 독순술 중인가? 그 피곤한 짓을 참 오래도 하는구만.

        

        엔리케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매에 손을 집어넣어.

        

        

       -철컥. 타앙—!

        

        

        그대로 권총을 발포했다. 움직임에 모멘텀이 전혀 없는 완벽한 솜씨. 뒤통수를 정확히 노린, 흔들림 없는 사선.

        

        이반은 고개를 까딱여 피하고는 도끼를 든 채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엔리케…?”

        “그래 임마. 일단 자리 피하자. 총소리 들렸으니 뭔 귀찮은 것들이 꼬일지 누가 아니. 너네 집에 좀 가자.”

        “지금은 조금 곤란한데.”

        “나는 좀 많이 곤란해. 엘리제가 이걸 알면 또 울겠다, 야. 네 고아원 구경도 할 겸.”

        

        

        엔리케는 이반의 목덜미를 꽉 붙들고 끌고갔다. 이반은 그녀의 얼굴을 슬쩍 보고 도끼를 집어 넣었다.

        

        대스승은 경박한 여자인데다 살짝 미쳐있지만, 그래도 허튼 소릴 할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급한 일이 뭔지 들어나 보자. 이반은 자연스럽게 엔리케의 팔에서 빠져나간 뒤 앞장서 걸었다.

        

        

        “자리가 다소 어지러울 순 있다.”

        “그래그래. 일단 가자고.”

        

        

       *

        

        

        잠시 후 엔리케는 이반의 고아원에 첫 발을 디뎠다.

        

        그녀가 느낀 첫 번째 감상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너 진짜 암살단 키우고 있는 거 아니지?”

        “오해다.”

        “진짜…?”

        

        

        엔리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아주 꼬마부터 졸업 직전인 다 큰 애들까지. 어린 것들이 졸졸거리며 돌아다니는데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조직에서도 이 정도의 규율은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자식 대체 뭘 하고 지낸거지. 엔리케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교육 과정 편성표 있으면 나한테 공유 좀 해줘. 우리 애들도 이렇겐 못 키우겠는데.”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영양 밸런스를 고려한 식단을 제공해라.”

        “뭔 미친 소릴 하고 있어 이 놈의 자식이.”

        

        

        엔리케는 피식 웃으며 마저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저건 또 뭐야. 마족 아냐?”

        “맞다.”

        “하다하다…! 너 진짜 이거 들키면 너나 쟤나 여기나 다 죽는 거 알고는 있어?”

        “알고 있다.”

        

        

        이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 멀리엔 아이펠로스가 아이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교육하고 있었다.

        

        아이 중 하나가 도도도 달려가 아이펠로스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30년가량 전장에서 구른 백부장에게 근접백타 기습을 성공했다는 뜻이니까.

        

        아이는 만세! 하고 소리치더니 다시 도도도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났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 기회는 필요한 법이지.”

        

        

        이반의 말을 들으며 엔리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족을 포용한 주제에 정작 학생들은 급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라.

        

        

        “다 왔다.”

        

        

        이반은 묵묵히 원장실 문을 열었다. 커튼이 내려진 원장실은 어둑했다.

        

        엔리케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춰섰다. 가느다란 부비트랩이 그녀의 발등 바로 앞에 이어져 있었다.

        

        그런 것들이 수십 줄기. 커튼 사이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 한 줄기에 거미줄처럼 드러났다.

        

        

        “이게 다 뭐야…?”

        

        

        빛이 없더라도 흡혈귀에겐 암시야가 있다. 암막커튼 따위로는 실내 공간을 감출 수 없다는 뜻이다.

        

        부비트랩이야 뭐, 편집증적인 보안 시설이라고 여기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너 진짜, 뭐 하고 살았던 거냐?”

        

        

        이반은 아무 말 없이 부비트랩을 해체했다. 하나하나 줄에 걸린 함정들을 풀어내며 원장실 구석의 조명을 건드렸다.

        

        팍, 하고 마력등이 푸른 빛을 내며 불을 밝혔다.

        

        실내는 엉망이었다.

        

        

       *

        

        

        수십 개의 서류 뭉치. 정갈한 서체로 빼곡히 적은 누군가의 프로필. 인명이 적힌 쪽지와 그 쪽지들을 잇고 있는 붉은 실.

        

        그런 것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이어진 자리엔 어김없이 들어선 메모들. 하나하나 읽어보니 평범한 대화문들이다.

        

        평범하게 있어선 안 될 종류의 것들이다. 누군가가 대화를 나눈 정황, 예상되는 어투, 행간 사이의 의미와 설골의 변화를 관측해 추론한 억양. 억양에 따른 예상 출신 지역 목록….

        

        방첩사령부의 적색 경보를 받은 국제범죄자를 추적할 때에도 이 정도의 노고를 들이진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학생을 상대로.

        

        혼자서, 잠도 자지 않고 며칠간 계속해서.

        

        엔리케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었다. 이 상황, 이런 모습, 이런 행태 모두가 그녀에겐 익숙했다.

        

        이건, 어떤 정신병의 흔적이다. 공황발작에 가까운 종류의.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

        

        전장에서 오랜 시간 굴렀던 녀석들 중에 가끔 보이는. 그다지 드물지 않은 종류의.

        

        하지만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운…. 지금도 프리첸카야 곳곳에 참전용사들 중에서도 이런 꼴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마약 중독자들이 썩어 넘친다.

        

        엔리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반.”

        “음.”

        “앉아라.”

        

        

        이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저 지긋지긋한 수염 아래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선명하게 보이는 듯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이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너, 잠은 언제 잤어.”

        “…엿새 정도 된 것 같군.”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을 때 그는 서류철 사이에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고, 그 이후로 그는 의도적으로 잠을 자지 않았다. 초인적인 의지라고 표현할만 하다.

        

        그러나 엔리케는 씁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얘기해봐. 이건 다 뭐야? 드미트리가 널 좀 봐달라고 했을 때 까지만 해도 난 네가 애들을 지키려 한다고 생각했어.”

        

        

        그야 용사 파티 자제들만 쫓아다닌 것처럼 보였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건 고마운 일이었다. 은퇴한 이후에도 몸소 나설 정도로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여기 보이는 흔적들은 그렇지 않다.

        

        

        “누굴 잡으려는 거야? 얀스크 대학 테러범?”

        “아니.”

        “말해봐. 그냥 솔직하게. 나도 이쯤 되면 알아. 너 말주변 정말 더럽게 없는 거. 그냥 처음부터, 제자야.”

        

        

        엔리케는 이반의 손을 꽉 잡고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과연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온 노괴에겐 세월의 무게 만큼의 설득력이 있었다.

       

        이반은 그녀의 간절함 담긴 두 눈을 마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이반의 입이 열렸다.

       

        그건 장대한 고해였다.

        

        

       

       *

        

        

        만약, 만에 하나.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살던 장소와 알던 사람들을 모두 등지고 떠나서 처음 보는 세상에 툭, 하고 떨어진 사람이.

        

        그러니까, 가령….

        

        자신이 읽던 소설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밤을 지새우고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그 소설 속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꿈은 깨어나지 않고, 세상은 여전히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죽기 싫어서, 혹은 돌아가고 싶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보려 한다. 다행히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라 잘 적응해 살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겪고 난 뒤에,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왜 끝나지 않는 건가.

        

        

        어쩌면 다른 조건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유력한 해결책이라면 자살이 아닐까 고려해보며, 몇 년간 상황을 지켜본다 하자.

        

        그런 와중에 한 사람이 툭, 튀어나온다.

        

        아마도 같은 고향 출신의 이방인.

        

        이제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이 정말 소설 속 세계에 불과한가.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은 소설의 서장에 불과했는가. 저 녀석이 읽은 소설의 한 페이지엔 내 이름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렇다 한다면.

        

        내가 맞이할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 되겠는가. 비극? 희극? 아니, 그 이전에.

        

        나와 내 인생을 한 줄의 전사(前史)에 불과한가? 새롭게 펼쳐질 이야기 밖에 박제되어 있는 등장인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점점 더 두서없이. 그러나 확신을 가진 눈빛으로. 자신의 스승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 나갔다.

        

        이 전근대 꼰대도 이해시켜줄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의 친절함을 담아서.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네가 사실 빙의자라고.”

        “음.”

        “그리고 다른 놈이 하나 더 있는 걸 최근에 확인했다고.”

        “음.”

        “그리고 그 놈을 죽여야 되겠다고.”

        “…음.”

        “그거 참 되게 논리적이구나 제자야.”

        

        

        엔리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그녀는 소파에 기대어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천장에도 메모가 붙어 있었다. 어떻게 붙였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진짜 많은데,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다. 난 네가 마왕의 탑까지 쫓아왔었다고 생각했어.”

        

        

        이 녀석과 함께 했던 시간이 워낙 길다보니,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이 녀석도 함께 탑에 올랐다고 여기고 있었다.

        

        엔리케의 실수였다. 사실 모두의 실수이기도 했다. 이 녀석의 상태를 몰랐으니까, 하는 변명은 의미가 없었다. 제자라고 거둬 놓고 방치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마왕의 탑?”

        “그래. 이상하게 우린 다들 널 같은 파티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아니었단 말이지. 당연히 알고 있을 얘기라고 생각해서 굳이 언급도 하지 않았던 거였는데.”

        

        

        엔리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막스는 틸레스 사람이 아니야.”

        “국적이 다르단 뜻인가? 하지만….”

        “아니. 내 말 먼저 들어. 막스… 막시밀리앙. 그 녀석은 이 세상 놈이 아니라구.”

        

        

        엔리케는 이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그의 정신에 직접 새겨 주려는 듯이.

        

        

        “네가 처음이 아니야. 마지막도 아닐테고.”

        

        

       *

        

        

        이 녀석의 말을 따라 편하게 ‘빙의자’라고 불렀지만.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건 빙의자가 아니라, ‘끌려온 이들’.

        

        그러니까, 세상의 추가 기울 때 툭툭, 한두 놈씩 어디선가 튀어나오던 녀석들.

        

        흔한 일은 아니지만, 한 세기에 걸러 두엇 씩은 반드시 나타나는.

        

        혼란한 세상에 양념이라도 치려는 양 툭, 튀어나와 ‘무언가’ 저지르고 사라지는.

        

        엔리케는 그런 녀석들을 알고 있다. 몇몇은 실제로 보기도 했었고.

        

        막시밀리앙. 그 사내 또한 그런 녀석들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도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러나 대견하게도 싸움터로 향했던.

        

        그래서, 흡혈귀인 그녀 자신조차도 그의 뒤를 따랐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의 앞에 서서 웃으면서, 모두를 따르게 만들었던.

        

        영웅, 용사, 마왕살해자, 그리고 평범한 한 남자. 마지막까지 외로워하던 이방인. 지금은 사라져버린.

        

        엔리케는 그 남자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틸레스에서 자신을 거둬줬던 한 평민 소녀를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들었던. 용감한 이방인.

        

        

       

        “그러니까 우린 용사를 ‘태어났다’라고 하지 않지. ‘나타났다’라고 말하잖니.”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으으… 좆소부이… 졸려요…

    자고 일어나서 댓글 확인 할게요… 죄송…

    이반의 정신병 에피소드는 앞으로 이야기에 꼭 필요했어요.. 이제 즐거운 스쿨라이프 러브코미디 학창생활… 바로 갑니다. 빠르게.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